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점점 더 생기 있는 시간을 갖기 어려워지고 있다.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는 아타루 사사끼의 말이 떠오른다.
오늘은 손자가 집에서 자는 날이다.
자는 모습을 보며 몸을 일으켜본다.
그나마 아이들과 함께 하는 동네는 살아 있다.
그리고 고양이와 개를 키우는, 나무와 꽃을 가꾸는 동네도.
이메일이 와 있다.
연구소 연구원들과 함께 교수님의 공저인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중 '삶의 전환, 교육의 전환' 글을 읽고
많은 공감과 감명을 받았습니다. 위 글을 바탕으로, 교육의 방향 전환, 교원, 학생, 학부모에게 부탁하고 싶은 내용 등등을 중심으로 준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포럼 제목: (가) 재난의 시대, '만물이 서로 돕는 세상'을 위하여 *변동 가능(교수님의 글 중 일부를 활용하였습니다.~^^)
다시 학교, 그리고 대안 학교 동네를 자세히 보고있다.
민들레에 실린 글은 아직 구체적이지 않다.
1년 반 전에 쓴 글이다.
<삶의 전환, 교육의 전환>
코로나19가 드러낸 학교의 민낯
코로나19 사태로 세상은 크게 변하고 있다.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그간 해왔던 것 중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덜어내야 할지를 인지하게 되었다. 특히 ‘공공재’로서의 교육과 돌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예전보다 더 근본적으로 교육에 대해 성찰을 할 지점에 와 있다.
실제로 주변에서 흥미로운 변화들이 일고 있다. 거대 기업에 다니는 A 씨는 최근 서울에서 산골 마을로 이사를 했다. 서울에 있는 회사 동료들은 가능한 한 회사에 가서 일을 보려 하지만 A 씨는 전적으로 재택근무를 한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공기도 좋고 출퇴근 시간도 절약하고 일의 능률도 한결 높아졌다. 이주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을 위해서다. 중학생과 두 초등학생 아이들은 작은 산골 마을 학교에서 행복하다. 서울서는 학교를 거의 가지 못했는데 한반에 일곱명 정도의 학생이 있는 이곳에서는 매일 학교에 가서 놀 수 있다. 중학생아들은 이미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이 들어서 온라인을 통해서 얼마든지 입시공부를 할 수 있다. 그 공부를 할지 다른 길을 택할 지는 지금부터 연구하면서 갈 생각이다. 경쟁이 치열한 학교가 아이의 미래에나 건강한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온라인 오프라인 통해서 새로운 학습을 실험하면서 사람답게 살아볼 생각이다.
A 씨처럼 코로나 사태로 온라인 수업을 지켜본 ‘똑똑한’ 부모들은 기존 교육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교육인지를 새삼 발견하는 한편 막강한 사교육 시장이 개발한 온라인 시스템을 보고 놀라고 있다. 아이의 동기와 공부 습관, 그리고 주변의 준거집단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이미 있는 온라인 학습 교재를 적절히 활용하면 학교와 상관없이 입시를 위한 성과도 얼마든 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편 입시공부와 무관하게 학교의 기능이 있음도 알아가고 있다. 아이를 종일 맡아서 먹이고 안전하게 잡아 붙들어두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보다 쾌적한 환경에 스트레스를 덜 주는 ‘인간적’ 학교를 찾아나서게 된 것이다. 이사할 생각이 없는 경우는 하교 후에 부모들이 삼삼오오 방과 후 공동 학습 시간을 꾸려 대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또한 동네 공부방이나 지역아동센터 등 마을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고 교육도 챙기려는 본격적인 움직임도 일고 있다. 그간 막강한 비중을 차지했던 학교의 역할과 위상이 흔들리면서 시민들은 개각각 학교를 잘 활용하는 방향에서 자구책을 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은 스마트폰 세대로서 상당수가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온라인으로 많은 것을 접하고 또 익혀가고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가 음식점에 가면 조용히 하라고 쥐어준 스마트 폰 덕분에 취향도 뚜렷해지고 다섯 살 정도부터 학습지를 해왔기 때문에 학습지 회사가 개발한 아이패드 학습에도 익숙해졌다. 구구단도 온라인을 통해 외우고 영수국 공부도 스스로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자신이 알고 싶은 관심사를 아주 깊이 팔 줄도 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손자는 <우와한 비디오> <웃소>라는 코미디 프로를 즐겨 보는데 그곳에서 괴로운 회사 생활과 연애에 대해서도 배운다. 자기가 좋아하는 코미디언 누나와 형들이 하는 “대학은 왜 가나?”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대학은 안 가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하고 할머니에게 “나 이제 지칠대로 지쳤어요.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 추워, 그럼 보일러 틀어” 이런 노래를 들려주기도 한다. 색종이 접기와 슬라임 놀이도 유튜브 선생님을 통해 익히고 곤충 박사 정부르, 마술사 최현우 등 하나를 깊게 파는 크리에이터/ 매니아 형들의 열혈 팬이기도 하다. 축구, 코로나가 창궐하는 미국에는 절대 안 가고 싶다면서도 아크로바틱스, 파쿠르, 산악자전거 유튜브를 통해 이미 아름다운 지구촌을 온라인으로 두루 가보았다. 기후 위기로 먹을 것이 없어질지 모른다면서 디스커버리 생존 프로그램인 베어 그릴스를 반복해서 보기도 한다.
넷플릭스의 <소셜 딜레마>에서 탁월하게 그려주고 있듯 이 세대는 온라인 중독으로 거대 테크 기업들이 만들어주는 욕망의 사이클에 갇힌 채 살아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만 동시에 이미 자기만의 뚜렷관 세계관을 만들고 있다. 온라인 공간과 AI의 세계라는 새로운 시공간에서 살아갈 신인류답게 말이다. 펜데믹 상황에서 모두가 불안과 공황 상태를 경험하며 지내고 있지만 깨달음의 시간이 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후 위기와 펜데믹 위기를 자초한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절감하면서 다시 겸손한 존재로 우리 모두가 개벽의 시대를 열어갈 성장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그래서 새삼 그간 우리가 거쳐온 제도와 비제도권 교육의 장에 대해 살펴보면서 새 시스템에 대한 생각을 나눠보려고 한다.
국민적 국민학교에서 시민적 대안학교로
유교적 텍스트를 읽고 몸가짐을 배우는 조선 반도의 서당과 과원을 낙후시키고 근대국가형성기에 들어선 것은 국민을 만드는 학교였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그 학교들은 계몽의 시대를 열어가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실은 ‘대일본 제국’에 봉사하는 인적 자원/산업노동자를 만들어내는 인력공장이었다. 그 이후 대한민국 국가가 세워지면서 그 학교에서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의 산업역군들이 키워졌다. 이어서 폭력적 군부 독재를 무너뜨리는 민주적 투사들도 고등교육을 통해 성장했다. 이들은 정치 민주화를 요구했고 집단적 시위로 군부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정치민주화를 성사시킨 청년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다. 이들은 GNP 1만 불 시대를 살아갈 자신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고자 했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아등바등하는 장에서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싶었고 자신들이 다닌 강압적 학교는 수명을 다 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헌신하는 국민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좋은 나라를 만들어가는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시민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대안교육을 말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생겨난 다양한 어린이 캠프, 공동육아어린이집, 대안학교들은 이 ‘시민적 국민들’이 뜻을 모으고 물질적 자원과 문화적 자본을 모아 열어간 학습터이다.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이라는 모토 아래 새로운 시대를 열러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국내외에서 일어나는 대안교육의 움직임에 공감하면서 교육개혁에 발 벗고 나선 정권은 1998년에 들어선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였다. 당시 이해찬 교육부 장관은 “하나만 잘하면 대학 간다!”라며 교육개혁을 서둘렀다. “열린 교육”을 하겠다고 성적표를 없애고 체벌을 금지했다. 이미 지방에서부터 서울까지 다양한 대안학교가 만들어졌고 기존 학교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대 놓고 잠을 자거나 시끄럽게 하는 등 교실 붕괴 현상을 일으키고 있던 차였다.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청소년들이 학교 안팎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기존 학교는 집어치우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육부는 그런 목소리들을 살려내지 못했다. 대부분의 국가 정책이 그러했듯 꿈만 거창했지, 실행기획은 미약했다. 단순히 선발제도만 바꾸면 된다고 생각해서 ‘하나만 잘하면 대학가는’ 입시 체제를 만드는데 급급했다. 하드 웨어만 보는 가부장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섬세하게 현실을 파악해서 어떻게 하면 창의적 시민들의 기운을 살려 교육개혁을 해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인데 자기들끼리 개혁을 하려고 했었다. 구체적으로 시민주도의 대안학교가 많이 만들어지도록 바우처 제도를 만들어야 할 시점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고 학습 과정의 규제도 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국민들은 위험 부담이 많은 대안교육의 길을 택하기보다 자신들이 잘 아는 기존의 입시를 통한 명문대 입학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하나만 잘하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의 의미도, 그 과정에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부지런히 학원에 보내서 입시훈련을 시켰고 그 해 대학 입시의 결과는 학원가 엄마들의 승리였다. 세계화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살벌한 세계화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조기 영어교육붐도 일었다. 해외로 조기 유학을 보내는 경우도 생겨났고 엄마와 아이들만 해외로 교육이주하는 ‘기러기 가족’도 생겨났다. 오로지 자녀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최적화 한 것이다.
세계화의 실상을 보게되고 영어만 잘 하면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무작정 해외에 가는 행렬은 줄어들었다. 탈 노동 저고용 사회가 도래한다는 불안한 메시지를 들으면서 불안해진 부모들은 갓난아기 때부터 자녀의 대입 성공을 위해 고삐를 쥐었다. 거대기업이 된 학원들은 갈수록 세련되고 단수가 높아져 맞춤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대치동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불안해진 어머니들의 롤 모델을 만들고 그 세계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 전에 직장생활 경험이 있는 똑똑한 어머니들은 아침 식사를 만들고 도시락 싸는 것은 서툴지만 입시 전문가이자 투자자로 사교육 시장의 전문가가 되었고 급기야 자발적 홍보를 담당하기도 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 교육제도의 도입은 한편에서는 자녀의 개별적 생존/성공을 선택한 어머니들의 극성에 의해,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성 있는 개혁을 해낼 능력을 갖추지 못한 국가에 의해 늦어지거나 포기되었다.
학교를 거부하는 청소년들은 줄어들고 점심을 먹고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학교 가는 것이 좋다는 청소년들이 늘어난 것은 이즈음이다. 2000년도 중반부터 끝없는 ‘자기 계발’과 ‘자기 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본격화되고 그 질서에 대수의 부모와 함께 청소년들도 자발적으로 몸을 맡겼다. 터무니 없는 기준으로 모두를 한 줄로 세우는 선발 교육이 다시 자리를 굳혔고 시장과 절묘하게 결합한 입시 체제는 매우 정교하고 복잡해졌다. 그 체제는 조부모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과 아이의 체력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현실로서 최근 JTBC 드라마 <스카이 케슬>에서 입시세계의 진수를 생생하게 재현한 바 있다.
나는 대안학교들이 전체의 1% 정도만 되면 제도권 학교도 자연스럽게 변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진보적 교육감들을 중심으로 제도권에서 ‘혁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대안교육을 접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혁신학교, 전환 학교, 자유학년제 등의 제도로 학교에 적을 두면서 대안학교에서 하는 것과 비슷한 학습을 할 수 있게 하려는 제도이다. 그러나 시장 주도의 입시 준비 시스템이 워낙 세밀하게 짜여 있고 이미 다수의 아이들이 취학 전부터 그 틀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그간의 노력과 투자가 아까워서도 쉽게 빠져나갈 수가 없다. 위험 부담이 높아 보여서이다. 결국 계층과 상관없이 모두가 폴러스가 지은 <꽃들에게 희망을>의 애벌레들처럼 위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각자 기둥을 오르느라 정신없이 달리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대학은 더 이상 창의적 인재가 세상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는 가는 곳이 아니다. 기존체제 유지에 급급한 거대한 제도로 남아있다. 구체적으로는 책상 앞에 오래 집중해서 앉아 있을 수 있는 이들을 선발하는 인증기관이 되었다. 대학이 선발한 입시전쟁에 전력투구한 인재들은 수시로 터져 나오는 사회문제를 인지할 수 있는 경험도 하지 못했고 시간적 감각도 길러내지 못했다. 이 체제에서 성공한 이들이 법관이 되고 검사가 되고 고위 공무원이 되고 의사가 된다. 20010년대 들어서서 성적 비관으로 자살한 친구를 모른 척해야 했던 특목고 출신 학생들을 종좀 만나곤 했는데 그런 회한을 가진 이들도 사라지고 있다. 지금 입시에 성공한 이들 대부분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오로지 입시 전투에 전력투구했던 자신의 ‘열끌 노동’의 시절을 돌아보며 그 노력/노동이 제대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에 매달리는 경향을 보인다.
그간 사회에 무관심했던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기 시작한 것도 그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때이다. 선배 세대가 했던 대의를 위한 집단적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개인적 경험에 근거하여 ‘공평함’에 집착하는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이른바 일류대학 엘리트들을 집단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을 때라는 말이다. 구조적으로 보면 자신들도 기득권층에 속한다는 것, 이미 사회는 학력이 체계적으로 세습되는 불공정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진화론적으로 보면 이런 사회의 미래는 어둡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집을 떠나려는 의욕을 보이는 청년들은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학교와 집과 학원의 트라이앵글을 그리며 입시교육에 몸을 맡겼던 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큰 고민 없이 입시공부만 하면 되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평생 그 안전한 ‘온실’에 머물수 있기를 소망한다. 급변하는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한 후대를 제대로 길러내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되는 이들의 불안은 부모의 지원에 비례한다. 금수저 흙수저로 비유되는 계급사회의 청년들은 자신들이 “무직, 무용, 무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이는 더욱 명약관화해졌다. 그러나 바로 이런 시점이 급반전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 다행히 청소년 당사자들과 부모들이 이번 팬데믹을 계기로 기존 학교와 대안교육을 두루 살피면서 적절히 활용할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아이 중심으로 맞춤 교육과정을 짜는 부모와 교사들이 늘어나면서 변화 가능성을 보기 시작한 이들도 늘어나고 있따. 이런 추세로 간다면 생각보다 빨리 반전이 가능할 것도 같다. 새로운 학습 생태계들이 위에서가 아니라 바로 아래 극히 일상적 공간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난민적 공생의 삶을 익히는 학교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제 학교는 많은 아이들에게 싫은 곳이 아니라, 친구가 있고 놀이터가 있고 친환경 급식이 나오는,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외부 사회가 점점 위험천만한 곳이 되다 보니, 학교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 comfort zone이 되었고, 머물고 싶은 곳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의 불안에 감염되어 성장한 아이들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외부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별로 없다. ‘애국적 헌신성’을 강조해온 ‘국민학교’에서 소비와 문화의 시대를 주도할 ‘시민들의 학교’를 거쳐 팬데믹 시대의 학교는 어떤 모습일까? 더 이상 ‘국민’도 ‘시민’도 아닌 ‘난민’적 존재가 어른이 되기까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난민’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국가가 개인을 보호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깨진 파국적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근대화 프로젝트의 중심축인 국민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시장을 견제하기 위한 기구인데, 2008년 월가 파동에서 보듯 대부분 국가는 금융자본의 횡포를 견제하지 않았다. 현 세계는 돈의 체제에 깊숙이 물렸고 국가는 그 하수인이 되어버렸다. 새벽부터 일어나 모든 국민이 하루 열 시간을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사는 노동 사회는 이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침부터 일어나 학교에 가서 훈육을 견딜 필요도 없어졌다. AI가 대부분의 인간노동을 대신할 ‘탈 노동 사회’의 학교는 또 어떤 모습일까?
분명한 것은 세상의 기준을 세우는 지렛대/축 자체가 변화하는 시간, 불확실의 불안을 견디는 시간이 지나고 있다. 아이들은 기성세대가 알고 있는 것과는 판이한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세월호 사태나 코로나19 사태처럼 어처구니없는 재난과 재앙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침착하게 대응하며 살아남을 순발력과 회복 탄력성을 키워야 하는 세대인 것이다. 수시로 달라지는 안팎의 환경 안에서 개인과 가정과 지역과 국가의 살림살이에 적절히 개입하면서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하고 내적으로는 공황에 빠지지 않는 지혜로움과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삶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탁월한’ 존재로 성장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난민적 공생의 장을 열어가는 일은 ‘만물이 서로 적대하는 세상’을 ‘만물이 서로 돕는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각자도생’의 승자독식 사회를 ‘만물이 서로 돕는’ 공생 사회로 전환하는 일이다. 이는 작게는 이웃을, 크게는 우주의 한 마을인 지구를 살려가는 일이기도 하다. 국민국가 정치를 일정하게 낙후시키고 개개인에서 시작하는 튼튼한 시민 생명 거버넌스를 만들어내는 것, 최저 임금을 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최고 임금도 정하는 것, 세금의 재분배로서의 복지제도가 아니라 환경을 망친 데 대한 보상의 개념이 포함된 시민 배당제도를 도입하는 것, 물적 생산 노동에 대한 지급만이 아니라 망가진 사회를 되살려내는 ‘활동’을 활성화하는 기본소득제도를 실현하게 해내는 일 등을 통해 새로운 공생의 시대를 불러들여야 할 것이다.
살아남으려 하기보다 세상을 구하려는 자가 살아남는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스마트폰 세대이자 마스크 세대인 지금의 아이들은 조숙하다. 초등학교 2학년 정도만 되면 자기 세계관을 형성하고 우주를 형성해가는 존재로 사유하고 행동한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스스로 삶을 만드는 존재인 인간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호모 파베르 3부작을 썼는데, 그 첫 권은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기술’ 곧 일상생활 유지에 필요한 물리적인 것들을 만드는 장인(匠人)을 다루었다.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가는 창조자 인간은 최근 AI라는 존재를 만들어 인간의 손과 발과 머리를 확장해가고 있다. 드디어 인간은 자신과 매우 유사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되었는데, 지금 자라는 세대는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와 같이 자신들이 만든 특별한 존재와 아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을 구해야 한다. 두 번째 책 『투게더』에서는 인간의 특별한 사회적 기술, 곧 ‘함께 사는 법’을 다루었다. 더불어 사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교육의 핵심인데, 지금의 아이들은 사람 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여타 생명과의 소통과 지구 밖 우주적 존재와의 소통도 고려해야 하는 존재이다. 세 번째 책 『짓기와 거주하기』(한국: 2020-01 출간)는 모여 사는 삶의 특성, 마을을 만드는 일이다. 여기서 아이들이 걸어서 갈 수 있는 카페나 마을 도서관, 아이들의 장난감을 포함한 물건들이 활발하게 교환되는 장터, 음식을 만들어 같이 먹는 동네 나눔 부엌과 동네 어른들이 절기에 따른 의례를 거행하는 신성한 장소 등이 모여 있는 생태계를 떠올려보자.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마을이다.
‘네 시간 자면 성공하고 다섯 시간 자면 실패한다.’라는 70년대식 협박 속에서 집과 학교와 학원을 오가고 있는 아이들이 해방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우주의 기운을 느끼며 오감과 육감을 다열어두고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고 배우는 존재로 살아갈 날 말이다. 우리는 거대한 하이테크 기업들이 이들을 모두 온라인 좀비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입시교육으로 이들이 컴퓨터가 더 잘 해내는 일을 익히느라 청춘을 바치기 전에, 미래를 만들어갈 기술과 협력을 해낼 수 있도록 자율과 공생적 시공간을 열어낼 궁리를 해야 할 때이다. 겁에 질린 아이들의 안전한 피난처로 굳어가는 학교를 생기 있는 존재들이 어우러지는 살림의 장소로 바꾸어내야 한다.
이런 시대를 누구보다 일찍 감지한 일리치는 1990년 하노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는 아픕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과 웃음,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살피는 기쁨을 알고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선을 돌려 삶의 기술과 고통의 기술, 죽음의 기술을 키워야 합니다.” 근대 인간들이 만들어낸 삶의 고통과 비참을 감지한 존재, 드디어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동물과 식물과의 연결성을 감지하는 존재, 더불어 살아갈 세상을 인식하고 AI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탁월한 존재가 성장하는 학교가 만들어질 때가 왔다. 이 탁월한 존재들은 세속적으로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뒤르켕이 말한 사회적 의식, 사회적 영성을 지닌 존재일 것이다. 자신과 연결된 공동체가 만든 세상의 비참함을 느끼고 비통해하면서도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새 언어를 만들고 튼튼한 집을 지으며 계속 살아갈 내공을 가진 존재이다. 이런 아이들과 함께 할 부모와 교사는 아이를 통제 관리하려는 강박을 내려놓고 아이와 만날 수 있어야 하고 답이 없는 묵시론적 혼란의 시간에 개벽의 기운을 느끼며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동기’를 설정하고 아이와 어른 세계를 격리했던 근대적 제도와는 이제 결별하자. 제도권학교를 거부하고 해체된 가족을 원망하기보다, 서로 의지하고 믿는 사람들이 상호부조 하며 학교 아닌 학교를 만들고 마을을 만들면서 생기 있는 삶을 회복해낼 때다. 아이를 키울 만한 동네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청년들의 결혼 파업과 출산 파업은 지속될 것이며 분노와 박탈감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경쟁과 적대의 총량을 줄이고 돌봄과 환대의 총량을 늘리면서 지속 가능한 삶의 장을 회복하는 것, 함께 모여 각자가 가진 자원을 나누고 기운을 나누는 것이 삶과 교육을 전환하려는 이들이 집중해야 할 활동일 것이다. 동네 안에 있는 작은 학교와 이런저런 살림의 시공간은 팬데믹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갈 최선의 아지트들이다. 마을 주민들이 부모, 조부모의 관계를 넘어서 이웃으로서, 피를 섞지 않은 삼촌과 이모로 남다른 인연을 맺고 소중한 경험을 나누게 될 때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혐오와 적대의 시대가 지나가는 것, 한국의 툰베리 세대 학생들이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 거리 시위에 나가기 시작하는 것, 입시 체제로 공고해진 한국 교육 판이 갑자기 바뀌는 것, 우리 아이들이 자신들의 수명대로 건강하게 살다가 노인이 되어 세상을 떠나는 것, 그런 기적들 말이다. 그래서 어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는 주문을 외우며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된 동네 아이들이 세상을 구할 수 있게 돕는 일이다. “서로를 살리며 스스로 서는 아이들”이 지속가능한 마을을 만들어가는 일을 지켜보고 또 도우면서 생기 있는 하루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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