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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소감

조한 2023.11.20 05:38 조회수 : 159

수상소감 201120

 

삼성 행복 대상 수상 소식에 40여 년 전이 떠올랐습니다. 취직을 위해 여학생들은 결혼 퇴직각서를 써야 했고, 동료 남사원보다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 청소를 하고 복사와 커피 심부름을 했던 때였습니다. 우리는 커피 카피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의식화운동에 열을 올렸고, 안전한 밤길 걷기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태아 감별이 가능해지면서 늘어난 여아 낙태를 줄이고자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을 시작했고 호주제 폐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회사도 군대의 연장선상이었고, 여성은 열외였던 시절이었죠. 한편, 공동 육아를 통해 내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을 함께 키우며 육아가 부담이 아니라 기쁨임을 알아갔습니다. 크고 작은 장애물을 없애고 우정을 쌓아간 덕에 딸들은 안채(가정)에서 바깥채(사회)로 눈부시게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여자들이 없으면 부서가, 회사가, 국가가,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돌봄과 소통에 능한 여자들이 사회로 진출하면 나라가 바로 설 것이고, 그들이 비운 자리를 남자들이 채우게 되면 조화로운 세상이 오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청춘 남녀는 사랑을 나누기보다 반목하고, 한국은 출산율 세계 최저를 기록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주류 사회에서는 손자병법을 익힌 남자들이 여전히 게임을 주도하고 있고, 폭력의 전시를 통한 서열화는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문화인류학자 김현미는 최근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라는 책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즈음 신자유주의 돌풍이 불었고 능력주의를 신봉하게 된 여성들이 일터에서 개별적 사투를 벌이게 되는 현상을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승자독식 사회에서 살아남을 것을 종용받으며 자란 소년 소녀들은 불평등 구조를 문제시할 시각도, 구조에 맞서 싸울 동료를 만들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성장하게 되었지요. 강남역 살인 사건과 미투 운동을 계기로 전환의 시급성을 알아차린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연대 활동보다 개별적 생존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현실입니다.

 

인류가 각자도생의 길을 비틀거리며 걷게 된 것은 불과 몇백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화인류학자 세라 허디는 직립보행으로 생존율이 낮은 사피엔스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협동 번식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적 출산공동육아덕분에 인류는 돌봄과 소통의 달인이 되었고 그 관계망 안에서 서로를 채워주며 안전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다정한 존재입니다. 어릴 때부터 특별한 훈련 없이도 다른 사람들의 곤경을 보면 도움을 주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며 상대의 마음을 읽으려 하지요. 유한성과 취약함이라는 삶의 조건을 상호 돌봄을 통해 승화시킴으로 인류는 자신의 본성을 실현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주문처럼 외웁니다.

적자생존은 틀렸다. 다정한 자가 살아남는다!”

재난이 파국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의 부재가 파국이다.”

 

얼마 전 손녀와 실버스타인의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헌신적인 나무에 관한 이야기죠. 저는 늘 나무와 동일시 하면서 감동에 겨워했는데 이번에는 끝없이 요구하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이 소년은 뭐지? 그간 우리는 이런 이기적인 소년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있었던 걸까? 아낌없이 주는 이 계신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낌없이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운동은 단순한 권리 찾기 운동이 아닙니다. ‘생산/체계에 치중하여 재생산/생활세계를 위태롭게 만든 가부장제를 넘어서는 것, 상호 돌봄의 실천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지속가능한 삶을 물려주려는 운동입니다. 여기서 돌봄은 노동이자 윤리관이고, 감정이자 사유의 원리입니다. 이제 그 원리와 능력을 남녀 모두가 발휘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라고들 하지만 저는 꽃은 시들면 열매를 맺고 사람은 죽으면 사랑을 남긴다라고 말합니다. 지구 생명학자 해러웨이의 말처럼 망가진 행성에서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키우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서로의 삶에 기꺼이 개입하여, 살고 죽는 것에 대한 감각을 키워가야 합니다.

 

삼성생명공익재단에서 이번에 주시는 상금은 상호 돌봄의 세상을 만들어간 그간의 여성운동을 기록하고 전승하는데 쓰려고 합니다. AI 시대를 살아갈 사피엔스의 후예들이 서로를 살리는 존재로 비상할 나침판과 지도를 만들려는 것이지요. 재단에서는 지난 11년간 88명의 수상자에게 20억 원의 상금을 수여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20억도 좋고 200억도 좋습니다. 삼성생명공익재단에서도 경쟁과 적대, 전쟁과 폭력의 세상을 넘어서려는 활동을 지원하고 아카이빙 하는 데 아낌없는 지원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자리에 서니 감사할 분들이 많습니다. 40년 전 커피 카피노래를 함께 불렀던, 이제는 할머니가 된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생들, 자매애로 충만했던 <또 하나의 문화> 동인들, 세대가 어우러진 마을을 만들어낸 <하자 센터> 동료들과 <소녀들의 페미니즘> 친구들, 걱정과 음식을 나누며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인 세상에 살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볍씨 마을><레이지 마마> 이웃,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 모두에게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 청소년 상을 받는 최별, 김선애, 오효정, 리안 티안 눈, 백혜경,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 학교를 빼먹고 이 자리에 온 손주와 친구들, 그대들이 우리의 기도이며 희망입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마련하느라 수고하신 관계자분들, 그리고 다정한 기억으로 축하해주러 오신 친지들, 감사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우정과 환대의 마을을 만들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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