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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또문에 글쓰기 - 동인지, 이어 쓰기의 시작

조한 2026.01.10 17:58 조회수 : 0

<또문소식 12>을 읽고-동인지, 이어쓰기의 시작

 

월간 <또문 소식> 12월호가 왔다. 흥미로운 에세이도 여럿 딸려 왔다. 읽으면서 내 마음에 들어온 단어들을 꿰며 오랜만에 또문 식 수다를 좀 떨어보려 한다.

 

어쩔 수가 없나

 

1983년 동안 모임 창립 때부터 함께한 반하라(박혜란)가 툴루즈에서 보내온 글을 보하니 왠지 올해는 또문에 반가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는 운동권이 되지 않으면 맹비난을 받던 대학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또문 활동에 참여했던 학부생 막내 동인이었다. 동인지 창간호에 <애정의 조건>에 대한 영화평을 썼던 것 같은데 이번엔 앤더슨(PTA) 감독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을 보고 영화에 드러난 주류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을 대해온 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왔다. 나 역시 임신한 여주인공을 관능 덩어리로 그려낸 장면에서 기가 막혔다.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반하라는 영화의 실제 모델인 블랙팬서 당수 일레인 브라운은 당을 떠나 독자 조직을 만들었고 여든한 살이 되는 지금도 흑인 여성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주거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올해는 이런 이야기가 들어있는 그녀의 독특하고 해박한 영화평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1986)을 보고 심한 악몽에 시달렸었다. 네오 누아르 영화는 이제 끊으려 했는데 하도 난리들을 쳐서 박찬욱의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말았다. 현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거나 폭력 미학의 거장이라거나 미장센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는데, 나는 로마제국의 거대한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던 검투사의 난투극을 보고 온 듯했다. 이번 소식지에 실린 김영옥의 말년성 개념을 지극히 범속하게 만들기라는 글에는 위대한 남성 단독자 주체라는 말이 나오는데 누아르 계 영화감독들이야말로 위대한 남성 단독자 주체의 극치 아닐까? 언제까지 이 폭력적 파괴 서사를 박수치며 봐야 하는 걸까?

 

또문 44

 

<또 하나의 문화>는 군부독재의 탄압이 거세지던 시대, 바로 그 위대한 남성 단독자주체들의 싸움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을 때 태어났다. 동인들은, 특히 고정희 시인은 밤새 시를 쓰고 낮에는 가투에 나갔고 나는 교수 성명서를 작성하고 잡혀간 학생들의 선처를 부탁하러 검사를 만나러 다녔다. 자신을 회색 인간이라고 부르면서 자살한 학생이 생겨났고 성폭력 사건은 묵인 방조 되던 시대였다. “그날이 오면모든 것이 다 해결되리라는 종말론적 정동, ‘무기력한 대화주의라며 소통의 힘을 부정하는 힘의 논리, 거대한 구원 서사가 압도하던 때였다. 또 하나의 문화는 그 세계에서 한발 비켜나서 폭력 이후의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문 동인들은 탈주자들이었다.

 

동인들은 조용히, 별일 아닌 듯 다른 이야기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대표도, 구원자도 될 의사가 없는 동인들은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골몰했다. 동인들은 보편객관을 위장한 거대서사를 멀리하고 작게 쓰기를 시도했다. 보편적 지식이 아니라 상황적 지식, 총체적 진실이 아니라 부분적 진실을 찾아 나섰다. “나는 이 위치에서 이 몸으로 이만큼만 말한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너의 이야기가 이어지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말을 걸며 자율 공생의 서사를 써 내려갔다. 동인들의 수다는 편집회의를 거친 동인지로 출간되었다. 동인지는 독서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또문은 흑자를 내는 출판사도 갖게 되었다. 일본과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부러움을 샀던 기억이 있다.

 

2000년 전후에 본격적인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면서 돌풍이 불어닥치면서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 동인지 마지막 호인 17호가 나간 것은 2003, 또문 소모임도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부자 되세요” “성공하세요라는 말을 대놓고 하는 시대가 왔고 여성들은 사회로 나가 돈을 벌고 사회적 성취를 이루고 꿈꾸던 결혼 생활을 완성하고 자아실현을 하느라 바빠졌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이 시대를 잘 그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고 이제 그들은 조금 놀라고 많이 지쳐서 으로 돌아오고 있다. 가수 화사가 굿 굿바이를 부르는 모습에서 나는 슬기롭게 이별을 고하는 법을 익히며 판을 떠나가고 있는 여자들을 본다. 그녀들은 이제 더 이상 남자 세상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페미니즘이라는 기표가 얼음땡놀이의 얼음!’이 되어버렸다는 정희진의 <여성주의의 쓸모> 칼럼을 읽으며, 또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을 자랑하는 스웨덴의 중도 당 대표 안나카린 하트는 취임 5개월 후 혐오와 위협으로 더 이상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사임했다는 소식 (여성신문 2025, 12.25 최연혁의 북유럽 리포트 하트가 남겨놓은 숙제”) 을 접하며, 폭력과 혐오의 시대를 전환하려면 특별한 상상력과 마술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동네 비건책방 주인 문문

 

우리 동네 비건책방 주인 문문은 이른바 4B (4) 세대로 결혼’, ‘연애’, ‘’, ‘출산에는 별 관심이 없고 비인간 존재들과의 친밀한 돌봄이면 족하다.각주1) 파국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울감으로 허우적대는 나를 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고양이도 안 키우고 덕질도 안 하잖아요? 어떡해요!” 문문과 그의 친구들은 고양이를 키우는 느슨한 가족이며 부지런히 덕질을 하면서 유쾌하게 지낸다. 다큐 제작도 하는 재주꾼 문문은 요즘 주인집에서 책방을 빼라고 해서 골이 좀 아프지만 바뀐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 있어서 그나마 안심이라고 한다.

 

그녀는 수시로 책방 북토크 행사를 열어 주변 사람들을 두루두루 연결하고 동네 인문학 수준을 높여주는 역할도 한다. 계엄령 사태 때 문문과 친구들은 여의도로 달려갔는데 그렇다고 국가에 대한 기대는 없다. 여성들에게 출산하라고 윽박지르고 교재 살인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국가를 누가 믿냐고 반문한다. 그녀들은 폭력에 맞서기보다 그 회로에서 이탈하는 중이다. 브라이도티가 말한 거리두기 distancing 말려들지 않기 disengaging 독 빼기 ditoxing”를 실천하고 있다.

 

지난번 소식지에 김은실은 <은중과 상연> 드라마는 결국 여성들 간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이며 여자가 여자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마지막에 죽음 조력자로 요청되는 과정에서 여성들 간의 관계에 대한 책임과 응답, 돌봄에 관한 대화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드라마를 보는 내내 여성, 모성성 그리고 공평성, 정의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면서 그런 이야기를 더 하자고 했다. “남자를 의식하지 않고 말하기”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는 그간 또문에서 가장 활발하게 해왔던 활동이다. 2의 여성해방의 물결은 성차가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시작했지만, 사회생물학적 성차는 있고 그 외 많은 차이가 있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존속한다면 그것은 바로 폭력적 세상으로부터 거리두기의 정치를 시작한 4B 세대 덕분일 것이라고 나는 미리 말하고 싶다.

 

다시 집으로

 

4B 운동은 연애 거부가 아니라 폭력적 친밀성의 거부이며 집단적 거리두기의 정치다. 이 운동이 취하는 하지 않음의 정치비재생산적 연대분리주의사회적 모성을 이야기해 온 또문 운동과도 통해있다. 차이가 있다면 또문 운동은 1980년대 여성들이 전통적 대가족제도에서 벗어나 분홍빛 미래를 그리며 사회로 진출할 시점에 지식인 중심 운동으로 시작했다면 2000년대 4B 운동은 남성 중심 사회에 직접 뛰어들었던 여자들이 남성적 폭력의 구조를 경험하고 돌아가는 운동이다.

 

어디로 돌아가나? “집으로 돌아간다.” 해러웨이의 표현을 빌리면 그 은 남성적인 기원(origin)이 아니라 여성적 얽힘의 장소이다. 그 집은 인간·비인간·기술·동물·기계·미생물이 얽혀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도망칠 수 없고 도망쳐서도 안 되는 관계망이다. “집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은 이 얽힘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 얽힘의 끊어버린 가부장제에 말려들지 않을 것을 천명하는 행동이다. 은 폭력의 흔적이 남아 있고 착취와 불균형이 구조화되어 있으며 인간의 행위로 훼손된 장소일 가능성이 높지만 우리는 그 세계를 버리지 않고, 그 안에서 다른 종들과 함께 다시 살아갈 방법을 찾아간다.

 

4B는 남자들을 위한 운동이기도 하다. 거대한 산업기술공화국을 만드느라 한바탕 전투를 치른 후 버려질 운명에 처한 남자들은 박찬욱의 영화제목처럼 참으로 어쩔 수가 없는상황에 부닥쳐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나 최근에 방영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에서 엿보이는 상호 돌봄의 세계가 아직은 조금 남아 있다. 이는 위계 서열과 패거리 문화와는 다르다. 남자끼리 경쟁이 아니라 친구가 되는 연습을 다시 해야 할 때다. 산업혁명 이후 핵가족과 연애결혼이 정착하면서 산업역군 남자들은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여자를 찾아내고 그로부터 적절한 서비스와 위로를 받으며 나름 잘 살 수 있었다. 이제는 그것이 가능한 물적 조건 자체가 변했다. 산업 사회 이전에 사랑채에서 그러했듯 남자들끼리도 서로 돌보고 지지하고 사랑의 표현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비명횡사하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네 선흘

 

조만간 나는 문문과 동네 책방에서 곧 또문 동인지를 읽고 이어쓰기를 하는 모임을 해볼 것이다. 전국 곳곳 책방에서 또문 읽기를 시작하는 꿈을 꾼다. 전국 지부를 내자고 했을 때 또문은 지부 같은 것은 안 차린다, 세 명만 모이면 자신들의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드시라라고 답을 드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전국에 있는 책방을 지부로 삼아 동인지 읽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페미니스트 영화의 고전인 마르린 고리스의 <안토니아스 라인> 영화를 볼 것이고 폭력 속에서도 얽혀 살아가는 삶을 섬세하게 그려준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 <우리 집> 그리고 <세계의 주인>도 볼 것이다. <올해의 여성 영화인 상>을 받은 윤가은 감독이 동료 영화감독들과 함께 한 GV를 우연히 봤는데 (윤가은, 김초희, 윤단비, 이옥섭, 임선애 감독) (관객과의 대화 | 20251026 https://www.youtube.com/watch?v=LjwYYXGX8zk) 그들은 어려운 팬데믹 기간에 상당한 시간을 함께 견디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순간을 회고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눈 환대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문 생각이 났다. 돌려가며 원고를 읽던 즐거운 편집회의, 글을 꼼꼼하게 읽고 수정·보완해 주던 선배와 친구들이 그리워서 울었다.

 

정말이지 동인지 글 어느 것 하나 혼자 쓴 것은 없다. 둘러앉아 수다를 떨면서 고치고 다시 쓰기를 수 차례, 함께 하는 기쁨과 진통을 거치고 나온 출산 물이 바로 동인지이다. 다시 그런 편집회의를 할 수 있을까? 실제 공간과 온라인으로 연결된, 세대가 어우러지고 지역이 어우러진 또문 편집회의를 상상해 본다. 동아시아 3국의 4B 현상을 다뤄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팬데믹의 우울함을 덕질로 이겨냈다는 박혜란 선생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생각해 보니 나도 몇 년 전 입덕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네 95세부터 80그림 할망’ 10인을 열렬히 덕질하고 있다. 도토리 철인데 허리가 꼬부라져 못 가시는 소막할망강희선 삼춘에게 산책때마다 도토리를 주워 조공을 바친다. ‘귀가 막혀기막힌 그림을 날마다 그리시는 신나는 할망,’ 로즈마리로 평화를 가져오는 초록 할망은 자주 차로 모시러 간다. <폭삭 속았수다> 홍보 영상을 찍은 인연으로 아이유도 할머니들 팬이다. 그녀는 각 할머니의 화풍에 맞춰 에르메스 스카프를 선물했고 여름에 냉장고도 사 보냈다.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을 골고루 사 갔고 그림을 걸어두니 잠이 잘 온다며 감사 편지를 보냈다. 다음 동인지 주제를 덕질의 세계로 잡아도 좋을 것 같다.

 

오래된 동인 정진경과 작년에 우리 곁을 떠난, 그러나 늘 우리 곁에 있는 괜찮아정병호가 대부도에 편집회의를 위한 공간 <담소재>를 마련해 두었다니 조만간 노구를 이끌고 육지 나들이를 해볼까 한다, 혹시라도 전국 책방에서 보내온 글들로 또 하나의 문화 18호가 나올지 누가 아나? -

 

 

각주 1) 4B란 비혼·비출산·비연애·비성관계를 의미하는 신조어인데, 손희정은 이를 차별과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청년 여성들이 선언한 재생산 노동 파업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쓰고 있다. (한겨레 21 <손희정의 정치 리부트> 2024.11.14.) 이 단어는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초 커뮤니티 사이트와 트위터 등에 돌아다녔는데 2018년 언론에 최초로 소개됐으며 2024년 미국 대선 이후 미국을 비롯한 해외로 확산되면서 한국 여성 운동의 주목할 현상으로 회자하고 있다. 위키 백과는 4B 운동을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급진적 여성주의 운동이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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