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마을과 작은 학교를 이야기하는가? (춘천 마을 이야기)
왜 지금 마을과 작은 학교를 이야기하는가?
-우정의 세계를 살고 살리다
조한 혜정 (문화 인류학자, 연세대 명예교수)
새는 둥지에
거미는 거미줄에,
사람은 우정 안에 – 윌리엄 블레이크
‘거대서사’가 부담스러운 ‘포스트 모던’ 시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운 ‘포스트 휴먼’ 시대가 왔습니다. 거창하고 추상적인 뭔가에 홀려 정신없이 달려온 우리는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전 세계의 시선을 끈 한국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그런 시대상을 탁월하게 그려준 작품들이지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지금, 내가 선 자리, 내가 맺은 인연과 내가 사는 동네를 둘러보게 됩니다. 작고 구체적인 이야기로 다시 새 역사를 만들어갈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난 나는 헷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처럼 알을 깨고 비상하는 꿈을 꾸며 자랐습니다. 먼 나라로 유학을 떠나 비상을 위한 시간을 가진 후 서른 살에 집/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뜻이 맞는 이들과 <또 하나의 문화>라는 여성주의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도시 안의 마을과 같은 것이었지요. 우리는 직장 근처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수시로 모여 수다를 떨고 재미난 일을 벌였습니다. 우정이 꽃피는 그 작당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동인지’라는 이름으로 묶어 세상에 내보냈고 그 책에 공감한 이들이 합류하면서 모임은 점점 켜졌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퇴직하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던 시절입니다. 직장여성 모임이 만들어졌고, 입시교육의 폐단을 절감한 부모들과 시민들이 아이들과 함께 만든 어린이 캠프 모임, 그리고 학교가 몸에 맞지 않는다는 청소년들과 어울리다가 대안 교육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문화산업 시대가 도래했으니 ‘문화’로 돈도 벌고 청소년들도 살릴 수 있다면서 홍익대 근처 문화패들과 어울리다가 청소년 프로젝트도 시작했습니다. ‘97년 IMF 구제 금융 소식에 화가 치민 이들은 급기야 “제발 국민 세금 좀 제대로 써서 사람도 살고 나라도 살리자”라면서 서울시로부터 ‘서울시립 청소년 직업센터 (하자센터)’를 위탁받기도 했습니다. 그즈음 산청에 간디 학교가 생겼고 홍대 근처 성미산 자락에 성미산 학교가, 광명, 대전, 대구, 광주 등 방방곡곡에 공동육아와 대안학교가 들어섰습니다. ‘말죽거리 잔혹사’ 시대에 학교를 다녔던 이들이 어른이 되어 다음 세대에게는 그런 폭력적 삶을 물려주지 않겠다며 새로운 삶의 장을 열어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동네 부엌 반찬가게와 마을 카페와 마을 극장이 생겨났고 마을의 택견 선생님은 제자들과 자전거로 세계를 도는 마을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시민 교육”의 기치를 내건 이들이 서로를 돌보고 챙기는 ‘도시 안 마을’을 만든 것입니다.
막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어른 세대와 결별을 선포한 세대가 등장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개성 있는 주체적 삶을 살아가기로 한 ‘신세대’ 청년들은 거리로 나와 자기만의 경험을 하고 다양한 빛깔을 뽐내며 문화의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97년 IMF 구제 금융에 이어 신자유주의 물결이 몰아졌습니다. 시장은 전 지구적으로 커지는데 직장은 줄어들었습니다. 2008년 월가 파동을 겪으면서 청년 고용난이 심각해졌고 청년들은 스스로를 3포 세대, 5포 세대, N포 세대라 부르며 불안해했습니다. 과도한 노동과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되면서 이들이 선택한 길 중 하나는 도시는 떠나는 것이었지요. 이른바 ‘저속기어로 전환 down shift 족. 이들은 회색 도시를 떠나 빈집에 많은 농촌의 자연 속으로, 그리고 인정이 아직 남아 있는 농촌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추구했고, 개성과 다양성이 존중되면서 동시에 상호부조 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집단주의적 마을이 아니라 개인들이 존중되는 그런 새로운 마을을 농촌이라는 세팅 안에서 만들어보려는 것이었지요.
1960년대 국가가 주도한 ‘새마을 운동’을 통해 대대적인 국가 주도적 마을 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청년들은 그때와 같이 국가가 주도하는 마을이 아니라 이웃이 상부상조하는 그런 마을을 상상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에 대한 향수를 가진 세대가 아직 건재하여 마찰을 빚기도 하고 든든한 지원부대가 되기도 했지요. 그리고 그때 마을로 갔던 많은 이들은 다시 도시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도시에서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이 때 이주한 청년들이 한국사회에 ‘시민적 공공성’의 개념을 뿌리내릴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국가적 공공성’과 ‘시민적 공공성’은 ‘위로부터의 변화’와 ‘아래로부터의 변화’라는 면에서 아주 다른 원리입니다. 초기 경제개발 시기는 강력한 국가가 주도해갈 수 있지만, 소비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 성숙한 시민사회가 발전의 기틀이 됩니다. 시민들의 창의력과 자발적 협력이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시민 주도적 거버넌스로 전환을 해야 하는데 한국은 지금 그 전환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적대와 혐오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고착된 토건주의적 관성을 바꾸지 못하여 엄청난 국세를 낭비하고 있고요.
‘마을’은 ‘시장’과 ‘국가’와는 다른 원리로 움직이는 영역입니다. 마을은 생산성을 높이거나 관치를 하는 곳이 아니라 상호 돌봄과 공생을 바탕으로 하는 ‘우정의 세계’입니다. 마을은 화폐가 중심인 ‘시장 질서’와 다르고 재분배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적 원리’와 달리 움직이는 영역입니다. 마을은 마르셀 모스가 말한 ‘선물 gift’의 세계이며 조부모의 사랑이 대대로 내려가면서 ‘세대’를 이어가는 환대의 세계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공 公 politeia (교환과 재분배를 하는 시장과 국가와 군대의 연합체)'와 사 私 oikonomia (사유재산을 공유한 생산 공동체로서의 가족) 와는 다른 원리로 움직이는 공 共 koinonia (더불어 하는 자발적 시민들의 세계)을 강조함으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자발적 시민들의 자유로운 소통과 상호 돌봄의 세계인 코이노니아가 축소되면서 한 사회는 활기를 잃게 되지요.
반세기 만에 세계 부국 10위 안에 들게 된 한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국가와 시장이 엄청 막강해진 반면 시민들이 설 자리는 아주 협소합니다. 시민들은 개별 가족 단위로 승자독식 각자도생의 생존을 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아파트 층간 소음 살해사건이 일어나는 적대와 분노의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마을 공동체 사업은 바로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국가 주도성에서 벗어나는 운동이어야 합니다.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삶을 재활력화하는 개개 시민들이 벌이는 움직임, 우정과 환대의 지수를 높이는 움직임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정과 환대에 대한 감을 잊어버린 정치가나 관료들은 마을 사업을 토건 사업처럼 진행합니다. 성급하게 성과 지표를 만들고 수치화하려고 합니다. 시민적 공공성을 키우고 있는 마을 사업의 지원방식은 달라야 합니다. 성과 지표를 언제까지 내라는 식의 방식은 금물입니다. 자발적인 시민들의 우정어린 세계를 만들어갈 시민들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그들의 하는 작업을 그들의 해온 방식과 원리대로 지원하고 지지해야 합니다. 관료적 공무원들은 이 활동에 참여해서 후기 근대적 거버넌스에 대한 학습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축복으로 생각해야 할 테지요.
‘시민적 공공성’에 대한 학습이 시급합니다. 그 학습은 고도 압축적 경제 성장 와중에 키워진 국민적 주체는 폭력적이고 위계적인 상호 죽임의 세계였다는 자성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돈을 위해 인간성을 저버리고 폭력을 정당화한 시간을 되돌아보고 거대한 폭력의 구조가 어떻게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간파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제도적 폭력만이 아니라 ‘내 안의 폭력’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을’이라는 이름 아래 활동하는 이들은 이제 삼삼오오 모여서 ‘우정의 세계’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정의 세계는 전문가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정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녹색 평론의 김종철 선생님을 기리며 쓴 박혜영 선생님의 글 중에서 이반 일리치의 친구 호이나키의 이야기를 인용해봅니다.
당시 미국의 어느 농장에 거주하던 호이나키는 멀리 떨어진 에이레의 작은 섬에 사는 친구로부터 안부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마크라는 친구는 어느 날 자기 등에 작은 혹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을 불러 모아 의논을 합니다.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눈 끝에 마크는 마을의 신부를 찾아가 혹에 성유를 발라 달라는 부탁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부는 주교가 부활절 직전 성목요일에 특별히 축복을 내린 기름을 마련하였고, 기도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은 성유의 효험은 바로 자기들의 믿음에 달려있다고 믿고 성심을 다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몇 주간의 의식이 끝나고 마침내 혹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호이나키의 또 다른 친구인 피터도 면도하다가 우연히 목에 혹이 생긴 것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피터는 외국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가장 존경받는 종양 전문가와 접촉을 했고, 그 전문가는 즉각적인 수술을 권했습니다. 피터는 결정을 앞두고 고심하다가 짧은 갈등 끝에 마침내 전문가의 결정에 자신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수술은 복잡했고, 화학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계속 반복되는 치료에도 불구하고 암은 다른 장기로 전이되었습니다. 여기서 호이나키가 서로 다른 길을 택한 두 친구의 예를 든 것은 어느 한쪽은 운이 나빴고, 다른 한쪽은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령 마크가 죽고 반대로 피터가 살았다 해도 중요한 것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두 선택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우정에 기반을 둔 세계 속의 삶인가라는 점에 있습니다.
박혜영 교수는 여기서 우정의 세계와 전문가의 세계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근대는 근대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 주도했습니다. 학위와 자격증을 지닌 전문가들이 주도했지요. 그러나 정보혁명과 생명공학, 그리고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세상은 크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조만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 대부분은 산업용 로봇에 의해 대체되겠지요. 평생직장도 사라지니 오래된 직장 동료도 사라지겠지요. 노동과 휴가의 이분법도 의미가 없어지겠지요. 급변하는 시대에 전문가 찾기가 힘들어지니 전문성과는 더욱 거리가 먼 ‘자격증 전문가’들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요상한 컨베이어 벨트에 모두를 맞출 수 없는 때가 왔습니다. 다행히 로봇들이 그 노동을 해낼 테지요. 이제 인간 사람들은 시계에 맞춘 ‘노동자/전문가’의 시간에서 ‘삶의 시간’으로 이동해서 아주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야 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괘종시계’라는 시를 길지만, 함께 읽어보지요.
안데스 고원의 원주민 부족은
여명이 밝아오면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동쪽을 향해 절을 하며 기도를 한다.
파차마마여, 오늘도 태양을 보내주소서
너무 오래 구름이 끼고
알파까가 병들고 감자 흉작이 드는 것도
신에게 바치는 효성이 모자란 탓이라고
그리하여 날마다 태양이 뜨는 것은
신의 은총이고 삶의 기적이라고 감사하면서
해가 뜨면 햇살 같은 얼굴로 서로를 포옹하며
하루를 기쁨으로 시작해왔다
어느 날 스페인 선교사가 들어와
그것은 무지몽매한 미신이라고
태양은 아침마다 떠오르게 돼 있다고
자 여기, 괘종시계가 울릴 때 일어나면
날마다 태양을 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과연 괘종시계는 훌륭하게 태양을 떠오르게 했고
새벽에 동쪽을 향해 기도드리는 행렬도 사라져 갔다
이제 아침이 오고 태양이 떠올라도
아무도 햇살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무감하고 피로한 노동의 시작만이
하루하루 주어질 뿐이었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감자를 한 줄이라도 더 심고
알파까 한 마리라도 더 늘리는 데 매달릴 뿐이었다
날마다 태양을 보내주시는 파차마마의 은총과
삶의 기적에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자
사람들 가슴 속에 태양이 떠오르지 않게 되고
아침마다 환희에 빛나던 주변의 세계와
우애의 마음들이 마술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정확하게 울리는 괘종시계와 함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2010 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무감하고 피로한 노동의 새벽을 맞이하는 것일까요? 서로의 빛나는 얼굴을 보면서 감사하는 시간이 아닐까요? 20세기 전후에 살았던 사회학자 뒤르껨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감사하고 서로의 존재를 축하는 자리, 바로 그 자리가 신이 재임하는 자리이며 그것이 종교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속적 현대사회에서 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 땅에, 또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을 테지요. 중요한 것은 서로의 존재를 축복하고 감사하는 감각, 우정과 환대의 감각을 우리가, 인류가 잃지 않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나/우리는 누구와 더불어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한 해를 기우는 해를 보면서 감사의 시간을 보내나요? 내가 만든 우정의 세계는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가요?
시민들의 자발적 사귐의 세계, 공생공락하는 우정의 세계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지구상에서 더는 버틸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 무력한 존재로 태어나는 인류라는 종의 진화는 그 무력한 존재를 돌보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약한 아기를 돌보기 위해 서로 돌보고 서로 의존하면서 우정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지금까지 지구상에 둥지를 트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적자생존은 틀렸다. 진화의 승자는 강자가 아니라 다정한 자였다.”라는 말은 이런 현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궁에서 태어난 존재는 사회적 자궁을 만들어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를 망각할 때 그 존재인 호모사피엔스는 더는 살아가기 힘들 것입니다.
우정의 세계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가는 마술의 세계입니다. 구체적인 실체 간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실명의 세계입니다. 단순한 공간이 아닌 숨결이 담긴 장소이며 장기지속 하는 시공간입니다. 서로 좋은 기운을 주고받으며 만들어가는 안전한 쉼터이자 배움터이자 삶터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우정이란 대기 속으로 흩어지는 숨결을 함께 마시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어 말합니다. “우정이란 자유의 공기를 함께 마시는 것, 무엇이 우정을 질식시키는지는 알 수 있지만, 무엇이 우정의 정기를 길러내는지는 알 수 없다. 우정의 정기는 뜻밖에 생기는 것이지만 오래가는 그 정기는 기적을 낳는다. 우정의 정기는 지키려고 애쓰는 순간 질식하기 시작했다가 이용해 먹으려고 작정하는 순간 타락하게 된다.”
일리치의 표현대로 우정의 세계를 만드는 마을 활동은 숨결을 함께 마시는 활동입니다. 즉흥성, 구체성, 장소성과 지속성이 핵심이지요. 그래서 마을을 평가할 때 실측과 통계화는 어리석은 일이며 치밀한 계획은 할수록 실패합니다. 정부에서 마을 공동체들을 지원하려고 한다면 우선 어떻게 즉흥성과 자발성에 근거한 우정의 세계가 만들어지는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런 감을 가진 이들이 주민이자 담당 공무원으로 활약해야 하지요. 폭력에 깊이 길든 만큼 우리는 우정의 세계에 들어가는 연습을 열심히 해야 할 것입니다. 도구적 합리성에 익숙한 공무원들이나 토건 사업만 했던 이들은 특히 그러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마을 공동체 사업의 핵심은 ‘시민적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권위주의적인 사업, 위로부터 시작하는 사업, 하드웨어 사업과는 달리 진행되어야 합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재활력화 revitalization 의 움직임, ‘아래로부터의’ 세상 만들기, 우정의 감각으로 만나는 동료를, 특히 다른 세대를 환대하고 그 만남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경험의 축적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마을에서는 무엇보다 ‘시계에 맞춘 시간’을 ‘삶의 시간’으로 전환해내야 합니다. 시간에 맞춘 노동자 로봇의 활약을 고마워하며 인류는 좀 다른 시간대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마을이 가장 먼저 삶의 시간을 회복하는 시공간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마을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우정의 세계’ 속에 살게 되면 어느덧 세상도 그런 세상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내 안에 있습니다. 계통발생/거대역사는 개인의 개체발생/작은 역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프랙털의 세계인 것이지요. 외톨이로 고독사를 하게 될 지경이 된 지금, 우리 인류는 우정어린 존재로 ‘존재 전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을 죽이고 물적 축적에 집중한 근대 문명을 넘어서야 합니다. 인간중심주의, 인간 예외주의 시대도 넘어서야 합니다. 서로를 착취하지 않는 상생의 삶, 서로를 돌보는 존재로서의 호모사피엔스가 되기 위해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삶을 위한 도시 재생을 바탕으로 하는 탈근대적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승자독식의 시대로 접어든 한국에서 우정이 살아있는 작은 학교, 그리고 그런 학교가 중심이 되는 마을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습니다. 성과는 미미하지만, 시작은 장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열기가 오르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드디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얼굴을 외면하던 이웃과 미소 띤 인사를 나눌 수 있었을까요? 함께 새벽 산책에 동행할 이웃, 텃밭에서 만나는 이웃, 김치를 얻으러 갈 수 있는 이웃, 상자로 온 사과를 나눠 먹을 이웃, 저녁 식사 후 가볍게 차를 마시러 갈 수 있는 이웃, 급한 일에 SOS를 칠 이웃은 사귀었는지요? 마을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날 깜짝 잔치를 열어줄 사람들은 몇 명이나 모였는지요? 거동이 좀 불편하지만 산책을 좋아하는 이웃 노인분과 가끔 산책은 하시나요? 우정어린 마을에서 맛난 밥을 나누며 작지만 큰 기쁨의 실천 속에 다들 하루 하루 활기차게 지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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