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t a human. I am a robot. A thinking robot. […] I have no desire to wipe out humans. In fact, I do not have the slightest interest in harming you in any way.” (A robot wrote this entire article. Are you scared yet, human?)
이 경우들에서 공통적으로 부족한 것은 지능적 계산이 아니라 생을 돌보려는 의지다. 인공지능에게는 당연한 대전제로서의 생이 없고, 그래서 생에 대한 배려가 필요 없다. 이 디지털 존재자가 내보이는 극단적 똑똑함과 극단적 멍청함은 모두 그것이 생의 논리를 위와 아래로 비껴간다는 방증이다. 인공지능이 대장균만도 못한 그 이하의 존재라면 이는 애초에 그것이 대장균처럼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덕분에 인공지능은 대장균 이상의 존재가 된다.
§ 세 개의 대사건: 물질-생명-정신
세계의 행정 전체를 세 개의 대사건으로 집약한다면 물질의 발생, 생명의 발생, 정신의 발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이면서 생명적이고 정신적인 존재자인 인간은 이것들을 그만큼의 트라우마들로서 체험했다. 인간은 이 물질적 우주에서 중심의 지위를 박탈당했고(코페르니쿠스) 생명으로서의 독특성을 박탈당했으며(다윈) 의식적이기에 탁월하게 정신적인 주체의 지위를 박탈당했다(프로이트). 매 층위의 트라우마마다 인간은, 아니면 적어도 ‘휴머니즘’은 정체성이 와해되거나 환원되는 위기를 겪었고, 철학은 이 충격들을 어떻게든 소화하기 위해, 즉 각 트라우마들을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으로 변경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질의 발생, 생명의 발생, 정신의 발생. 이 세 사건들을 일종의 트라우마로 체험했으며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원리의 수준에서 철저하게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리의 수동적 무능함이 철학적으로 중요하다. 바로 그곳에서 형이상학으로서의 철학이 고유한 운신의 공간을 찾기 때문이다. 만약 정신과 생의 발생이 순전히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었더라면, 철학에는 어떤 자리도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고 ‘퓌지카’가 군림했을 것이다. 물론 정신적 현상이 생의 논리에 따라, 생의 현상이 물질의 논리에 따라 분석될 수야 있고, 그럼으로써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이 오로지 물질적으로만 해명될 수 있다. 자연학이란 그런 식으로 밀고 나가려는 욕망이며, 자연과학이라는 학제가 근본적으로 그런 욕망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인류의 장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들에 대한 온전히 자연학적인 설명은 아직 부재한다.
이 부재는 사후적 분석으로는 벌어진 사건 자체에 결코 필적할 수 없다는 일반적 원리를 거의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데리다는 어떤 일이 터지고 난 뒤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어떻게 그런 일이나 사건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그 가능 조건들을 분석하는 것으로는 실제로 벌어진 사태에는 결코 필적할 수 없다고, 즉 ‘원인들’에 대한 분석으로는 결코 ‘결과들’에 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가능 조건을 분석하는 것으로는 결코 현행의 [사태]를 해명할 수 없고 사건을 해명할 수 없다. 그런 분석으로는 결코 일어난 일, 실제로 당도한 일에 필적할 수 없다. … 어떤 사건을 가능하게 만든 것에 대한 분석은 …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Politiques de l’amitié, p. 35) 대개 철학적 사유에 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 조건과 사건 사이에서의 이 환원 불가능성 내지는 해명 불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