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가
경향신문 컬럼은 약속대로 일년. 앞으로 컬럼 글은 안 쓸 것 같다. 활의 말을 많이 빌렸다. 어쨌든 말은 나/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말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조한혜정의 마을에서]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가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브런치’라는 사이트에 종종 들른다. 서로의 글을 읽으며 서로를 작가로 살리는 곳이다. 이번주엔 “버거운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저렴한 것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정신과 의사 이두형씨가 쓴 글인데 청양고추 한 봉지가 얼마나 큰 행복을 줄 수 있는지를 쓰고 있다. 딱 적당한 냄비에 대파와 냉동 만두를 깔고 따로 끓인 물을 넣고 면을 넣고 청양고추 씨를 가위로 발라내고 잘라 막판에 살짝 넣어서 완벽하게 끓인 면을 뚜껑에 덜어 한입 한입 먹다가 숭늉까지 만들어 마시는 과정을 소상하게 들려주는 글이다. 실은 라면을 자신의 미각과 지식과 재능을 총동원해서 정성껏 끓이고 맛있게 먹는 과정을 세밀화 그리듯 그린 글인데 예술가의 작은 공연이나 진지한 요리사의 수행을 보는 듯 위로가 되었다. 작가는 주거비, 자녀 양육, 커리어, 노후 준비 등 인생의 ‘큰 것들’로 숨 막히지만 이런 작은 행복이 주는 기쁨으로 잘 버텨내자고 말한다.
마을에서 일상의 구체적이고 소소한 삶을 일구며 새 시대를 열어가는 글을 쓰려고 칼럼 연재를 시작했다. 그런데 코로나19 역병이 돌면서 내내 나라 걱정하는 글만 썼다. 역병으로 숨 막히는 일들이 이어지고 벼랑 끝에 서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우리가 알던 ‘역사의 시간’은 끝나가고 있다. ‘합리의 시대’를 관장하던 전능하신 신은 죽었고 천사도 날개가 부러져 들것에 실려 갔다. 만민 평등한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던 공화국의 꿈은 깨지고 코로나19 백신을 두고 나라 간 경쟁이 일고 있다. 역병은 국경을 넘나들 텐데 지구주민 모두가 예방주사를 맞을 수 있게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2차 대전 직후 바로 이런 일을 위해 탄생한 세계보건기구(WHO)는 왜 제대로 역할을 못했을까?
기원전 8세기에서 3세기에 걸친 혼란기에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힌두교와 이스라엘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합리주의가 한꺼번에 터져 나와 근대 문명의 기초를 이뤘다. 고통과 불안, 폭력과 두려움과 삶의 공허에 직면하면서 인류는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삶의 비참을 나누는 공감과 자비의 시대를 열어갔던 것이다. 카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축의 시대’라 불렀다. 지금 우리는 그때와 비슷하게 팬데믹으로 인한, 그리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할 것이라는 비정상적 시간을 마주하고 있다. 계획하면 할수록 망가지는 시간이라 섣불리 남을 도울 수도 없다. 오로지 우주의 기운과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만날 때 하늘이 그를 도울 것이라 믿고 갈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소소한 삶 다루려 칼럼 연재 출발
코로나로 ‘나라 걱정’ 글만 써와
지금 고요의 시간 되찾아야 할 때
자각하는 존재 프랙털 무늬로
반복 번질 때 세상 기운 바뀐다
우울 모드로 들어간 내게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작업을 해온 ‘삶 디자이너’ 박활민은 세 가지 처방을 내려주었다. 죄의식, 곧 선민의식을 내려놓을 것, 나라를 사랑하되 너무 사랑하지 말 것, 자신을 살리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낼 것. 그는 자신이 개설한 <혼자의 학교> 24강을 마무리하면서 전자칠판에 이렇게 썼다. “당신은 스스로 어떤 틀을 만들어놓고 스스로를 가두고 타인을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요? 당신이 하는 행위가 자신을 살린다고 하면서 자신을 죽이고 있지는 않은가요? 지금 이 시대는 자신을 죽이는 대가로 보상을 받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입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이 언제 행복한가가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살아나는가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살아나는 감각을 자각하는 것이다. 살아나는 감각을 자각하는 행위만으로 존재가 살아나기 시작하는데 그 행위는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인간이 원래 해오던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일류대에 입학하면 살아날 것 같고 명품 아파트나 브랜드 옷을 사면 살아날 것 같았던 때가 있었을 게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님을 알아차린 이들이 늘고 있다. ‘큰 것’을 향해 달리느라 죽어가는 자신을 살리려는 시도를 곳곳에서 만난다. 이두형 작가가 정성을 다해 라면을 끓인 시간도 실은 자신을 살아나게 하는 수행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고요의 시간을 되찾아야 할 때다. 바쁜 와중에 짬을 내 동네 숲에 들어가 고요의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 인터넷을 끄고 몰려드는 정보 자극을 차단하는 저녁을 맞는 것만으로도, 새벽에 일어나 눈을 감고 의식을 가라앉히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수행만으로도 생명의 에너지는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다. ‘살아남’을 자각하는 존재가 프랙털의 무늬처럼 반복적으로 나타날 때 세상의 기운이 바뀌고 새로운 축의 시대가 열린다. 그간 모든 것을 아웃소싱하면서 살아온 나 자신을 위해 수행을 시작하려 한다. 2021년, 우리 모두가 고요의 시간을 되찾는 한 해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