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페미니즘, 창조적 공동체를 살다/살리
창조적 돌봄 공동체를 살다/살리다*
* 페미니스트 후배들이 나의 페미니즘을 이야기 해달라고 해서 이것 저것 꺼내보고 있다.
십년 전 은퇴하면서 우리끼리만 보자고 썼던 미간행 글을 꺼내본다.
-------들어가는 글
말이 지겹다. 말을 많이 하면서 살아온 내 삶이 지겨워지려고 한다.
왜 그렇게 말을 많이 했을까?
얼마 전부터 은퇴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곤 했다. 시간 강사 기간까지 합치면 1979년부터이니 무려 35년을 보낸 내 유일한 직장을 떠난다는 것인데, 따져 보면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일까 싶기도 하다. 강의는 하고 싶으면 가끔 하면 될 것이고, 고정 수입이 줄어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학생들 밥을 사 주거나 일을 벌이거나 후원금을 선뜻 내기가 어려워질 수 있겠지만, 앞으로는 제자들이 밥을 살 테고 후원금도 그들이 낼 테지. 조교가 없다는 것도 좀 아쉬운 일일 테지만 일을 좀 줄일 때이기도 하고, 연구는 어딜 가서나 하는 짓이니 계속할 것이고. 결국 남은 것은 연구실을 비우는 일, 이른바 ‘방 빼는 일’만 남았다. 학교와 집이 워낙 가까워 주로 집에서 작업을 했으니 방을 빼도 그리 아쉬운 일은 없을 듯하다. 인문관 건물에서 18년, 그리고 1996년 한총련 사태로 불에 그을린 종합관 ‘배상금’으로 지은 제2 인문관으로 옮긴 지 15년. 별칭이 위당관인 이곳 503호에 걸린 액자나 책은 집으로 옮기거나 어디 주면 되고, 그래도 남은 일은 서랍 정리이리라.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 내 연구실에 가끔 들리는, 또는 아직 들리지 않았지만 늘 들리고 싶어 했을 제자들에게 연세대에는 이제 내 연구실이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이 남았다.
동료 교수인 김현미, 나임윤경, 조문영 선생이 올 초에 나를 연희동 단골 중국집으로 불러내 정년 기념 심포지엄을 준비하는데 딱히 원하는 것이 있냐고 물었을 때, 그냥 파티나 한번 하면 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내 연구실이 없어지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는, 따뜻하고 조금은 유쾌한 파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김현미 선생은 그것은 그것대로 하면 되고, 학계에 있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심포지엄을 하면 내가 글을 좀 써야 할 것이며, 준비 과정에서 “재미없다”는 둥 코멘트를 하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지금 다 하라고 윽박질렀다(내게는 세상에서 무서운 사람이 단 두 명 있는데 그중 한 명이 김현미 선생이다). 나는 아무 소리 않겠다고 순순히 약속하였고, 지금 그의 명령대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성과주의라는 수레바퀴 아래의 삶이 얼마나 숨 가쁜지를 잘 아는 터라, 이런 자리를 마련한 후배와 제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사실 나는 이런 말을 하면 고마움이 달아난다고 믿는 원시적 인간이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최근 들어 부쩍 세속적으로 적응했나 보다.
학문적 여정, 그 경험주의자의 여행
나는 말을 찾아 온 세상을 다녔다. 말을 찾았을 때,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내가 말한 모든 것, 암시하려 한 모든 것은 내 안에서 나왔다. 어떤 것도 나로부터 유리된, 외부에서 온 객관적 지식이 아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경험했다. – 토마스 만
내 학문적 여정은 책과의 만남이 아니라 사람과의 만남의 연속이었다. 나는 ‘명사들이 추천하는 이 한 권의 책’ 같은 것을 요청받을 때마다 늘 당황한다. 지난 주 우리 사회학과 BK(Brain Korea) 세미나에 평생 베버를 연구한 전성우 교수가 오셨는데, 그분은 막스 베버와 자신이 벌인 상상의 대담을 정리해 와서 강의를 시작했다. 위대한 사상가 한 사람을 평생 연구한 그에 비하면, 나는 무수한 연구자들과 일상의 사람들을 가볍고 짧게 때로는 길게 만나며 바람을 많이 핀 ‘날라리 학자’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알아야 했고 납득되지 않는 것을 납득해야 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앎과 삶이 밀착되는 상태에서 살고 있어야 하는 그런.
한국이라는 나라는 내게 언제나 좀 낯설고 불편한 곳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율적이었던 내게, 그리고 그런 자율을 허용해 준 가족에 비해 간섭이 심한 학교나 한국 사회는 별로 마음에 드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적응을 해야 하기에 나는 그 사회와 다소 거리를 두고 ‘낯섦’을 즐기는 전략을 썼던 것 같다. 유학을 가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페미니스트들과 교류하면서, 나는 그 불편함이 개인적인 관찰로 해소될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해결해야 할 어떤 것임을 깨닫고 남녀평등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고고학 책에는 사냥꾼들이 사용한 도구가 최초의 도구라고 나오지만, 어쩌면 아기를 업는 띠와 채집을 위한 소쿠리가 더 먼저 사용된 도구였을지 모른다는 학설에 귀를 쫑긋 세운 나는 제주도 해녀 마을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경제권을 쥔 해녀들은 얼마나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의 부부 관계와 육아 방식은 어떠할까? 마을 안 권력 관계는 어떠하며 성 역할 구분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박사 논문을 쓴 후 나는 부리나케 짐을 싸서 모국으로 돌아왔다. 내 할머니가, 그리고 엄마가 사실상 은밀하게 일상에서 벌여 온 여성해방운동을 본격적이고 공개적으로 이어 가기 위해, 반쪽짜리 안경으로 보던 세상을 두 쪽짜리 안경으로 보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 그해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엔 광주항쟁이 일어나 세상은 흉흉하면서도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마침 이화여대에서는 이효재 교수를 위시한 여성학 팀이 꾸려져 강좌 개설을 하고 있었고, 우리 대학에서도 ‘리버럴’한 남자 교수들이 여학생 대상 과목을 법적 평등과 평등한 사회 참여를 주제로 한 강좌로 바꾸어 가고 있었다. 사회학회나 문화인류학회에 가면 한눈에 나와 좋은 인연을 맺어 갈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이론으로 무장한 무서운 여자들’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뭉쳤다.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라는 ‘창조적 공동체creative commons’가 만들어졌고 신촌에 둥지를 튼 또문 아지트에서 우리는 밤새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면서 다양한 작업을 했다. 그 활동은 자연스럽게 학술 논문으로, 좀 더 대중적인 동인지로, 어린이 캠프와 예비 대학생 캠프와 대학생 모임, 직장인 소모임으로, 그리고 주부 모임으로 다양한 싹을 틔워 번식해 갔다. 이런 텃밭에서 한국여성학회라는 학회도 만들어졌고, 사회과학자들과 시인, 소설가와의 만남, 이어서 미술가들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언론은 또문 활동을 주목하면서 열심히 보도해 주었다. 조직적 힘을 총집결하기를 원했던 주도적/남성적 운동권은 또문이 그런 힘을 분산시킨다며 힐난하는 눈길을 보내기도 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사회운동가들은 꿈꾸는 세상을 미리 그 안에서 만들어 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87년 군부 독재 정권이 사실상 무릎을 꿇고 뒤이어 동유럽이 몰락하면서 변혁운동에 진공이 생겼을 때 이를 버텨 준 것은 문화운동이었다. 조직적 힘의 대결로 민주화를 이루어 내려고 했던 ‘골수 운동권’들이 허망함을 달래며 유학길을 떠나거나 소리 없이 어딘가로 사라졌을 때, 그 대를 이어 여성운동이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활동을 활기차게 이어 갔다는 말이다. ‘주변자’였던 ‘여성’의 발견은 청소년들과 장애인, 동성애자, 탈북자의 권리와 당사자운동으로도 이어졌다.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일상의 발견, 관계의 중요성, 일관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적 근대화 단계로 보면 경제 개발과 정치 민주화 시대를 지나 소비와 대중문화 시대가 열린 것이며, 일상의 민주화와 개성이 강조되는 새로운 시대를 페미니즘이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또문이 벌인 중요한 실험 중 하나는 어린이 캠프였다. 사람을 키우는 것, 사람을 밀어주는 것이 또문이 해 온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문이 생겨서 좋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수업에서 만난 인연을 이어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1985년 즈음부터 어린이 캠프를 시작했는데, 학기가 끝날 즈음 나는 캠프에 오면 좋을 만한 학생에게 “와 볼래?” 하고 초대를 했다. 다른 교수들이 캠프 교사를 할 학생들을 데리고 오지 않아서 결국 캠프 교사는 대부분이 내 수업을 들은 연세대 사회학과 학생들이었다. 캠프 단골 어린이들은 ‘노마(캠프 교사의 별명)’가 되려면 연세대 사회학과를 가야 하는 줄 알고, 크면 자기도 꼭 연세대 사회학과에 가겠다는 결심을 내보이기도 했다. 한참 뒤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초대를 해서 왔는데 제대로 챙겨 주지 않아 상처를 받은 이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조상모(조한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의 모임)’라는 모임도 있었을 정도라 하니, 나의 가벼운 초대가 학생들에게는 전혀 가볍지 않은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나는 초대를 하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들이 알아서 그 마당에서 논다고 생각했지, ‘챙겨 준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때 나는 왜 나만 유독 학생들을 초대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했는데, 어릴 때 외할아버지 고아원에서 아주 많은 친구들과 가족처럼 지낸 독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잠정적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를,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 온 것 같다. 나는 이를 위해 특히 안식년을 잘 활용해 온 편에 속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릴 즈음에는 가족과 함께 영국 캠브리지로 도망을 갔다. 나는 서울올림픽 즈음의 그 광신도적 국가주의 구호들을 참을 수 없었다. 영국의 어느 공원 옆 오래된 3층 집에서 나는 내 첫 번째 책을 완성했다. 그리고 귀국을 하니 대학생들이 교실로 돌아와 있었다. ‘짭새’들과 대치하며 밖으로만 나돌던 대학생들이 뭔가 배우고 싶다는 눈길로 교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성학과 문화인류학이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좌로 등극했고, 나는 교실로 돌아온 대학생들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할 언어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겉도는 말, 헛도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창조적 공공 지대를 대학 안에 만들어 가고자 했던 것이고, 그 첫 만남의 산물이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 1 : 바로 여기 교실에서????또하나의문화, 1992이다. 이 책은 그 당시 청년들에게 “내 인생의 책 세 권 중 하나”에 꼽히기도 했다.
나는 국가주의와 국가주의적 부권이 부상하는 양상을 보면서 민족주의, 탈식민, 탈근대 공부를 시작했다. 속물적 졸부들의 등장과 복권을 꿈꾸는 아시아의 ‘보수적 아버지’들이 주도하는 전통부활운동, 유교자본주의론과 아시아주의에 대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또문 안에 ‘문화/권력’이라는 지적 공동체가 만들어졌고, 아마도 이때 내가 가장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문화’를 발견한 한국 사회와 대학 사회에 많은 애정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1994년 스탠포드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나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미국 학자들과 만났다. ‘한국적인 것’과 전통을 찾기 시작한 한국을 자본주의 발전 단계로 파악하려 드는 마르크시스트 학자들, 한국의 경제 기적을 배우고 싶어 하는 보수적 모더니스트들, 그리고 서구 중심 헤게모니를 해체하려는 탈식민주의 학자들을 두루 만났다. 나는 그곳에서 만난 아시아계 학자들과 의기투합하여, 앞으로는 아시아 학자들이 만나는 모임을 미국이 아닌 아시아에서 하기로 했다. 약속대로 귀국 후 우리는 동아시아 지역 학자들의 모임인 ‘INTER-ASIA CULTURAL STUDIES’ 그룹을 만들었고, 나의 아시아 나들이가 잦아졌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이 창조적 학문 공동체는 더욱 활기를 띠었고, 세계 출판 산업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ROUTLEDGE 출판사를 통해 학술 저널을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중국이 거대하게 부상하면서 중국계 지식인들이 중국 중심의 판을 만드느라 분주해졌고, 나는 나대로 한국의 신자유주의화 물결에 대응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해져 버렸다.
1997년 금융 위기의 고비를 넘기고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을 때부터 나는 ‘선비’의 정치 참여가 불가피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랏일’에 자문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997년에 문화관광부의 문화비전2000위원회, 청소년 정책 자문위원장, 이듬해에는 대통령 자문 기관인 새교육공동체위원회, 그 다음 해에는 서울시에서 긴급하게 만든 실업대책위원회 등에 참여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관과 만났다. 관과 협력하는 일을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 본격적인 인문학적 실험의 장인 일명 ‘하자센터’를 만들게 되었다. 나는 당시 연세대 총장에게 하자센터가 MIT 미디어 랩Media Lab 같은 연구와 실험의 장이라고 설명하면서, 연세대 한 귀퉁이에서 새로운 교육을 갈망하는 십대들과 대학생, 그리고 문화 패거리들과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 일을 실제로 하게 된 계기는 현실 감각이 뛰어난 한 제자 때문이었다. IMF가 터지고 나라가 힘들어졌을 때 갑자기 찾아온 그 친구는 “선생님, 이제 책 그만 쓰셔도 돼요. 이제 일을 벌이셔야 해요. 아이들이 먹고살 일 말이에요.”라며 나를 밀어붙였다. 나는 황당해하며 말했다. “관의 지원을 받아 청소년 사업을 하라고? 미쳤냐?” 그런데 그 미친 일을 나는 지금까지 하고 있다.
1998년 나는 한적한 일본 도쿄도립대학 기숙사에서 한국 사회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하므로 그야말로 호젓한 이방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내게 필요했던 호숫가에서의 휴식 시간을 보내며, 북유럽 사회의 청소년 정책, 그리고 일본의 학급 붕괴 상황과 청소년 활동을 살펴보았고, 한국의 교육과 청소년들이 살아갈 세상을 그려 보면서 그들과 함께 시대적 실험을 할 창조적 공동체로서 하자센터에 대한 구상을 마무리했다. 그 후 6년 동안 하자센터에서 세대 간, 계층 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많은 만남을 가졌고 함께할 파트너들을 찾아 세계를 여행했다. 2005년에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서 가장 자유롭고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많다는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대학(UC Santa Cruz)을 찾았다. 그곳에서 매일 요가를 하며 후기 근대적 삶에 젖어 보았고, 학자들이 앞으로 올 세상을 논하는 토론회에도 갔다. 매우 미국적인 토론회에 참석한 후엔 도쿄대로 옮겨 사토 마나부 선생의 ‘배움의 공동체’ 작업에 참여하면서 많은 일본인 교사들을 만났다. 일본이 한국보다 인구도 서너 배 많고 땅도 훨씬 넓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한국을 보는 또 하나의 안경으로서 일본을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 여행에서였다. 한국과 일본의 ‘근대성의 시계’가 매우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2008년 뉴욕발 ‘리만 쇼크’ 이후 세계 금융 위기는 우리 모두를 겁에 질린 외톨이로 만들고 있다. 숨 가쁜 한국 근대화 과정 한가운데서 그 변화를 읽어 내느라 고군분투했던 나는, 대학 교수들은 BK21 사업으로 정신없이 살고 대통령은 온통 국토를 파 뒤집어 놓는 상황을 보면서 망연자실했다. 뭔가 정말 잘못되어 가고 있다. 나는 여기서 뭘 잘못했나?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가진 주체로 세우는 일에서 시작해, 청소년들과 다른 주변화된 주체들 역시 그런 권리를 누리는 ‘입법자적 주체’로 살려 내고자 열정적으로 일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를 위해 소비 사회를 연구하고 한류 열풍 현상을 연구하고 대중문화를 연구하며 인터넷 문화에 대해서도 열심히 탐구한 것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을까?
치열하게 현장에 다가가고 관련된 논문을 섭렵하면서 같은 관심을 가진 동료들을 찾아 토론했던 나날들. 세찬 물살처럼 흘러가는 현실을 읽어 내기 위해 나는 늘 머리를 비워 두고자 했고, 내 안에 이상한 욕망이 자리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여유롭게 놓아 주려고 노력했다. 내게는 교실도 주요 현장이었다. 그런데 나는 강의 계획서대로 진도를 나간 적이 없다. 나는 솔직히 강의 계획서대로 강의를 하는 ‘훈고학적’ 사회과학자나 인문학자가 될 수 없는 몸을 가졌다. 내게 6년 개근상을 타는 아이들은 신기한 존재였고, 학교를 ‘땡땡이’ 치고 한가로움을 즐겨 본 일이 없는 이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도 많았다. 어쨌든 나는 그런 유연함과 열정으로 현실을 읽어 가려 했고 세상을 좋게 만들어 보고자 애쓰지 않았는가? ‘근대를 넘어서는 상상력’이 바로 나의 연구 주제였기에 나는 늘 문제를 느끼고 풀고자 하는 이들이 있는 곳에 가려 했다. ‘지속가능한 삶을 만들어 가려는 주변적 행위자’들이 벌이는 ‘재활력화’운동이 나의 관심사였으며, 그 행위자들은 곧 나의 동료이자 연구 대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탐정도 용의자 중 한 명’이듯 그 연구 대상에는 늘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접근 방법이 아주 탁월하다고 믿었고 내 연구와 작업이 사회에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어떤가? 나는 마르크시즘을 주요 분석 틀로 삼는 이들이 가진 어떤 경직성이 싫어서 근처에 가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흥망성쇠의 사이클을 제대로 한 바퀴 돌아 버린 듯한 지금, 마르크스의–엄밀하게 말하면 그 당시 그 주변에 있던 창조적 공동체 지식인들의– 탁월한 통찰력을 높이 사고 싶다.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 청소년, 어린이, 장애인, 동성애자 등 모든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이 ‘입법자적 주체’로 드러나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분명 거쳐야 할 근대화 과정의 핵심이다. 그런데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 여자들이 ‘열혈 매니저 맘’이 되어 아이들을 신자유주의의 굴레 속에 꼼짝없이 가두는 장본인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아 당당해진 여자들이 신자유주의 질서에 누구보다 재빨리 편승해서 살벌한 ‘승자 독식 질서’를 즐기리라고 미처 예상치 못한 것, 그것은 나/우리 지식인들의 잘못일까? 보수적 권위주의와 엄숙주의로부터 벗어나 ‘자율과 공생’의 삶을 살아갈 창의적 인재가 되라고 열심히 부추겼던 90년대 학번 졸업생들이 마흔에 접어들어 ‘속물’이나 ‘잉여’가 되는 갈림길에서 눈치 보기에 바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솔직히 상당한 자책감을 느낀다. 나는 그간 역사의 ‘잔물결’이나 보면서 그렇게 열심히 현장을 뛰어다니고 이론들을 오독해 온 것일까? 달리 했더라면 그 길도 달라졌을까?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가진 ‘입법자적/주권자적 주체’가 되는 과정은 상품 소비에 목을 매는 ‘소비적/문화적 취향의 주체’로 나아가는 길목이었고, 그 소비적 주체는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개별적 ‘투자/투기적 주체’로 이어지는 전 단계였단 말인가?
요즘 나는 시장이 키운 아이들, 즉 스스로를 ‘인적 자본human capital’으로 간주하고 투자적/투기적 주체로 살아가는 세대를 교실에서 만나며 수시로 무력감을 느낀다. 대학생이지만 실은 유치원생 같은 순박함을 보이는, 그러면서 어딘지 늘 겁에 질려 있는 듯한 아이들. 힘 있는 자와 자기를 돌볼 여력이 되는 부모 앞에서는 한없이 온순하고 귀여운 강아지이면서 머리를 쓰고 몸을 움직이자고 하면 ‘팩트’ 운운하면서 한없이 따지려 드는, 미움이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조신하고 예의 바른, 그러면서 ‘초합리적 바보짓’을 일삼는 세대 말이다. 연세대 백양로, 곧 자기 학교 앞마당이 명분도 실리도 없는 형태로 마구 파헤쳐지는데도 “내 방만 있으면 돼요. 그것만 제대로 챙겨 주세요. 그 외는 엄마, 아빠가 알아서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총학생회장을 보면서, 나는 ‘먹튀 자본주의’가 키운 아이들이 겁에 질린 모습을 보는 듯하다. 형제도 자매도 없고 또래 간 의리도 없는 아이들, 누군가에게 저항해 본 기억이 없고 ‘우리’를 위해 일을 벌여 본 적이 없는, 공공의 감각이나 창조적 공동체에 대한 감각 자체가 생기지 않은, 매니저 엄마와 시장이 키운 모래알 세대의 등장을 놓고 나는 한참 난감해하고 있다.
돈을 벌기로 작정한 무기상의 후예들은 거대한 먹이 사슬을 만들어 세계 곳곳을 누비며 파괴를 일삼는 중인데, 시민들은 점점 더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 하는 상황. 석유 마피아들과 원전 마피아들, 그리고 앞으로는 물과 숲을 팔아 돈을 벌려는 장사꾼들이 호시탐탐 아이들이 살아갈 자원을 잠식하려 노리고 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전북 무주 구름샘 마을 건너편에도 요 며칠 사이에 산 하나가 시뻘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필요하지도 않은 저수지 사업으로 많은 흙이 필요해서라고 한다. ‘토건의 왕’은 사라졌어도 4대강 사업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많은 토건 사업은 새만금이 그렇듯 이명박 대통령 이전에 시작한 일이다.
권력을 쥐는 것이 목적인 정치인과 돈을 불리는 것이 목적인 무기상의 결탁, 거액의 장비와 돈을 투자한 토건 회사들의 몸집 불리기, 그리고 소비 욕망의 세계로 국민들을 몰아넣는 대중 선동 미디어는 이제 그 ‘성공 사례’를 발판 삼아 해외로 뻗어 간다고 한다. 좀 더 천박해진 한국식 자본주의가 따라 하기에 용이한 모델이 된 것이다. 얼마 전 TV 드라마 「대장금」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며 언론에서 인터뷰를 해 달라기에 기꺼이 해 준 적이 있다. 나는 「대장금」은 한국 여성운동 내지 선각자 여성들의 경험과 염원이 만들어 낸 대단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 대하드라마를 본 세계 주민들은 그것이 한국산인 것을 알면 한국에 대한 존경심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해외로 수출되는 한류 드라마가 다 이런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후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기 드라마는 작품이 아니라 나이키와 같은 상품이며, 성형 수술 산업과 같이 돈을 벌어들이기 위한 하나의 산업이다. 설상가상으로 태국에서 4대강 사업을 본뜬 사업을 시작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국 자본주의가 안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원자력발전소와 인터넷실명제와 전자 정부라는 시스템 등을 후발 주자들, 특히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에 팔려고 활발한 교섭을 벌여 왔다는 소식도 전해 듣는다.
글로벌 자본의 압력 속에서 개별 국민국가들은 나름대로 변신을 꾀하고 있지만, 첨단 정보 기술의 발달과 다차원에 걸친 ‘이동’으로 국가 경계는 수시로 무너지고, 보이지 않는 돈의 침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와 일상적 삶의 영역 사이의 균열이 깊어지는 가운데 다양한 영토성, 새로운 삶의 터전, ‘마을/로컬’이 출현하고 있긴 하지만, 이 로컬들이 얼마나 지속가능한지, 그 안에 어떤 혁명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로컬’이 국민국가 시대의 공간 개념과는 다른 연계와 매개와 통합의 시공간을 창출함으로써 내용text만이 아니라 맥락context 자체까지 전폭적으로 바꾸어 가기를 바라지만, 서구에 비해 훨씬 압축적으로 근대화 과정을 거친 ‘동아시아 주민’들은 자주 ‘멘붕’에 빠져든다. ‘성찰적 주체 형성’이라는 단어를 쓴 내 논문이 낯설어지려 한다. 세상이 굴러가는 모양이 점점 요상해지는 것을 감지하고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왔다. 정치의 시대를 지나 여성과 문화의 시대가 올 줄 알았는데, 지금 우리는 DNA가 달라진 듯 육화된 자본의 화신들과 생존 가능성에 대한 불안으로 죽은 척 겁에 질린 좀비들이 득실거리는 시대와 만나게 됐다. 그렇다면 가족도 학교도 붕괴된 상황에서 우리는 결국 마을에 모여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마을의 핵심은 내가 강조해 온 자율 공간, 그 다양한 창조적 공동체일 것이다.
오랜 세월, 나는 참 많은 어른과 아이들을 ‘망태 할망’처럼 부지런히 불러 모았던 것 같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는 아름다운 가사를 가진 노래가 있는데, 나는 누군가와 만나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으면 사는 느낌을 갖지 못하는 존재로 생겨난 듯하다. ‘사회’ 자체가 소멸되어 가는 지금, 그래서 나는 숨 쉬기가 힘들다. 릴케의 “나는 잘못한 것이 아닌 게 아닐까”라는 말과는 달리, 나는 요즘 부쩍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닐까”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질문도 오래 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혼자 한 것은 없었으므로, 내가 혼자 잘할 수 있는 것도 없었으므로. 그것은 우리들이 잘못한 것이고, 그러니 우리들이 고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만남은 일시적이다. 그러나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불현듯 어디선가 다시 우리를 만나게 해 주기도 한다. 나는 한 살 반이 된 손자 ‘장자’가 ‘책 읽는 목수’, ‘음악 하는 농부’로 자라나길 기도하며 그가 자랄 창조적 공동체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가 ‘기도’와 ‘노동’의 즐거움을 아는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 내 외할아버지처럼 뒷짐을 지고 마을을 둘러보는, 마을에 도움이 되는 지혜로운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 나는 동네 부엌에서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영화를 같이 보고 이런저런 동네 싸움을 말리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얽혀 사는 소리를 노랫소리처럼 들으며 지내고 싶다. 미처 짝을 만나지 못한 청년들이 짝을 만나는 파티도 열어 볼 생각이다. 그렇게 몸에 힘을 빼고 시간의 향기를 맡으며 따뜻한 만남을 계속 이어 갈 생각이다
여행 중 주워 온 엽서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consult not your fears
but your hopes and your dreams
너의 공포와 상의하지 말고
너의 희망과 꿈과 상의하라
나는 이 말을 달리해 본다.
consult not your fears, not your hopes nor your dreams
consult your friends
너의 공포와 상의하지 말고 너의 희망과 꿈과도 상의하지 마라
네 친구와 상의하라
2013년 10월 21일
무주 구름샘 마을에서
2023년 5월 24일
선흘 볍씨 마을에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