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처음 번역.출간되는 독일의 정치경제학자 볼프강 슈트렉의 저작. 2012년 세 차례에 걸쳐 발표했던 프랑크푸르트 아도르노 강의 내용을 수정보완한 주요 저작 중 한 권이다. 슈트렉은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 초기 핵심 브레인으로 일하며 독일의 정치경제, 자본주의의 다양성, 신자유주의 비판 및 대안 제시 등에서 중요한 연구 성과를 내왔다.
슈트렉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40여년에 걸친 모순관계 및 위기구조의 역사, 즉 민주적 자본주의의 역사와 그간 벌어졌던 세계 경제위기들의 실체를 낱낱이 밝힌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강제적인 결합이 어떤 갈등 구조와 위기를 만들었고, 그것을 봉합하기 위해 어떤 방식이 투입됐는지, 위기를 유예시키며 시간을 벌었음에도 왜 작금의 경제위기가 초래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러한 난국 속에서 한국의 정치와 경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체계적인 논증과 도표들과 함께 담겨 있다.
1장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아도르노를 중심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다듬은 위기이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으로 시작한다. 2장에서는 민주적 자본주의의 공공재정이 지나친 민주주의로 몸살을 앓는다는 논거를 뒤집는다. 3장은 재정건전화 국가의 형성이 유럽연합의 발달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고 보고 유럽연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글이다.
마지막으로 유럽연합과 유로화의 사례를 바탕으로 글로벌화에 제동을 걸고, 시장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조건을 탐색하는 데 할애한다. 그러면서 국가로 대변되는 민족이 각각의 경제생활 공동체와 운명 공동체를 존중하는 '평가절하'와 조정 가능한 고정 환율 제도를 갖춘 브레텐우즈체제를 모범안으로 제안한다.
▶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40여년의 줄다리기,
그 비틀린 관계가 낳은 세계 경제 위기를 파헤치다
독일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로 쾰른 막스플랑크 사회연구소 명예소장이자 쾰른대학교 교수인 볼프강 슈트렉의 저작이 국내에 처음 번역 출간됐다. 슈트렉은 프랑크푸르트학파 계열에 속하며 정치경제학쪽에서는 칼 폴라니와 가까운 연구자다. 또한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 초기 핵심 브레인으로 일하며 독일의 정치경제, 자본주의의 다양성, 신자유주의 비판 및 대안 제시 등에서 중요한 연구 성과를 내왔다. 이번에 소개되는 『시간 벌기』는 2012년 세 차례에 걸쳐 발표했던 프랑크푸르트 아도르노 강의 내용을 수정보완한 그의 주요 저작 중 한 권이다. 슈트렉은 제도와 권력 관계가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고 보고, 제도의 역사적 변화에 주목하는 ‘역사적 제도주의’historical institutionalism에 이론적 기반을 둔 연구를 지속해왔다. 『시간 벌기』 역시 역사적 제도주의 시각을 견지하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40여년에 걸친 모순관계 및 위기구조의 역사, 즉 민주적 자본주의의 역사와 그간 벌어졌던 세계 경제위기들의 실체를 낱낱이 밝힌 성과물이다.
이 책이 지닌 특이성과 특별함은 제목 ‘시간 벌기’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슈트렉은 1970년 이후 후기자본주의의 여러 위기가 감지되자 닥쳐올 사건을 되도록 미루면서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시도들이 있었음에 주목한다. 사건을 미루고 막기 위해서 꼭 돈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님에도 위기가 닥치자 막대한 규모의 돈을 투입해 불안정한 사회갈등을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2015년의 그리스 사태와 유로존 위기 등은 이러한 방식이 더 이상 효과가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시간 벌기』는 1970년 초반 전후戰後자본주의의 황금기 퇴조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 세계의 민주적 자본주의가 어떤 구조적 모순과 위기의 궤적을 그려왔는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동시에 시간을 사들이며 위기를 유예시켰던 방식들을 순차적으로 분석해 보여준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강제적인 결합이 어떤 갈등 구조와 위기를 만들었고, 그것을 봉합하기 위해 어떤 방식이 투입됐는지, 위기를 유예시키며 시간을 벌었음에도 왜 작금의 경제위기가 초래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러한 난국 속에서 한국의 정치와 경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체계적인 논증과 도표들과 함께 이 책에 담겨 있다.
▶ 고삐 풀린 자본과 위기 유예 방식
슈트렉은 “현재의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를 관찰함에 있어 시간을 끌어들이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13쪽)하다고 말한다. 현 위기를 1960년 말에 시작돼 오랫동안 진행된 연속적인 발달 과정의 중단 단계로 인식하고 지난 과정을 돌이켜보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앞날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올바른 인식의 길이 열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현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기보다 지난 시절의 경제 위기 사건들을 되돌아보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1장 「정당성위기에서 재정위기로」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아도르노를 중심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다듬은 위기이론(이하 ‘위기이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으로 시작한다. 왜 당시 위기이론의 예측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전후자본주의에서 펼쳐졌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는 1970년대에 진단했던 위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2008년의 위기를 맞이했는지 추적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슈트렉에 따르면 위기이론이 범한 가장 큰 오류는 “자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전략을 펼쳐나갈 정도의 능력이 없다”(46쪽)고 봤다는 데 있다. 즉 자본이 불안의 진원지이자 지속적인 사고뭉치임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위기이론의 예측과 달리 노동자와 소비자들은 자본주의에 충성을 다하며 일하고 소비했으며, 그럼에도 경제 성장은 멈추고 말았다. 자본주의 엘리트와 정치 동맹군의 꾸준한 야합은 자유화를 환영하고 있었다. 결국 “위기이론은 정치적으로 위기를 관리할 수 없게 되어버린 자본주의에, 자유방임을 선언한 국가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다.”(48쪽)
슈트렉은 1960년대 말에 이미 자본주의의 평화는 깨졌다고 말한다. 전후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모습을 바꾸는 과정만 있었을 뿐이다. 슈트렉은 이를 증명해내기 위해 위기이론이 놓친 ‘자본’과 ‘자본주의’의 속성을 세세하게 분석한다. 자본주의는 일종의 사회계약을 전제로 성립하며, 시대와 맞물려 정당성을 담보해야만 하는 사회질서다. 1980년대 초반을 시작으로 전후자본주의 사회계약의 핵심 내용은 차례로 폐기되거나 의문에 붙여졌다. 국가와 정부는 경제 자산가와 관리인들에게 굴복해 성장, 고용보장, 사회적 보장, 복지 등의 책임을 시장에 떠넘겼다. 그리고 깨져버린 자본주의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 투입됐다. 처음에는 쓸 수 있는 돈이 늘어났다는 ‘돈의 환상’을 주는 인플레이션이 도입했고, 효력이 떨어지자 국채 증서 발행으로 민간 금융시장을 인위적으로 키우며 가계부채를 무한정 늘렸다. 그러다 결국 국가부채와 은행 빚을 중앙은행이 사들이도록 했다. 슈트렉은 위기 유예 방식을 설명하면서 시간을 벌며 위기를 미뤘던 방식이 자본주의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음을 거듭 상기시킨다. 수면 위로 오른 위기는 방법을 달리하며 봉합됐지만 그 과정에서 자본은 제 자리를 점차 확장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 왜 국가는 세금 수입을 줄이고 부채를 떠안았을까?
경제학계의 주류인 ‘제도경제학’이론은 금융위기가 민주주의 실패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자유와 권한을 제공한 결과 국가재정에 어려움이 왔으니,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공재정을 보호하고 세금을 부과해 사회적 공유지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에는 여러 의문점이 남는다. 만약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금융위기가 왔다면 1980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고용조건의 열악함, 빈부격차 심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왜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투표율은 계속 감소하는 걸까?
2장 「신자유주의의 개혁」에서 슈트렉은 민주적 자본주의의 공공재정이 지나친 민주주의로 몸살을 앓는다는 논거를 뒤집는다. 가장 극적인 국가부채가 2008년과 그 이후에 일어났다는 점(도표 2-1)은 투표를 행사한 국민의 지나친 민주주의 요구와 관계없다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재정의 위기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극소수의 사람이 갈수록 세금을 내지 않아 빚어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1990년 들어 전 세계적으로 대기업에 부과하는 세율을 앞다퉈 끌어내렸고, 세금이 한 번 떨어지자 인상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세금 감소로 수입이 줄어들자 복지비 감소와 임금 인하를 갖고 왔으며 당연히 저소득층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조세체계가 부자의 재산과 그 유산에 공익 목적으로 매기는 세금이 적으면 적을수록 부의 불평등이 더 심해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도 민주주의와 민주적 정치는 저항하기를 주저했다. 여기에 1990년대 거품경제를 누리며 민주주의 정치는 ‘강한 정부’를 ‘부드러운 통치’로 대체하는 게 민주주의 친화적이며 사회에도 좋다는 장광설에 폭넓은 믿음을 선물하면서 국가재정은 실패에 이르고 만 것이다.
슈트렉은 부채국가가 필연적으로 ‘채권자’라는 두 번째 유권자의 등장시킨다는 점에 주목한다. 국가의 세무정책으로부터 엄청난 자산을 쌓을 기획을 허락받고 이 돈을 투자하기 위해 국가부채에 시달리는 정부를 최적의 투자자로 발견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슈트렉은 이를 국가국민과 다른 ‘시장국민’으로 명명한다. 부채국가는 이로써 두 계급의 이해당사자, 즉 ‘국민(국가국민)’과 ‘시장(시장국민)’의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켜줘야 한다. 채권자는 국가와 국민이 감당할 만한 조건으로 빌려주고 국가는 차환할 수 있다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또한 국민의 눈에 정부가 채권자의 하수인처럼 보이지 않도록 연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슈트렉은 민주주의의 퇴행으로 인한 시장의 급부상이 결국 부채국가를 몰고 왔음을 논증한다. 그리고 이제 민주주의의 간섭으로 해방된 부채국가는 국간 간 금융외교 형태의 국제 정치 속에서 또 다른 국면에 놓인다.
▶ 유럽연합, 유럽 자본주의의 자유화를 이끄는 기관차
슈트렉은 위기가 유예되면서 국가의 성격이 조세국가에서 부채국가로 바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국가부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색하는 과정에서 부채국가는 다시 ‘재정건전화 국가’로 변신의 과정을 거친다고 진단한다. ‘재정건전화’란 거칠게 말해 초국가적 금융시장과 투자자의 요구에 순응하며 길들여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재정건전화 국가’는 국가재정의 부채와 적자를 줄이려는 목표 아래, 금융시장에 요구에 따라 재정규율을 따르며 국가재정을 축소지향적으로 ‘재창조’하는 국가다. 3장 「재정건전화 국가의 정치」는 재정건전화 국가의 형성이 유럽연합의 발달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고 보고 유럽연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글이다. 슈트렉에게 유럽연합은 “유럽 통합이 자본주의 경제를 민주주의의 시장 간섭으로부터 해방하는 기제로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시켜온 방향의 잠정적 정점을 찍는 제도”(155쪽)다. 유럽연합은 ‘부정적 통합’, ‘긍정적인 게 없는 통합’이라는 수식을 단 채로 출발했다. 시장을 창출하고 해방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정치 장애물을 없애려는 정책들을 잇달아 발표하며, 시장의 자유가 헤게모니를 갖는 데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시장 자유화를 필요로 하는 나라를 보호하고 통화동맹의 기조를 따르지 않는 나라에 내적 평가절하(임금 삭감, 사회복지 축소,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단행했다. 지출 삭감과 감세 속에서의 재정건전화는 결국 국가의 시장 개입을 무력화하고 국가 기능을 전면적으로 축소하는 민영화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또한 재정건전화로 인한 유럽 국민경제의 자유화는 2008년에 시작된 게 아니라 꾸준히 이뤄져온 변화 과정의 본질이자 결과물이다.
가령 그리스의 사례를 보자. 그리스는 1981년 유럽공동체 회원이 됐고, 2001년부터 유럽통화동맹에도 속했다. 1990년대 이후 그리스가 국가부채로 치러야 하는 금리는 5년간 17%에서 6%로 떨어졌다. 동시에 유럽연합이 제공하는 지원금은 그리스 국내총생산의 4%에서 2%로 줄었다. 그리스가 적자를 자본시장에서 메울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통화 동맹 가입으로 공공지출을 신용 차입금으로 충당할 수 있게 되자 국가 부채가 꾸준히 늘어났다. 결국 그리스가 통화 동맹 가입 이후 확실하게 남은 유산은 1995년과 대비해 국내총생산의 거의 60%에 해당할 정도로 급증한 국가부채였던 것이다.(도표 3-8) 2015년 그리스 사태는 유로존 가입 후 산업경쟁력이 나날이 약화되고 나라 안의 부패와 탈세가 결합되면서 발생한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유럽연합의 이러한 상황을 타진할 방법은 없을까? 슈트렉은 마지막 부분을 유럽연합과 유로화의 사례를 바탕으로 글로벌화에 제동을 걸고, 시장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조건을 탐색하는 데 할애한다. 그러면서 국가로 대변되는 민족이 각각의 경제생활 공동체와 운명 공동체를 존중하는 ‘평가절하’와 조정 가능한 고정 환율 제도를 갖춘 ‘브레텐우즈체제’를 모범안으로 제안한다. 두 가지 모두 국가 단일시장 체제에서는 눈엣가시로 많은 저항을 불러오는 거친 방법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러 원칙들을 교정하며 더 나아가 유로화 폐지까지 가능케 하리라고 본다. 그가 이렇게 극단적인 카드를 내놓았던 것은 그만큼 현 상황의 심각성을 대변하는 게 아닐까? 슈트렉이 이 책 끝에서 현 경제위기는 “최고의 경제학자들이 진땀 흘려가며 연구해야 할 문제”(259쪽)이며 “신자유주의의 탈민주화 프로젝트의 속개를 막을 투쟁에 투여할 시간을 버는 일은 절박하다”(261쪽)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 책속으로 추가
현재의 금융위기와 재정위기 그리고 경제위기는 지금껏 살펴보았듯 오랫동안 신자유주의가 전후자본주의를 변형시킨 끝에 맞은 잠정적 절정이다. 인플레이션과 국가부채와 가계부채는 민주주의 정치가 꾸준한 물질적 발달이라는 성장자본주의의 외양을 그때그때 버티게 해준 응급처치였다. 시장과 인생의 기회를 위에서 아래로 점차 분배해주겠다는 달콤한 말을 감당할 수 없을 때마다 비상수단으로 끌어댄 게 그런 꼼수였다. 이 세 가지 모두 차례로 그 효과를 소진당하며 다른 응급처치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자본의 수혜자와 관리자가 각기 10년여 동안 그 세 가지 효과를 집중적으로 써먹은 탓에 돌아온 대가가 너무나 비쌌기 때문이다.
현대 화폐의 마법에 호소하며 시간을 사들이는 일이 21세기 초의 심각한 위기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통할까? 이미 오래전부터 그 어떤 실질적 기반도 가지지 못한 자본주의는 평온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해묵은 공약을 지킨답시고 주기적으로 한사코 현실과는 반대되는 쪽으로 시간을 사들이는 수법을 구사해왔다. 그러나 2008년에 터진 금융위기는 이제 더는 그런 수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2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