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경 컬럼 20231101
"생각이 너무 많고 무기력해요.", "다른 사람이 어떤지는 관심 없고 자기주장만 해요. 그러면서 억울하대요." 이는 진료실을 찾는 당사자 혹은 그 가족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고통 중 하나이다.
삶의 허무는 성경에도 기록된 오래된 인간의 화두이며, 개인주의 역시 근현대 문명의 흐름에서 자연스레 강화된 이념이자 생활양식이다. 하지만 이는 갈수록 매우 병리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 신화>의 첫 장에서 인간의 유일한 철학적 주제가 자살이라고 했다. 우리는 왜 자살하지 않을까?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이의 해답은 타인에게서 주어질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본질적 질문의 막막함과 무게에 짓눌려 생각의 늪이나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하지 않는 시간이 가장 많아진 현대인이 이 질문에 가장 크게 압도된다. 그리고 정신의학은 이들을 제대로 돕고 있지 못하며, 가정, 학교, 종교 단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 이럴까?
어쩌면 이유는 '나는 누구이며,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괴리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많은 이들이 그저 남들 하는 대로 따라 살며 공허하고 불안해한다. 우리에게 만남, 공부, 일은 일상과는 동떨어진 꾸밈이요, 기술이 되었다. 아름답게 가꾸거나 높은 수준의 능력을 갖출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저 근본적인 질문이 전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의 공허와 우울, 쓰라린 자괴감과 무가치감은 약으로 치유될 수 없다. 약은 그 괴로움을 잠시 둔화시켜서 시간을 버는 데 의미가 있다. 그리고 부모, 교사, 정신과 의사, 상담가, 종교 지도자의 어떤 멋진 말도, 이 글도 당신을 치유할 수 없다.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해답을 가장 오래도록 제시해온 것은 종교이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동학 등의 고등 종교들은 신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 내 안의 부처, 참나, 사람이 곧 하늘로 인간을 묘사한다. 즉, 인간은 본래 선하고 아름다우며 지혜롭고 존귀한, 그 무엇에도 손상되지 않는 온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치유란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 다시 말해 신·부처·하늘과 접속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뭉클한 이야기인가. 그런데 왜 이런 훌륭한 종교 역시 인간의 구원에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까?
치유는 언어를 포함한 특정 능력이나 물질의 차원이 아닌 존재 전체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이 근원적 질문을 자신의 일상에 적용하며 살았고, 부분이 아닌 전 존재로 진실하게 자신과 타자를 만났다. 본연의 존귀하고 온전한 자기를 산 것이다. 그래서 그분들의 말과 삶은 생명력이 있고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의 가치 입증과 성취를 위해 스스로를 도구화하고 소외시킨다. 당연히 일상은 귀찮아지고 타자 역시 소외된다. 하지만 전 존재가 실리지 않은 말, 글, 행위, 능력은 자신을 치유하지도 타인의 치유를 돕지도 못한다.
부모, 교사, 정신과 의사, 상담가, 종교 지도자, 정치인,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일상에서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도울 것인가? <신윤경 봄정신건강의학과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