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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관련 인터뷰 (서울 신문)

조한 2019.08.04 15:51 조회수 : 605

가장 안 읽는 주제의 글이라는데 여기자 협회 회장인 김균미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조희선 기자가 정리해서 보내온 원고를 수정보완하다보니 두배로 길어졌다.

요즘 내 글은 안/못 쓰고 이런 짓이나 한다. 

 

아래는 신문에 난 내용. 7일자.

 
[서울신문] 기획 08면_20190806 (1).jpg

 

휴가 중에 대책없이 쓰고 싶은 대로 수정보완한 원고는 아래. 

 

[서울신문 서울젠더연구소 출범 기념 인터뷰]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지속가능한 성평등 사회에 대해 묻다(가제)

 

 

한국 사회에 변혁의 바람을 몰고 온 미투 (MeToo·나도 피해자다. 또는 '나도 성폭력 없는 세상에 동의한다)운동의 진동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각계각층에서 터져나온 여성들의 목소리는 공고하게 이어져 온 남성중심적 폭력 문화의 민낯을 들춰냈고, 남성중심 권력 구조에 균열을 냈다. 불법촬영 (일명 몰래 카메라), 낙태죄 폐지 등 여성 관련 이슈가 주요 의제로 떠오르는 가운데 성폭력 대책과 성평등 정책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반발과 반격도 거세지고 있다. 여혐 대 남혐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졌고, 여성우대로 역차별을 받았다며 페미니즘에 반기를 드는 남성들도 늘어났다. 서울신문 부설 서울젠더연구소는 국내 대표 여성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71)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성차별을 주제로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물었다. 조한 교수는 성평등 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한국사회만이 아니라 인류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과제라며 말문을 열었다. 가깝게는 근대의 근간을 형성해온 군사주의와 과학기술주의에 대해, 멀게는 긴 인류사를 통해 이루어져왔던 가정과 공공 영역 분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하지 않으면 미래를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교환영역(시장)재분배영역 (국가)를 축소시키는 한편, 장기간에 걸친 공존의 원리인 호혜의 영역을 사회의 핵심 영역으로 삼고 확장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녀 모두가 상호 돌봄의 주체, 자율과 공생의 존재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담은 서울젠더연구소장 김균미 대기자가 진행했다.

 

 -2018년 미투 운동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현재 상황을 진단하신다면.

 = 한국에서는 2005년에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이 남학생의 진학률을 추월했다. 그런데 아직도 여성을 자신의 소유물이나 노리개처럼 여기면서 폭력적으로 대하는 남성들이 남아 있다. 여성 파워가 세지는 것에 위협을 느낀 남성들이 늘어나는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투 운동은 더 이상 그런 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단호한 선언이다. 최근의 미투 운동은 이전의 성폭력 폭로건과 성격이 좀 다르다. 그전에는 피해자를 대변하는 운동이었다면 지금은 당사자들이 직접 발언을 하고 나섰다. 이 현상은 울리히 벡의 ‘1, 2차 근대의 개념으로 풀어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차 근대의 주역은 중세 신분제에서 해방된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산업 역군이자 제국주의 전쟁의 참전자로 일등 시민의 자리에 있었다. 여성들은 그들을 보조하는 현모양처 가정주부의 자리에 있었다. 경제성장이 진행되어 2차 근대에 접어들면 남녀 모두가 경제활동에 참여하면서 자립가능한 개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여성운동 차원에서보면 1차 근대에서 여성들은 경제사회 자립을 위한 동등한 권리 운동을 벌인다. 그런데 2차 근대에 가면 개인의 존업과 자율적 삶을 존중하자는 운동을 벌이게 된다. 서지현 검사나 김지은 비서의 미투 사건은 이런 2차 근대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된 여성들이 작은 폭력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회원리 자체의 근원적 변화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최근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백래시(반발,반격)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를 어떻게 보시는 지요?

 

1차 근대에서 2차 근대로 넘어서는 과도기 현상이다. 2차 근대에 접어들면 여성들도 온전한 독립이 가능해져서 공사 영역에 걸쳐 자율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반면 직장만 있으면 결혼을 하고 가장으로 어깨를 펴고 살 수 있으리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성장한 남성들에게는 수난 시대가 시작된다. 남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상황에서 남자들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다 남자는 무엇에 소용된단 말인가?” 여성들이 1차 근대의 시기에 여성운동의 불을 지폈던 책 <여성의 신비>의 부제가 이름 없는 문제였는데 2차 근대에는 남성들이 자부심을 갖게 어려워진 상황에서 이름 없는 병을 앓게 되는 것이다. 급격한 사회변동에 미처 적응하지 못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반격을 시도하게 된다. 현재 한국의 일베화 현상이나 여혐 남혐 대립구도는 이런 변화의 와중에 나온 병리적 현상이다. 일상의 영역에서 보면 초기 사회화를 여성들이 도맡은 상황에서 강한 모성에 대한 무의식적 반감을 갖게 되었거나 여교사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역차별을 당했다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1차 근대적 여권운동은 적대와 혐오 감정에 불을 지펴서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 ‘여성의 좌절과 함께 남성의 좌절도 다루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 모두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되 그간의 발전주의가 파생시킨 문제들을 해결하는 협동적 주체가 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녀 갈등의 핵심은 군대 문제가 아닐까요? 오래 전부터 해결방안으로 사회복무제를 제시하셨습니다.

 

한국의 남성 의무복무제는 성차별 체계의 핵심이다. 최근까지 월급 호봉이나 공무원 채용 시험에 가산점을 주는 보상제도가 있었고 일상적으로 군대를 가지 않은 존재를 따돌리거나 이등 시민으로 취급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었다. 공무원 시험 시 군가산점을 두고 여성과 장애인 대표가 위헌 소송을 내서 1999년에 승소했는데 이 즈음에 병역 제도를 2차 근대적 시점에서 개혁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병사가 총 들고 싸우는 시대도 지났고 기강을 세우기 힘든 상황에서 군대는 청년 직업 훈련소화 하고 있다. 십년전부터 스펙을 아무리 쌓아도 취업이 안 되는 불안한 상황에서 여대생들이 군대 가는 남자 동급생에게 하는 농담 섞인 말이 있다. “나도 아침에 깨우는 종소리에 일어나 해주는 밥 먹고 시키는 일 하며 지내고 싶다.” 실제로 군대간 동기 남학생은 충분히 쉬고 상사가 자격증 따는 것을 장려하는 덕분에 자격증도 따고 세계여행 비용을 벌어 제대 했다. 냉전체제는 북한의 개방으로 전혀 다른 지평으로 이동하고 있다. 청년들을 위한 훈련은 오히려 재난과 재앙의 시대에 대비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젠더를 둘러싼 논란을 해결하려면 일자리와 결혼, 돌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기성 정치인이나 관료, 부모들은 자기 세대의 세계에 갇혀서 평생 일자리와 파뿌리가 될 때까지 같이 사는 결혼을 상상하면서 문제를 악화 시키고 있다. 산업화 세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혼자서도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방향으로 선회를 해야 한다. 모두가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공생사회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하면서 실제 일어나는 심각한 사태들은 보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말했지만 1차 근대는 가정 주부와 가계 부양자, 즉 아내가 돌봄을 맡고 남편이 돈을 벌면서 유지됐다. 2차 근대는 여자가 사회에 나간 반면 남자들이 가정의 돌봄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여자들이 사회에 나감으로 만들어진 공백을 메울 것이라 예상했다. 현실은 어떤가? 오로지 입시 공부만 하고 직장을 얻는 훈련만 받은 여성은 남자 못지 않게 돌봄에 서툴다. 그렇게 성장한 많은 능력 있는여성들은 출산하고 3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직장에 가고 싶어한다. 여성들은 남성 못지않게 돈벌이에 급급하면서 육아를 맡을 사람을 고용하거나 어린이 집에 장시간 맡긴다. 그렇기 기획된 가족의 아이들은 장시간 학교와 사교육시장에 맡겨져 관리보호된다. 이제 이런 부부중심 핵가족을 바탕으로한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사적제도는 한계에 달했다. 개인이 중시되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적 동거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예전의 친족이나 이웃이 했던 역할을 할 제 3의 공간들이 많아져야 한다.  뚜렷한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서로 돌보고 친하게 지내며 필요시에 상부상조하는 돌봄과 호혜의 공간, 곧 시민적 공공성이 기본이 되는 공간들이 많아져야 한다.  

 

-돌봄의 공백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안이군요. 그러면 이것이 실제로 여가부가 담당해야 하는 일이었을까요?

 

그간 가족에게만 맡겼던 돌봄을 사회적 돌봄의 개념으로 풀어내는 것이 바로 여가부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1차 근대에서 제기된 생산성, 곧 여성의 노동참여와 인권문제와 함께 2차 근대의 생산성 문제, 사회적 돌봄이 이루어지는 호혜의 영역을 회복해내는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사회복무제를 마련하는 과제를 초기부터 고심했어야 했다. 남녀 모두 상호부조하고 아이를 키워는 돌봄사회를 만드는 일에 복무하면서 신체를 단련하고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며 협력하는 존재로 단련되는 제도화 말이다. 예를 들어 최근 어린이 집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는데 사회복무를 하는 청년 남녀가 참여를 하게 되면 지혜롭게 풀어 갈 수 있는 사태이다. 남녀 모두 어릴 때부터 남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서 성장해야 하지만 스무살 즈음의 모든 국민들이 천재지변에 대비하고 약자를 돕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으면서 사회의 책임있는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사회복무제는 승자독식이 아니라 호혜돌봄을 제도화하면서 사회적 경제영역을 확장해낼 것이다. 이미 해체된 가족적 돌봄에 세금을 붓지 말고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호혜적 관계를 맺고 특히 아이를 함께 키우는 즐거움을 경험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세금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 실제로 아이는 부모만이 아니라 더 많은 어른들과 아이들 속에서 자라야 잘 자라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세대도 이웃집을 들락거리면서 사회성을 키웠고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다시 그런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1차 근대는 부부중심 핵가족을 우주로 상정하고 그들이 전적으로 양육을 책임지도록 했다. 이제 핵가족 제도는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부부의 힘만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고 이웃과 마을이 함께 키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돌봄의 사회화를 국가의 핵심 과제로 삼고 예산 책정 방식부터 바꾸어가야 한다. 2000년대 중반 출산률이 떨어지자 정부는 급하게 출산과 육아 관련 복지제도를 마련했다. 사회적 돌봄 체계를 만들고자 한 것인데 돌봄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토건적 방식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저임금 노동자들이 cctv로 감시 당하는 열악한 보호 관리소 같은 어린이집들을 양산해냈다. 돌봄은 아이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축복하면서 성장시키는 일이다. 아기를 낳은 부모는 3년간의 출산 휴가를 당당하게 요구하면서 어린이 집이니 이웃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육아활동을 해갈 수 있어야 한다. 아이의 부모이자 아이를 함께 키우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스스로도 돌봄의 능력을 키워내고 호혜적 존재로 성숙해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출산 휴가를 갖는 많은 여성들은 자기 아이에 매달려 돈과 인터넷의 도움으로 전전긍긍하면서 보낸다. 육아의 기간을 경력단절이라고 보는 시선부터 문제적이다. 이 시기는 돌봄의 능력을 키우고 사회적 관계망을 돈독히 하는 대단히 훌륭한 경력을 쌓은 시기이다. 이미 아파트에서 공동육아방을 꾸려서 아이들을 함께 키우다가 육아관련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서 누구보다 즐겁고 의미있는 사회경제적 활동을 하는 어머니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려고 숲유치원을 만들어 새로운 육아의 장을 열어가는 부모들도 있다. 부부중심 핵가족의 틀에서 벗어나서 2차 근대적 생태계를 만드는 실험이 이미 여러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적응해온 핵심적 능력도 바로 이 사회적 돌봄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구적 합리성이라는 쇠우리에 갇혀 죽어갈 수밖에 없다.

 

 -‘토건 국가에서 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강조해오셨다.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가 쓴 보이지 않는 가슴이라는 책이 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가슴이 있어 세상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돌봄은 시장이나 도구적 합리의 영역이 아니라 소통합리성의 세계이다. 존재와 존재의 만남, 소통과 이해와 공존의 행위이다. 그러나 도구적 합리성이 주도하는 사회에서는 이 영역을 무시해왔다. 여성들, 특히 1차 근대에 열렬한 운동을 했던 페미니스트들도 돌봄에 대해 엄청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가정주부 시대에 어머니들이 강요받은 비지불 노동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돌봄사회에서 말하는 돌봄은 가족을 넘어선 사회적 돌봄이다. 가족이 부담스러워 결혼을 안 한다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사회적 돌봄이 가능한 사회는 결혼을 강요하기보다 동거를 장려하고 의무적 제도가 아닌 실질적 지원을 하는 사회이다. 바람직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가족은 서로를 해치기보다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현재 노인 복지 등이 성인 자녀들의 부담을 줄여주면서 애정있는 돌봄관계를 회복하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 가족성원이 아닌 내가 독립된 개체로서 나 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돌봄 사회이다. 더 나아가 돌봄창의의 근원이다. 창의적인 것은 안전한 돌봄이 있는 환경에서 나온다. 가족보다 더 다정하게 여럿이 함께 사는 코리빙 스페이스, 자신의 삶을 실험하면서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려고 작당해서 문제를 푸는 연구소 리빙랩’(living lab), 신뢰하고 협력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모여 무엇이든 시도해보는 창의적 공유지,’ 이런 것들이 돌봄사회를 만들어내는 생산지기이다. 경쟁과 적대가 아니라 이해와 배려, 공감과 협력이 가능한 시공간이 만아져야 한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차원에서라도 성평등 교육은 중요한데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페미니즘은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인 남자와 여자라는 범주가 어떤 방식으로 인지되고 활용/이용되어 왔는지를 체계화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man the hunter의 역사관을 women the gather/carer의 역사관으로 균형을 잡는다. 류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10개월의 임신과 3년의 의존 기간을 거친다. 무력한 아이는 돌봄과 소통과 협력이 이루어지는 작은 사회 안에서 성장하며 그 사회적 가치를 내면화 한다. 현재 자본주의제체는 그런 인간의 원래적 류적 특성을 무시하고 경쟁과 승자독식의 사냥꾼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역사를 써왔다. 페미니즘은 사냥꾼의 역사가 인류사의 주가 아니라는 것, 채집과 육아의 역사가 함께 가지 않으면 죽음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이후 주디스 버틀러와 같은 후기 구조주의 이론가들은 페미니즘을 남녀만이 아니라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들을 인정하고 공존하게 하는 철학으로 발전시켰다. 최근에는 도나 해러웨이와 같은 AI와 애완동물과의 공존을 다루는 사이보그 페미니스트도 등장했다. 1차 근대에 만들어진 페미니즘이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적 언어였다면 지금은 2차 근대에 맞는 페미니즘을 만들어가기 위한 진통 중에 있다.

 

이런 차원에서 미투 운동을 기존의 폭력적 사회를 전환해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개개인은 자율적 존재이고 그 자율성은 존중되어야 함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남자건 여자건 자신을 건드리고 괴롭히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아니다하고 말할 수 있는 교육을 시켜야 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은 피해자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상황을 직시하고 성찰적 언어를 만들어내야 한다. 피해자 가해자의 이분법적 구도로는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교육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경험을 꺼내놓고 말하는 리빙렙과 같은 분위기에서 다 같이 학습 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현재는 소수의 전문가들이 연구를 할 시간도 없이 성교육계몽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고차원적 학습을 대대적으로 해내기 위해 국가는 대대적인 연구와 지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남녀의 의식수준의 격차가 점점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남자들에 대한 특별 조치가 필요하다. 중학교, 아니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남자 아이들이 사회화 되지 못하고 있다. 존경스러운 남자 모델도 안 보이고 어머니나 여자 교사와 별로 친하지 못하다보니 온라인상에서 전쟁과 폭력의 주를 이루는 게임에 몰입하거나 일베처럼 몰려다니는 남자 패거리문화에 휩쓸리게 된다. 건강한 남성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시급하다. 일차 근대에 여성들이 어머니가 가르쳐주지 못한 직장 진출을 잘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적극적 조치가 필요했듯이 아버지가 가르쳐주지 못한 소통과 돌봄의 영역에 남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남자들은 권력적 언어가 아니면 소통을 잘 못하는 식으로 키워져왔다. 기성세대 남자들은 그간 돈 버는 영역에서 열심히 일 했고, 그 선택지밖에 몰랐다. 남자들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존재, 비폭력 대화가 가능한, 제대로 돌보고 소통하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특단의 적극적 조치가 필요하다. 선각자 아버지들이 참여해야 할 영역이기도 하다. 실제로 소통과 돌봄의 능력은 AI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더욱 키워내야 할 능력이다. 지능상으로는 자신보다 백배 똑똑한 AI 로봇을 잘 데리고 살려면 똑똑한 (clever) 경쟁적 존재가 아니라 보살피고 이끄는 지혜로운(wise)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성평등 사회를 위해서는 모든 주체가 변화해야 하는데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인가.

 = 분배적 정의와 합리적 제도화가 여전히 필요하지만 동시에 호혜의 영역을 회복해내야 한다.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거대 테크 기업들이 우리들의 생각을 조종하면서 적대와 혐오의 세력을 키워가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를 위해 소통과 협력이 가능한 창의적 공유지들이 많아져야 한다. 무슨 문제가 터져도 불안하지 않고 스스로 대응할 수 있는 비빌 언덕이자 백업’(backup·뒷받침)이 되는 동네 말이다. 이전에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 더 나아가 책을 통해 만난 이들과 함께 만든 준거집단이자 지지집단 같은 것들이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내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동네 주민자치센터에 아이들을 공동으로 돌보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어른이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상호 돌보는 그런 호혜의 시공간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 이전에, 거대 정치 이전에 내 삶의 터전을 단단하게 마련해가는 살림의 정치를 열어가야 한다. 안전망 없으면 모두가 일자리 없으면 끝이다라며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스템에 몸을 맡기고 좀비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모두를 불안과 스트레스 속으로 밀어 넣은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사회안전망이 있을 때 생각도 바로 할 수 있고 투표도 제대로 할 수 있고 사회도 변화시켜 갈 수 있다. 한발 늦게 가는 것 같지만 그곳이 실은 사회변화를 이루어낼 지름길이다.

 

 -‘젠더’(Gender) 젠더 이슈와 관련한 다양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발족한 서울신문 서울젠더연구소에 기대하는 역할이 있다면.

 =‘젠더는 생물학적 성과 구분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으로서 남성 중심의 사회가 어떻게 구성돼 왔는지 살펴보자는 의미에서 붙여진 단어다. 서울신문이 서울젠더연구소라고 이름 붙인 것은 시의적절하다. ‘남녀로 구성된 사회가 긴 인류사를 통해 왜 이렇게 적대적 사회가 되었나는 거시적 관점을 가지고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을 연구하고 해결해 가는데 도움이 되는 연구소가 되기 바란다. 현재 세계가 돌아가는 현실을 보면 이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2016년 미국과 영국에서 있었던 미 대통령의 선거와 브랙시트 투표가 캠프릿지 아날레티카라는 온라인 영국 회사가 분노의 유권자들에게 보낸 가짜 영상 홍보물의 효과로 나온 결과라는 네플릭스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위대한 해킹 the great hack>). 전투적 남성성을 회복하려는 성찰성 없는 벡레쉬 집단의 가짜 뉴스에 더하여 빅데이타를 이용하여 돈 벌기에 급급한 거대테크기업들까지 세상을 어지럽기 그지없다. 한국도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근대의 원리였던 발전주의적 언어를 넘어 근대를 성찰하는 언어로 시대의 문제를 연구하고 풀어내줄 것은 기대한다. 페미니즘은 다음 세대가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선언이다. 서울젠더연구소가 남녀와 세대 등으로 나눠진 이들이 같이 모여서 의논하고 작업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면 좋겠다. 특히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2차 근대의 성찰적 페미니즘의 토대를 만들어 가주기를 기대한다.

 

 대담 김균미 대기자 kmkim@seoul.co.kr

 정리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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