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의 글방- 제목의 중요성
[어딘의연연 - 새해호⑦] 미래소녀 옌도빈 |
아홉 살 조카 옌과 시작한 글방에 이런저런 인연으로 친구들이 붙었다. 도와 빈. 오늘부로 열 살이 되는 여자 어린 이들이다. 줌으로 수업을 하는데도 얼굴이 어찌나 반짝반짝 빛이 나는지 신기하고 경이롭다. 옌이 한 달 정도 먼저 시작했다는 이유로 나는 종종 옌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부탁한다.
옌, 제목은 어떻게 짓는 것이 좋을까요?
순간 긴장을 하지만 옌은 나에게 들었던 말을 정확하게 기억해 침을 꼴깍꼴깍 삼켜가며 말을 한다.
제목은 글의 얼굴이예요. 우리가 처음 사람을 만날 때 얼굴을 보잖아요. 제목은 내 글의 얼굴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딘이 ‘설날’에 대해 써오라고 했을 때, 제목을 ‘설날’이라고 붙이면 우리 모두 다 같은 얼굴이 되는 거예요.
도와 빈이 헐, 하며 웃는다. 살짝 긴장이 풀어지는지 옌의 말도 어깨도 부드러워진다.
그냥 설날이라고 쓰지 말고 잘 생각해서 아, 이 글 읽어보고 싶다, 라는 제목을 붙이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때 어, 오싹오싹 귀신체험, 이런 거는 자꾸 보고 싶잖아요. 어, 그리고 어떤 작가가 이순신 이야기를 썼는데 제목을 ‘광화문 그 사내’ 라고 지었는데 여러 사람들과 의논해서 ‘칼의 노래’로 바꾸었대요. 그래서 그 책이 아주 많이 팔렸대요.
맙소사, 저거까지 기억하다니. 지나가는 이야기로 김훈의 <칼의 노래> 이야길 잠깐 해주었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입력되어 버린다. 정성껏 공들여 필요한 이야기를 정갈하게 해야 한다 이 미래소녀들에겐. 야무지게 설명을 마치고 힘들었는지 후, 한숨을 쉰다.
할머니에 대해서 써오라고 글감을 내주었을 때 옌이 붙여온 제목이 뭐였지요?
응? 아, ‘할머니를 보고 싶으면 숲으로 가세요’ 였죠.
왜 그렇게 제목을 붙였어요?
우리 할머니는 수목원에 있는 카페에서 일하거든요. 수목원에 가면 우리 할머니를 볼 수 있어서요.
아, 그렇구나. 아주 재미있는 제목이었어요. 음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썼을 때는 제목이 뭐였어요?
‘나는야 감자고양이’, 요 헤헤.
왜 그 제목이 나왔죠?
왜냐면요 저는요 감자랑 우유를 너어무 좋아하는데요 우유는 고양이도 좋아하잖아요. 그래서요.
어쩐지 읽고 싶어지는 제목이었어요. 도와 빈도 제목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 조금 알겠어요?
네에.
명징한 대답이 울린다 온라인의 세계에.
제목은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거라고 나는 설명을 덧붙인다. 무심코 지나가다가 어 이게 뭐지, 들여다보게 되는 혹은 지나갔다가도 다시 되돌아와 책을 들어 후루룩 넘겨보게 되는 제목, 을 붙여보라고 이야기한다. 어떤 글은 제목이 먼저 생각이 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글은 다 쓰고 나서 고심에 고심을 해 붙이는 경우도 있다. 제목은 종종 홀연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아침에 눈을 떴을 때나 산책을 할 때 불현 듯 생각난다, 라고 쓰지만 사실 글이란 본격적으로 책상에 앉아 쓰기 2-3일 전부터 몸과 마음을 오직 그것에 점령당한 상태라 불현 듯 이라기보다는 장고 끝에 떠오르는 한 송이 허공꽃이라 할 수 있다. 연연처럼 짧은 글을 쓸 때는 제목이 글의 방향을 결정하는 바 제목을 정하고 나면 오케이, 이제 시작하면 되겠군, 마음이 사뿐해진다.
그런데 얘들아, 사람은 왜 맨 처음 만났을 때 얼굴을 볼까? 발이나 엉덩이를 먼저 보지 않고.
까르륵, 미래소녀들이 웃는다.
사람들이 처음 만나 엉덩이를 먼저 보면 엉덩이에 넥타이도 매고 목걸이도 할까?
까르륵, 미래소녀들이 숨넘어가게 웃는다.
머리띠도 엉덩이에 하고.
선글라스도 엉덩이에 끼고.
화장도 엉덩이에 하고.
깔깔깔깔, 신이 났다.
다른 생명체들도 처음 만났을 때 얼굴을 볼까? 개미나 박쥐 같은 애들도?
개미는 페로몬을 보내요. 그걸로 서로를 알아봐요.
박쥐들은 눈으로 보지 않아요. 초음파로 쏘아서 되돌아오는 음파로 그게 뭔지 알아봐요.
음, 역시 미래소녀들은 똑똑하다.
그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 할까?
어, 목소리요. 목소리를 봐요.
옌이 말하자 도가 반박한다.
목소리를 어떻게 봐?
목소리를 듣겠지.
빈이 정정한다.
대신에 더 잘 들을 수 있을 거 같아. 안 보이니까 잘 들어서 아, 저런 목소리는 나쁜 놈이야, 저런 목소리는 귀엽게 생겼을 거야, 저런 목소리는 할머니야, 이렇게 생각할 거 같아.
와, 그러면 목소리를 본다, 는 이야기도 틀린 말이 아닌 거 같아.
감탄하며 내가 덧붙인다.
근데요 엉덩이에 눈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아요. 뒤에도 잘 볼 수 있고요.
옌이 터지려는 웃음을 물고 말한다.
눈이 얼굴에도 있고 엉덩이에도 있고 그런 사람 있으면 괴물일까? 멋진 사람일까?
신나게 이야기하던 미래소녀들의 얼굴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된다.
만약에 엉덩이에 눈이 있는 아이가 우리 반에 있다면 친구들이 와 근사하다 부러워할까, 이상하다고 놀릴까?
미래소녀들은 금방 대답하지 않는다.
어떤 친구들은요 멋있다고 할 거 같고 어떤 친구들은 징그럽다고 할 수도 있어요.
도가 말한다.
아, 좋은 생각이 났어요.
옌이 눈을 빛내며 말한다.
가리고 있다가 착한 친구한테 먼저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비밀로 하고 둘이 있을 때만 엉덩이눈을 보여주면 되요.
음, 그런데 그렇게 꼭 가려야 할까? 옌도빈은 그런 아이가 있으면 친구가 되고 싶어, 아니면 좀 이상해서 싫어?
저는 친구가 되고 싶어요.
옌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한다. 3초 쯤 생각한 도가 말한다.
저도 친구가 되고 싶어요.
친구를 많이 만들면 되요. 그래서 같이 놀고 편이 되주면 되요.
빈이 말한다.
아 그렇구나. 아주 좋은 생각이네. 자, 얘들아 그럼 오늘 글 읽어볼까? 오늘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뻤던 날에 대해 써오기로 했지. 누구 글부터 볼까?
도는 놀이공원에 갔던 이야기, 빈은 가족과 함께 싱가폴에 갔던 이야기를 써왔다. 어린이 바이킹을 타는 이야기, 맛있는 음식을 먹은 이야기가 맛깔스럽다. 옌의 글을 읽을 차례다.
나에게 찾아온 큰 기쁨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큰 기쁨이예요. 그러지 않았다면 서로 만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겠죠. 추억을 만들 수도 기쁜 일조차 생기지 않았을 거예요. 때로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옛날 사진을 보면 느낄 수 있어요. 기뻤던 일을 생각해도 되죠. 저는 태어날 때부터 잘 웃었어요. 그런데 태어나서 웃을 수 없는 친구들도 많을 거예요. 제가 이렇게 사랑받고 웃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예요.
어라, 지금까지의 글들과는 결이 다르다. 만 여덟 살 어린 작가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어있다니, 조금 낯설고 조금 경이롭다.
자, 옌의 글을 읽고는 어떤 생각이 드는지 이야기해 볼까요.
골똘히 생각하던 도가 먼저 말한다.
음, 좀 이상한 글이긴 하지만 재밌어요.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생각이 들어요.
오마갓, 훌륭한 피드백이다.
신기했어요. 그런데 좋았어요. 다른 점이 많아서 좋았어요.
빈이 말한다. 멋진 피드백이다. 집중해서 듣고 있던 옌의 얼굴에 웃음이 돈다.
아, 나도 재밌게 읽었어요. 그런데 재미있었던 일을 써 오기로 했는데 옌은 왜 어떤 구체적인 그러니까 생일잔치나 친구와 놀았던 일을 써오지 않고 저렇게 썼을까요? 궁금하네요.
옌에게 물어보았다.
어, 그냥요.
아하, 그냥요, 맞다, 그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해요. 다음 주엔 가장 좋아하는 과목, 에 대해서 써오기로 할까요? 그럼 안녕, 여러분 먼저 나가세요.
화면에서 미래소녀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그녀들이 각자의 우주로 떠나버린 텅 빈 공간을 바라보다 어쩐지 옌의 글을 한 편 더 읽고 싶어져 다른 글을 찾아본다.
“야! 그런 별명 부르지 말라고!”
퍽퍼퍽. 오빠가 또 이상한 별명을 불렀다. 그럴 때 나는 정말 속상하다. 오빠가 만든 별명은 구두쇄, 뿡뿡이, 소금쟁이 라는 별명이다. 금요일에 오빠랑 싸우다가 무릅을 창문에 부디쳤다. 정말 아파서 아주 조금 울었다. 엄마는 어쩔땐 오빠한테 야단을 친다. 하지만 그날은 안그러셨다. 오빠는 내 마음을 너무 모른다. 놀아주지도 않으면서 이상한 별명까지 만들어 부르다니. 나는 오빠가 정말 싫다. 오빠는 왜 이상한 별명을 부르는 걸까? 오빠는 엄마께 꾸중을 들어도 계속 별명을 부른다. 설마 오빠가 만든 별명을 오빠 친구들한테 말한건 아니겠지? 오빠가 별명을 안 불렀으면 참 좋겠다. 오빠, 나랑 졀교하기 싫으면 별명은 그만 불러!
속상하거나 억울했던 일을 써오기로 한 날 가져온 글이다.
제목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끝내주는 제목이다.
2021년 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