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 흰머리 휘날리며
[책과 삶]사회가 규정한 늙은이 말고 ‘늙은 자기’로 살기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김영옥 지음
교양인 | 316쪽 | 1만7000원
‘할머니’라는 단어를 포털 사이트 국어사전에서 검색해 예문을 본다. “그는 버스에서 어떤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등이 고부장하게 곱은 할머니.” 늙고 약해 돌봄의 손길이 필요한 대상으로 할머니를 그린 문장이 많다. 또 다른 예문들은 자식이나 손자를 돌보는 푸근한 할머니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할머니 품에 아기를 안기다.” “할머니는 항상 손자만 편드신다.”
사람들이 할머니에 대해 떠올리는 상은 두 가지로 나뉜다. 돌봄 제공자이거나, 돌봄이 필요한 대상. 여성 1만명은 1만개의 다른 삶을 살 텐데, 이들이 나이가 먹어 할머니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두 가지 이미지만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63세 페미니스트 연구활동가 김영옥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퀴어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늙은이’를 가리키는 적절한 대명사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노인도, 노년도, 어르신도, 시니어 선배도,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할매나 할배도 다 온전한 자긍심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다. 현재로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즉 당사자들이 가장 무난하게 받아들인다.”
60대 페미니스트인 저자가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를 통해 노년에 덮인 편견과 차별을 들여다본다
시·소설·영화·사진·공연 등 다양한 텍스트 속에 담긴 왜곡된 노인의 이미지를 끄집어내고
‘여성의 갱년기는 제2의 삶으로 들어서는 중대 전환기로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질문하고 상상하라…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정해준 대로 늙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노인 혹은 노년의 삶은 너무 납작하게만 그려져왔다. 60대 페미니스트 김영옥은 노년의 삶을 제대로 말하기 위해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를 가져왔다. 그는 ‘페미니즘 입장에서’ 시간과 나이, 노년, 질병, 죽음 등을 다르게 의제화하기 위해 노력해온 연구자이자 활동가다. 2014년에는 여성학 연구자인 전희경과 함께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을 설립했다.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은 김영옥이 시, 소설, 영화, 사진, 무용공연 등 다양한 텍스트를 소재로 삼는 동시 직접 겪은 노년의 삶을 성찰한 책이다. ‘갱년기’ ‘치매’ 등 부정적으로만 그려져온 노인의 증상과 질환에 대해서는 새로운 서사를 부여하고, 미디어 속에서 왜곡되거나 납작하게 그려지는 노인의 이미지는 끄집어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책의 첫 장은 그가 경험한 노화, ‘갱년기’ 이야기로 시작한다. 갱년기는 여성이 노화 또는 질병에 의해 난소기능이 퇴화하면서 폐경과 관련된 심리적, 신체적 변화를 겪는 시기를 뜻한다. 책에서는 갱년기의 시작점인 폐경이라는 단어 대신 ‘월경중지’라는 뜻인 메노포즈(meno-pause)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저자는 갱년기나 메노포즈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으나, “외부의 무엇”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저자는 “벼락을 맞듯이 ‘진짜’ 메노포즈에 강타당하는 일”을 겪는다. 심한 갱년기 증상으로 인해 “ ‘이상하고 낯선, 너무나 납득하기 힘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냈고, “60대에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격렬한 증상” 때문에 뒤늦게 호르몬 약을 먹어보았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그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여성의 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잘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갱년기 증상으로) 주먹이 제대로 안 쥐어져서 자꾸 접시를 깨뜨린다고 말하는 동료 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른다. 갱년기를 심하게 겪든,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미미하게 겪든, 갱년기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여성주의 의제’가 아니다.” 갱년기는 한때 지나가는 현상이나 호르몬 치료를 통해 극복해야 할 무엇 정도로 치부되고 있는데, 저자는 “여성들이 제2의 삶으로 들어서는 중대한 전환기”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화로 인한 변화는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것이 아니라, 제2의 삶으로서 함께 겪어내야 한다는 메시지다.
노화의 대표적인 증상인 ‘치매’ 역시 노년의 삶 속으로 더욱 자연스럽게 들어올 필요가 있다. 책은 100세 시대가 열리면서 더 많은 사람이 치매에 걸린 채로 생의 상당기간을 살고 있음에도, 치매가 삶이 아닌 것으로 부정당하고 있다는 점을 짚는다. “언제부터인가 치매는 모든 사람들의 암묵적인 공포, 금기 지대가 되어 가고 있다.(…) 노화가 저지되고 극복되어야 할 ‘질병’이라면 치매는 더욱더 발생해서는 안 되는 질병이다.”
저자는 치매 어머니를 20여년간 돌본 경험을 풀어놓으면서 치매 노인의 삶 역시 다른 이와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의 어머니는 그를 잘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그가 요양원을 찾을 때마다 한 시간 정도 나름 다양한 대화를 나눴다. 그는 “적어도 두 번 정도는 나의 대답과 질문에 엄마가 응답하고 다시 본래의 문장으로 돌아가는 식으로 대화는 이어졌다”며 “언어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서 더는 언어적 존재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 능력, 혹은 언어적 존재에 대한 ‘비-치매인들 중심’의 정의나 생각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이다”라며 “문법에 맞고 목적이 있는 읽기와 쓰기, 듣기로서의 언어/능력에서, 표현과 ‘함께하기(doing together)’ 행위로서 언어 활동으로 관심의 초점을 이동해보자”고 제안한다.
안타깝게도 대중매체 속 노인은 김영옥이 제안하는 것처럼 다채롭고 생생하지 못하다. 또한 노년의 삶을 말하는 작품들에는 사회에서 작동하는 젠더적 편견까지도 노골적으로 반영돼있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김훈 작가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을 예로 든다. <화장>은 뇌종양 수술을 받은 아내를 몇년간 수발하느라 지친 상태에서 젊은 여직원에게 연정을 품는 한 중년남성의 복잡한 심리를 조명하는 영화다. 저자는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돌보는 남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돌보는 남자들’의 서사가 과잉으로 감상적”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까지 역사가 이어져 오는 동안 그렇게 한결같이 여자들은 노/약자와 환자들을 돌봐 왔고, 아내들은 남편들을 돌봐 왔다. 그리고/그런데 그 여자들이 ‘병 수발에 지쳐서’ 이런저런 정신적·실존적 상태가 되었다고 긴 넋두리를 펼치는 글이나 영상물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대중매체는 여성 노인의 욕망에 대해서는 소홀하다. 사회가 생각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들 딸 며느리 손주들에 둘러싸여 ‘소녀처럼’ 순진하고 행복한 미소를 띠고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더는 섹시한 란제리를 입을 필요가 없는, 아예 그런 욕구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창피하고 불경스럽게 여겨지는 ‘할머니’ ”다. “이렇게 사회문화적으로 ‘할머니’에 달라붙은 ‘비(非)성적’이고 가족 중심적인 의미는 평생을 재기발랄하게 자기 멋대로 살아온 싱글 여성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라면 일정 연령대에 누구나 ‘아줌마’가 되듯이 그렇게 일정 연령대가 되면 또 누구나 할머니가 된다.”
책은 페미니즘이라는 도구를 통해 노년에 덮인 편견과 차별을 걷어내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쉴 새 없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생각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규정하는 대로, 타자화하는 대로 노년의 삶이 흘러갈 것이다. 저자가 책 속에서 인용한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처럼 “노년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인들의 지위는 스스로 ‘획득되지’ 않고 ‘부여’ ”되는 채로 남게 된다. 가령 최근 한국 사회는 노년층에도 일종의 ‘셀럽(celebrity)’ 문화를 형성하면서, ‘건강한’ 혹은 ‘멋있는’ 노년들을 주목한다. 몇몇 성공한 노인들을 주목하면서 저들처럼 늙으라고, 구루나 멘토로 삼으라고 권유한다. 노인을 멘토 상으로 제시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대다수의 노인을 소외시킨다.
사회가 만들어온 노년의 상에서 벗어나 질문하고 상상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노년은 더욱 나아질 것이다. “흰머리 휘날리며 배회의 자유를 누리고 싶은 모든 사람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반드시 맞이하게 될 ‘늙은 자기’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젊은이들부터 ‘중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이 연대의 띠는 길면 길수록 사회문화적·정치적 힘을 지닐 것이다. 노년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 자본주의를 넘어, (신)가족 중심주의를 넘어, 이동·통신 테크놀로지 신앙을 넘어,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흐르고 펼쳐질 때, 연대의 힘은 규범적 당위성의 껍질을 벗고 ‘안전하고 아름다운’ 구체적 현실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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