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2020 사계절
정성과 신뢰의 세계가 만들어가는 기쁨의 배움의 세계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사회 예절을 지키는 사람.”(45쪽)
어린이의 품위
어린이가 독서 교실에 들어오면 일단 가방을 받아서 정리한다. 그런 다음 어린이 뒤에서 외투 벗는 것을 돕는다.
이 때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된다. 외투 자락 말고 다른 데는 되도록 내 손이 닿지 않게 조심한다.
너무 빨라도 느려도 안 된다. 제일 중요한 건 어린이가 팔을 뺄 때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이다. 어린이 입장에서는 어깨만 조금움직였을 뿐인데 스르륵 왜투에서 빠져나왔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어린이에게 받은 옷을 옷걸리에 끼워서 모양을 잡아 걸어둔다. 이 부분은 민첩하게 처리한다. 기다리는 동안 손님이 어색해지면 안 되니까.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때도 당연히 시중을 든다. 이게 더 어렵다. 외투를 벗을 때처럼 입을 때도 양팔을 동시에 소매에 끼워야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들은 혼자 입을 때처럼 한 판을 먼저 끝까지 넣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쪽 팔을 끼울 때는 팔을 접고 끙끙대게 마련이라, 시중을 드는 게 오히려 어린이를 불편하게 하는 셈이 된다. 그러면 나는 어린이 앞으로 가서 얼굴을 보며 이야기 한다.
"선생님이 이렇게 하는 건 네가 언젠가 좋은 곳에 갔을 때 자연스럽게 이런 대접을 받았으면 해서야. 어쩌면 네가 다른 사람한데 선생님처럼 해줄 수도 있겠지. 그러니가 우리 이거 연습해보자." 어린이는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양팔을 조금만 뒤로 하고 서 있으면 된다. 그러면 내가 옷을 끼워준다. 스스륵, 탁. 부드럽게 옷 입기가 끝나면 매무새를 손질하느라 그러는지 기분이 좋아서 그러는지 어린이가 어깨를 으쓱인다. 처음에는 이 과정을 쑥스러워하던 어린이도 몇 번이면 익숙해져서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나에게 자연스럽게 등을 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슬쩍 웃는 얼굴이 되는 것을 나는 여러번 보았다. 그런 순간 때문에 이 서비스를 좋아한다....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안하무인으로 굴길ㄹ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은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외투 서비스, 어린이를 대하는 내 마음을 다 잡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식이다. 한편으로는 어린이 보라고 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좋아보이는 것을 따라 하니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이 과정이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다. 마리아 몬테소리의 [어린이의 비밀]에는 '코풀기 수업'에 대한 경험이 적혀 있다. 몬테소리는 '재미있는 수업'이라고 생각해 손수건 사용법 등을 가르쳤는데 어린이들은 전혀 웃지 않고 귀 기울여 수업을 들었을 뿐 아니라 수업이 끝나고는 깜짝 놀랄 만큼 열광적인 박수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몬테소리는 어쩌면 자시이 "어린이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건지도 모르다고 했다, 어린이들은 더러운 코 때문에 끊임없이 야단맞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제대로 코 푸는 방법을 몰라 애를 먹어 온 것이다.어린이라고 해서 코를 훌쩍이며 지저분한 모습으로 다니고 싶을 리 없었을 테니, 배움의 기회가 너무나 소중했으리라는 이야기 였다. 41-42
이 귀엽고 애틋한 일화애는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다. 어린이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품위를 지키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으로서 어린이도 체면이 있고 그것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도 남에게 보이는 모습에 신경 쓰고 때와 장소에 맞는 행동양식을 고민하며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