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분의 편지- 사회적 영성에 대하여
오늘 아침을 열어준 편지 하나.
오래전부터 기다리던 편지다.
조한혜정 선생님, 안녕하세요?
유난히 길었던 여름 장마가 끝난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파란 하늘을 반가워하며 집 앞 탄천길을 따라 전철역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내린 폭우에 씻긴 하천은 잠시 뿐이겠지만 맑고 깨끗했습니다. 작은 다리 아래를 지나는데, 뜻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아이가 개울 속을 한가로이 거닐며 놀고 있는 것이었어요. 너무 아름다워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풍경이었습니다. 몇 년 동안 그 길로 출퇴근하면서 개울가에서 노는 아이는 가끔 봤어도 개울 속으로 들어가 노는 아이는 처음 보았거든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바라보는데, 문득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è Bella)〉가 생각났습니다.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아빠 귀도는 아들 조슈에를 살리기 위해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를 흥미진진한 게임 공간으로 변화시킵니다. 조슈에는 1000점을 따면 탱크를 상으로 받는다는 아빠의 말을 믿으며 하루하루를 신나게 살아갑니다. 생존이 아니라 삶을요. 전쟁 막바지에 귀도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 게임을 하며 자기 목숨을 버리고, 조슈에는 진주한 미군 탱크를 타고 게임에서 이겼다며 환호합니다.
비극이면서 희극인 이 영화의 제목 ‘인생은 아름다워’는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에게 살해당한 트로츠키의 유언장에서 따온 거라고 하죠. 멀고 낯선 망명지 멕시코에서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며 썼을 트로츠키의 유언은 혁명가 특유의 비장하고 결연한 어조로 전개되다가, 뭔가를 각성한 듯, 갑자기 소박하고 온화한 정서로 바뀌며 끝을 맺습니다.
"안뜰에 있던 나타샤가 창가로 다가와서, 공기가 내 방에 더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는 마당의 벽을 따라 자라고 있는 선명한 초록빛 풀들과 그 벽 위의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사방에 가득한 햇빛을 볼 수 있었다. 인생은 아름답다. 우리 뒤에 올 세대들이 인생에서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을 씻어 내어 인생을 한껏 즐길 수 있게 하자."
소설가 현기영은 트로츠키의 이 말을 인용한 다음, 마치 오랜 친구에게 답장하듯 글을 씁니다.
"그 말이 맞다. 글 쓰는 자는 어떠한 비극,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독자에게 확신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각성이 생겼다. [...] 그래서 나는 그동안 등한히 하거나 무시했던 나무와 꽃에게, 달과 강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서정시에 대해서도 사과한다. 그리고 싸우는 동안 증오의 정서가 필요했고, 증오가 가득한 가슴으로는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속이 느끼했는데, 이제 나는 그 사랑이란 두 글자에 대해서도, 그것을 노래한 사랑의 시에 대해서도 머리를 조아려 사과를 한다." _현기영,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중에서
평생 제주 4.3의 역사적 고통과 트라우마를 용기 있게 직면하며 증언해온 작가의 고백과 사과에 가슴이 아릿합니다. 홀로코스트와 암살과 민간인 학살의 악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한 인생의 아름다움을 코로나19 팬데믹이라고 파괴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재난의 시대에 선생님과 제가 함께 찾아보려는 ‘사회적 영성’의 다른 이름은 ‘아름다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움은 우연일 때, 예상하지 못했을 때, 의도하지 않았을 때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선생님과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 선생님께서 보내 주신 한 이메일 제목은 〈하라리 종교〉였지요. 그런데 이메일에서 링크하신 영상은 종교에 대한 유발 하라리의 강연이 아니라 대구에서 코로나19를 온몸으로 막았던 의료인들의 증언을 담은 〈K-방역이 필패할 수밖에 없는 한국 의료계의 진짜 현실〉이었습니다. 링크를 잘못 보내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처음엔 무슨 의도로 보내신 걸까 궁금해 더 마음챙겨 영상을 보았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영상 속 의료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꼈던 것도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간호사 김수련, 유연화, 최호정, 의사 김동은, 방역 공무원 안병선, 이 다섯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보며 기억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존경의 작은 표시일 것 같습니다. 그들이 존경스러운 것은 ‘K-Pop’의 보건의료 버전처럼 부각된 ‘K-방역’을 성공시킨 영웅들이어서가 아니라, 열악한 조건과 환경에서 두려움을 마주하면서도 고통받는 이들의 곁을 지킨 우리의 동료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바라보는데, 문득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è Bella)〉가 생각났습니다.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아빠 귀도는 아들 조슈에를 살리기 위해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를 흥미진진한 게임 공간으로 변화시킵니다. 조슈에는 1000점을 따면 탱크를 상으로 받는다는 아빠의 말을 믿으며 하루하루를 신나게 살아갑니다. 생존이 아니라 삶을요. 전쟁 막바지에 귀도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 게임을 하며 자기 목숨을 버리고, 조슈에는 진주한 미군 탱크를 타고 게임에서 이겼다며 환호합니다.
비극이면서 희극인 이 영화의 제목 ‘인생은 아름다워’는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에게 살해당한 트로츠키의 유언장에서 따온 거라고 하죠. 멀고 낯선 망명지 멕시코에서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며 썼을 트로츠키의 유언은 혁명가 특유의 비장하고 결연한 어조로 전개되다가, 뭔가를 각성한 듯, 갑자기 소박하고 온화한 정서로 바뀌며 끝을 맺습니다.
"안뜰에 있던 나타샤가 창가로 다가와서, 공기가 내 방에 더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는 마당의 벽을 따라 자라고 있는 선명한 초록빛 풀들과 그 벽 위의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사방에 가득한 햇빛을 볼 수 있었다. 인생은 아름답다. 우리 뒤에 올 세대들이 인생에서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을 씻어 내어 인생을 한껏 즐길 수 있게 하자."
소설가 현기영은 트로츠키의 이 말을 인용한 다음, 마치 오랜 친구에게 답장하듯 글을 씁니다.
"그 말이 맞다. 글 쓰는 자는 어떠한 비극,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독자에게 확신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각성이 생겼다. [...] 그래서 나는 그동안 등한히 하거나 무시했던 나무와 꽃에게, 달과 강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서정시에 대해서도 사과한다. 그리고 싸우는 동안 증오의 정서가 필요했고, 증오가 가득한 가슴으로는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속이 느끼했는데, 이제 나는 그 사랑이란 두 글자에 대해서도, 그것을 노래한 사랑의 시에 대해서도 머리를 조아려 사과를 한다." _현기영,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중에서
평생 제주 4.3의 역사적 고통과 트라우마를 용기 있게 직면하며 증언해온 작가의 고백과 사과에 가슴이 아릿합니다. 홀로코스트와 암살과 민간인 학살의 악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한 인생의 아름다움을 코로나19 팬데믹이라고 파괴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재난의 시대에 선생님과 제가 함께 찾아보려는 ‘사회적 영성’의 다른 이름은 ‘아름다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움은 우연일 때, 예상하지 못했을 때, 의도하지 않았을 때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선생님과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 선생님께서 보내 주신 한 이메일 제목은 〈하라리 종교〉였지요. 그런데 이메일에서 링크하신 영상은 종교에 대한 유발 하라리의 강연이 아니라 대구에서 코로나19를 온몸으로 막았던 의료인들의 증언을 담은 〈K-방역이 필패할 수밖에 없는 한국 의료계의 진짜 현실〉이었습니다. 링크를 잘못 보내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처음엔 무슨 의도로 보내신 걸까 궁금해 더 마음챙겨 영상을 보았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영상 속 의료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꼈던 것도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간호사 김수련, 유연화, 최호정, 의사 김동은, 방역 공무원 안병선, 이 다섯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보며 기억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존경의 작은 표시일 것 같습니다. 그들이 존경스러운 것은 ‘K-Pop’의 보건의료 버전처럼 부각된 ‘K-방역’을 성공시킨 영웅들이어서가 아니라, 열악한 조건과 환경에서 두려움을 마주하면서도 고통받는 이들의 곁을 지킨 우리의 동료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큰 병원 중환자실 출신으로 대구로 자원 파견 근무를 나간 간호사 김수련 씨는 자기보다 “더 정신이 강한” 간호사 친구와 함께 코로나19 감염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반병동 출신 간호사인 그 친구가 중환자실에서 사용하는 체외심폐순환기를 직접 다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김수련 씨는 최선을 다해 15분 동안 친구에게 작동법을 알려 주었고, 친구는 그 의료기기를 체크하며 밤새 환자를 지켜봤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밤샘 근무를 마치고 나온 친구가 김수련 씨에게 한 말은 “너무 무서웠다.”였습니다. 김수련 씨는 그 말을 들었을 때가 대구에서 한 달 동안 근무하면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대구 코로나19 방역과 치료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마치 “모래 위의 성 같았다.”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인구 1천 명당 의사 수는 OECD 국가 중 가장 적고, 간호사 자격자의 절반이 불평등 처우와 고된 근무환경을 견디지 못해 병원을 떠나 있고, 공공병원 비율이 11퍼센트 밖에 안 되는 보건의료 환경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많은 의료인, 방역 공무원, 돌봄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의 수고로 재난의 불꽃이 파국의 불길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정부의 투명한 정보 공개와 정책 덕분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의료인과 시민의 자발적 협력과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한국인은 “국난 극복이 취미인 국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나서서 파국을 막아 왔습니다. 한편으로는, 고맙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위기 때마다 국가의 공공 보건의료체제가 아니라 시민의 헌신과 희생에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그리고 지속가능한지 의문입니다.
"사실 거의 우리가 몸으로 막았어요. 최일선에 있는 사람들이. 근데 우리 보고 이거 다시 하라고 하면, 진짜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분명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이런 감염병 사태가 아니더라도 관심을 더 많이 가져 주시고, 같이 싸워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한 간호사 유연화 씨는 최선을 다했고, 그와 같은 의료인들은 팬데믹의 2차, 3차 파도가 밀려오면 다시 무거운 방호복을 입고 두려움 속으로 뛰어들겠지요. 그들이 지난봄 때보다는 덜 무섭고 덜 힘들게 일할 수 있도록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있어야 할 텐데, 그래서 더 불안하고 걱정스럽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귀도의 아내이며 조슈에의 엄마인 도라는 유태인이 아니어서 나치에게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행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 기차역에서 나치 장교에게 말합니다. “내 남편과 아들이 저 열차에 타고 있어요. 나도 저 열차에 타겠어요. [...] 내 말 들었어요? 나도 저 열차에 타겠다고요!” 검은 연기를 뿜으며 출발하다 급히 멈춘 열차를 향해 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도라의 모습은 아프면서 아름다웠습니다. 대구에서 코로나19와 싸운 의료인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도, 아픔의 현장에 있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 자원하여 대구행 열차에 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재난 속에서 사회적 연대를 실천한 그들에게서 제가 본 것은 종교적 영성이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무서움을 견디며 이웃을 돌본 그들의 사회적 실천은 이기적 자아를 초월해 신과 이웃과 연합하는 종교적 수행과 다를 게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제 눈에는 신천지 집단이나 전광훈 집단처럼 신앙과 이념의 이름으로 이웃을 해치는 종교인들보다, 재난에도 예배를 지속하고 제도와 조직을 유지하는 데만 몰두하는 종교인들보다, 고통을 겪는 이웃의 곁을 지키며 돌보는 비종교인들이 훨씬 더 종교적으로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종교 없이도 자비롭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미안한 시절입니다. 재난은 인간의 최악과 최선을 모두 드러내는데,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은 종교의 최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봄 신천지 사태와 이번 여름 전광훈 사태는 한국교회의 두 극단인 도피주의와 정복주의의 폐해를 징후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신천지 집단은 신도 수가 14만 4천 명이 되면 모두 영생을 누리며 왕 노릇하는 종말이 온다고 믿기에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을 열망합니다. 전광훈 집단은 한국사회를 정복하여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려고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책임 윤리가 없고, 세상을 정복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웃 사랑이 없습니다.
그런데, 도피주의와 정복주의는 신천지나 전광훈 같은 일부 극단적 그리스도교 집단만의 병적 상태일까요? 부끄럽게도, 표현의 정도와 방식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도피주의와 정복주의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세상 속에서 약자를 사랑하고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시작한 사랑의 종교라면,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원수사랑은커녕 이웃을 원수로 삼아 혐오하는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닐 겁니다.
재난 속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다, 그 자체로 재난이며 바이러스인 종교의 어둠을 이야기하니 우울해지네요. 선생님과 저의 정신건강을 위해 종교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위로와 희망을 주는 건, 재난의 시대에 인간의 최선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에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교회 밖에 구원 없다(No Salvation Outside the Church)”고 주장해 왔지만, 이제는 “세상 밖에 구원 없다(No Salvation Outside the World)”는 에드워드 스킬레벡스의 통찰처럼, 세상을 구원의 장소로 재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 속에서 구원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기형도 시인이 만난 동네 목사처럼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긋는 이들입니다. 세상 밖으로 도피하지도, 세상을 정복하지도 않고, 세상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연대하는 생활, 그것이 사회적 영성의 출발점이며 목적지가 아닐까요?
대구 코로나19 방역과 치료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마치 “모래 위의 성 같았다.”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인구 1천 명당 의사 수는 OECD 국가 중 가장 적고, 간호사 자격자의 절반이 불평등 처우와 고된 근무환경을 견디지 못해 병원을 떠나 있고, 공공병원 비율이 11퍼센트 밖에 안 되는 보건의료 환경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많은 의료인, 방역 공무원, 돌봄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의 수고로 재난의 불꽃이 파국의 불길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정부의 투명한 정보 공개와 정책 덕분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의료인과 시민의 자발적 협력과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한국인은 “국난 극복이 취미인 국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나서서 파국을 막아 왔습니다. 한편으로는, 고맙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위기 때마다 국가의 공공 보건의료체제가 아니라 시민의 헌신과 희생에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그리고 지속가능한지 의문입니다.
"사실 거의 우리가 몸으로 막았어요. 최일선에 있는 사람들이. 근데 우리 보고 이거 다시 하라고 하면, 진짜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분명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이런 감염병 사태가 아니더라도 관심을 더 많이 가져 주시고, 같이 싸워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한 간호사 유연화 씨는 최선을 다했고, 그와 같은 의료인들은 팬데믹의 2차, 3차 파도가 밀려오면 다시 무거운 방호복을 입고 두려움 속으로 뛰어들겠지요. 그들이 지난봄 때보다는 덜 무섭고 덜 힘들게 일할 수 있도록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있어야 할 텐데, 그래서 더 불안하고 걱정스럽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귀도의 아내이며 조슈에의 엄마인 도라는 유태인이 아니어서 나치에게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행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 기차역에서 나치 장교에게 말합니다. “내 남편과 아들이 저 열차에 타고 있어요. 나도 저 열차에 타겠어요. [...] 내 말 들었어요? 나도 저 열차에 타겠다고요!” 검은 연기를 뿜으며 출발하다 급히 멈춘 열차를 향해 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도라의 모습은 아프면서 아름다웠습니다. 대구에서 코로나19와 싸운 의료인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도, 아픔의 현장에 있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 자원하여 대구행 열차에 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재난 속에서 사회적 연대를 실천한 그들에게서 제가 본 것은 종교적 영성이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무서움을 견디며 이웃을 돌본 그들의 사회적 실천은 이기적 자아를 초월해 신과 이웃과 연합하는 종교적 수행과 다를 게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제 눈에는 신천지 집단이나 전광훈 집단처럼 신앙과 이념의 이름으로 이웃을 해치는 종교인들보다, 재난에도 예배를 지속하고 제도와 조직을 유지하는 데만 몰두하는 종교인들보다, 고통을 겪는 이웃의 곁을 지키며 돌보는 비종교인들이 훨씬 더 종교적으로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종교 없이도 자비롭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미안한 시절입니다. 재난은 인간의 최악과 최선을 모두 드러내는데,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은 종교의 최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봄 신천지 사태와 이번 여름 전광훈 사태는 한국교회의 두 극단인 도피주의와 정복주의의 폐해를 징후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신천지 집단은 신도 수가 14만 4천 명이 되면 모두 영생을 누리며 왕 노릇하는 종말이 온다고 믿기에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을 열망합니다. 전광훈 집단은 한국사회를 정복하여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려고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책임 윤리가 없고, 세상을 정복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웃 사랑이 없습니다.
그런데, 도피주의와 정복주의는 신천지나 전광훈 같은 일부 극단적 그리스도교 집단만의 병적 상태일까요? 부끄럽게도, 표현의 정도와 방식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도피주의와 정복주의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세상 속에서 약자를 사랑하고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시작한 사랑의 종교라면,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원수사랑은커녕 이웃을 원수로 삼아 혐오하는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닐 겁니다.
재난 속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다, 그 자체로 재난이며 바이러스인 종교의 어둠을 이야기하니 우울해지네요. 선생님과 저의 정신건강을 위해 종교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위로와 희망을 주는 건, 재난의 시대에 인간의 최선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에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교회 밖에 구원 없다(No Salvation Outside the Church)”고 주장해 왔지만, 이제는 “세상 밖에 구원 없다(No Salvation Outside the World)”는 에드워드 스킬레벡스의 통찰처럼, 세상을 구원의 장소로 재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 속에서 구원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기형도 시인이 만난 동네 목사처럼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긋는 이들입니다. 세상 밖으로 도피하지도, 세상을 정복하지도 않고, 세상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연대하는 생활, 그것이 사회적 영성의 출발점이며 목적지가 아닐까요?
탄천에서 그 아이의 발을 기분 좋게 간질여 주었던 맑은 물은 어디에 있을까요? 심심한 한강을 지나, 탁한 서해를 지나, 아픈 맹골수도를 지나, 지금쯤 푸르른 제주 바다에 이르렀을까요? 가을바람 선선한 날, 손자와 제주 해변을 걸으실 때, 여기 탄천에서 한 아이와 저를 기쁘게 했던 물방울들이 잔잔한 파도 속에 반짝이는 것을 보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2020년 8월 31일 홀가분
2020년 8월 31일 홀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