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 컬럼 ghost dance
고스트 댄스
조민아 마리아(조지타운 대학교수)
겨울이 오는 길목, 제가 사는 동네의 멕시칸 음식점은 죽은 자의 날 (El Día de los Muertos) 축제 준비가 한창입니다. 설탕, 초콜릿, 아마란스 등으로 만든 달콤한 해골 모형들이 식탁에 놓여 있고, 오색찬란한 의상을 입은 해골 웨이터들이 멕시코 전통음식이 담긴 접시를 나릅니다. 슬픔보다는 익살과 해학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죽은 자의 날을 기리는 방식이지만, 삼삼오오 떼지어 있는 해골무리들을 보면서 저는 다른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나니사나흐 (Nanissáanah), 고스트 댄스라고도 불리는 미국 원주민들의 슬픈 역사입니다.
고스트 댄스 이야기는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80년 경 미국 정부는 원주민들을 살던 땅에서 쫓아내 척박하고 황폐한 소위 “보호구역에 몰아넣으며 식량과 생필품을 보급하겠다는 조약을 맺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많은 원주민들이 굶어 죽기에 이르렀죠. 처참했던 상황 속에서 원주민들은 생존을 위한 절박한 바람을 몸짓을 담아 일종의 종교운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고스트 댄스입니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춤을 추면 죽은 조상들을 만나 천재지변을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마침내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재난이 도래하면 백인들은 전멸하지만 원주민들은 조상들의 비호로 살아남으며, 결국 대지에 다섯 길 높이의 새로운 흙이 덮이고 들소 떼와 야생마가 돌아오는 새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게 되리라는 순박한 믿음을 담은 운동이었죠. 고스트 댄스는 보호구역에 살던 여러 부족들에게 들불이 번지듯 퍼져 나갔습니다.
고스트 댄스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춤 그 자체였습니다. 노래와 곡을 하며 느린 장단에 맞추어 추는 비장한 춤은 대개 나흘 혹은 닷새 동안 지속되었죠. 북이나 악기도 없이 남녀가 함께 어우러져 환각에 젖은 듯 춤을 추었습니다. 이 낯설고 원초적인 춤의 제전에 백인들은 공포와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겠지요. 미국 정부는 고스트 댄스를 금지하고 기병대를 증강 파병합니다. 원주민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항복을 택하지만, 기병대는 포화와 총탄을 퍼 부으며 학살을 일으킵니다.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을 포함 300여명의 원주민을 몰살한 이 사건이 그 악명 놓은 1890년 겨울 운디드니의 학살 (The Massacre of the Wounded Knee)입니다.
마지막 항거의 순간에 서로 다른 부족들을 결집한 행동이 춤이었다니, 더욱이 이 춤이 원주민들에게는 종교였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종교관을 알면 가슴 저리게 다가옵니다. “종교는 사실 살아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우리가 공언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선포하는 것도 아닙니다. 종교는 우리가 하는 것, 원하는 것, 추구하는 것, 꿈꾸는 것, 상상하는 것, 생각하는 것 - 이 모든 것 - 하루 스물 네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종교는 단순히 이상적인 삶이 아니라 실제 사는 그대로의 삶입니다” (Jack D. Forbes, Columbus and Other Cannibals: The Wetiko Disease of Imperialism, Exploitation, and Terrorism). 원주민 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잭 포브스 (Jack D. Forbes, 1934-2011)는 원주민들의 종교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원주민들에게 종교는 한 사람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 행동 그 자체였습니다. 벌레를 보고 펄쩍 뛰면 그것이 그 사람의 종교고, 살아있는 동물을 실험하면 그것이 그이의 종교며, 악의적으로 남을 험담하면, 또 모르는 이들을 무례하게 대하고 공격하면 그것이 또 그이의 종교라고 그들은 이해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총칼을 들고 찾아와 땅과 하늘과 물을 가르고 자기 것이라 우기며 협박하는 이상한 종교를 가진 정복자들 앞에서 원주민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자신들의 종교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채, 유일하게 의지할 대상인 조상들에게 호소하며 살고자 몸부림치는 자신들의 삶, 종교를 말입니다. 제게는 이 원주민들의 종교가 온몸으로 하느님을 드러내었던 예수님의 종교와 많이 닮아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집니다.
죽은 자의 날은 다가오고, 방방곡곡에서 죽음의 소식이 들려옵니다.우크라이나에서, 이란에서, 아이티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길가에 뒹구는 낙엽처럼 얇고 연약하여 때로는 바스락 소리조차 내지 않고 흩어집니다. 제빵공장에서 부당노동으로 인한 과로에 시달리다 기계에 빨려 들어가 사망한 노동자에게도, 그 공장에서 여전히 기계를 돌려야 하는 그의 동료들에게도, 삶과 죽음의 경계는 그리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이렇게 죽은 자의 날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종교는 무엇일까요? 원주민들이 믿었듯 종교가 우리들의 삶 그 자체라면, 성무일도를 하고 묵주기도를 올리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하고 성체를 모시는 순간들 뿐 아니라 우리가 꾸는 꿈, 마음에 품는 생각, 모르는 이에게 내뱉는 말, 먹을 거리를 고르는 것과 같은 사소하고도 무거운 일상의 선택, 힘겨운 나 자신과 이웃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 우리의 이 모든 것들이 종교라면 우리의 종교는, 나의 종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