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며 그리고 환대하라
아르떼 컬럼 2022 04
<머물며 그리고 환대하라 : 마을의 기도하는 예술가가 되어야 할 시간>
지난 선거 기간에 나를 가장 우울하게 한 것은 여고 동창 카톡방이었다. 추억의 팝송이나 감동적인 동영상을 나누는 한가로운 방이었는데 선거 기간 즈음해서 혐오와 적대에 가득한 가짜 뉴스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가부 예산이 31조로 국방 예산과 같고, 여가부의 본질은 “좌파 교육”이라는 글도 있었다. 여가부 예산은 1조 4천억 원, 국방부 예산 54조 6천억 원의 2% 정도로 사실상 여가부는 예산이 없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손녀들이 ‘몰카’ 때문에 공중화장실도 못 가고 갖가지 성폭력에 시달리는 현실은 모른 척하고 싶은 걸까? 정작 자기 삶은 돌보지 않다가 서러운 인생이 되어 중앙정치판에서 악을 쓰는 것은 남자들의 몫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할머니들도 그 대열에 참여하다니! 남녀노소 없이 외톨이가 되어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에 시달리는 이 세상을 어찌할까?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은 70대 중반에 접어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고립의 시간을 더불어 사는 시간으로 바꾸어가는 이야기다. 제인 폰다와 로버트 레드포드의 노련한 연기로 시선을 끈 영화기도 하다. 주인공 에디는 이웃에 사는 홀아비 루이스를 찾아가 별난 제안을 한다. 섹스 없이 함께 잠을 자자는 것. 밤이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고립감을 어둠 속에 함께 누워 대화하며 달래보자는 것이다. 루이스는 숙고 끝에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 두 사람은 그냥 함께 있는 것 자체로,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로 충만해지는 자신들을 보게 된다. 루이스는 이제는 여자 따먹는 농담을 하며 낄낄대는 동네 남자들 맥주 모임을 가지 않는다. 대신 별거하는 부모 사이에서 외로운 에디의 손자를 데리고 캠핑하고 기차놀이를 한다. 따뜻한 우정의 관계로 여유가 생긴 에디도 오랫동안 갈등 관계였던 아들과 화해한다. 극단적 부부 중심 사회로 배우자가 죽으면 기약 없는 고립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미국의 노인들에게 이 영화는 커다란 해방감을 선물했을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삶, 그 단순한 기쁨
내가 사는 제주 마을에도 영화를 찍어도 될 법한 사례가 있다. 영화는 오십 중반에 접어든 그림 선생님이 동네 할머니 집 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될 것이다. 86세 홍태옥 할머니는 코로나 때문에 노인정도 못 가고 친구 집도 못 가게 되면서 하루하루가 적막하고 외롭던 차였다. 제주에서는 할머니들이 일 나갈 수 있으면 구십 살이라도 나가시는데 작년에 갈비뼈가 부러져 일도 못 나가게 되었다. 그때 동네 그림 선생님이라는 분이 찾아와 <할머니 예술 창고>를 하겠다며 하루 동안 창고를 빌려달라고 한다. 팔 년 전에 동네 주민 센터에서 마련한 <어르신 그림책 학교>를 다니면서 그림을 조금 배웠던 차라 반갑게 그리하라고 했다. 어느 토요일 마당 한가득 청소년들과 어른들이 모여 풍경도 그리고 꽃과 나무와 오래된 도구와 빗자루와 솥과 이불장을 그렸다. 할머니도 오랜만에 그림을 그리니 좋았다. 창고 프로젝트가 끝나 섭섭했다. 그때 그림 선생님이 불쑥 찾아와서 “삼촌 그림 좀 그려보세요!”라고 했다. 스케치북과 색연필과 물감도 가져와 함께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은 수시로 들러서 새로 그린 그림이 있냐며 들어와 그림들을 살펴보고 잘 그렸다고 비행기를 태웠다. 다 그린 그림들을 껌딱지로 창문과 벽에 붙여주고 가면서 자꾸 보면서 연구하라고 했다. 선생님이 가고 나서 한두 가지 그리다 보면 계속 그리게 된다. 심심할 때나 밤에 누우면 뭘 그려볼까 생각하게 된다. 평생 한숨 돌릴 시간 없이 살았지만 짬짬이 눈으로 담아 두었던 장면들, 머릿속에 넣어둔 생각들이 한가해진 지금 하나둘씩 살아서 돌아온다. 선생님처럼 가까이 가서 보고 자세하게 그려본다. 그림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을 글로 적어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긴 밤과 새벽의 어둠과도 친구가 되었다. 그림을 그리면 어둡던 마음이 환해진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동네 할망 친구들이 와서 벽에 붙인 그림들을 보고는 자기도 그리겠다며 연습 노트를 빌려 가기도 한다. 선생님이 친구들을 데리고 오기도 한다. 그림을 둘러보고 슬며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모르는 분들이지만 같이 그리다 보면 친구가 된다. 아들들과 며느리, 손자들도 그림 그리는 할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할머니에게 이 환대의 드로잉 스튜디오를 선물한 이는 ‘반사’라는 별명을 가진 예술가다. 세상의 나쁜 기운을 반사하는 의미로 그런 별명을 붙였다. 반사는 미술가지만 다른 사람들을 그림 그리게 하는 애니메이터이자 큐레이터이기도 하다. 한때 미술 전시장이자 아티스트 레지던스이기도 한 카페를 운영했는데 젠트리피케이션 와중에 접어야 했다. 그 와중에 재난학교를 만들고 피해자들과 연대하여 임대차법을 개정해내기도 했다. 그는 재난이 파국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의 부재가 파국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산불로 모든 동물이 도망칠 때 부리에 물을 담아 불을 끄려는 벌새처럼 그냥 그림을 그린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하루를 기도와 그림으로 마감하는 그는 피에르 신부님이 말한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의 기쁨, 그 단순한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두 여자는 수시로 모여 요즘 밥 먹듯, 기도하듯 그림을 그리면서 찾아온 이들을 어떤 전환이 일어나는 마술의 세계로 인도한다.
예술가로 삶을 마감할 권리
신을 죽이고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시작한 근대 예술가들은 고향을 버리고 전 세계를 방랑하며 독창적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다. 그들은 단명했으며 괴짜일수록 오래 기억되었다. 그런데 그간 인간이 만든 것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라는 것을 알아버린 지금, 예술가들은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남다른 고독을 즐기고 남다른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만들어낸 것이 근대의 예술세계였다면 파국으로 치닫는 파상의 시대에 예술은 신과 함께 재난 상황에 임재하는 초월의 세계이자 기도의 세계가 아닐까? 도구적 이성과 탐욕의 지배로부터 비켜나 있는 세계 말이다. 지금은 불모지에 꽃씨를 뿌리며 이곳저곳 돌아다닐 때가 아니다. 한곳에 머물면서 이끼가 살게 하고 꽃씨를 뿌릴 때다. 우리 동네 홍태옥 할머니와 반사 선생님의 드로잉 스튜디오에는 이끼가 끼기 시작했다. 조만간 꽃들이 피고 나비가 날아들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식물, 사람과 동물이 만나고 삼라만상이 마음을 열게 되는 환대의 장소가 열리고 있다. “그림을 그리시니 잘 돌아가실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뜬금없이 말했다. “그림 그리면 잘 죽어질건가?” 할머니가 답했다. 그때 떠오른 문장 하나. “모든 사람은 예술가로 삶을 마감할 권리가 있다.”
할머니들이 중심이 된 우정의 세계가 열리며 이 동네에 새로운 기운이 더해지고 있다. 동네 초등학교는 학생들이 늘어나서 본교로 승격했고 멋진 언니들이 운영하는 ‘비건 책방’도 생겨서 하굣길 책의 세계와 만나는 아이들이 행복해졌다. 효모를 만드는 청년 협동조합도 생겼다. 동네 예술가들과 주민들이 별일 없이 수시로 모여 그림을 그리고 꽃모종을 나누면서 유토피아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 동네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우정과 환대를 생성하는 이런 마을/세포가 프랙탈 시대의 무늬처럼 반복적으로 재생되면서 이 시대의 우울을 벗겨내기를 기대하고 있다. 더불어 하는 기쁨을 알게 해주는, 밤에 우리의 영혼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드로잉 스튜디오를 위해 축배를!
조한혜정
시대의 흐름을 읽고 실천적 담론을 생산해온 학자로서 제도와 생활세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시대 탐구를 해왔다. 1990년대에는 ‘하자센터’를 설립해 입시교육에 묶인 청소년들이 벌이는 ‘반란’을 따라가면서 대안교육의 장을 여는 데 참여했다. 저서로 『선망국의 시간』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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