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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과 40주년에 사회학과를 부탁해

조한 2012.03.23 13:10 조회수 : 5419

 

사회학과 40주년에

 

“난감함을 공유하는 사회학도들의 수다를 그리워하며”

 

조한 혜정

 

1. 변혁의 한 가운 데에서

 

아 벌써 40년이 지났나? 2008년 문화인류학과가 만들어진 후 새 학과에 입학한 학생들 챙기느라 나는 잠시 사회학과를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사회학과 40주년 기념 책자를 낸다며 강정한 선생님이 글 한편 써달라고 했다. 막 동경 행 비행기를 타려는 때였다. 비행기 속에서 지난 세월을 떠올려 보았는데 참으로 많은 얼굴과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자유주의 이후” 라는 단어와 함께. 내가 즐겁게 기억하는 우리 사회학과는 자유롭고 언어가 풍성한 학과였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분위기가 있어서 타과 학생들의 부러움을 샀고, 나라의 ‘구조적 모순’을 말하던 그 말발과 필력과 시위전력으로 아방가드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낸 과이기도 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언제쯤의 사회학과는 대학에서도 가장 대학다운 학과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연세대 사회학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유학서 돌아와 첫 강의를 맡은 1979년 가을이었다. 이후 매 학기 3개 정도의 강의를 했고 1981년 전임이 된 후 30년을 이 학과의 선생으로 있었다. 사회학과를 거쳐간 학생들이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나는 [탈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의 글읽기와 삶 읽기]라는 베스트 셀러를 쓰기도 했고 최근에는 [교실에 돌아왔다]는 책을 학생들과 함께 쓰기도 했다. 급격한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와중에서 변하고 있는 학생들에 대해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한 책이다. 연세대 사회학과에 있으면서 사회학과를 가장 즐기면서 살았던 사람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나는 그 안에 속할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해마다 들어오는 호기심 많고 사회에 대한 헌신적 마음을 가진 훌륭한 학생들을 맞이 했고, 그들과 깊은 인연을 맺으며 즐거운 프로젝트를 했고 그 에너지가 사회를 좋게 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최근에 내가 아주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서울시립 청소년 직업체험 센터(하자 센터)도 사회학과 출신들이 없었으면 생겨나지도, 유지 되지도 않을 동네이다. 소용돌이치는 세기적 변화의 와중에서도 나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회학과에서 만난 인연들 속에서 힘든 줄 모르고 활기차게 보냈던 것이다. 참 감사한 일이다.

 

돌이켜보면 1979, 그 해는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사망한 해다. 당시 한국사회, 특히 대학 캠퍼스는 광주 항쟁에 대한 이야기로 부글거리면서 반독재 투쟁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수시로 휴강을 했고 학생들은 걸핏하면 스크럼을 짜고 학교 안팎을 돌고 외부로 나갔다. 이른바 “짭새들”이 캠퍼스에 상주하고 있었고 강의실은 텅 빌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들끼리 모여 계급, 노동, 분단의 모순 등의 주제를 두고 머리를 싸매고 세미나를 했다. 사회 갈등의 현장에서 변혁론을 읽고 깨달은 바 진리를 실천하느라 밤새 세미나와 가투와 뒤풀이를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탁월한 논객들도 출현하고 운동권 스타들도 나오고, 동지애적 연애도 성행했다. 기존 학과 수업에서 좋은 학점을 받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그들은 학점 따위에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사회 핵심 ‘엘리트’들이었고 신촌 역에서 바라본 연대 정문은 세계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였다. 대학이 그때 정말 파릇파릇하게 살아 있었다.  ‘마르크시즘’ 세미나에 열을 올리던 학생들은 ‘사회 모순’이라는 단어를 대중적 언어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사회모순이라는 단어를 택시기사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될 즈음에 군부독재정권은 민의 저항에 항복을 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1980년대다.

 

당시, 교수들은 본의 아니게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군부 정권이 무너질 즈음에는 시국 선언문을 쓰거나 수시로 성명서에 서명을 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 후반은 휴강으로 노는 시간이 많았다. 시위 중에 잡혀간 학생들을 만나러 유치장에 가기도 하고 담당 담당 검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나는 그 여유로운 시간에 [또하나의 문화]라는 남녀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동인 모임을 만들어서 여성운동에 열을 올렸었다. 비정기 동인지를 펴내고 호주제 폐지와 밤길 안전하게 걷기 등 시위를 조직하고 대안적인 어린이 캠프도 굴리고 예비 대학생 캠프도 함께 하면서 주류 학생운동과는 좀 다른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곧 무너질 군부독재시대를 준비하면서 개인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능주의적 논의를 문제시했던 당시 학생들은 마침 내가 가르친 수업이 갈등론에 속하는 여성학이었기에 관심을 보였고 수업들은 꽤 활기차게 굴러갔다. 정말이지, 당시 우리 사회학과는 ‘어려운 이론’을 읽어내며 사회의 심층을 꿰뚫어 보는 비판적 지성의 산실이었다. 문화의 힘을 믿는 나로서는 1980년대 당시의 변혁 운동이 지나치게 조직과 권력 중심이어서 불평을 많이 했지만 그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실천하는 지식인이 되고자 애쓰던 모습을 사랑했다. 졸업 후, 또는 퇴학 후 공장과 농촌으로 직접 뛰어든 이들도 있었고 계속 글로, 또는 영상운동을 통해 대의를 실현시키고자 했던 노력이 이어졌다. 미국 유학 가는 이들은 개량주의자이거나 배반자 취급을 받았고 대신 내부적으로 다양한 공동체적 실험을 해나갔었다. 우리 과에서 영화 관련한 훌륭한 감독과 제작자들이 탄생한 것도 그 당시 문화적 실험이 가능했던 우리 동네 기운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군부 정권이 무너지고, 동유럽이 붕괴되면서 대학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지만 우리 학과는 여전히 시대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1990년대 일상의 민주화와 함께 소비사회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는 개성과 자율을 이야기 하는 학생들이 우리학과 수업에 몰렸고 특히 비판사회학과 문화인류학, 그리고 여성학 관련 수업은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머리를 울긋불긋 염색한 학생들, 힙합 바지를 입고 피어싱을 한 학생들은 [대중문화연구] 수업에서 본격적인 문화기획을 해보면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는 훈련을 하였다.   

 

우리 학과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는 어디서부터 생겨났던 것일까? 해방 후 생긴 학과들이 대부분 일제 때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분들이 만들었다면 우리 과는 1936- 38년 부근에 태어난, 미국 유학에서 막 돌아온 교수들이 만든 학과이다. 네 분의 ‘서구의 물을 먹은 신사’들이 만든 것이고 학과가 생긴 지 7년 후에 합류한 나도 미국 유학파이다. 미 유학생 중심인 교수진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여 교수가 드물고 보수적인 문화가 지배적인 때이기도 했지만 우리 학과 교수들은 권위주의로부터는 멀어지고자 했던 분들이었다. 내게 여자라고 불편을 준 적이 없었으며, 학문적 권위는 가지되 권위를 부리지 않는 편이었다. 장애인 학생들 받아들이는 원칙을 정했다거나 개별자를 존중하는 분위기는 내가 오기 전부터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았다. 당시 교수가 반바지나 블루진 차림으로 캠퍼스를 활보한 학과는 아마도 우리 학과 외 별로 없었을 것이다. 나의 사학과 스승이었던 황원구 선생님은 “요즘 교수들이 스웨타 쪼가리를 입고 강의실에 들어가니 참 큰일이다”라고 하시며 내 복장에 대해서도 은근히 경고를 하시곤 했지만 우리 과 교수들은 누구도 내 복장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송복 선생님이 “조 선생은 와 화장을 안 하요? 그런데 지금 하면 이상할 것 같네.”라고 지나가는 말을 하셨는데 그것은 그냥 호기심에서 한 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송 선생님의 인품에 대해서는 많은 학생들이 여전히 고맙게 여기고 있으며, 사회학의 기초를 확실하게 다져주신 꼼꼼한 박영신 선생님의 원칙주의는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당시 연고 전 출전선수들은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기계적으로 학점을 주었는데 박영신 선생님은 그것을 문제 삼아서 유명해지셨다. 나 역시 누구에게 특혜를 줄 수 없다는 원칙주의자여서 낙제를 시키는 교수 반열에 참여했다! 교수회의 때 장학금이나 회사 추천서를 써주어야 할 학생 이름과 집안 사정을 바싹 다 알고 계시던 안 계춘 선생님의 자상함은 늘 내게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학과에는 자상한 교수가 있어야 한다. 안선생님이 바둑 사랑, 그때는 좀 심하지 않나 싶었지만, 지금 쫓기는 듯 살아가는 교수들을 보면 늘 그리워지는 한 폭의 장면이다. 바이올린과 단소를 즐기시던 전병재 선생님도 우리 학과의 리버럴한 분위기에 한 몫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잠시 함께 계셨던 정재식 선생님은 한 세대 윗분이자 초장 기 유학파로 신사의 면모를 두루 갖춘 분이셨다. 나는 ‘적절한 주변성 (여자라는 것, 인류학 전공이라는 것)’을 활용하면서 개인성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그 ‘물’에서 참 좋은 시절을 보냈다. 학생들도 그런 분위기 덕에 꽤 괜찮은 대학 시절을 보냈으리라 생각한다.

 

2. 학과 이전과 그 이후

 

나도 2년 후에는 은퇴를 한다. 평생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은 편이니 은퇴를 한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졸업생들과 만남이 전보다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나보다 먼저 연대캠퍼스를 졸업한 이들이 행보가 말이다. 작년 특히 졸업생들을 만나는 기회가 많았는데, 그들이 교수에 대해 아주 개인적인 사건이 없는 한별 추억거리를 갖고 있지 않아서 놀랐다. 한창 자기자신에게 빠져 있을 나이라 그럴 수 있겠다 싶긴 하지만 섭섭하기도 하고, 교수들이 그렇게 학생들에게 해준 것이 없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학과에 대해 애정이 많은 학생들이 이구 동성 우리 학과에 대해 회고하면서 하는 말은 우리 학과의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분위기에 대한 말이었다. 예를 들어 송복 선생님의 강의가 내 강의와 상반된 논의가 많았는데 오히려 그런 것이 자극이 되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말을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 학생들로부터 자주 들었다.

 

90년대 들어서서 김용학, 김동노, 유석춘, 김호기 교수 등 우리학과 졸업생 교수들이 들어오면서 사회학과는 그야말로 더욱 다양하고 젊고 활기찬 학과가 되었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반공주의가 아니라-를 함께 배울 수 있었고 권위주의적이지 않는 분위기에서 과 전체가 엠티를 가고 때론 학술토론회도 했었는데, 1992 20주년 기념 행사에 여러 대학에서 교수들이 많이 오셨었는데 그 때 그분들이 우리 학과를 아주 부러워하시던 기억이 난다. 2000년에 김현미 선생님도 오시면서 문화연구가 활성화 되었다. 질적 연구와 양적 방법을 공히 가르치는 학과로 우리 사회학과는 균형 잡힌 사회과학도를 키울 수 있어서 ‘깃발’을 날렸던 것 같다. 그 즈음 일 세대 교수 네 분이 한꺼번에 은퇴를 하시고 또 한 차례 젊은 교수들이 들어왔다. 문과대학에서 우리 학과는 여전히 개성 있고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학생들을 키워내는 최적의 산실로서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었다. 문과대학에서 너무 인기를 끌어서 학부제 시행 중에는 미움을 살 정도였다.

 

2004년 일 세대 네 분 교수들이 은퇴 하시는 것과 함께 2 세대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학과는 사회과학대로 적을 옮겼다. 초창기 교수진, 특히 전병재 선생님은 사회학은 인문학이라고 강조해오셨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직 이유를 잘 모르지만 2 세대 교수들의 생각은 달랐던 듯하다. 나는 인류학 전공인데다가 1기와 2 (남자) 교수들 사이에 끼어있어서 사실상 그리 큰 목소리를 낼 형편은 아니었다. 학과 이전 건으로 여러 차례 밤샘 교수회의를 했고 결국 학과를 사회과학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연세대는 법학과가 독립하면서 정치학과와 행정학과가 남아 사회과학대학을 만들었는데 당연히 옮겨야 할 경제학과와 사회학과가 옮겨가지 않았던 터였다. 정치학과와 행정학과가 터주인데다 규모도 크다 보니 그 두 학과가 사회 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사회과학대 분위기는 어른들에게 깍듯하고 기강이 서 있는 회사 비슷한 분위기가 있어서 일하기에는 편하다. 그러나 교수회의 끝나고 폭탄주를 제조해서 마시는 분위기, 농담을 잘 해야 하는 분위기도 인류학자에게는 꽤 흥미로운 관찰거리였다. 사회학과의 리버럴한 분위기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사회학과에서는 교수와 학생이 맞담배 피운다며?” “칫솔을 물고 다니기에 물어보니 사회학과 학생이라잖나......” 사회학과는 이른바 군번도 모르는 버르장머리 없는 학생들을 키우는 곳으로 평판이 나버렸다.

 

요즘 대학가에서는 취업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학생들이 주류를 이룬다.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진지하게 토론하고 책 읽기를 사랑하는 학생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부모님이 자신의 은퇴자금까지 다 쏟아 부은 투자에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학 초기부터 개별적으로 취직 준비에 분주한 것이다. ‘성과주의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이들에게 사회학적 상상력을 키우라는 주문은 귓전에서 사라지는 말이다. 12년 동안 어머니의 극진한 관리아래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족집게 과외만 받은 학생들은 잔머리를 굴리는데 도가 튼 ‘초 합리적 바보’들이어서 더욱 강의를 하다 보면 난감함을 느끼게 된다.  ‘시위’나 ‘데모’라는 단어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교수가 사회 비판적 이야기를 하면 왜 한쪽 편을 드냐고, 좀 공평하라는 식의 눈치를 주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승자 독식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토플 학원 등 각종 학원까지 다녀야 하고 비싼 등록금을 버느라 알바를 뛰어야 하고, 학점관리를 잘 해서 교환 학생 할당을 잘 받아야 하는 학생들 사정을 알면 교수도 할 말이 없다.

 

또래끼리의 치열한 토론이나 고민 나눔, 청년이기에 벌일 수 있는 문화기획 등 내가 그간 편애했던 학생들 부류는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학생들과 좀 친해질 만 하면 어느새 교환학생으로 사라지고, 다시 돌아와 또 좀 친해질 만 하면 법학 대학원 입시나 취직 공부한다고 사라지는 학생들. 이런 세태가 때론 원망스럽고 은퇴할 때가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교수만이 아니라 학생들도 정신 없이 돌아가는 롤러 코스트에서 ‘생각자체’를 못하게 한지가 한 십 년 정도 된 것 같다. 대학도 ‘신자유주의의 장치’에 단단히 걸려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회학과는 사실상 이런 상황에 대한 발언을 해야 하는 학과가 아닌가? 언제부터 그리고 왜 사회학자나 사회학과 학생들이 사회에 대해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고 잠잠해진 것일까? 생각해보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에도 좀 잠잠했었던 것 같다. 한국의 사회변동이 너무나 빨라서 그냥 당황하고 있는 상태인가? 그간 대한민국은 부동산 열풍과 주식 열풍, 카드 대란 등의 줄줄이 이어지면서 세계 어디에서도 알아주는 돈의 왕국이 되었다. 정치문화적으로는 ‘노풍,’ ‘인터넷 열풍’, ‘한류 열풍’, 2002 월드컵 거리 축제’ 등의 굵은 사건들이 일어나 문화연구자인 나로서도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변화의 물결에 휘말려서 우리는 현실인식을 포기했는가?

 

우리 사회학과의 찬란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못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여전히 나는 우리 사회학과가 비판적 지성의 산실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야 말로 지속 가능한 삶을 향한 전환과 새로운 시대 언어가 만들어져야 할 때가 아닌가? 올해 사회 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학과 소개하는 주임 교수들이 앞 다투어 “우리학과가 한국에서 제일 좋은 학과”라거나 “교수의 수가 많은 막강한 학과” 라거나 “취직이 아주 잘 되는 학과”라거나 “S대 생도 와서 떨어진다”는 등의 말을 해서 씁쓸해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사회를 알아가고 개념을 잡아가는 작업은 ‘소통 합리성’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고 권력이나 조직, 전략 등 도구적 합리성과는 다른 차원의 감각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기초 학문은 뒷전이 되고 응용학문이 판을 치게 되는 곳에서 어떻게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가 나올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대학이 효율과 성과만을 강조하는 이상한 동네가 된 배경이 있긴 하다. 급격한 글로벌 자본주의화 속에서 세계 100위 등수에 들어야 한다는 강박, 일등만 되면 된다는 경쟁을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고 그 앞장을 선 것은 고려대학과 연세대학이다. 그렇게 된 지 근 십 년이 되어간다. 작년 유럽에서 만난 유럽인 교수는 한국이 대학순위경쟁제도를 부추겨 자기네 총장단도 한국식 정책을 도입하려고 한다는 원망을 들었다. publish or perish 논문을 내느냐 사라지느냐”로 사생결단을 내는 제도가 한국에 도입된 후 더 기계적으로 운용 되면서 전 세계에 다시 수출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간 부자 나라가 된 덕에 돈이 많아진 학술진흥재단에서 BK(Brain Korea)와 같은 장기 7년차 프로젝트 등 대규모 사업을 하게 하면서 교수들은 회사 사장보다 더 바쁜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틈이 나면 가족과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외국 학회에 다녀와야 하고 영수증까지 챙겨야 한다. 사실상 인문 사회과학 교수 중에는 샌님, 선비 성향의 분들이 많은 데 자주 곤혹스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우리 사회학과가 점점 더 통계 연구로 치닫게 된 것도 국가 프로젝트를 해야 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대학가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객관적 지표에 매달리고 그런 기준에 맞추려면 일년에 수편의 논문을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긴 호흡으로 스토리가 있는 책을 쓰려는 학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나마 나는 BK 사업에 가담하지 않은 행운으로 책도 내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종종 교보 문고에 가서 사회학 선반을 둘러보는데 시대에 대한 문제를 던지면 깊이 있는 논의를 펼치는 저서를 찾아볼 수 없게 된지 오래다. 하루 살이로 살면서 SCI 논문을 써야 하는 마당에 무슨 책을 쓸 수 있을까? 내가 만일 최근에 박사를 받은 학자라면 교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설혹 되었다 해도 종신제에서 당장 탈락했을 것이다. 사회의 변화를 긴 호흡으로 읽고 책을 써야 할 사회학자로서는 참으로 힘겨운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송복 교수는 은퇴하시기 전 후배교수들을 보면서 “앞으로 그 심란한 세월을 어찌 보낼꼬......” 라며 염려를 하셨는데 실제로 교수들 중에 중년에 과로사 하는 경우가 늘어나서 요즘은 후배 교수 만나면 얼굴이 편한지를 먼저 살피게 된다.

 

내 머릿속 스쳐 지나간 사회학과 40년의 모습은 대략 이런 것이다. “시대를 만들어가는 변혁 주체의 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을 기억하고 있는 졸업생들에게는 실망스러운 모습일 테고, 그간 사회학과를 지탱하느라 열심히 뛰었던 교수들에게는 더욱 섭섭한 말로 들릴 수 있을 것이지만 사회학과는 상당한 침체기를 거치고 있다. 사회학 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표류하고 있다. 리차드 세넷이 말한 “표류하는 개인과 소멸하는 열정”의 [뉴캐피탈리즘], 한병철 박사가 말한 모두를 성격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피로사회]를 구태여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몸과 마음으로 글로벌 자본이 압도했던 시대의 파행성과 삶의 피폐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우석훈 박사는 “20세기 초 마르크스 30, 대공황 이후의 케인즈 30, 오일 쇼크 전후의 하이에크 30년 이후 칼 폴라니의 시대가 온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다.

 

이래 저래 길에서, 식당에서, 비행기 안에서 마주치는 졸업생들의 맑은 눈빛에서 나는 이런 염원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식당에서, 그리고 작은 디자인 학교 오프닝에서 우연히 연달아 만난 93학번 안상평 동문의 이메일이 바로 이런 마음을 이어가게 해주는 글이다.

 

“전 사회학이 체제저항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학문체계 내에서 이런 것들을 드러내놓고 학습하고 배우는 데가 별로 없지요. 전 그게 사회학 내지 사회학과의 에너지, 운동성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 에너지는 크게 봐서 민주화, 자유화를 향한 에너지가 아니었나 합니다. 학교 다닐 때 그 두 가치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학습한다는 거 자체가 사회학을 배우는 아주 큰 즐거움이었던 거 같아요. (그 즐거움으로 법학, 경영학 아이들을 우습게 여기기도 했으니까요. ) 하지만 이 두 에너지가 이른바 신자유주의에 포섭되면서 그 사회학이 가진 에너지가 많이 소진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사회학이 기운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사회학이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복합적인 측면에 대한 대항담론을 만들어 내는데 실패한 결과가 아닌 지, 사회와 사회 구성원들의 처지와 고통에 대한 설명력을 상실해버렸다는 것인데 사회학은 어디에 소용이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됩디다. 정말 사회학의 위기가 온 것이 아닌가 싶어지고요. 제 기억으론 민주화 이후 정치사회학의 담론은 사회적 자본, 투명성, 부패 이런 주제들로 급격히 옮겨 갔던 거 같고, 자유화 담론을 주도했던 문화나 여성 쪽은 욕망이나, 정체성 논의를 부각시켰는데 그 선에서 멈춰버리고 만 듯 합니다. 그래서 결국 저항담론 내지 해방담론으로서의 매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겠지요? 신자유주의 자장에 사회학이 갇히면서 해방, 저항 담론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하게 못하게 된 것일 테지요. 양적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 사회학 위주로 사회학의 주된 흐름이 재편되는 것도 이런 위기에 나온 자구책일 텐데 이것 자체가 신자유주의 흐름에 더 깊이 들어가면서 우리 자체를 해석하는 언어를 만들어 내는 데서 더욱 멀어져 간 것 같습니다. 양적 분석 위주의 사회학과의 싸움에서 언어를 만드는 사회학이 졌고 도태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전히 식민지적인 현실, 곧 미국 중심주의와 우리의 언어를 아직 갖지 못한 상황이 연계되어 있을 테지요. 저도 선생님처럼 가끔 대형서점에 가면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이 사회학 코너 랍니다. 매번 허탈해져서 돌아서긴 하지만 말이지요.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사회학의 재활력화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는 아직도 사회학이 사람들에게 삶을 헤쳐나가는데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거든요. -

 

3. 고삐 풀린 세상의 난감함을 공유하는 자리

 

월러스타인은 [자유주의 이후] 책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료들이 전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국가가 군산복합체에 의해 휘둘리고 결국 세계가 1%를 위한 세상, “돈을 위한 돈의 세계”로 빠져들 우려를 표명했었다. 2008, 뉴욕 발 세계금융위기로 세계경제는 심하게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월 가 점거 시위가 시작되면서 세계 시민들이 서서히 현실을 직시해가고 있다. 2012, 우리는 1980년대 학생들이 했던 것처럼, 글로벌 독재 거버넌스를 놓고, 구조적 모순을 논할 때를 맞은 것이다. 아직 골이 아프지 않다면 최근에 내가 하고 있는 책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1972년에 경제학자 도넬라 메도즈 팀은 [성장의 한계]라는 책에서 “자기 파괴적인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들은 “지금과 같은 추세로 세계 인구와 산업화, 오염, 식량 생산, 자원 약탈이 지속된다면 지구는 앞으로 100년 안에 성장의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인구와 산업 생산력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급락할 것이다.” 라면서 “지속가능성 혁명”을 촉구했다. 반대로 당시 허드슨 연구 소장이자 미래 전략가인 허만 칸 박사는 “우리는 첨단 기술만으로 100년 동안 전 세계 150억 명을 1인당 2만 달러 수준으로 생활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아주 보수적으로 잡아도 그렇다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허만 칸은 앨빈 토플러 등과 함께 1970년대 사회가 빠진 예측으로 전략적인 미래학을 만들어내던 사람 중 한 명인데 IQ 세계최고로 알려진 천재이자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출신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을 지원한 자문이기도 하였다. 메도즈보다 허만 칸 쪽으로 기울었던 지난 30, ‘자기 파괴적 성장주의’는 지금 지구상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거대한 구조가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삶이다. 더 이상 계산이 나오지 않는 중산층의 삶이 문제다. 미국 중산층의 붕괴에 대해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 당신들의 나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20년 전에는 시장이 중상층과 저소득층, 삭스 백화점과 시어스 백화점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지금은 더 잘게 쪼개졌다. 연이어 밀려온 아웃소싱과 대량해고의 물결에 떠밀린 중산층은 날로 상승하는 의료비, 연료비, 대학등록금을 대기 위해 버둥거렸다. 이미 탈 산업화에 희생된 전통적 노동자 계층은 저임금 서비스 직종으로 내몰려 안전모를 벗고 대걸레를 손에 쥐었다. 빚을 값기 위해 고금리 재 대출 담보로 잡힌 집은 성인이 되어서도 독립하지 못한 자녀들과 손자들로 북적거렸다. 일터에서는 작업 효율만 강조되고 임금은 오히려 떨어졌다. 의료보험료가 주택대출금이나 집세보다 더 높아지자 보험을 포기하고 진통제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에런라이크:10). 그녀는 많은 연봉을 받아 초 부유층에 편입된 CEO, 헤지 펀드 운영자, 금융인들도 삶이 불안한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에런아이크는 이어서 “노동자의 연금과 혜택을 빼앗아 기업이익 부풀리기, 사기성 농후한 대출 상품 팔기, 보험료를 올리는 한편 보험금 지금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가입 차단하기, 노동력을 감축해 주가 띄우기, 초과근무 수당을 주지 않으려고 근무 시간 기록을 조작하는 일” 등 시대의 선택 받은 엘리트들이 하는 일이 ‘제도화된 강도 짓임을 이야기 하면서 성공한 자들에게 안고 있는 난감함을 이야기 한다.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고자 한다면 어딘가에서 돈이 나와야 하는데 더 이상 지배할 식민지도 없고 새로운 유전이나 금광이나 우라늄광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힘없는 국민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거리낌 없이 짓밟는 “먹() () ()”이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과 공기를 오염시키는 동시에 ‘안전하게 마실 물’이라며 물을 팔아 돈을 챙기는 일. 외국 농산물 기업을 위해 자국 농부들의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는 일, 우울증 약 복용을 유도하는 의료체계 속으로 국민들을 몰아 넣어 자활 능력을 상실하게 하는 일. 성장 호르몬, 종자 위기, 핵폐기물, 핵 재처리 장 등 통제 불가능한 상태를 야기시킬 위험을 위험하지 않다고 우기면서 돈을 버는 일 등 카지노 자본주의 사회에서 “끝없이 성장을 믿으며 이윤을 추구하는 이들은 먹튀족이 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이 체제는 아주 교묘한 장치들로 구성원들이 그 구조를 쉽게 간파하지 못하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주 무력한 상황으로 몰아넣어 무조건 자신을 강자와 동일시하게 만든다거나, 아예 너무 바쁘고 피로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것도 이 장치에 속한다.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카드 수수료부터 거대한 국책 사업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세금과 보통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세나간 돈의 행방에 대해 이제 알만한 사람들을 다 알고 있다. 고도 압축적 경제 성장을 해낸 한국사회는 이런 과정을 더욱 압축적이고 파행적으로 경험하고 있고 그래서 이런 상황을 첨예하게 인식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1980년대 열심히 사회변혁 세미나를 했던 이들은 분명 지금 “이렇게 살기 위해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세미나를 하고 시위를 했단 말인가?” 고 한탄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말, ‘자본이 관철된 사회’가 지금 가장 적나라하게 그 모습을 우리 앞에 드러내놓고 있다.

 

모든 사람들을 전략적 인간, 소모품 건전지로 만들어버리는 효율과 생산성과 성과주의의 시대, ‘도구적 합리성’의 시대를 다시 소통의 상호 돌봄, 언어와 의미와 삶의 동기, 그리고 예술과 상상과 창의성이 살아나는 시대로 만들어 가는 일, 불가능할까? 에런라이크가 말한 현실을 냉철하고 직시하면서 용기를 갖는 것“Existential Clarity and Courage”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상황이 너무 나쁘니까 사람들은 세상의 어두운 면을 애써 보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가능한 한 긍정하고 밝은 면만 보면서 열심히 고 싶어하고 경향은 이런 변화의 와중에서 생긴 태도일 것이다. 뒤르켕의 집단의식 collective conscience, 그 사회의 기본이 소실되었는데 사회학도들이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나는 지난 40년간 이 학과를 거쳐간, 사회학적 상상력과 인류학적 감수성으로 현실을 보는 눈을 키운 이들이 모여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면 분명 세상은 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위해 거리로 나섰던 선배들과, 대학 입학과 함께 “빚 갚는 인생”을 시작하는 후배들이 모이면 할 이야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곳을 거쳐 간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세미나를 시작하면 좋겠다.  마르크스를 좋아한 하비의 [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 마르크스 읽기가 답답했던 사람은 에런라이크의 [! 당신들의 나라], 니체를 좋아한 사람은 한병철의 [피로사회], 아니면 우리학과 출신 사회비평가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나 엄기호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를 읽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난감한 상황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둥그렇게 모여 앉아서 뜨거운 차를 마시며 "야아, 곤란하군요." "좀 난처한걸요." "좀처럼 결론이 나질 않네요." 하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함께 난감함을 공유하자고 말한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어디선가 빌려온 것 같은 결론을 들이대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가 해답을 알고 있다고 호언장담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정말 난처한 상황이고, 그래서 빨리 해답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냥 난감함을 공감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며 이때는 유머가 잃지 말라고 그는 말한다. 곤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공감 하는 것. 그것이 사회의 기본이라는 것을 사회학도들이 실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각자가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로 시대를 읽고 시대를 듣고 시대를 말하기 시작하면 좋겠다. 물질과 제도적 권력만 보이는 틀을 활짝 벗어나 사회학적 상상력이 되살아나는 논의의 장을 열어갈 수는 없을까?  삶의 난감함을 공유하는 작은 자리들이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큰 이야기로, 노동과 계급과 호혜 관계와 단골 경제 논의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는 없을까? 조만간 동문들과 재학생들과 교수들이 함께 어우러져 마련한, 심각하지만 아주 즐거운 학술 모임에 초대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2012 3 24일 조한 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