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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일 선생의 사회적 영성 탐구

haejoang@gmail.com 2023.03.02 12:21 조회수 : 63

경전을 확실하게 참조하는 지식과 믿음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

묵상 모임 멤버인 정경일 선생의 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 : 사회적 영성 이야기 06 

 

“신자유주의 : 전지전능하지만 사랑은 모르는 신”

 

공포의 신

여기  한 신이  있다. 모든  것을  알고(전지全知, omniscience),  모든  것을  할 수 있고(전능全 

能, omnipotence),  모든  곳에  존재하는(편재遍在, omnipresence)  신이다. 인격신관을  갖고 

있는  종교  전통이  믿고  고백하는  보편적  절대신이다. 이런  속성을  가진  가장  대표적인  신은 

아브라함계 종교 전통인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이 공통적으로 믿는 하느님이다. (이슬람 

의 ‘알라’는 ‘하느님’의 아랍어 표기다.) 이렇게 전지전능하고 편재하는 하느님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신적 속성은 전적 선함(全善, omnibenevolence)이다. 사랑의 하느님, 자비로우신 하 

느님이다. 그런데 이런 절대신이 선을 결여하고 있다면, 사랑을 모른다면 어떨까? 아마도 끔 

찍한 공포의 신일 것이다.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2015년 작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전지전능하지만 선하지 않는 신 

에 대한  풍자적  영화다. 영화가  묘사하는  신은  “빵은  잼을  바른  면이  꼭 바닥에  떨어진다”, 

“마트에서 계산할 땐 항상 옆줄이 더 빠르다”와 같은 ‘짜증의 법칙’으로 재미 삼아 인간을 골 

탕 먹이고, 이유 없이 재난을 일으켜 괴롭히고, 아내인 여신과 아들 JC(Jesus Christ), 딸 에 

아(Ea)를 억압하고 폭언을 일삼는 성질 고약한 가부장적 신이다. 전지전능하지만 선도 사랑도 

모르는 신에 딱 맞는 캐릭터다. 이런 난폭하고 냉혹한 신에 반항하는 에아는 오빠 JC처럼 사 

도들을 모아 사랑의 세계를 재창조하려고 한다. 그래서 영화의 프랑스어 원제목은 “완전히 새 

로운 신약성서”(Le Tout Nouveau Testament)다.

영화 바깥 실제 세계에도 난폭한 신이 하나 있다.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의 핵심 교리는 

“시장이 가장 잘 안다.”(전지)라는 것과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전능)라는 것이다. 그 

러니 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정부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정부 자체가 

문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정부는 쓸데없이 시장을 규제하지 말고 경제는 시장에 맡겨 두 

라는 것이다. ‘작은 정부’, ‘자유 경쟁’, ‘규제 완화’와 같은 신자유주의 신념은 시장의 전지전 

능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산물이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세계화를 통해 지구촌 어느 곳에나 

존재(편재)한다. 심지어 공산당이 통치하는 중화인민공화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오늘의 중국은 

사실상 ‘국가 신자유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 문제는 이 신자유주의가 전지전능하고 편재하지 

만 선과 사랑은 결여한 신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신자유주의 절대신을 숭배하는 인간은 행복 

할까?

신자유주의 시대의 ‘레 미제라블’

전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신자유주의를  정착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정치인이다. 

“사회라는 것은  없다. 개인과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그의 발언은  신자유주의의 속성을 

극명하게 나타낸 말로 널리 회자되었다. 또한 대처는 1981년의 한 인터뷰에서 “경제는 방법 

이다. 목표는  마음과  영혼을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하나의 

경제이론이  아니라  세계관이며  이념이며  생활방식임을  가리킨다. 신자유주의  생존게임장에서 

경쟁하며 살아온 수십 년 동안 인간의 마음과 영혼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세계는 어떤 곳이 되었을까?

첫째, 신자유주의 절대신은 모든 곳을 시장으로,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시장은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이다. 시장은 상품을 더 비싸게 팔려는 상인들과 그것을 더 싸 

게 사려는 소비자가 흥정을 벌이는 장소다. 상인이든 소비자든 결국 이익을 좇아 거래 행위를 

한다. 물론  이는  신자유주의  이전, 아니  자본주의  이전  사회들에서도  존재했던  시장의  기본 

성격이며 원리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시장과 시장 아닌 곳이 어느 정도 구분 

되어  있었다. 경제적  이익  추구를  최우선적  가치로  삼지  않아도  되는  삶의  영역이  존재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정치나 교육이나 복지나 종교나 예술과 같은 인간 삶의 영역은 자본과 시 

장의 논리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돈에 지배되지 않는 사회적 공공성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함께 사회의 모든 영역이 시장으로 탈바꿈했다. 교육의 경우를 

보면, 오늘의 학교는 경쟁력  있는 산업예비군을 양성하는 직업학교로  변형되었다. 물론 표면 

적으로는 인성교육의 가치를 여전히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교사도 학부모도 학생을 경쟁력 있 

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스펙  쌓기에  몰두한다. 이제는  시장  논리를  노골적으로 반영하는 

‘교육  시장’,  ‘교육  산업’,  ‘교육  투자’,  ‘교육  서비스  사업’,  ‘학원  재벌’ 같은  용어들이  교육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다. 고등학교도 대학도 학생의 인격 함양보다 취업 역량 형 

성과 강화에 더 열중한다. 학교는 ‘교육 소비자’인 학생의 마음과 영혼을 신자유주의적 인간형 

에 맞게 바꾸고 있다. 그래서 교육시장에서도 ‘믿음’이 필요한 걸까.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 

서 대입 코디네이터 김주영은 불안에 빠져 있는 예서 어머니 한서진에게 말한다.

“어머니,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저를 믿는다는 건... 어떤 상황이 오든 두려워하지 않 

고 반드시 최고의 결과를 보리라 기대하시는 겁니다.”

“네, 선생님! 믿어요, 믿고 말구요!”

시장화는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신이 통치하는 세계의 인간은 언 

제 어디서나  경쟁하며 살아간다. 치열한 입시경쟁, 취업경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더 비 

싸게 더 잘 팔리는 상품이 되기 위해 끝없이 자기계발에 골몰한다. 노동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고용 불안정이 초래한 무한경쟁 현실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계발 경쟁의 파괴적 결과 

는 극단적  개인주의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철저히  개인의 책임이다. 사회 

적, 구조적 문제로 인한 고통도 경쟁력 있는 상품이 되지 못한 개인의 탓이다. 노력이 아니라 

‘노오력’을 해도 안 되는 세상의 ‘비참한 사람들’(Les Misérables)은 사회의 불의를 비판하지 

않고 자신들의 불운을 한탄한다.

둘째, 신자유주의 신은 모두를 자신의 헌신적 추종자, 자발적 공모자로 만들었다.

종교의 생명력은 신자의 믿음과 헌신에 있다. 종교적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헌신적 신자가 

많을수록 그 종교는 생기를 띄고, 그렇지 않을 때 활력을 잃는다. 붓다나 예수나 무함마드와 

같은 위대한 성인들은 진리에 대한 전적 헌신을 체현했고, 같은 헌신을 제자들과 신자들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진리에의 헌신은  세상의 질서를 거스르는 길이고, 따라서  위험하고 고단한 

길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진리  아닌  것과  타협하고  진리를  배반한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을 뜻한다면  그리스도인 중에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 

까? 불교도  이슬람도  유교도  마찬가지다. 종교의  역사는  끝없는  자기배반의  역사다. 그래서 

개혁이 필요할 때마다 ‘원천으로’(ad fontes)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무튼 종교적 진리에 대한 전적 헌신은 신앙인에게는 버겁고 두려운 십자가다.

그런데, 거의 모든 신자의 전적 헌신을 끌어내는 데 유일하게 성공한 종교가 하나 있다. 자 

본주의가 그것이다. 유발 노아 하라리는 자본주의를 “추종자들이 그들이 하도록 요구받은 것 

을 실제로 행하는 역사상 최초의 종교”라고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종교로 본다면, 인류 역 

사상 자본주의만큼 광범위하면서도 강력하게 신봉자의 전적 헌신을 실현한 종교는 또 없을 것 

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종교의 가장 극단적인 근본주의  교파다. 고전적 자유주 

의자인 애덤 스미스가 오늘의 신자유주의를 본다면 그것을 ‘이단’이라고 규정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현대 신자유주의의 주창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나 밀턴 프리드먼이 보기에는 존 메이 

너드 케인스 등의 수정자본주의야말로 위험한 이단일 테지만….

신자유주의는 모든 사람을 헌신적 추종자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자발적 공모자로 만들었다. 

신자유주의는  강요하지  않는다. 불안을  이용해  은밀하게  유혹한다. 오늘의  경쟁하는  인간은 

신자유주의가 치밀하게 설계해 놓은 ‘서바이벌 게임’, ‘데스 게임’의 희생자일 뿐만 아니라 공 

모자다. 홀로 생존자, 승리자가 되기  위해 타자를 이용하고 배신하고  낙오시키며 자발적으로 

서로 경쟁한다. 그래서 잔혹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한때의 ‘깐부’였던 001번 오일남은 진 

실을 깨닫고 자신에게 항의하는 456번 성기훈에게 싸늘하게 말한다. “나는 아무에게도 이 게 

임을 강요한 적이 없어. 자네도 제 발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나.” 

절망은 그 자신을 반성하는가?

2016년, 조너선 오스트리 등 IMF 경제학자 3인이 공동 작성하여 발표한 글이 큰 국제적 반향 

을 불러일으켰다. “신자유주의는  지나치게  많이  팔렸는가?”(Neoliberalism:  Oversold?)라는 

글이다. 이 글은 제목부터 이례적이다. 그 이름의 부정적 뉘앙스 때문에 신자유주의를 주창하 

는 사람들도 스스로를 ‘신자유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데―스스로를 ‘자본주의자’로 부르는 이 

들이 많지 않은 것처럼―신자유주의의 대표적 국제 조직인 IMF 소속 경제학자들이 ‘신자유주 

의’라는 용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글의 내용은 더욱 논쟁적이다. 필자들은 자본 

의 과도한  자유와 ‘작은  정부’의 지나친  긴축재정, 그리고  그로  인한  불평등을 신자유주의의 

내재적 문제라며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을 신자유주의자들의 ‘반성문’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반성은  잘못의  인정만이  아니라  행동의  전환을  요구한다. 『레 미제라블』의 

난폭한 장 발장은 미리엘 주교를 만나 회심한 후 마들렌 시장이 되어 자비를 실천하며 살았 

고, 냉혹한 쟈베르 경감은 “주고받는 친절, 헌신, 자비, 관용, 엄혹함을 자제시키는 연민, 배 

려, 영원한 단죄의 근절, 저주의 근절,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법의 눈, 인간의 정의에 역행하는 

무엇인지 모를 신의 정의”에 눈을 뜨고 죽음으로 참회했다. 쟈베르에게도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근본적  반성과  전환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신동엽 시인은 〈절망〉이라는 시에서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 

하지 않는다.”라고 썼는데, 오늘의 신자유주의도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체제는 스스로 반성하지도 바뀌지도 않는다. 인간이 체제를 바꾼다. 체제를 바꾸기 위해서 

는 인간의 의식 전환과 삶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종교의 존재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대 

한 종교들은 하나같이 탐욕과 폭력과 무지의 길에서 돌아설 것을 가르쳤다. 맘몬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신앙과 삶의 원천으로 삼는 그리스도교는 더욱 그 

렇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의식 전환, 체제  변화를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

전환과  변화의  출발점은  경제적  시장  논리로  환산되고  환원되지  않는  인간 삶의

자비롭고 정의로운 영역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선 종교부터 전지전능하지만 선과 사랑은 

모르는 신자유주의의 통치로부터 해방하는 것, 그것이 사회적 영성의 기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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