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아이들 긴 원고
<도서관 이야기> 국립 아동 청소년 도서관 출간 (긴 버전)
AI 시대의 아이들은 어떻게 성장해가고 있나?
- ‘스마트’ 세대의 교육에 대하여
1. 요즘 아이들이 선 자리
몇 년 전부터 어휘력이 부족하고 혐오 표현을 거침없이 쓰는 ‘요즘 아이들’에 대한 논란이 일었습니다. 아이들이 스마트폰에 빠져 책을 못 읽게 되었다는 우려 속에 ‘문해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대통령도 문해력을 언급하고 나섰고 급기야 교육부에서는 문해력 향상을 위해 초등 1, 2학년 국어 시간을 34시간 늘리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아기 때부터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어머니들이 늘어나고 이쁘게 단장한 학교 도서관을 드나드는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적했던 도서관도 어린이 책 읽기나 글쓰기 모임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요. 분명 고무적인 일이지요.
글을 통해 자기 생각을 풀어내고 곱씹어보는 습관을 갖게 되는 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독서를 통해 세상을 읽는 통찰력, 숙고하는 습관,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수시로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을 갖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불확실성의 시대가 와도 함께 배우며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여기서 나는 문해력이란 단순히 ‘텍스트를 읽어내는 힘’이 아니라 ‘삶을 읽어내는 힘’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정보홍수 속에 허우적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가며 삶을 읽어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절실해진 시대이지요. 나는 1990년대 초반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라는 책을 통해 한국 대학생들의 교조적 글 읽기와 입시형 글 읽기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었습니다. 이제 겨우 그 병폐에서 벗어난 듯한데 최근에 불고 있는 문해력 붐은 왠지 불길합니다. 문해력이 “공부의 기초체력을 키워주는 힘”이라거나 “초등학교 문해력이 평생 성적을 결정한다‘라는 문장을 접하면서 말입니다. ‘문자 미디어’ 시대에서 ‘멀티미디어’ 시대를 지나 ‘디지털 미디어’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데 문해력을 공부나 논술력 차원에서 논하고 있는 교육 환경이 염려스럽다는 말입니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의 저자 김성우 엄기호는 SNS 열풍을 염려해야 하지만 독서가 입시를 위한 방편이 되어가는 상황 역시 심히 우려스럽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해력은 “맥락 속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타인의 말을 알아듣고 소통의 다리가 되면서 윤리적 주체가 되는” 능력을 말한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이 학원과 학교를 맴도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태권도 학원으로 향하는 노란 봉고에 올라 학원 투어를 시작합니다. 외국인 부모들은 학교와 학원이 만들어낸 이 안전하고 효율적인 한국의 자녀 관리시스템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정보력과 기획력을 갖춘 엄마의 코치를 받으며 자란 많은 아이들이 일찌감치 세상이 승자독식 세상임을 간파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입시 깔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입시와 취업용 글쓰기 기교에 익숙해지면서 진짜 글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사회비평가 우석훈은 시험을 금지한 초등학교 시절은 그런대로 책도 읽지만, 중학교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중학교 2학년이면 공부에 매진할 것인지 아닌지 포기할 것인지 판가름이 난다고 합니다. 공부할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다람쥐 쳇바퀴를 돌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온라인 게임이나 소셜 미디어 세계에 입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두 길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비상’을 위한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입시중독 환자를, 다른 한편에서는 스마트기기 중독환자를 키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학 입시에 성공한 입시 중독환자들이 스마트기기 중독환자들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두 길 외의 길을 내는 것이 시급합니다.
2020년 미국에서 제작된 제프 올롭스키 감독의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The Social Dilemma)는 구글 디자이너였던 트리스탄 해리스의 인터뷰로 시작합니다. 소셜 미디어 중독 현상을 다루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는 소셜 미디어가 어떻게 중독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디자인되었고, 사람과 정부를 이용하고 음모론과 가짜 뉴스를 퍼지게 하는지, 그리고 광고에만 의존한 수입 창출 구조가 그런 현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서 일했던 실리콘 밸리 전문가들이 스스로 이루어낸 것에 대해 경악하면서 자신들의 창조물인 소셜 미디어를 주의하라고 간절하게 경고를 하는 것이지요. 아이들을 이런 중독의 프레임 속에서 살게 할 것인지 새로운 시대를 탐구하고 만들어가는 세계를 만들어가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시간입니다. 아주 낯선 세상을 살아낼 아이들, 그 존재들이 만들어가는 세계를 존중하려는 의미에서 나는 그들을 ‘신인류’라고 부릅니다.
2. 3차 과학 혁명의 새벽을 여는 ‘신인류’
이 아이들은 유발 하라리의 분류에 따르면 500년 전에 발생한 과학 혁명이 제대로 효과를 내는 시점에 성장하는 존재들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에서 현생 인류가 거친 진화를 세 단계로 나누어 풀어냅니다. 일차 혁명은 7만 년 전의 ‘인지 혁명’으로 직립보행을 하게 된 인류가 도구와 불을 사용하고 서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존재가 된 시점을 말합니다. 미숙한 아기를 낳아 기르면서 소통과 공감 능력을 기르고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생산량을 늘리고 종교적 의례를 수행하기에 이르러지요.
그 후 5만 년 정도가 지난 1만여 년 전 인류는 자연의 순리에 적응해서 살던 시기를 지나 자연에 가공하기 시작합니다. 자연의 변덕에서 벗어나 스스로 곡물과 동물을 키우면서 부족국가를 만들고 도시를 만듭니다. 이른바 ‘농업 혁명’을 거치면서 가능해진 변화입니다. 이 시기를 통해 부의 축적이 가능해지고 부족국가에서부터 제국까지 복잡한 정치 경제 사회의 제도화가 이루어집니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 생산하고 비축하고, 때로 비축한 것을 뺏기도 하면서 고대 왕조시대는 중세 봉건제와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거치며 이른바 ‘문명개화’의 세상을 열어갑니다. 이때 인류는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부르며 오로지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고집했습니다.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과학기술을 발달시킨 한편 개인의 고립과 국가 간 전쟁, 빈부격차, 인구문제, 그리고 환경오염 등으로 스스로를 멸종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이 와중에 3차 혁명 곧 ‘과학 혁명’의 시대가 열립니다. 산업 혁명 이래 500년 동안 진행된 이 시대는 ‘농업 혁명’을 통해 건설된 문명을 해체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정보공학과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존재가 출현하는 급진적 전환시간을 지나는 중이지요. 기성세대가 두 번째 혁명이 만들어낸 문명의 마지막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다면 아이들은 세 번째 혁명의 새벽쯤의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전환은 너무 급작스럽고 근원적이어서 구성원들이 상황을 제대로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많은 과도기적 혼란과 오해를 우리는 나날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끝없이 책 읽기를 열망하면서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으면서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계몽주의자가 책을 싫어하고 역사는 순환하거나 망한다고 보는, 그래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 탈근대적 신인류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성세대는 스스로를 낯설게 보기 위해 새로운 안경을 쓰려고 노력은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직선적 진보 사관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해체의 시간을 거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막강한 서구 백인 문명의 침략으로 급격한 체제 붕괴의 시간을 거치고 있던 북미 원주민 사회에서는 열 살 정도가 되면 소년은 자신을 보호해줄 수호신을 찾아 홀로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우리가 만나는 신인류 역시 열 살 정도가 되면 자신의 수호신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일거리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몰려오는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내면의 힘을 키우고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지요. 나는 요즘 주변의 소녀 소년들을 보면서 이미 자신의 수호신을 찾아 나선 이들을 만납니다. 낯선 질문을 하며 낯선 길을 개척하는 그들을 기성세대는 애써 외면하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나는 맹랑한 신인류를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온라인 오프라인을 통해 만나고 있습니다.
나는 하굣길에 동네 책방에 들러서 책을 읽다가 책방 주인의 부탁을 받고 훌륭하게 전시 코너를 마련하는 ‘책방 어린이 큐레이터’ 소녀를 알고 있습니다. 아픈 외숙모를 곁에서 지켜보며 어린이용 동의보감에 이어 어른용 동의보감을 통달한 후 약초 시장을 찾아다니고 학교에 가서 피곤해하는 친구에게 한방차를 끓여주는 소년도 알고 있습니다. 동네 도서관에 어슬렁거리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다가 관련 책과 동영상을 부지런히 챙겨보면서 ‘고양이 박사’가 된 어린이도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드라마 배우로 자기 길을 찾았던 배우 박 은빈이나 동화 작가 전 이수, 천재 피아니스트 임 윤찬 같은 사례는 실은 이 세대에서 드문 사례가 아닙니다. 정보사회에 접어들면서 어릴 때부터 자기 세계를 찾고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해진 환경이 된 것이지요.
이 세대는 기성세대와 질적으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 가지 면에서 그러합니다. 첫째로 이 세대는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진’ 문물을 재빨리 모방하고 포드 자동차를 생산하듯 거대 회사를 만들어 기계처럼 일하는 국민을 양산하면 GNP가 올라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컨베이어벨트에서 맡은 일만 하면 되는 포드주의적 시대는 지나고 있습니다. 한정된 일자리를 얻기 위한 경쟁심과 지구력을 키우기보다 변화를 감지하는 창의성과 일을 성사시키는 소통력을 키워야 하는 시대이지요. 인생에서 가장 활기찬 십여 년을 대학과 취업의 좁은 문을 뚫기 위해 보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을 위해 기성세대가 할 일은 개별가족으로 교육비를 벌어 구체제에서 살아남게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불안을 덜어주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본소득제도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러면 이들의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자기주도활동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제대로 열매를 맺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사회가 활성화될 테지요.
두 번째로 신인류는 망가진 지구를 돌보고 ‘사회’를 돌보는 활동/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될 것입니다. 한국 인구 통계에 따르면 2067년이면 65세 이상 고령 인구와 노동인구의 수가 같아집니다. AI 인공지능적 존재가 생산라인에서 24시간 작업하는 동안 이들은 노인을 돌보고 수시로 터질 위기 상황에서 속출할 취약한 존재들을 돌볼 것입니다. 울리히 벡은 이런 상황을 위기가 일상화된 ‘위험사회’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산적한 사회문제를 풀기 위해서 ‘부’가 아닌 ‘위험’의 개념으로 ‘문명적 탈바꿈’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초연결 디지털 사회에서 온갖 종류의 ‘위험/위기’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상황이지요. 사회학자 김홍중은 이런 시대 상황을 살아내는 데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파상력’이라고 말합니다. 시대가 깨져가는 것을 견디고 바라보는 마음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공동운명체로서 공감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가족이기주의와 국가 이기주의를 넘어서 이웃과 인류, 그리고 지구상의 다양한 비인간 생명체와의 관계 회복이 시급합니다. “아기가 아닌 친족을 만들자”라는 해러웨이의 선언은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자는 주문이지요.
세 번째로 ‘신인류’는 과학과 친해져야 하는 세대입니다. 근대가 인문 사회과학적 사유 세계를 중시했다면 ‘신인류’는 과학적 사고와 알고리즘 언어를 동시에 익히며 AI와 친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최근에 나온 안드로이드 영화 <미스터 양>이나 <아임 유어 맨>을 보면 로봇이 아이를 더 잘 돌보고 더 살뜰한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인류’는 AI와 분업 관계를 이루며 생산과 돌봄 양 영역을 오가게 될 것입니다. 근대인들이 피노키오 동화를 읽으면서 스스로를 피노키오와 동일시 했었다면 ‘신인류’는 피노키오를 만들고 데리고 살아야 하는 제페토 할아버지와 동일시할 존재이지요. 제페토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내는 문해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지요. 최근 이경화 작가는 <담임 선생님은 AI>에서 안드로이드인 AI 담임과 좌충우돌하며 ‘사회’를 만들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엄마가 자투리 시간을 놓고 자녀와 휴대폰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런 차원에서 에너지를 소진해서는 안 될 테지요. 나는 이 책을 읽은 아이들이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그런 학급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을 상상해봅니다.
3. AI와 함께 망가진 행성을 고치는 존재들을 위한 장소들
이제 몇 프로의 ‘가타카’를 키우기 위한 교육을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른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 안에서 늦은 밤까지 학원 투어를 하고 “4당 5락 (네 시간 자면 살아남고 다섯 시간 자면 도태되는)” 선발게임에서 살아남은 극소수 아이들이 미래의 지배자/생존자가 되어 '헝거 게임'과 같은 디스토피아를 만들지, 아니면 부모의 치밀한 생존-성공 기획에도 불구하고 자기 수호 신을 찾아 나선 ‘신인류’가 멸종을 막는 기회를 얻게 될지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신인류’는 중세가 몰락하고 근대로 넘어가던 격변기보다 더욱 근원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해력으로 말하면 신석기 이후 인쇄술에 바탕을 둔 시기를 ‘1차 문해력”의 시대라고 부른다면 이 세대는 ’2차 문해력‘의 시대를 열어가는 중이지요. 진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간 시민들의 ‘고독한 책 읽기’가 근대적 문해력의 핵심이었다면 탈근대적 문해력의 핵심은 다시 고향을 찾고 만들며 멸종 위기의 시간을 살아내는 ‘신인류’의 ‘더불어 하는 삶 읽기’가 아닐까요? 보다 사회적이고 영적이고 과학적인 존재로의 비상이 요구되는 시점이지요.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불안이 만들어낸 경쟁적 선발체제 때문입니다.
시장과 학교가 만들어낸 공고한 입시 체제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럴 때 나는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라는 문장을 외웁니다. 탈근대적 상황에서는 정면 돌파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각자 선 자리에서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방법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교육부가 문해력을 높이기 위해 1, 2학년 국어 시간을 34시간을 늘린다는데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이 과제를 두고 학교와 도서관이 만난다고 생각해봅시다. 널브러져 자고 싶으면 자면 되는 도서관 공간에서 스멀스멀 깨어나는 아이들을 봅니다. 한쪽에서는 온라인 학습 프로그램으로 맞춤법 퀴즈 놀이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시를 천자문 외듯 낭송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지구에게 나는 어떤 반려자일까?” 라며 어린이 작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글쓰기에 골몰하고 있는 활기찬 배움과 놀이의 장소들을 상상해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일단 실험 교실부터 열어야겠지요. 실험 없이 새로운 제도는 만들어지지 않으니까요. 대안적인 실험학교가 생긴 지도 20여 년이 지났습니다. 작은 학교 만들기 운동을 하던 교사들이 마을 활동가들과 만나 새로운 시대의 세포를 만들어간 지도 십 년의 역사가 쌓였습니다. 아이들이 신인류임을 알아차린 어머니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지만 의미 있는 일들이 곳곳에서 다양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학교의 경계를 넘나들며, 도서관의 구태를 벗어나 실험은 시작됩니다. 탈근대적 문해력을 키우며 AI와 함께 망가진 행성을 구할 ‘신인류’를 초대할 시간입니다. 멋진 아이들을 초대할 방법을 각자 선 자리에서 즐겁게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조한 혜정 2022년 9월 22일
(문화인류학, 손주 세대에 관심이 많은 할머니,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