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편지 - 도통한 그녀들
이슬아의 아침 편지는 상쾌함을 선물한다.
그녀의 소개로 오늘도 상큼한 이를 만난다.
그녀는 선물 주는 즐거움을 안다.
나도 나누고 싶어서 이슬아의 허락을 받아 실어본다.
[일간 이슬아 / 친구들] 2020.04.09. 木 : 자는 얼굴 - 요조
오늘 낮에는 책을 읽다가 아름다우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만났습니다. '영원의 관점으로 응시'한다는 말이었는데요. 이것을 읽고 저의 친구 요조를 생각했습니다. 그런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요조를 언뜻 본 것만 같아서요. 요조가 쓴 <아무튼, 떡볶이>라는 책을 읽어 보셨을까요? 제게 그 책은 떡볶이 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관한 이야기로 뭉클하게 남아있습니다. 넓디 넓은 우주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너무나 한 점에 불과한 우리, 가끔 떡볶이를 먹으며 기뻐하고 슬퍼하는 비겁하고 나약한 우리 영장류에 관한 이야기요. 그래서인지 이따금 시간과 공간이 아득해질 때마다, 죽음에 대해 말할 용기가 생길 때마다 카톡으로 '요조 언니.' 하고 그를 부르곤 합니다. 그는 웬만해선 빨리 말하지 않고 크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 속도와 볼륨을 유지하며 말하는 사람은 요조 뿐인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다고, 요조의 글을 읽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가 응시한 자는 얼굴들에 관한 이야기를 독자님들께 발송합니다.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020.04.09. 이슬아 드림
일간 이슬아
日刊 李瑟娥
자는 얼굴 - 요조
집밥밖에 모르는 부모님은 특별한 날 가끔 외식을 하는데 그때 가는 식당은 거의 정해져 있다. 쌍문동의 어느 불고기집이다. 나는 이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되었지만 일 년에 몇 번은 부모님과 맛있게 먹는다. 간단한 효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작년 어버이날에도 이 불고기집에 갔다.
백기녀(어머니)는 야무지게 고기를 굽고 신중택(아버지)과 나는 맥주를 마신다. 이런저런 대단할 것 없는 말들을 나눈다. 이곳에 올 때마다 그렇게 한다. 고깃집 특유의 흥과 기운 속에서 세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 높고 크다. 그렇게 나누는 대화중에 백기녀는 언제나, 아직도 신중택을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가끔 술 먹고 속 썩여서 그렇지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네 아빠를 정말 사랑해. 가끔 옆에서 자고 있는 거 보고 있으면 그렇게 안 됐고.”
자고 있는 걸 보면 불쌍하다는 말은 신중택이 나랑 있을 때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신중택과 밤늦도록 티브이를 보면서 술을 마신다. 개그콘서트나 코미디 빅리그 같은 것을 보면서 대화 없이 낄낄거리며 술을 마실 때도 있고, 축구 경기를 보면서 목이 쉴 만큼 고함을 칠 때도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철학적인 이야기를 나누거나, 선거철 후보들의 토론회를 보고나서 각자의 정치적 신념을 말하고 듣느라고 동이 틀 때까지 마시기도 한다. 아무튼 우리 둘은 티비를 되는대로 틀어놓고 그것을 소재 삼아 맥주를 마시며 얘기하는 걸 좋아하고, 그때 백기녀는 소파에 드러누워 우리의 대화에 몇 번 참견을 하다가 먼저 잠이 든다. 그러면 신중택은 자고 있는 백기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꼭 그런 말을 했다.
"네 엄마 자고 있는 거 가만 보고 있으면 그렇게 안 돼 보인단다.”
한 몸처럼 같이 잠이 들고 같이 눈을 뜨던 연애 초반을 지나며 이종수(애인)와 나는 다른 일을 하다 제각각 잠이 들 때가 많아졌다. 방에서 글을 쓰다가 거실로 나와보면 플레이스테이션을 하던 이종수는 헤드셋을 쓴 채 잠이 들어 있었다. 거실에서 고양이들과 놀아주다가 슬슬 잘 준비를 할까 하고 방에 들어온 이종수는 책을 읽다가 잠이 든 나를 발견했다. 그 모습은 예쁘고 멋지기보다는 눈을 뜨고, 침을 흘리고, 괴상한 포즈인 채일 때가 많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자는 모습을 놀리면서 자주 놀았다. 자신은 절대 코를 골지 않는다는 이종수에게 내가 전날 녹음한 코 고는 소리를 들려주거나, 내가 보통 표본실의 개구리 같은 모양새로 잔다는 것도 알아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시절은 슬그머니 끝나버렸다. 이종수는 이제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어제 신수진 자는 모습 정말 대박이었는데' 라고 말하고는 그만이다. 나 역시 이종수의 자는 모습을 두고 놀리는데 흥미를 잃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언제부터였는지 이종수가 우스꽝스럽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웃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슬퍼지는 쪽에 가까워졌다.
이종수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소리죽여 우는 적이 가끔 있다. 입을 약간 벌린 채 속 편하게 자고 있는 그 모습이 정말이지 죽음의 얼굴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종수가 죽게 되면 이런 얼굴일까. 영문도 모르고 곤하게 자고 있는 얼굴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 청승맞은 예행을 하다 보면 지금의 초초분분이 얼마나 지극하게 소중한 것인지, 이런 귀한 시간을 마냥 흐르게 두고서 바보 같은 얼굴로 잠들어있는 이종수가 얼마나 연약하고 가여운 존재인지가 절절해졌다.
이종수는 이제 개다리춤을 추는 듯한 모습으로 자고 있는 나를 봐도 컥컥거리면서 웃는 일 없이 그저 덤덤하게 다리를 모아주고 이불을 다시 제대로 덮어주고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준다. 가끔 안쓰러운 사람 앞에서 낼 법한 탄식을 하면서 이마에 입을 맞춰줄 때도 있다. 나는 그때마다 잠을 어렴풋이 깨지만 눈을 감은 채로 다만 이종수도 나의 자는 얼굴을 옛날과는 다른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나보다 짐작한다.
사랑하는 타인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며 단순히 웃기거나, 평화로워 보인다거나 하는 것을 넘어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왜일까. 김소연 시인은 <마음 사전> 이라는 책에서 연민이라는 감정을 ‘대상에 대한 합일'에서 생기는 것으로 정의한다. ‘너’와 ‘내’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정말 믿어짐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너’의 자는 얼굴은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비감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매일 실감하며 요즘을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