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직장은 공부하는 직원들이 많은 곳
하자 센터가 남다른 데가 있다면 판돌들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어제는 기획부장 아키가 횡해문학에 실린 자신의 글과 함께 신동아에 실린 청년 관련 기사를 보내왔고
오늘은 거품이 책을 추천해왔다.
위기에 빠진 것은, ‘청년’이 아니라 ‘사회’다 아키, 이충한 (하자센터 기획부장)
1. 청년 혹은 미래세대에 대하여 <청년을 바라보는 위치와 각도>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44세의 기성세대 남성으로서, 청년의 노동(과 비노동)에 대해 대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적합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의 주변부에서 곤란함을 겪는 청년들을 오랫동안 가까이 지켜본 사람으로서 어떤 종류의 의무감을 느껴 원고 청탁을 수락했다. 세밀화보다는 크로키에 가까운 글이다 보니,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 자리가 열렸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보태본다.
해석이란,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과 위치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을 해석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 우선 관찰자인 내가 겪었던 청년기가 현재와 너무나도 다르고, 그 개념과 범위 자체도 사회적으로 충분히 합의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난감한 것은 대상이 너무나도 복잡해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어서 관찰의 ‘각도’를 잡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우선 ‘사회적 보호’와 ‘자기책임’이라는 각도에서만 봐도 답을 내기가 힘들다. 청년이란 유년이나 노년처럼 마땅히 보호해야 할 대상도 아니고, 장년처럼 스스로 모든 것을 책임지기도 힘든 시기다. ‘활력’과 ‘무기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젊은이들은 ‘N포 세대’라 불리며 욕망 없는 애늙은이 취급을 당하지만 정작 이들이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원을 ‘늙은이’들이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가장 뜨거운 화두인 ‘노동’ 영역은 더 어렵다.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해도 살아남기 힘든 무한경쟁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세대착취가 메뚜기떼처럼 쓸고 지나간 청년이라는 초원에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어쩌면 지금의 청년문제를 논할 때 배경에 두어야 하는 관점은 ‘미래세대(future generation)’라는 개념일 지도 모른다. 미래세대란 현재 정책적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현세대의 정치적·생태적 결정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미성년 및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뜻한다. 그리고 개념 자체로 미래세대의 취약성이나 자구노력과는 상관없이 현세대(living generation)가 침해하지 말아야 할 일정 부분의 몫이 있다는 태도를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과 청소년, 즉 청(소)년들에 대해서는 문제(취약성) 중심으로 풀어야 할 영역이 존재함과 동시에 보편적으로 배려해야 하는 영역도 존재한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물론 사회 통념상 청년을 만19세 이상으로 정의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래세대의 개념에 청년을 포함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은 인구규모나 사회경제문화적 입지로 볼 때 현세대보다는 미래세대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이 근대 한국 역사상 어떤 청년들보다 영향력을 잃어버린 세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동기부터 자기주도성을 펼쳐 볼 수 있는 ‘틈새’를 갖지 못한 채 아주 매끄럽고 완벽한 경쟁에 내몰렸던 세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틈새 없는 경쟁 끝에 남은 전방위적 엉망감>....중략
4. 청년, 혹은 사회의 미래를 위한 제안
<포화된 현재, 삶에 틈새를 내어주는 시공간의 필요성>
매우 진부한 발상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우리에겐 ‘미래진로위원회’ 같은 것이 필요할 듯하다. 대통령 직속으로 만들어져도 좋고 민간 재단이 설립해도 좋고, 거창한 컨트롤 타워 같은 것이 아니어도 좋다. AI 전문가와 인류학자, 생태전문가와 예술가가 함께 ‘제대로 된 미래’를 그려보는 그런 모임 말이다. 어쨌거나 훌륭한 어른들과 청(소)년들이 함께 미래세대의 노동과 삶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고 제안하는 작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회가 제대로 된 가치관과 경로를 정립하는 것이 우선이긴 하지만, 개인의 진로에 대해서도 적절한 지원이 필요하다. 일단은 연령범위와 정의가 모호한 청소년과 청년 정책을 최소한 진로관점에서는 청(소)년으로 통합해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원정책을 마련할 때 진로탐색기(16-24세)와 진로적응기(25-34세), 진로전환기(35-44)로 나눠서 고민하는 것을 제안한다. 특히 19-24세 연령대에 기초적인 진로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20대 후반의 취업지원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현재의 미분값과 상대적좌표로 모든 것이 수렴되는 '포화상태의 현재saturated presence' 속에서 진지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전에는 이러한 포화된 현재가 일정 정도 순기능을 했지만, 현재로부터 얻을 것이 없는 '미래세대'들은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평행우주로 자아를 분산투자하고 있다. 따라서 포화된 현재를 사는 탐색기(16-24세)와 전환기(35-44세)의 중간쯤에는 삶에 틈새를 내는 ‘틈새 시기gap year’를 지원해줄 필요가 있다. 선발경쟁이나 실적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니즈와 사회의 니즈를 정렬해볼 수 있는 안전한 시공간이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16-24 진로탐색기의 10대와 20대들은 서로를 참조하며 진로역량을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서 교류하며 지내는 것이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서울시 교육청은 지난 5년간 만16세 공교육 청소년을 위한 갭이어 ‘오디세이학교’를 실험해 왔다. 일반고등학교의 성적분포와 비슷한 청소년 100명 정도가 하자센터를 비롯한 4개의 캠퍼스로 나뉘어 대안적인 커리큘럼 속에서 진로를 탐색하게 되고, 1년 과정 수료 후에는 학력을 인정받아 고교 2학년으로 복귀하게 된다. 9개월에 불과한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학생들은 일반 학교에서는 상상하지 못했을 만큼 엄청난 성장을 이뤄낸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곁을 느끼며 걸었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뛰어갈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또래들과의 관계, 스스로의 내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고 각각을 정렬시켜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포용적 커뮤니티 안에서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타인과 공존하는 훈련은, 이들이 훗날 어떤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핵심적으로 쓰일 기본역량을 길러준다.
<모두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돕는 전환 허브>
‘삶의 감각을 깨우고 존중과 다양성을 배우는 공간’인 하자센터는 ‘16-24 청소년의 진로 탐색기를 돕는 일학교’를 시범 운영 중이기도 하다. 대안학교를 다니며 디자인을 배우는 18세 인턴 A가 23세의 비대학 후기청소년인 음악작업장 프로젝트 매니저 B를 만나 음악을 제작하기도 하고, 20대 초반의 청(소)년 메이커들이 전공영역을 넘나들며 협업하는 프리랜서 길드를 만들어가고 있기도 하다. 하자센터 내의 다양한 프로그램들과 연계하여, 이미 한 해 50명 이상의 16-24 청소년들이 작거나 큰 지원금을 받으며 일경험을 쌓고 있다.
지금은 초기 실험 중이지만 하자센터의 궁극적인 방향은 이 청(소)년들이 노동과 비노동의 이분법을 넘어 그 사이를 채우는 다양한 활동들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일학교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은 생계를 위한 임금노동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자원활동이나 예술활동에 대한 욕구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작가정신을 갖는 생산자인 동시에 팬심으로 똘똘 뭉친 애호가일 수도 있으며, 서로의 작업에 대한 후원자가 될 수도 있다. 노동과 비노동 사이를 무지개빛 스펙트럼으로 채워 두려움 없이 오가는 경험을 쌓는 것이 이들의 진로탄력성을 높여줄 것이다.
만약 하자센터와 같은 진로지원 시설과 평생학습 시설, 마을지원 사업과 창업지원 사업 등이 종합적으로 결합된 커뮤니티 전환허브가 생긴다면 어떨까. 일자리가 아닌 일거리를 만들어내고, 취업지원이 아니라 성장지원을 하는, 스스로의 삶을 전환하면서 파편화된 커뮤니티를 되살리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 말이다. 분과별 장벽 뒤에서 소극적으로 자기 영역을 만들어 온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진짜 일을 해보기 위해 교류하며 일하는 곳이라면 공적 예산 사용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동시에 제고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최근 공공 주도의 많은 대형 커뮤니티 공간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 중에서 공유된 가치와 능동적 주체가 없는 곳들은 아마 빠른 시간 내에 게토화되고 말 것이다. 이런 전환적 공간을 구축해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과 문화, 그리고 사회를 전환하고자 하는 주체들이다. 지금의 많은 청년들은 기존 관점의 사회운동이나 혁명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전환하고자 하는 의지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을 ‘청년공간’이라는 이름으로 고립시키기보다는, 착취하지 않는 다른 세대와 협력하여 사회 전체를 전환시키는 첫 세대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어떨까. 우리 기성세대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미래의 곳간에서 세금을 퍼내어 당장 번지르르한 성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세대가 제대로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를 묵묵히 만드는 일일 테니 말이다.
레이 올든버그 '제3의 장소'
이번 개정판 번역본 소개글을 보니, 하자를 이해하는 개념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사 공유 합니다.
'나 답게 있을 수 있는 공간' 이바쇼에 비해서는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능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기사 밑줄 그어 봅니다.
"올든버그 교수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목적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비공식적 공공생활’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공간을 복원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여겼다. 이 공간을 제1의 장소인 가정, 제2의 장소인 일터나 학교에 이은 ‘제3의 장소’로 명명하고, 10년간 관련 연구에 몰두했다. "
"제3의 장소가 가진 가장 중요한 기능은 ‘통합’이다. 주민들은 이곳에 모여 소식을 주고받는다. “모두가 서로를 좋아할 수는 없지만, 서로를 잘 알고 모두와 편하게 지내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새로 이주한 사람을 환대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동화’의 기능도 담당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을 관심사 중심으로 ‘분류’하거나 집단적 성취를 도모하는 ‘본부’의 역할도 한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042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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