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의 감수성으로 자본주의 살아가기
하자 스무번째 생일을 맞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시대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데 하자센터,
그 센터를 거쳐간 이들의 행보를 보면
한국사회의 일면이 보인다.
초창기에 대학원생으로 하자를 만드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 이가 있다.
그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면 즉각 소리 높혀 문제제기를 하고 공론장을 벌이게 만들었다.
새 동네를 만들 때 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이 있을까?
그래서 나는 양양을 하자 센터를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아리조나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에게 하자 초기 막내들을 생일 파티에 모아보면 어떻겠냐는 이메일을 보냈더니
"막내들 모임보다는 하자에 있다가 private sector로 가서 좀 다른 마인드로 시장에서 플레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하자의 초기 온라인 시스템을 개발한 팀은 일년이 되지 않는 시점에 회사를 만들어 나가겠다고했다.
솔직히 약간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냥 아무 말 없이 나가도록 했다.
"가는 사람 막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만든 자율동네였고
내심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하지"라는 뱃짱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뜻을 모으는 것이고 당시 하자는 뜻이 모아지는 기운 충천한 곳이었다.
사실상 나간 온라인 팀장은 하자 센터의 싻을 틔운 계기가 된 1996년 백양로 난장의 총기획, 지휘자였다.
군대에서 장군의 비서를 하다가 제대하고 내 수업을 듣다가 큰 행사의 총 기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탁월한 기획자였고 그를 중심으로 모인 작업자들이 없었으면
하자 센터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항상 그에게 감사하고 그 역시 스승의 날이면 어김없이 포도주 한병을 들고 하자를 찾아온다.
시장적 마인드를 가진 판돌들은 NPO에 속하는 하자공동체와 보이지 않는 갈등을 빚었고
게중에는 자신이 먼저 그런 경향을 알아차리고 나가서 사업을 한 이도 있고
취직을 해서 잘 나가는 이들도 있다.
자신은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하자센터 쪽에서 (휘가) 강력하게 추천해서 사회적 기업가가 된 이들도 있다.
나가서 때론 후회하고 때론 잘 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들 했을 것이다.
그들이 차린 '사회적 기업'도 사실상 일반 기업과 별 다른 바 없는 기업도 있고
<길모퉁이 가게>로 영상화된 <소풍가는 고양이>처럼 매우 사회적인 성격이 강한 기업도 있다.
그들은 서로 돕기도 하고 투자도 한다는 소문을 듣고 있다.
하자에서 좀 놀다가 개인 아티스트로 시장의 흐름을 타고 크게 성공한 아티스트도 있고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탁월한 작품을 내지만 시장적 성공에 연연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양양은 중학교 때부터 하자에 들락거린 친구의 예를 들면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 사회변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나이들었다고 자본과 편안하게 결탁하지 않는 식으로 가는 슬로워크 기업의 핵심 멤버인 펭도의 예를 들기도 했다.
회사 문화나 마인드가 확실히 다른 벤처를 꾸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과 자율을 강조한 하자인만큼 개인주의적으로 풀어가는 건 당연한 것이고 다양한 선택지들이 나온 것 역시 당연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자적 감수성으로 자본주의를 살아가기"라는 주제로 토론을 해보면 좋겠다는 것이 양양의 제안이다.
역시 막내 공신다운 제안.
역시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서 지내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