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기일에 외경 읽기
묵상 모임에서 읽음
고정희 시
1
외경읽기-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올릴 때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잔에 어스럼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2
외경읽기-
어느날의 창세기
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강물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거스르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산들이 마을로 무너지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나무들이 뿌리를 창궁으로 치켜들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생명 있는 것들의 너그러움
부드러운 흙가슴의 너그러움
공기의 너그러움
천체 운행의 너그러움일 거야
별들이 저마다 주어진 길을 돌고
바람이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우듯
핏물이 밥사발에 범람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너그러움일 거야
세계인의 신음소리가 하늘을 덮지 않는 것은
일말의 너그러움일 거야
돌들이 일어나 소리치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어머니가 방생한 너그러움
임신한 여자가 담보 잡힌
너그러움일 거야
등뼈를 쓰다듬는 너그러움
살기를 풀어내는 너그러움
아아 우주의
너·그·러·움·일·거·야
3
겨울사랑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