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퍼거슨
P.33~34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의 지적은 기억해둘 만하다. 그는 전체 인구 중 극히 일부인 안정적인 도시 노동 계급의 생활방식이 순식간에 (어찌 되었든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있듯) 모두의 미래로 제시되어버렸다고 말하면서 20세기를 ‘노동자의 세기the century of laboring man’로 회상한다.
스탠딩이 주장하듯, ‘노동자의 세기’가 종말을 맞이했다면, 그 이유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안정적인 임금노동자가 사라진 탓이 아니라, 지구적 성장과정에서 더는 임금노동을 보편적인 해결책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급망과 노동시장이 세계화되면서 노동 계급의 조직력이 약해지고,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과 재정 긴축 탓에 구조적인 실업과 비정규직화가 지속되고 있으며, 최근의 기술발전이 임금노동의 전 분야를 대체하거나 대폭 축소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오랜 기간 이어져왔던 전환 논리는 이제 설득력이 없다.
[분배 정치의 시대]에서 나는 생산 시스템에서 역할을 맡지 못하고 배제된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제안할 수 있는 대안적인 좌파 전통이 풍부하게 이어져왔음을 제시했다.
무정부주의 공산주의자인 피터 크로포트킨의 경우, 분배에 관한 보편적인 요구와 분배 정의의 개념은 노동이 아닌 궁극적으로 사회적인 성원권에서 출발함을 항상 주장해왔다.
넘쳐나는 우리의 부는 어디서 온 것인가? 이전 세대보다 우리가 훨씬 더 생산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그들보다 뛰어난 인종이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더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100년, 아니 1,000년의 인류역사를 거치면서
세대를 이은 노동과 희생, 발평으로 건설된 거대한 지구적 생산조직을 통해 그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거대란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백만명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 거대한 부를 생산하는 조직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현 시점에서 소리 높여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기업의 주주들만은 분명히 아니다.
그 조직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상상하고 고통받고 피흘린 모두의 후손들, 간단히 말하면 우리 모두의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생산과 관련된 모든 체계는 통합된 유산이다.....노동자들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 즉
우리 모두가 거대한 공동자산의 상속자로서 지분을 가지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유산은 노동에만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피흘리고, 창의력을 발휘한 함꼐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가치의 원천은 사회전체인 것이다.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