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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축제 축하글

조한 2024.03.24 19:41 조회수 : 0

연세대 2024321일 연세대 제 4회 인권 축제에 부치는 글

 

- 조한혜정

 

백양로에 오랜만에 오니 낯섭니다. 그런데 인권을 이야기하는 이 자리에 서니 타임캠슐을 타고 온 듯 하네요. 낯설면서 익숙한 이 자리에 초대해주어서 고맙습니다.

 

대학생들이 사회에서 가장 인권 의식이 높았던 때가 있었죠. 내가 막 연세대학교에 부임한 1980년대에는 학생들이 교내 곳곳에서 역사와 사회구조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고 인권공부에 열중하던 때였어요. 캠퍼스 잔디밭은 사복을 한 군인들이 퍼져 있었지만 학생들은 전공수업을 빼먹고 빈교실 곳곳에서 인권 세미나를 하고 거리 투쟁, 이른바 가투를 벌이기 위해 준비를 했지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인권을 얼마나 박탈하는 체제인지 공부하면서 인권을 탄압하는 군부 독재 정권을 물러나게 할만큼 힘을 키웠고, 1987년 군부 독재 정권의 항복을 받아낸 것은 여러분도 알고 있는 일일겁니다. 이렇게 인권에 눈을 뜬 학생들은 인권운동을 확장해갔습니다. 월경 페스티발과 성정치 문화제를 열기도 하고 <두 입술>이라는 여성주의 잡지도 펴내면서 남녀 평등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어갔아요. 장애인 인권 동아리 게르니카와 성소수자 동아리 컴투게더가 대학가 최초로 결성된 것이 1995년 즈음, 그러니까 30년 전이네요. 2012년 연세대 학생 87%동성애 인정한다는 애널스 서베이 (표본 1002명 조사) 발표가 있을 정도로 대학은 인권 감수성을 드높히는 선진적인 큰 배움터였습니다. 이 즈음에 등록금 반값 투쟁으로 학생들이 백양로를 가득 메웠던 광경도 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는 그런 대학 내 인권운동이 어떤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입니다. 인권운동의 입지가 그리 넓지 않은 것 같은데 지난 십년간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나는 1997년 한국이 IMF 사태를 겪으면서 이 흐름을 거스러는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다 함께 잘 살아야 보자는 공생적 세계관은 퇴조하고 혼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약육강식의 세계관이 우세하기 시작했지요. “하나만 잘하면 대학 간다며 개성중심 교육을 선언한 교육부 장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입시 전문가들과 협업하여 명문대에 자녀 보내기 작전에 전력투구하는 부모들이 입시교육을 주도하기 시작했지요. 2000년대 들어서서 이웃 대학 총장님이 우리 대학에 와서 명품 인재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특강을 하셨습니다. 나는 농담인 줄 알았지만 곧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배제와 탈락의 정치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꽃들에게 희망을> 우화에서처럼 어떻게든 꼭대기에 올라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부모와 학생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지요.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과 자신의 체력이 당락을 좌우한다는 불공정한 경쟁을 공정한 경쟁이라고 믿고 모두가 명문대 입학을 위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이 삶의 근본적 취약함과 유한성을 외면하고 돌진하기를 명하는 곳이 된 지 십여년이 되었고 이 분위기는 얼마간 지속될 것 같습니다. “한번 탈락하면 끝이라는 불안을 안고 만인을 경쟁상대로 삼으며 성장한 이들에게 인권’ ‘공존’ ‘상생의 가치는 추상적 단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 이 자리, 인권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참 귀한 자리이면서 쉽지 않은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상적인 시민이란 자율적이고 기업가적이며 실패를 모르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의 승승장구는 복지국가의 해체, 그리고 민주적 제도와 시민 참여의 와해를 정당화한다.” 영국의 학술모임더 케어 컬렉티브에서펴낸 [돌봄 선언] (2021 : 29)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인간의 취약성과 상호연결성을 외면하면서 살아남은 신자유주의적 시민들에게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불편하고 위험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권을 이야기하려면 대단한 혜안과 세심한 작전이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폭력의 집중화가 진행된 인류 문명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인간 반려종이나 인공지능의 존재를 염두에 둔 성찰이 필요하지요. ‘인권개념을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인데 현재의 대학이라는 곳이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좋은 자리인지, 만일 이곳에서 해야 한다면 어떤 언어로 어떤 방식으로 판을 벌일 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주최측에서 이미 이런 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이런 복잡한 생각에 나는 발랄한 축하를 하지 못하고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내년 인권축제의 주제를 <적자생존은 틀렸다. 최후의 생존자는 친화력이 좋은 다정한 자였다> 라거나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 정도로 하면 어떨까요? “재난이 파국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의 부재가 파국임을 알아차린 이들이 모여 공감과 연대의 장을 벌이자는 것이지요. 아렌트(1906-1975)는 일이차 대전을 겪은 후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권리의 소유자로 규정함으로써 공적 영역의 황폐화를 초래했다. 그 결과 인간은 전체주의 체제의 야수적 지배를 경험했고, '경제인'(homo economicus)으로서 시장의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어서 그는 전체주의는 외로움은 기반으로 삼는다. 나치즘 추종자들의 주요 특성은 야만과 퇴행이 아니라 고립과 정상적 사회관계의 결여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학가의 인권 축제는 이런 폭력적 문명과 인간 존재의 근원적 취약함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망가진 행성의 비운을 함께 살아내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요즘 나는 도나 해러웨이의 책을 읽으며 주문처럼 문장을 외우곤 합니다. “망가진 행성에서 책임을 지고 살아가기” “곤란함을 살아내기서로에 대해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정치적 전망을 구상하고 살고 죽는 것에 대한 감각을 배양하기, 공동으로있기 being-in-common(에스토지토), 집으로 돌아가기, 이야기하기, 응답-능력 기르기, 상대가 지닌 능력을 북돋우려는 관심, 이런 단어들을 실천하려고 애씁니다. 희망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인 세상. 우정의 세계를 짓는 것이 지금 시대 인권 축제의 장에서 우리가 할 기도이며 노래일 것입니다. 인간은 실체든 속성이든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서만 존재한다는 인식, 자아는 관계이며 환대의 장소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지속가능한 삶의 감각을 익히게 될 것입니다. 내년에는 내가 남에게 도움을 주는 과정 자체가 자기 존재에 대한 감각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알아차리며, 그 기쁨의 실천을 통해 우리가 비로소 살아가는 감각을 회복하게 된 것을 자축하는 축제를 기대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우리는> 서로 돌보고 우정의 감각을 익히며 지속가능한 지구살이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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