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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 학교,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조한 2016.04.08 22:14 조회수 : 1156

"전환기 학교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민들레 제목: 시민적 공공성을 위한 교육의 전환)

 


 

삶의 전환, 교육의 전환

 

온 나라를 커다란 충격 속에 몰아넣으며 국가의 역할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한 세월호 사태, 그리고 최근에 불거진 무상교육비 미지급 사태와 인천, 부천을 비롯한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이들의 실종사태를 접하면서 공공재로서의 교육과 돌봄의 영역이 과연 살아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돌봄의 정의로움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남아 있을까? 모두 평등한 교육을 받게 하겠다면서 일류 고등학교를 없애고 고교평준화제도를 시행한 지 30년도 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교육은 사교육 시장이 주도하는 판이 되었고 정확한 고교 서열화가 이루어져 있다. 과학고, 자사고, 외고, 자공고, 특목고, 인문고 등으로 질서정연하게 서열화가 되어 있는데, 이 서열은 기본적으로 부모의 투자와 비례한다. “실력보다 돈의 시대가 온 것이며 항간에 떠도는 금수저 흙수저식의 수저계급론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말한 세습자본주의이론의 실재이다. 일부 아이들이 부모와 시장에 의해 일류가 되기 위해 사육되고 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해체된 가족의 아이들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상태에 방치되고 있다. 그 동네에서는 차마 말로 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고, 그럴 때마다 미디어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힐 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런 세상이 올 것을 예감해서 대안적 삶을 추구해왔던 대안교육의 장은 제대로 가고 있는가? 1990년대 시민사회가 만들어낸 대안교육현장들은 신입생이 줄어들어 문을 닫거나 점점 규모가 축소되는 상황에 처해 있고, 일부는 전환교육 혹은 전환학교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해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대안학교는 쓸모없어진 것일까. 아니면 이제 사라져도 될 만큼 소임을 다한 것일까? ‘대안적인 삶삶의 전환은 무엇이 다른 걸까? 그리고 이때의 전환은 어디에서 어디로의 전환일까? 고도 경제성장사회에서 탈·저성장 위험사회로의 전환일까? ‘교육 불가능성에서 지속가능한 삶으로의 전환일까? 이 글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그간 어린 국민들을 키워온 학교의 변화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망하는 조짐과 징후들은 역력하지만 잘 나가는 국민이건 연명조차 어려운 국민이건 모두가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 구조를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선지 나는 요즘 1,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가 한 말 아우슈비츠를 겪고도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 행위이다라는 말을 음미하게 된다. 그리고 최근, 이반 일리치의 글을 다시 읽고 있다. 어쨌든 나의 거시적 이야기가 다소 폭력적으로 들리더라도 더 이상 합리가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글 쓰는 괴로움을 감안하여 읽어주기 바란다.

 

국민학교에서 대안학교로

 

유교적 텍스트를 읽고 몸가짐을 배우는 조선 반도의 서당과 서원을 낙후시키고 근대국가의 형성기에 들어선 것은 국민학교였다. 그 학교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져 해방 이후까지 애국적 국민과 산업노동자를 만들어내는 산실이었다. 그 산실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산업역군들이 키워졌고 폭력적 군부 독재를 무너뜨리는 투사들이 태어났다. 경제성장과 정치 민주화를 이루고 나서 좀 여유가 생긴 부모들은 GNP 1만 불 시대를 살아갈 자신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기존의 학교가 수명이 다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들(시대를 내다보는 지식인, 교사, 부모, 양육에 관심을 가진 시민적 국민들’)은 돈과 문화적 자본, 그리고 뜻을 모아 새로운 교육의 장을 열어갔다. 나는 이들을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시민적 국민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들은 대안교육을 말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대안학교들을 만들면서 2의 근대화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나라를 위해 무조건 목숨을 바치는 헌신적 국민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좋은 나라를 만들어가는 시민적 공공성의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공동육아어린이집과 대안학교를 만든 사람들은 다음 세대에겐 스스로 삶을 기획하고 자신의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할 능력을 키우는 학교,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학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런 학교를 꿈꾸었던 교사와 부모들은 아이들이 악착같이 돈을 벌고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아등바등하지 않는 존재이기를 바랐다.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공공적 시민들을 키워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갸륵한 시민들의 움직임에 각성한 국가 지도자들은 국가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하나만 잘하면 대학 간다는 모토를 세워 교육개혁에 발 벗고 나서기도 했다. 다양한 대안학교가 만들어졌고 각 학교마다 설립자와 학부모, 교사와 학생들이 한데 어울려 토론하고 소통하고 신뢰하면서 원하는 배움의 장을 꾸려갔다.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국민, 문화산업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들, 급변하는 시대에 일어날 문제들을 협력해서 풀어낼 공공적 시민들이 실제로 그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힘든 근대사를 살아온 국민 다수는 불안감 속에서 시민적 공공성을 키우는 새로운 학교를 만드는 실험에 참여하기보다 개별적 생존과 성공을 선택했다. 끝없는 경쟁 구도 속에 자기 계발자기 책임을 강조하는 시장적 질서, 곧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몸을 맡기기로 한 부모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살벌한 세계화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조기 영어교육 붐이 일었고 돈 버는 아버지를 남기고 교육을 위해 엄마와 아이들이 해외로 떠나는 기러기 가족, 그리고 조기 유학 붐도 일었다. 이들은 다시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다면서 가족 단위로 각자도생하던 시절로 돌아가 정신없이 뛰기로 했다. 그전 시대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대가족과 이웃이 서로 돕는 환경이 사라지고 돈(시장)과 핵가족 단위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불안해진 부모들은 내 아이는 내가 키운다!”며 사교육 시장의 코칭에 의

지해 투자자가 되어갔다. 그런데 투자의 결과가 좋지 않아 부모들의 불안과 공포는 커져가는 중이다.


최근 학제가 고정되어 있고 정형화된 형태의 대안학교보다 제도와 비제도를 넘나드는 전환기 학교, 자유학년제 등 새로운 형태의 교육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대안학교와 뭐가 다른가? 돌이켜보면 대안학교는 태생적으로 제도교육은 망했지만 국가는 그런대로 잘 가고 있다고 믿었던 시기에 생긴 학교이다. 나는 대안학교들이 전체의 1% 정도만 되면 제도권 학교도 자연스럽게 변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제도권 학교는 더 높은 벽을 쌓은 보호관찰소가 되었고 아이들은 그 벽 너머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조차 갖지 않게 되었다. 대안적 삶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겁에 질려서 그나마 생존이 보장되는 듯한 온실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물기로 한 것이다. 사실상 글로벌 금융시장의 붕괴와 근대 국가의 붕괴 속에서, 자발적으로 대안을 찾는 시민들의 움직임도 더 이상 힘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단적으로 보면 대안학교를 만들거나 대안학교에 보내려고 관심을 갖는 부모들이 줄어들고 있다. 대안학교에 입학하고서도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고, 아이 못지않은 두려움을 가진 부모들 때문에 곤혹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대안학교에서도 어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갈등이 일어나지만, 대안교육의 힘은 그런 갈등을 드러내고 함께 해결하는 과정 속에 신뢰의 공동체가 작동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자기 외에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부모들이 생겨나면서 여러 대안학교에서는 수습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전환의 교육, 난민적 공생의 생태계

 

그러면 애국적 헌신성을 강조해온 고성장 시대초등학교에서 시민적 공공성을 강조한소비와 문화산업 시대대안학교를 거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탈성장 위험사회의 학교는 기존 국민국가 시대에 만들어진 학교의 태를 더 이상 유지하지 않는 모습으로 진화해갈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아이들이 걸어서 갈 수 있는 카페나 마을 도서관, 아이들의 장난감을 포함한 물건들이 활발하게 교환되는 장터, 음식을 만들어 같이 먹는 동네 나눔 부엌과 동네 어른들이 절기에 따른 의례를 거행하는 좀 신성한 장소 등이 모여 있는 생태계 같은 것을 떠올려 보자. 시민적 공공성을 자연스럽게 익히면서 동시에, 또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침착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난민적 공생성을 익히는 학교 아닌 학교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난민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더 이상 국가가 개인을 보호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 근대 국가의 실패가 여실한 시점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여기서 국가의 실패란 세월호 사태나 보육 대란 등을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박근혜 정권의 실패 차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화 프로젝트의 중심축인 국민국가의 실패를 말한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시장을 견제하고 선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국가들은 2008년 월가 파동으로 시작한 글로벌 금융 위기를 목격하고도 금융자본의 횡포를 견제하려 들지 않았다. 그나마 국민들과 가장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는 국가를 형성한 북유럽의 경우도 글로벌 금융자본의 횡포에 대해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못했다. 지난 201512월 파리기후변화협약 당사자 총회 (COP 21)에서 그나마 각국 대표들이 위기를 인식하며 일정한 협약을 맺게 된 것은 그야말로 기적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현 세계는 이미 너무 돈의 체제에 깊숙이 물려버렸다. 선거판을 지배하게 된 금권정치, 치열한 입시공부와 고액의 교육비를 지불하고도 직장을 갖기 어렵고 자칫하면 잉여적 존재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하는 청년들의 절망, 각자가 가진 잠재력을 발휘할 어떤 학습도 이루어지지 않는 교육 불가능 사회에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기 재능을 볼 수 있는 눈과 그 재능을 발휘할 조건을 조절할 힘을 빼앗기고 외부의 도전과 내부의 불안을 이겨낼 자신감을 상실한 채 편안한 안전지대(comfort zone)’에 숨어서 살아가고 있다. 돈으로 유지되는 묘한 삶의 굴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이런 현실을 시장 의존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는 순간에 나타나는 현대화된 가난이라고 부르면서 사람들을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서 살게 하고 특히 시간을 잡아먹는 초고속 교통, 병을 만드는 의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교육을 받으며 살게 한다고 했다. “자율은 무너지고, 기쁨은 사그라지고, 경험은 같아지고, 욕구는 좌절되는상황을 견뎌내야 하는 시간을 살게 되는 시점인 것이다.


물론 국가의 실패 양상과 정도는 나라마다 조금씩 달리 나타난다. 여전히 민주적 거버넌스가 이루어지고 있는 선진국에서는 국민들이 국가의 운명을 염려하고 시민적 공공영역을 통해 그 방향 결정에 관여한다. 2011년 후쿠시마 사태 이후 독일이 탈핵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낸 일이 그런 경우이다. 러시아와 헝가리, 한국과 같이 상당히 적나라하게 실패 상황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모두가 경제개발 담론이 주도한 근대화를 무리하게 추진했던 국가들이며 그런 국가가 드러내는 조직화된 무책임의 구조는 최근 한국의 세월호 사태에서, 또는 헝가리의 폭력적 난민 정책에서, 그리고 러시아의 시리아 폭격 등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선진국들이 파리협약 이후 재생에너지 산업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는데 반해 이들 국가들은 핵발전소를 늘리고 핵폐기물 처리 산업을 선점하겠다면서 토건적 성장주의를 고수할 것을 천명한다. 더 이상 선진국을 따라가지 않기로 한 상황에서, 그리고 더 이상 선진국도 충분한 모델 사례가 되기 힘든 상황에서 이들 국가들은 사실상 ()망국먼저 망하는 나라의 행보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망해가는 것의 징후는 그 체제의 다수 구성원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잘 간다는 착각을 고수하고자 하는 데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 시점이 지나면 국가는 망하고 국민은 난민이 된다.

 

삶의 고통과 기쁨을 불러내는 학교

 

우리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전환의 교육혹은 교육의 전환은 바로 이런 근원적 위기 상황에서의 전환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가와 시장, 그리고 그들 간의 균형을 이루며 활성화되었던 시민사회가 붕괴한 상황, 국가와 시민사회만이 아니라 가족의 붕괴가 역력한 상황. 결국은 모두가 난민이자 고아가 된 상황을 감지하면서 시작되는 새로운 실험일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올 필요도 없고 개천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오히려 그 깊은 늪에서 쉽게 출구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전환을 꾀하는 교육은 그간의 대안학교처럼 정형화된 학교의 태를 만들고 훌륭한 커리큘럼을 짜보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이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자만이나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부모는 아이를 자신이 책임져야 할 존재로 여겨 불안과 공포 속에서 관리하려는 강박을 내려놓아야 한다. ‘전환을 모색하는 학교의 초점은 학생과 교사와 그곳의 모두가 서로로부터 배우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 삶을 외면하도 묵시록만 읊어대지도 않으면서 서로를 연결하는 소통과 신뢰의 생태계를 이루어내는 것에 놓여야 한다. 지금 시대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인터레그넘(interregnum), 즉 국왕이 죽고 아직 새로운 왕이 나타나지 않은 전환적 공백기이고,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하는 시도는 그 긴 과정의 새로운 걸음이다. 난민적 공생의 장을 열어가는 일은 각자도생의 생존을 집단적 생존으로 바꾸어내는 일일 것이며, 작게는 이웃을 크게는 지구마을을 만들어가는 일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국민국가 정치의 낙후성을 넘어서 아래로부터의 튼튼한 거버넌스를 먼저 만들어내는 것, 최저 임금을 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최고 임금도 정하는 것, 세금의 재분배로서의 복지제도가 아니라 환경을 망친 데 대한 피해보상 차원의 시민배당제도를 도입하는 것, 물적 생산 노동에 대한 지불만이 아니라 망가진 사회를 되살려내는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기본소득제도를 실현시켜내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작지만 거대한 일이 벌이지는 이런 삶의 장에 관여할 때,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도 해결할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이들이 보는 만화와 책들이 거의가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 같은 이야기를 원류로 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세상을 구하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게 하면서 막상 세상을 구할 방법을 익히지 못할 때 그들은 환상에 빠진 무력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아이들이 발을 땅에 붙이고 살아가게 하는 것을 더 이상 막아서는 안 될 것이다.


가족 3부작을 만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아무도 모른다>를 통해 엄마마저 사라져 아이 넷이 빈집에서 사는 현실을 통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회를,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통해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기 힘들어진 부모들이 키울 수 없는 아이들의 성장을 보여주었다. 자기를 추스르기도 힘들어하는 이혼한 부모 때문에 타로 형제는 사실상 부모를 돌본다. 열심히 시간에 맞추어서 학교를 가는 동생에게 학교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을 수 있고 수영을 배우면서 즐겁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들을 키우는 것은 마을이다. 성인이 된 자녀들이 방황하며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거나 사라진 자녀를 그리워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든 아이들을 자기 손주처럼 애틋하게 대하는 마을, 농사를 짓고 음식점을 하면서 일상이 제대로 굴러가는 마을이 아이들을 키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스스로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는 나약한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비로소 배움·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성공한 남자의 아버지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가 말하는 전환의 교육은 의도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진짜로 일어날 지도 몰라, 기적>의 배경마을, 곧 우연한 만남들을 통해 삶이 이루어지는 그런 모습과 비슷한 시공간일 것이다. 날마다 술에 취해 밤늦게 돌아오는 록 밴드 스타인 아버지의 앨범이 잘 팔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이, 동생과 엄마와 아버지가 다시 합쳐서 살기만을 애타게 바라는 형, 죽은 고양이를 차마 놓아주지 못하는 친구의 곁에 머물러줌으로 고양이를 함께 묻어줄 마음이 생기는 친구, 바로 이런 애틋한 마음이 살아있는 곳 아닐까? 제도적 삶은 망가졌지만 삶은 지속되어야 하고 서로 어울리며 사회를 만들어내는 일을 계속 해나갈 때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 기적의 내용은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바로 그 자체일 수 있다는 것,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는 힘을 갖게 되면서 그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운명을 감당할 힘을 갖게 된다는 것, 나는 지금 이 시대의 학교는 바로 이런 것들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동기를 설정하고 아이와 어른들을 격리했던 근대적 제도와는 결별을 할 때다. 이미 조직화된 무책임의 체제가 되어버린 국가에 청원하고 매달리기보다, 붕괴된 학교를 고발하고 해체된 가족을 원망하기보다, 공생의 삶을 살아갈 몸을 만들어갈 생태계를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청년들에 의한 결혼 파업과 출산 파업은 지속될 것이며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적개심에 가득 찬 이들은 기승을 부릴 것이다. 경쟁과 적대의 총량을 줄이고 돌봄과 환대의 총량을 늘리면서 지속가능한 삶의 장을 회복하는 것, 함께 모여 각자가 가진 자원을 나누고 기운을 나누는 것이 삶과 교육을 전환하려는 이들이 원하는 일일 것이다.

미래는 없고 희망만 있는시대가 오고 있음을 누구보다 일찍 감지한 일리치는 1990년 하노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는 아픕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과 웃음,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살피는 기쁨을 알고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선을 돌려 삶의 기술과 고통의 기술, 죽음의 기술을 키워야 합니다.”

 

(2016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