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추천사 -< 월경 :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도를 그리다>
월경 :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도를 그리다 (조소담 외, 교육공동체 벗)
추천의 글
<아름다운 청년, 세상을 살다/살리다>
인류의 역사, 특히 사냥꾼의 역사를 3분 37초 안에 탁월하게 그려 낸 애니메이션이 있다. 천재 작가 스티브 컷츠Steve Cutts가 2012년 12월 21일에 올린 〈Man〉은 4천만 이상이 본 동영상인데, 한 남자 사람이 딱정벌레를 밟아 죽이고 손을 들어 “앗싸”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계속 길을 가면서 그는 뱀을 잡아 가죽 구두를 만들어 신고 닭을 잡아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으로 튀겨 먹고 양의 다리를 분질러 뜯는다. 좀 더 세련된 모습으로 총을 들고 나타난 그는 물개를 잡아 외투를 만들어 입고 박제 장식을 위해 표범을 죽이고 코끼리 사냥으로 얻은 상아로 피아노 키보드를 만들어 연주하는 고상한 교양인이 되기도 한다. 종이 생산으로 우거진 삼림이 사라지고, 콘크리트 빌딩 숲이 들어선 도시는 밤낮없이 전기를 돌린다. 거대한 축산 농장과 유전자 조작 농산물 공장이 곳곳에 들어서고 온갖 종류의 생체 실험이 자행되면서 생태계는 급격히 파괴된다. 쓰레기 더미가 되어 버린 지구 꼭대기로 올라간 이 남자 사람은 그 어떤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늠름하게 걸어가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아 시가를 피운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에 도착한 눈이 한 개, 세 개 달린 외계인들이 그를 기이하게 보다가 왕좌에서 끌어내 밟아 버린다. “Welcome!”이라는 팻말을 남기고 그들은 쓰레기 더미 지구를 떠난다.
이 동영상은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눈이 하나, 그리고 세 개 달린 외계인은 오지 않았지만 대신 바이러스들이 출현하고 기후 재앙으로 홍수와 가뭄, 산불이 수시로 일어나 인간들에게 경고를 내리고 있다.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들까지도 사냥꾼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이 파괴적 역사의 끝은 어디일까? 짙어지는 죽임/죽음의 시간을 살림/생명의 시간으로 전환해 내는 것은 불가능할까? 내가 이 암울한 인류사의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이유는 이 책에 실린 청년 여성들의 글을 읽으면서 살림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새 문명을 만들어 낼 살림의 몸짓, 진화의 새 단계를 만들어 낼 돌연변이의 잉태 가능성 말이다.
2020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전 인류가 비상에 걸렸다. 스스로 거리 두기를 하며 자가 격리를 시작하자 야생 동물들이 도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기이한 상황에서 침몰하는 타이타닉호를 본다.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 평화롭게 죽어 가겠다고 갑판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들, 그 속에서도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인류가 처한 상황이다. 이런 침몰을 일찍이 감지하여 ‘헬 (조선)’을 말하던 대한민국 청년들은 갑자기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나라’로 부상하고 있는 상황에 당황하고 또 감격해한다. 서구 선진 자본주의 제국들이 어이 없이 무너지는 가운데서 그나마 제대로 방역을 하고 있는 나라에 사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군사주의와 기술 제일주의에 바탕을 둔 서구 자본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 초 ‘벨 에포크(가장 아름다운 시대)’를 찍은 후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여성을 억압하고 생명과 평화를 무시하며 제국주의적 확장을 통해 꽃을 피운 서구 근대 문명은 전후 신생국(미국)의 등장으로 또 한 번의 꽃을 피우는 듯했지만 사실상은 ‘조직화된 폭력’의 시대를 유지하며 몰락을 앞당기고 있다. 일찍이 타자의 몸과 영혼을 지배하는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핵심 모순이라고 지적한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9년에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조금 나아졌을까?
어제는 절대 권력에 대항해 죽음을 걸고 ‘미투’를 한 《김지은입니다》를 읽었다. 그리고 오늘은 이 책에서 그 다음 세대, 본격적인 전환을 이루어 내는 여성, 청년들을 만난다.
‘농사짓는 페미니스트’ 박푸른들. 그는 자신이 ‘애정’하는 아빠와 동네 사람들의 삶이 덜 불행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농업을 선택했다고 한다. 농부들이 애써 키운 자식 같은 농작물을 버려야 하고 제대로 생산비를 건지지 못하는 그런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초보 농사꾼이자 장사꾼이면서 그림쟁이이고 작가이고 편집자인 푸른들은 일제 때 사람을 키우겠다고 만든 충남 홍성 풀무학교 동네 덕분에, 그리고 ‘애정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을 살리고 있어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중학교를 다닌 리조. 귀국해서도 입시 경쟁에서 생존해 SKY대에 입학한 행운아다. 세계의 명문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에 교환 학생으로 있으면서 실리콘밸리에까지 진출해서 2년간 인턴 생활을 했다. 대단한 사냥꾼이 될 수 있는 자질과 운을 가진 경우다. 잠 안 자고 일하는 세계의 브레인들과 새벽을 맞으며 춤을 추었던 그는 ‘하산’한다. ‘신들이 사는 곳’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세상임을 온몸으로 알게 된 그가 돌아와 머물기로 한 곳은 몸을 이야기하며 만난 동료들의 곁이다. 몸을 억누르고 몰아붙이는 세상에서, 몸의 돌봄과 놀이를 함께 회복하는 동료들이 있어 한국을 떠나지 않고 있다. 파쿠르, 댄스, 태극권 등 다양한 신체 수련을 활용하여 몸을 살리는 ‘움직임교육’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있다. 참고로 북유럽에서는 경쟁적 집단 체육을 지양하고 파쿠르와 요가, 암벽 등반 등을 학교 체육의 재료로 쓰고 있다고 한다.
‘미스핏츠’라는 제목의 잡지를 동료들과 함께 펴낸 조소담. “이 세상에 맞추지 않겠어. 내게 어울리는 세상을 만들 거야”라며 그녀는 온라인 세대에 의한 온라인 세대를 위한 잡지를 창간한다. 그의 등장을 보면서 나는 알아차렸다. 신인류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나는 그 신인류의 출현이 꽉 끼는 교복의 단추를 풀라고 한 교사에게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에서부터 싹이 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세상에 살기’로 결심을 하고 자퇴한 그는 그 교사 ‘덕분’에 자신에게 적합한 환경을 선택하면서 동료들을 만들고 자율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분노나 부당함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이 고도 관리 사회에서 그런 분노를 갖게 한 그 선생님은 혹 하늘에서 날아온 ‘천사’가 아닐까? 스스로 ‘자격’을 만들고 일을 만들고 자리를 만드는 그녀는 AI 시대의 에이스이고 살림의 감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좋은 어른을 만나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는, 도시락 가게 소풍가는 고양이의 홍아, 크리킨디의 우화로 위로를 받으며 노래를 짓고 또 부르며 미장 장인으로 살아가는 화경, 여행학교를 다니며 비빌 언덕이 되는 동료들을 만나고 베트남에서 〈기억의 전쟁〉이라는 다큐를 만든 서새롬, 제도권 학교를 훌훌히 나와 사회를 함께 바꾸자며 이들과 의기투합해서 정당 정치를 시작한 강민진, 기술을 매개로 여성 작업자들과의 연대의 기쁨을 알아가는 민재희, 페미니스트 동료들과의 즐거운 일상을 만들며 탱고를 추는 소정, 대안학교 교사이자 기후활동가인 볍씨학교 소연 샘……. 여기 필자 대부분이 나와 어디서건 옷깃을 스친 인연들이다. 부당함을 느끼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부쩍 자란 몸과 마음을 보면서 나는 이 우울함 가운데서도 산들바람처럼 ‘살림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믿기로 한다.
아나키스트로 분류되어 온 크로포트킨의 책, 《만물은 서로 돕는다》를 다시 꺼내 읽는다. 그는 이 책에서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강조한 ‘생존 투쟁’이 아니라 실은 ‘상호 부조’가 더 중요한 법칙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학적인 종species이 계속 진화하기 위해서는 상호 투쟁이 아니라 상호 부조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들에서 나타나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나타나는 상호 돌봄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 앞으로도 인류가 기억해내고 실천해 내야하는 것을 일러준다. 그렇다. 변화는 오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밥맛이 없어도 부지런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이 아름다운 여성들이 가져올 살림의 세상이 보고 싶다면 말이다. 그래서 함께 묻기 시작한다. 국가는 무엇이며 가족은 또 무엇인가? 남자와 여자는 무엇인가? 모든 관계가 깨져 나가는 지금, 공생의 기쁨을 경험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어머니와 딸들의 역사가 이어지는 미래. 그 오래된 미래가 오고 있다. 스스로 돌보고 서로를 돌보는 마음, 자매와 형제가 우애하고 이웃이 서로 돕는 마을의 삶, 그리고 지구의 만물이 서로 돕는 세상을 우리 안에 모셔오기 시작하자. 이 길을 누구보다 먼저 가고 있는 이들, 이 책 저자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출판사 이 진주 편집장에게도 '살림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들의 진진한 이야기를 책으로 계속 펴내달라고 주문하려고 한다. 스스로를 돌보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대지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2020년 5월 9일 조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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