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전 사회학 대회 때 글을 다시 읽게 된다
날씨가 추워졌다.
12월이 다가오고 있다.
작년을 생각하면서 이런 저런 글을 꺼내본다.
엉망진창인 복지제도를 기본소득제 중심으로 개혁하는 것,
그와 동시에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시대를 읽고 있는시민들이 다시 모일까?
경쟁과 적대와 혐오의 흐름을 바꾸어낼 우정과 환대의 시민들.
그 시민들이 다음 세대의 자원을 강탈하지 않기로 선서 하는 것,
툰베리 세대의 선언을 모른 척 하지 않기로 하는 것.
기후 위기 비상 행동이 거국적으로 벌어지면 좋겠다.
엄마와 아이들, 그리고 좀 여유가 있는 장노년 세대가 같이 가야 할 듯.
2018년 12월 7일 한국 사회학 대회
주제 : "균열과 혐오의 사회를 넘어: 연대와 치유를 위한 사회학적 성찰“
” ‘미투’ 운동과 기본소득, 그리고 이바쇼“
조한 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 명예교수)
- 프롤로그 -
지구별에 온지 6년 반이 된 미래인은 노래를 좋아한다. 얼마 전까지 애창곡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였는데 <아이콘>의 <사랑을 했다>로 넘어갔다. 요즘에는 <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른 <그건 니 생각이고>를 부른다.
내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니가 나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걔네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아니면 니가 걔네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그냥 니 갈 길 가/이 사람 저 사람/이러쿵저러쿵
뭐라 뭐라 뭐라 뭐라 뭐라 뭐라 해도/상관 말고/그냥 니 갈 길 가
미주알고주알/친절히 설명을/조곤조곤 조곤조곤 조곤조곤 해도
못 알아들으면 이렇게 말해버려
그건 니 생각이고/아니/그건 니 생각이고
알았어 알았어 뭔 말인지 알겠지마는/그건 니 생각이고
이런 노래를 부르며 자라는 미래인과 그의 친구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갈 것 같다.
하버마스가 후기 근대 시민들은 ‘정당성의 위기’ 아니라
‘동기 상의 위기’에 시달릴 것이라고 말했지만
스마트 폰의 친구로 자란 이들은
헬로 카봇의 주인공 차탄처럼
헷갈리는 일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자기 길을 갈 것이다.
이 미래인은 얼마 전 유치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쫄랑거리며 따라오기 시작한 생후 두 달짜리 강아지를 키우기로 작정했다.
이 미래인(과 그의 친구들)은 드디어 인간중심의 세상을 넘어서
로봇과 여타 생명과 공존하는 post human 시대를 열어가는 것일까?
1. 인류가 도달한 디스토피아와 불량국가
유토피아를 항해 달렸던 인류가 마침내 도달한 곳은 디스토피아였다. 유럽의 최고 지성이었던 자크 아탈리는 말한다.
“우리는 이미 끔찍한 세상을 살고 있지만, 머지않아 이곳은 더 살기 힘든 곳이 될 것이다.
.....오래전부터 정치 개혁과 시급한 조치의 필요성을 누누이 당부해왔다.
그러나 권력자들이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한 채 게으른 태도로 일을 질질 끌기만 하는 것에 분노는 느낀 나는 이제 개인에게 고하고자 한다....
권력자들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라.....
그저 비난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지 마라.
부디 행동할 용기를 가져라
나는 이를 두고 ‘자기 자신 되기’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이 시점에서 ’근대적 전문가‘라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실은 그들 대부분- 자원을 소유한 자들과 그를 돕는 10% 정도의 사람-은 안락지대 comfort zone에서 기득권을 누리다가 조용히 죽어가는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막스 베버가 우려했던 근대 자본주의의 미래, 쇠우리 iron cage 체제가 완성되어가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들은 줄어들고 기후 변화를 비롯한 환경과 자원고갈, 잔인한 시장과 폭력적 국가, 그리고 일상의 혐오가 지속가능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조만간 도래할 미래를 그린 묵시론적인 영화들, SF 디스토피아 영화들은 사실적이었다.
마가렛 에트우드 원작(1985),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핸드 메이즈>, 미합중국은 깨졌고 캘리포니아에 들어선 군부 통제 국가를 배경으로 한다. 불임과 불모의 땅에서의 희망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 그리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키우는 것이다.
영화 윌리엄 아이리쉬 원작을 영화화한 엔드류 니콜 감독의 <가타카> (1997) 열성인자가 제거된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선택된 자들만 가는 우주항공회사. 자연적으로 태어난 이들은 진입조차 불가능하다.
장 마르크 로셰트 원작 만화(1984-000)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 설국 17년 인류 마지막 생존지역은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있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기차 한 대만 끝없이 궤도를 달린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꼬리 칸과 대조적으로 기차 소유주와 관계자들의 앞쪽 칸은 호화롭다. 아이들은 귀족 교육을 받고 어른들은 술과 마약을 즐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지만 오늘만은 영원한 듯이 살아간다.
닐 블롬캠프 감독의 <엘리시움> (2013) 하나의 인류, 두 개의 세상. 서기 2154년 버려진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 전쟁, 질병이 없는 선택받은 1% 세상 엘리시움으로의 이주를 꿈꾼다.
베로니카 로스 원작 (2011), 닐 버거 감독이 만든 <다이버전트>(2017), 시카고, 잦은 전쟁과 자연재해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인류는 하나의 사회, 다섯 개 분파로 나뉘어 자신이 속한 분파의 행동규범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통제사회에서 살아간다.
2018년에 나온 온라인 게임 세계에서 반지를 찾아내는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 또한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로 세상을 구하는 문제를 푸는 청년들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무림은 망했고 강호의 고수들이 출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제 사회학 교재보다 이런 영화를 보는 것이 더 사회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독존과 공존, 탈존과 생존, 그 어딘가에서 서성인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이런 세상의 삶을 이해하려면 사회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사회학적 파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회가, 사회의 마음이 꿈꿔온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파상破像의 시대. 사람들은 기왕의 가치와 열망의 체계들이 충격적으로 와해되는 체험 앞에 속수무책으로 맞닥뜨린다. 9·11 테러, 2008년 금융위기, 3·11 동일본 대진재, 이슬람 국가(IS)들의 등장 등, 파국적으로 엄습해오는 재난과 위협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어지러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파상의 시대는 문명사적으로 대변동의 시기이며, 대안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의 꿈들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며 문제화되는 시기다.”
괴물이 된 시장, 고장이 난 국가, 그리고 지쳐 떨어져 나간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민사회. 수명이 다한 근대 자본주의 문명은 각 나라의 근대화의 방식대로 붕괴의 길을 가고 있다.소통과 상생과 돌봄의 감각을 잃은 사람들, 홀로 남겨진 사냥꾼들. 이주민을 몰아내고 싶어 하는 청년들, 여자를 혐오하는 청년들. 그러나 아직 그 체제에 온전히 오염당하지 않아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여성시민들다.
2. ‘변태국가’ 의 미투 운동
박노자는 노동자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 한국을 ‘불량국가’라 불렀다. 나는 미투 운동을 보면서 한국이 ‘변태국가’임을 깨닫게 된다. ‘비변태 남자’들이 ‘변태 남자’들에게 져버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버린 상태.
남한의 여성들은 1945년 식민지 해방과 함께 참정권 운동 없이 참정권을 얻었고 교육권을 얻었고 노동권을 얻었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훌륭한 시민들이 출현했다. 대한민국 국민 서지현 검사는 여성국민을 식민의 대상으로 취급한 검사를 고발했다. 대한민국 국민 김지은 비서는 여성국민을 식민의 존재로 대하는 자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에 미투 운동에 참여했다. 미투운동을 통해 ’헬조선‘은 비로소 ’대한민국‘이 되어가고 있다며 누군가가 말했다. 근대 국가 체제 자체가 망가지고 있는 시점이라 자괴감이 드는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의 과정을 거치는 것. 근대 청년기를 제대로 거처지 않고 성숙한 노년이 될 수 없다.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나라로 바로 서는 과정을 잠시라도 거쳐야 한다. 체계와 생활세계, 도구적 이성과 소통적 이성, 토건과 돌봄 영역이 균형 있게 진화하는 시점을 거쳐야 한다. 한국은 그 불균형이 극단적인 사회에 속한다. 공적 영역에서 여자와 남자간의 힘의 불균형은 첨예하다. 남자가 지배하는 공적 세계와 여자가 지배하는 사적 세계간의 괴리는 크고 사적 영역과 돌봄 영역에서 남자는 겉도는 존재다.
근대국가가 제대로 서려면 ‘분단국가’가 화해해야 하지만 남북 화해 못지않게 남녀 화해가 국가 사활이 걸린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초딩 남자아이들이 여혐증세를 보이고 전철에서 여자 욕을 중얼거리는 앳딘 청년들을 자주 보게 된다. 아주머니들만이 그들을 나무라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남자들이 여자 화장실을 엿보지 않는 사회, 여자들이 리벤지 포르노 공포에 시달리지 않는 사회, 청춘들이 마음 놓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회가 다시 올까?
변태 국가는 미투 운동을 통해 구원될 수 있을까?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경찰에 들어가면서부터 국가가 2차 가해를 하는 집단, 보호기구가 아니라 폭력 기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변태 조직으로서의 국가가 돌봄의 조직으로 변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은 어떤 것일까? 식민지 수탈을 위한 관료행정 기구를 그대로 답습한 채 바꾸어내지 못했다는 사실, 식민지 시대를 통해 갖게 된 콤플렉스와 강박증으로 가득한 가학과 자학의 내면. 그런 콤플렉스를 갖지 않는 여성시민들을 끌어들일 때 남성국민 중심의 국가주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다. 비로소 변태국가, 그리고 불량 국가는 변할 수 있다. 시민 개개인이 스스로를 돌보며 서로를 돌보면서 상생의 국가를 만들어가는 ‘시민적 공공성’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 내가 안희정 판결을 유의 깊게 보고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채효정 박사의 '오입쟁이가 너를 재판할 것이니 너는 너의 오입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글을 자주 인용하는 이유이다.
-'안희정 무죄' 판결을 보고 (8/15)
아리스토파네스가 쓴 <구름들>은 소피스트라는 당대의 지식장사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정론'과 '사론'이 '말하는 법'을 배우러 온 한 젊은이의 교육을 자기가 맡겠노라며 논쟁한다. 사론 (아디카이오스로고스)은 젊은이를 꼬시며 설득하기를 "자 내 제자가 되어 멋대로 하고, 뛰고, 웃고, 아무 것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게"라고 한다. 무엇을 하더라도 논박하여 정당화할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정론 (디카이오스로고스)이 걱정하여 말하길 저 청년이 정말 그 말을 믿고 그런 짓을 했다가 재판정에 서게 되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러냐고 하자 '손해 볼 것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 말해보게. 변호사들은 어떤 사람들에게서 나오나?
오입쟁이들이지.
동감이야, 어때, 비극작가들(시인들)은 어떤 사람들에게서 나오나?
오입쟁이들이지.
좋아서. 대중선동가(정치가)는?
오입쟁이들이지.
그리고 관객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은지 둘러보게.
둘러보고 있네.
뭐가 보이는가?
맙소사! 오입쟁이들이!
'안희정 무죄'
판결을 보니 전날 읽었던 희극의 내용이 그대로 겹쳐졌다.
"이 나라에서는 불의하고 무도한 자들이 정의의 평결자이니 너는 두려워말고 저지르고 즐겨라. 그들의 불의한 말(adikaioslogos)이 언제든 너를 무죄로 만들어줄 것이니."
이 극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피스트에게 돈을 주고 논쟁술과 변론술을 가르쳐놓으니 이 아들은 아버지를 패고도 당당하게 자기 행위를 논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괴물이 된다. 이 아버지는 그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철학관에 불을 지른다. 내 저것들을 어떻게 할까요, 고소를 할까요, 하고 헤르메스 신에게 조언을 구하는데, 헤르메스가 소송을 할 것이 아니라 저 떠버리들의 집을 불태워버리라고 조언을 해준 것이다.
학계 언론계 법조계 인사들의 '전문가적’ 궤변을 듣고 있자니,
정말 불을 싸지르고 싶다. 신의 현명한 조언을 따라.
철학관에 불을 싸지를 아버지는 어디에 있을까? 신탁을 내릴 헤르메스 신은 또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 신들은 왜 다 남성의 모습일까?
여성은 인류 최초의 식민지였고 마지막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마리아 미즈는 여성은 또한 인류 최후의 구원자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그녀들이 어디에선가 나타나 신석기 시대 이후의 남성 중심적 문명을 돌봄 상생의 문명으로 바꾸어낼 때가 된 것이다. 인류가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을 수 있다면 분명 그것은 보다 많은 것을 갖기 위해 투쟁한 남자의 역사가 아니라 아이를 낳고 키우고 살림을 맡아왔던 여성들이 만드는 역사를 통해서 일 것이다. 디스토피아의 끝에 반전이 있다면 그것은 밥을 짓고 지혜를 나누고 아이를 키운 화덕 근처의 자리에서 일어날 기적일 것이다. 그 여성시민들이 시민으로서 공적영역과 가정 영역에서 공히 활약할 때 그래서 파트너 남성들이 시민으로서 공적영역과 가정영역에서 공히 활약할 수 있게 될 때 일어날 기적일 것이다. 그것이 아닌 다른 선택은 없는가? 남녀의 구분이 사라진, 스스로를 복제하는 생명체가 탄생할 것이고 그들에게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새로운 이름이 붙여질 것이다. 엔드류 니콜 감독이 그린 <가타카> 그 이후.
3 ‘이바쇼’ 내가 안전하게 느끼는 처소, 그 돌봄의 자리와 기본소득
입시 공부로 밤 10시가 지나야 집에 돌아오는 아이들은 잠을 안 잔다. 아무리 늦어도 밤에 한두 시간 유투브를 보고 웹서핑을 한다. ‘유일하게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보는 시간’이니까,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시간이니까. 모든 것이 타의에 의해 움직이는 틀 안에서 그 시간은 ‘나를 완전히 망가뜨리지는 않겠다는 자존을 유지하는 마지막 힘’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그게 어디로 가는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냥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야’라는 걸 확인하는 것으로 족하다. 자기답게 살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 이미 난민의 시간 속으로 만들어버린 체제이지만 살아있음을 느낄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을 위해 노력하는 그는 아직 살아 있다.
그래서 더욱 각자도생 제대로 하면 된다. 자신이 결정해서 갔다면 실패해도 다시 힘내서 길을 찾을 테니까 말이다. 국가나 가족은 최소한의 할 일을 하면 되고 더 이상 국가나 기존의 시민사회 같은 것에 기대지 말고 정말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을 하면 된다. 개개인으로 외로운 늑대처럼 살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개별자'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표밭만 보는 정치가들은 노인들의 비위만 맞추려 할 것이다. 누가 더 가져가는 지를 계산하고 비교하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복지의 수혜자들은 갈수록 많은 것을 기대하면서 진상 국민으로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그리고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치매환자들이 되어갈 것이다. 치매 노인에게 투표권 주기보다 스마트폰 시대를 사는 중학생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 14세 살인을 한 중학생을 강력 처벌하고자 한다면 14세 청소년들에게 먼저 투표권을 주고 그런 논의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기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해서 이들이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고 고심을 할 것은 분명하다.
부모보다 기계로부터 더 많은 말을 배운 아이들의 세대가 자라고 있다. 그들에 대해 기성세대는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알 길도 없다. 기반 자체가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최근 들어 자해를 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성장학교 별 교장)는 10월4일 <한겨레21> 인터뷰에서 말했다. “아이들이 부모 또는 중요한 어른에게 말하지 않고 자기 몸에 자해를 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무언가’ 심리적 고통을 처리한다. 그건 말로 할 수 없다는 뜻이고 말로 하기가 어렵거나 소용없다고 느낀다는 얘기다. 여러 가지 복잡한 신호이기 때문에 ‘아이가 뭔가 말로 하기 어려운 게 있구나’라는 걸 알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자해의 원인은 개별적이지만, 김 교수 같은 전문가들이 자해와 관련해 주목하는 ‘요즘 아이들의 두드러진 정서’가 있다. 첫째, 멸망 정서(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둘째, 고생 정서(사는 게 너무 힘들다-태어나면서부터 고생했다). 셋째, 왕부담 정서(부모가 나 때문에 산단다-재롱만 10년째 떨고 있다). 넷째, 섭섭 정서(민모션-울고 싶은데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감정을 숨긴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다섯째, 복잡한 등교 정서(학교에 공부하러 가지 않는다-밥 먹으러, 친구 만나러 혹은 삥뜯고 ‘작업’하러 간다).
인터넷 미디어의 역할, 불안과 우울의 정치적 의미, 금융자본주의가 노동에 미치는 역할 등에 천착해온 이태리 자율주의 이론가이자 미디어 활동가인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한국사회를 기호 자본주의화 과정을 가장 선진적으로 가는 사회라고 말하면서 부모보다 기계로부터 더 많은 말을 배운 아이들의 세대가 어떤 심리적 고통을 앓고 있는지는 <죽음의 스펙터클: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범죄, 자살, 광기>에서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다. 그는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조승희를 비롯한 범인들이 구조의 부작용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결국 스스로와 타인들을 파괴하게 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베라르디는 [미래 이후]에서 1970년대 이래로 자본주의는 파괴를 통한 축적 국면에 들어섰으며 그때부터 이미 전 지구적 생산기계는 무한한 성장을 위한 체계, 부와 소비를 동일시하는 체계를 살찌우기 위해 (물, 공기, 도시환경 등의) 물리적 자원을 파괴하고 신경 에너지를 과잉착취해왔다고 쓰고 있다. 1977년에 폭발한 펑크 운동은 이런 미래의 소진, 노동·생존·정동의 불안정화를 예감한 운동이었고 1999년의 시애틀 시위에서 2001년의 제노바 시위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반지구화 운동, 서구와 아랍 세계에서 일어난 최근의 점거 운동 역시 미래라는 관념을 문제 삼으면서, 불안정한 노동과 인지노동에 대한 자율적 의식을 창조해왔다고 말한다.
산업화 시대에 자본주의는 임금 생활자의 신체에서 뽑아낼 수 있는 물리적 에너지를 찾아왔다. 그래서 정신 병리를 도시의 주변부에 격리시켜 놓을 수 있었다. 이와 달리 기호자본주의에게는 본질적으로 정신노동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오늘날 사회 기계의 핵심부에서 정신병리가 폭발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이처럼 확산일로에 있는 정신 병리는 금융경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변덕스런 감정 기복, 공황, 우울증 등은 더 이상 정신분석의 어휘에서 가져온 은유가 아니다. 이 단어들은 경제 행위와 정신적 병리현상이 갈수록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이다. 따라서 이제 경제의 순환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신적 피로, 점점 더 널리 퍼져가는 절망을 이해한다는 것을 뜻하게 됐다.
더 나아가 베라르디는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 기호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정보노동의 정신병리>에서 삶은 파편화되고 노동과정은 의미 없는 산발적 행동의 재조합으로 되어버리는 기호자본주의 시대에 대해 집중적 탐구를 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 불안정성에 시달리는 인지 세대, 곧 알파벳[문자] 환경 이후의 전자·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한 최초의 세대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경제와 정서의 영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일으킨 변이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정보의 가속화가 인간의 감정에 끼치는 영향과 가상적 소통이 신체적 지각에 끼치는 영향, 더 아나가 인간들 사이의 교류가 점점 더 전자기기를 매개체로 삼아 이뤄질 때 무의식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변화에 대해 아직 아는 것은 별로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수신기의 세계, 즉 연약하고 감각을 느끼며 살로 된 기관들로 만들어진 인간의 유기적 세계가 송신기의 전자적 세계와 접속되면서 정신 병리적 효과가 양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송신기의 세계는 끊임없이 가속화되어가고 있으며 수신기의 세계는 필사적으로 그 속도를 따라 잡으려 하고 있다. 자신의 인지반응을 가속화하고 표준화하면서 말이다. 인간의 정신은 기계의 진화 리듬과는 완전히 다른 리듬으로 진화하면서 그 와중에 공황, 지나친 흥분, 과잉운동성, 주의력 결핍 장애, 난독증, 정보 과부하, 그리고 신경 회로의 포화 등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베라르디는 이들에게 ‘코그니타리아트’(인지적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한국의 여성혐오와 일베 현상도 불안과 탈진을 견뎌내고 있는 청년들의 문제적 삶이 인터넷 미디어의 만나면서 어떤 현상으로 전개될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것은 아주 심각한 병리적 현상이며 마음의 문제에까지 가버린 현실이라는 점이다. 사회과학자들은 그들과 만나는 법을 알아낼 수 있을까? 그간의 국가적 난민이 된 이들과 함께 살면서 트라우마 상황을 연구해온 정신과의사 정혜신씨는 흥미로운 조언을 한다. <당신이 옳다>는 책에서 타인을 돕고 싶다면 끝까지 “당신이 옳다”고 공감해주라고 말한다. 여전히 타인을 사랑하고 공감과 지지로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사키 아타루는 <이 치열한 무력을> (2013)에서 이렇게 말한다.“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역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만 관여하라고 권한다. 세상 모든 문제를 풀려는 엘리트로서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를 하나만 제대로 풀어갈 수 있었다면 지금 세상은 사뭇 달라져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모두 현상을 징후로 읽어야 하는 시대이다. 그런 면에서 내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해졌다. 희망제작소가 십 주년 특별 기획으로 마련한 “시대정신을 묻는다”라는 주제의 집중인터뷰에서 나온 핵심 개념은 ‘ 즐거운 놀이터와 안전한 피난처다’였다.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놀이터와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처소. 그 둘은 사실 건강한 모든 생명체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일본에서 한창 사랑을 받는 단어 중 하나인 ‘이바쇼’가 이런 시대적 욕구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처소’ 내가 있어야 할 곳, 내가 나로 느낄 수 있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 내게 맞는 속도로 가는 시간, 느슨하나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가면서 내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장소, 그래서 내가 나비가 될 고치를 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장소, 당신이 당신으로 살아가는 시공간 말이다.
지금 시점에서 국가주의적인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하다. 삶의 바닥을 보고 있는 ‘난민적인 시민들’이 자신의 자리를 자각할 수 있는 자리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이바쇼’를 찾은 난민적 시민들이 불안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리를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관점과 태도로 관계를 맺고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 ‘신’의 자리에 오른 근대적 국민들이 각자도생의 길을 오롯이 가게 될 때, 그 과정에서 강요되지 않은 상호부조의 관계를 맺어가고 ‘내가 누구인지, 그 동안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를 묻기 시작할 때 새로운 문명의 싹이 트게 된다.
이 시점에 국가의 변신이 시급하다. 제임스 c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서 국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국가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지만, 그 목적한 바를 현실에서 이루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에 엄청난 해악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국가가 보다 수월하게 통치하기 위해 이용해왔던 도구들을 보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국민, 시민, 사람의 일상을 보지 않고 관리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초기 도로를 깔고 거대한 토건 사업을 하고 국민들을 대량 생산인구로 만들 때는 필요했던 제도이지만 후기 근대로 들어서면 바로 그 거대한 관료제가 국가의 붕괴를 재촉한다. 후기 근대, 2차 근대 위험사회의 국가는 이제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특히 그간 돌봄과 소통과 상생의 영역과 공적 영역을 넘나들면서 성숙해가는 여성국민의 삶을 닮아야 한다. 돌봄과 소통의 능력이 퇴화되지 않는 여성 국민들을 파트너로 삼는 것이 그 국가가 붕괴하지 않을 길이다.
올해 혜화역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집회에 7만 혹은 8만이 삽시간에 모였다. 이들은 자신이 당한 폭력과 그것을 당했을 때의 느낌에 대해 발언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고 또다른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나와야 했다., 이미 각자도생하는 후기 근대적 상황에서 한 가지 이슈로 이 정도의 숫자가 모이는 건 전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일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개인으로 자신의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을 두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성시민들이 디스토피아가 된 시대를 구하는 새로운 역사의 주체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운동은 ‘개인'으로 시작되었고 '개인'에게 그만큼의 권리와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낯선‘ 개인들을 두고 과격성 운운하기 전에 정혜신씨의 권고처럼 “당신이 옳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류 미디어에서는 이 여성들의 ’일베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단 일베가 ’나쁜 놈‘이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일베화만 막으면 된다는 것인가? 그런 논리가 현 시점의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되는 논리일까? 전철을 타면 큰 소리로 여자에 대한 욕을 중얼거리는 앳딘 남자들을 종종 보게 된다. 못나지 않은 외모이지만 표정은 아프고 무력해 보이는, 삶이 힘들어도 하나씩 생각하면 풀린다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친구가 없어 보이는 소년들이다. 아주머니들이 야단을 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 마무리를 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연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바바리 맨이 나타나면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가위 가져오라‘고 소리치며 그들을 쫒아내곤 했듯이 이들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은 아직 아주머니들 뿐이다. 이들을 적대시 하고 광화문에 모인 여성들을 그들과 한 통속으로 묶어버림으로 주류 미디어가 얻어내는 것은 무엇일까? 기존질서 유지, 기득권 체제의 유지이다, 그러나 지금은 개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베는 나쁜 놈 이전에 어떤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존재이다. 정혜신의 말대로 일베에게도 ’당신이 옳다‘고 말할 수 있어야 치유가 가능한 시대이다. 거대한 쇠우리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 모두를 어른 아이, 남녀 노소 할 것없이 외톨이 사냥꾼으로, 청각이 고장난 존재로 만들어내고 있다. 모든 것은 징후적인 것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그 징후를 온전히 읽어낼 안경이다. 성급한 해법은 위험을 증가시킬 뿐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를 앓고 있는 국민과 시민들은 이제 일차 근대문명을 일으켰고 해체 과정에 있는 ‘국가’와 ‘가족’이라는 거대한 체제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들이 굴레에서 벗어나 온전히 개인으로 설 때 새로움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길을 기획하고 운명을 책임지는 '개인'으로 태어날 때 그는 다시 자율적으로 일하고 노동하고 활동하는 존재가 되고 온전한 정치적 '시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시민'이 공무원이 되고 활동가가 되고 예술가가 되고 연구원이 되어 세상 곳곳으로 나갔을 때 우리는 다시 호혜의 감각이 살아 있는 ’ 사회‘를 이야기 할 수 있고 시민 연대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들/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개인, 즉 '시민'이 서로를 보호하고 쉴 수 있는 이바쇼이다. 호혜의 감각을 되살릴 수 있는 안전한 공적 공간, 공유재가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에게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일차적 의무는 호혜적 삶을 가능케할 영역을 넓혀가는 일이고 이는 두 가지 과제를 수반한다. 하나는 기본소득제도의 실현이고 다른 하나는 공적 공간을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기본소득제도와 안전한 공유공간 확보를 통해 자율적 시민이 적극적으로 각자가 안전하게 느끼는 ‘이바쇼’를 만들어가기 시작할 때 디스토피아를넘어선 시대의 상상이 가능해질 것이다. 머리 만이 아니라 가슴과 몸으로 새로 태어난 자율적 시민들이 돌봄, 소통, 상생적 삶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 이것이 후기 근대 국가, 특히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급격하게 망가지고 있는 불량국가, 변태국가, 그리고 치매 국가가 해야 할 시급한 일이다. 최소한의 안정이 보장되는 실험적 삶이 가능해지면 시민들은 서서히 진상국민, 수동적인 수혜자 좀비의 상태에서 벗어나 서로를 챙기면서 생기 공동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공공 (自助共助公助)의 세계, 스스로 돕고 서로를 돕다가 새로운 공공을 만들어내는 인류 태초의 공동체적 삶을 기억해내면서 말이다. 그 개벽의 시간에 즐거이 동참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