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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렉서스

johancafe 2010.05.13 18:29 조회수 : 2905

[주제] 여섯번째 과제 :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앞에 글로벌 시대의 창조적 산실,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내공을 싣고
2-1. 책을 통해 '글로벌'을 느끼다 : 피할 수 없는 해일과의 만남
여러주에 걸쳐 우리는 각자의 영어이야기와 연관지어 자기 소개를 풀어놓았다. 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법과 남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시간들을 통해 서로를 인식한 후 진행된 수업공동체에 관한 논의를 통해 이미 만들어진 공동체의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업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와 자신을 긴밀하게 연결시켜 보는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탄생한 지시문 수업공동체는 이번 수업부터 눈을 들어 더 큰 공동체, 즉 우리가 직면해있는 사회 바라보기를 했다.

토론기간 : 2006/10/16 01시 까지
[주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읽고 쪽글을 씁니다.
전통과 현대, 전통-근대-후기근대(탈근대), 세계화와 전지구화 등의 키워드를 연상하면서 읽어 봅니다.

사회보기의 첫걸음으로 조한은 외면할 수 없는 거대한 현실로 다가온 세계화를 선택하였고,그 방법은 학술적인 이론서가 아니라 잘나가는 세계화주의자 토마스 프리드만의 책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만의 책. 프리드만은 오늘날을 움직이는 거대담론으로 '세계화'를 지목한다. 그는 첫머리에 "세계화는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세계화로 인해 지구는 단일의 글로벌 시장으로 바뀌어가고, 지구 전체가 하나의 마을처럼 변해 가고 있다."라고 말한다. 세계화가 가져오는 갈등의 구조를 그는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메타포로 사용하여 드라마틱하게 설명해 준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란 바로 세계화 체제와 지역 또는 개인 나름의 문화적 전통과 주체성 사이의 긴장을 상징한다.를 읽고 세계화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풀어놓는 것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경험과 생각, 저자의 이야기가 주가 되는 책이었지만, 같은 텍스트를 토대로 했어도 글에 담아 낸 생각은 서로가 달랐다.
쪽글에서 학생들은 개개인의 가치관이라는 뿌리에 근거를 둔 다양한 스펙트럼을 드러내었다. 그런 다양한 스펙트럼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조류가 있었다면 그것은 학생들의 불안감이었다. 학생들은 자신이 변화시킬 수 없는 거대한 구조로써의 세계화를 두려워하며 공통적으로 그것에 대한 불안감에서 발로한 견해를 펼쳤다. 세계화에 편승해야한다는 주장, 혹은 심정적으로 세계화를 거부하는 주장이 나왔다. 그와 다른 또 다른 입장의 글들 또한 결국 두려움에서 발로된 글들이 많았다. 아래는 학생들의 입장을 펼쳐놓은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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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수 없다면 즐겨라!"
우리 수업에는 이런 입장이 드물기는 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인 세계화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학생들이 좀 있었다. 일부는 소극적인 태도로, 어쩔수 없이 나는 세계화에 순응하겠다는 주장을 하였고, 일부는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당연히 세계화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한다는, 메시지를 담아내기도 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렉서스는 물질문명의 첨단과 세계화를 상징하며, 올리브나무는 비물질문명의 전통적 고수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의 글은 거의 대부분이 올리브나무쪽을 렉서스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둘이 어느 정도의 연관성은 가지고 있지만, 양자택일의 선택을 함으로써 하나를 숭상하며 하나를 배척하는 것은 마치 세계의 패러다임이 타협할 수 없는 한 가지로 귀결된다는 혼동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가장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다. TV광고에서 어느 할머니의 집에는 컴퓨터가 설치되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컴퓨터를 설치하고 화상통신을 하면서 근대화되어 가족들과 동떨어진 상황을 화상TV로 극복한다. 우리들은 이 광고를 보면서, 할머니의 전통적인 입장과, 다른 핵가족들의 근대적인 입장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불편함이 멋지게 해소되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훈훈한 감정도 느낀다.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며 다른 하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주장에서는 근대화된 현실 자체를 비판하며 가족들이 하나로 뭉쳐 살거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족들이 할머니를 방문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반면 어느 한 쪽에서는 근대화를 통한 효율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정따위는 인습으로 어느정도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화상TV라는 그 당시의 최첨단 렉서스는 오히려 전통과 근대의 모순과 대치를 '유일하게' 해결해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는 '한 나라가 어떤 옷을 입고 질주하는가는 전적으로 그 나라의 자유다. 하지만 앞서가는 나라들은 황금구속복을 입고 뛴다. 이제 황금 구속복에 몸을 맞추지 않는 나라들은 뒤쳐질 수 밖에 없다.'라며 황금 구속복을 입는 나라의 9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1. 당신 나라는 얼마나 빠른가?(창조적 파괴를 얼마나 잘 하는가?)
2. 당신의 나라는 얼마나 지식을 수확하고 있는가?
3. 당신의 나라는 얼마나 가벼운가?(지식 용량의 증가)
4. 당신의 나라는 외적으로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가?(표준의 확산)
5. 당신의 나라는 내적으로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가?(투명성=정직성)
6. 당신의 나라의 경영진은 깨어 있으며, 그렇지 못한 경우 교체 가능한가?(책임성)
7. 당신의 나라는 부상자를 쏘아죽일 영의가 있는가?(부실기업의 퇴출)
8. 당신의 나라는 친구를 얼마나 잘 사귀는가?(개방성과 협력성)
9. 당신의 나라의 브랜드는 얼마나 출중한가?(최고의 상품 생산과 최고의 서비스)
특히 저자는 황금구속복을 인용하며, 세계화를 통한 경제의 통합화는 불가피하며, 자신의 9가지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통해 세계화를 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세계화와 전통의 관계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결국 '부가 전부는 아니다'라는 식의 사고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세계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초기 자본주의가 태생하면서, 자본주의라는 강력한 소용돌이현상을 가장 빠르고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국가들은 여전히 경쟁 우위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그 소용돌이현상을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자신들의 비효율성을 지켜나갔던 국가들은 퇴보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가장 크게 간과하고 있는 사실중의 하나는, 경제와 문화는 '소비문화' 내에서만 연관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문화는 그 자체가 효율적이건, 비효율적이건 인간의 근원적인 정신적 욕구(예를 들어 유대감이나 사랑, 윤리)의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열의 개념도 없으며,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이다.
문화와는 별개로 경제는 엄연히 발전하며, 세계화되는 시점에서 발빠르게 세계화되지 않으면 당연히 도태된다. 어느정도 배부르다면 경제에 그다지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아니, 어느 정도 배가 부르고 싶다면 그 '어느정도'가 얼마나 경제의 완전한 자본주의화와 세계화속에 기민하게 대처한 값으로 얻게 된 성과인지 성찰해보아야 한다. 프리드먼의 색안경은, 자신의 '경제의 세계화'의 이론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경제를 문화 전체와 무리하게 연관시키는 것에 있다. 그래서 그는 필연적으로 딜레마를 조장하며, 근대가 끝나가고 탈근대가 넘어가는 경계에서 서 있는 우리들에게 허영의 딜레마를 제공한다. 근대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은 탈근대의 장점의 하나이며, 가장 그럴듯하고 강력한 이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을 생각하며 먼저 발빠르게 '탈근대 이후', 즉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포스트 탈근대'의 해법으로서 전통으로의 회귀를 제시하는 것은 명백한 퇴보이다. 특히, 경제적 관점에서는 어불성설이며, 문화적 관점에서는 전통으로의 방어적 회귀란 자문화의 국수성과 배타성을 무언중 강하게 지지하는 것이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은 재화 그 자체의 효용과 미국의 회사의 마케팅된 환상을 즐기는 것이지, 미국 문화에 동화되어 가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세계화는 덫이 아니라 기회이며, 우리가 이 물결조차 몸에 익히지 못한다면, 조난당하여 경쟁에서 당연히 탈락할 것이다.

경영계열 박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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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인간답고 싶어요"
세계화와 전통사이에서의 균형잡기를 강조하는 주장과 함께 이 수업에서 주류를 형성했던 주장의 글들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글들의 공통적인 핵심어구는 '인간다움'이었다. 세계화의 비인간성을 고발, 비판하면서 그들이 생각해오던 정이 넘치는 유토피아에대한 향수를드러내는 글들이 많이 나왔다. 강한 입장의 글들은 저자의 주장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고있는 글들을 따로 분류한 것이며, 이들의 글중에서는 세계화애 대한 적극적 반대를 실천으로 옮겨야한다는 의견도 보였다.


(약한)올리브나무 -세계화가 싫지만-
세계화란 뭔가 기분 나쁜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너무 낯익게 들리는 단어가 되어버렸지만, 정작 나는 그 실체가 뭔지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정떨어지게 만드는 것들은 또 있었다. 마구 흘러들어오는 타 문화의 문물들이 그랬다. 세계화 덕분에 무언가 사람도 마을도 모두 '고만고만'해졌다. 아이들도 고만고만하고, 어른들도 고만고만하고, 고만고만한 도시나 농촌 속에서 고만고만한 경험들을 하며 특별한 것 없이 자랐다. 특별한 것. 그렇다. 세계화는 특별한 것으로부터 나를 유리시켰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맞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술, 금융, 정보, 그리고 의사결정의 민주화는 전에 없던 보편성을 만들어냈다. 내가 느꼈던 그 불안과 혐오는 아마 '내가 속한 세계의 올리브나무'를 위협하는 '렉서스'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프리드먼이 말하는 네 가지의 민주화는, 그야말로 그가 말했듯 세계를 '완전경쟁시장'으로 만들었다. 진입 장벽들이 사라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출발선에 서 있다. 그야말로, 민주적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왜 그것이 그렇게 끔찍하게 들리는지! 모든 사람이 엇비슷해진다니. 이쯤 되면 내가 차별주의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겐 내가 선 이 자리에 꼭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서 있어도 상관 없다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약간 비약해서 내가 네가 아니고 나일 수 있는 이유를 강탈당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세계화가 싫었다.
사회계열 장혜영


렉서스도 '사람'이 끄는 것이다
"모든 사회는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자신의 채색된 렌즈를 통해 다른 문화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서구문화의 유별난 점은 그것이 너무나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또 너무나 강력해졌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을 비교해볼 '타자'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우리와 같거나 우리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여기는 것이다." 1)
책을 보는 내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저자가 끼고 있는 렌즈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책의 서두에서도 '어떤 렌즈를 통해 이 세상의 유기적 시스템, 거대 담론인 세계화를 읽어 나가야 할 것인가'하는 물음을 던지고 그것을 모색하기 위한 길을 당당한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분명 그의 사고는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냉전 체제 이후의 세계적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세계화가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어왔는지, 그것이 앞으로 만들어갈 흐름 속에서 인간들은 '인간답게'살아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았다. 더 빠르게, 더 멀리, 더 깊이 침투하는 첨단 기술, 생산성과 효율성에만 근거하는 100미터 달리기식 세계화는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향해서 숨고를 틈 없는 달리기에 집중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책에서 언급된 1999년 프랑스의 노동법 개정 사례는 이러한 나의 물음을 더욱 구체화 시켰다. 프랑스 정부가 급여의 삭감 없이 근로시간을 39시간에서 35시간으로 줄였을 때 많은 기업에서 '생산성이 1포인트만 뒤져도 모든 일감을 잃는 세상인데 근로시간을 줄이는 것은 물갈퀴를 신고서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꼴'이라고 비난했다. 책에서도 결국 프랑스는 100미터 달리기에서 메달을 딸 가능성이 희박해질 것이라는 기업의 불평으로만 이야기를 일단락 짓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프랑스나 영국 등의 나라에서 근로 시간을 줄였을 때 노동자들의 사기나 활력이 살아나 생산성에서도 더 높은 효율을 보였다는 사실은 기업인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기존의 '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사회를 바라 볼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100미터 달리기의 메달은 누구를 위할 수 있을 것인가. 메달이 전 사회적으로 막강한 부와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거라는 사실만을 믿고 있기엔 전 세계적으로 파괴되는 올리브 나무가 너무 많고 그 곁에서 소외 받는 사람들의 그늘이 너무 크다.
"인종적 폭력, 물과 공기의 오염, 가족의 와해, 문화적 해체 등 겉보기에 관련이 없는 듯한 문제들이 긴밀히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런 문제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면, 그러한 문제가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문제들의 접점을 발견한다면 (중략) 핵심은, 각 문제를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 그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어떤 가닥을 잡아당기면 되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 2)
양극화의 심화, 전통의 해체 등 세계화가 낳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수없이 많이 거론되고 있다. 이 책 후반에서도 저자는 세계화의 문제점들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화는 분명 새로운 기회이며, 더 많은 기술 발전과 '세상 좁히기'를 통해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해나갈 수 있다는 전망이 깔려있다. 하지만 그렇게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것 역시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를 두루 관조하는 것이 아닌,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렉서스 안에서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렉서스도 '사람'이 끄는 것이다. 지금은 마냥 '세계화'라는 흐름을 몰고 끊임없이 달리는 것이 아닌 우리가 세상을 어떤 방향으로 끌어가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후기 근대적 전환의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올리브 나무의 무분별한 파괴를 비롯하여 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어마어마한 문제들을 돌아보고 그것들을 풀기위한 어떤 가닥을 잡아당긴다고 할 때, 그 중심에 우리의 삶 속에서 '인간을 인간답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회계열 김새별
--------------------------------------------------------------------(강한)올리브나무
우리, 살아남아야 하잖아요.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프리드먼의 생각에는 나도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흐름에 적합하도록 몸을 맞춰나가야 한다는 생각에도 동의한다. 프리드먼의 말을 빌리자면 소위 황금 구속복을 입는 일은 필요하다. "권력의 반(反)집중화"를 이뤄내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렇다. 분명 세계는 변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실시간으로 대화를, 그것도 무료로-메신저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너무 식상할 지경이다. 사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 나온 이야기들은 '이미 한 물 간 이야기 아닌가' 싶을 정도다. 2000년의 이야기이니 벌써 6년이 흘렀다. 지금 세상은 그 때와 또 다르다. 세계는 급변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2000년에 일어났다면, 2000년과는 또 다른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 선배와 TV를 보고 있는데 지상파 DMB폰 광고가 나왔다. "TV는 집에서만 보면 되지, 들고 다니면서까지 봐야하나." 하는 언니의 말에, 나는 말했다. "처음에 휴대폰이 나왔을 때, 누가 거의 전 국민이 휴대폰을 들고 다니게 되리라고 생각했겠어요. 전화는 집에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다 들고 다니잖아요." 언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저게 대세가 되면 또 저거 없이 어떻게 사나 싶을 거야, 그지?"
2000년에 나는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당시에 휴대폰은 흑백이었다.) TV를 보며 킥킥대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지하철을 타고 가며 TV를 볼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조금 더 지나면 그런 사람이 반절 이상이 되고, 더 지나면 거의 전부가 되는 때도 올 것이다.
프리드먼의 이야기가 아직 유효한 것은,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세상은 지금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황금 구속복을 입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우리는 종전에 살아왔던 방식을 고수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핵실험을 함으로서 자국의 위상을 높이겠다던 인도가, 결국은 무디스에 의해 평가 등급이 강등됨에 따라 다시금 방향을 틀었다는 이야기는 이를 잘 드러낸다. 세상은 렉서스의 논리에 따라 돌아가게 된 것일까? 올리브나무의 논리로는 살 수 없는 것일까?
'살아남기'가 지상최대의 목표라면, 우리는 어떤 논리를 채택해야만 한다. 어떤 논리를 택하든, 목적은 그 논리가 아니다. '살아남기'다. 그리고 그를 위해 유연하게 대처해나가는 능력이 요구된다. 표지에 써 있는 "세계화는 덫인가, 새로운 기회인가?"라는 질문에서 프리드먼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계화는 새로운 기회이다." 쪽이겠으나, 내 생각은 "세계화는 덫일 수도, 새로운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유연성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유연해질 필요가 있지 않은가.
프리드먼은 '유연해질 필요'에 대해 끊임없이 설파하지만, 그의 '유연하기'의 방향은 '황금 구속복' 쪽으로 기울어져있다. 변화에 대해 유연하자는 이야기는 좋다만, 프리드먼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유연하지 못하다. "당신네 나라의 문화와 사회적 전통이 이 구속복이 강요하는 가치관(물론 그 가치관이 '유연함'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다.)과 상충된다면 그 점에 관해서는 마음 속 깊이 동정합니다."1) 고수해야 할 것에 대해 고수하는 것 역시 유연함의 한 대상이다. 그런데 그는 무려 '동정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올리브나무는 동정의 대상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프리드먼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 '유연함'보다는 '효율성'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을 텐데, 과연 '효율성'은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0과 1로 '처리'되어 버릴 수 있도록, 디지털화 되어야 하는가? 물론 지금 세계에서 '경계'는 무너지고 있고, 인터넷서점에는 '보더리스북스(Borderless Books)'라는 것도 있다지만, Borderless와 효율성만이 '살아남기' 위한 최적화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렉서스가 전부는 아니다. 차갑고 매끄러운 스틸의 느낌과, 거칠지만 어딘지 따뜻한 나무의 감성은 분명 다른 것이며, 어떤 하나만 가지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각각의 경우에 필요한 것을 채택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프리드먼 역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균형잡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균형을 잡는 것 역시 유연한 대처 방법이라 하겠다. 우리는 어떤 의미로든 좀 더 유연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지상 최대의 과제는 '세계화'가 아니라, '살아남기'이므로.
인문계열 신연순


살고 싶다.
어느 곳에선 미국의 군사세계화를 위한 전쟁기지 건설에 반대한다며, 여태껏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지키고 싶다며 울부짖는 사람이 있고
어느 곳에선 동료에게 밥과 물을 전달하고 싶다던 건설노동자가 경찰의 방패에 머리를 찍혀 죽었다.
어느 곳에선 단전된 방 안에서 촛불을 키고 잠들었다가 화재가 나 목숨을 잃은 여중생이 있다.
한편
TV에선 '자연친화적'인 아파트를 보며 감탄하는 골프천재소녀 미셸 위가 나오고
참으로 '여유롭고' '세련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브런치를 즐기고 있고
한 노동자가 비참할 정도로 조용하게 죽어가는 동안에도 평소와 같이 북적대는 외솔관 연세대학교 인문대학의 건물에서
그 누구도 그 노동자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혹은 못한다.)
이 두 가지의 풍경들 속에 내가 있다. 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가. 철저하게 장막으로 나누어진 두 가지 풍경 속에서 난 고민한다. 그리고 분열한다. 어떤 것이 진실일까. 나는 누구일까.
세계화는 분명 기회일 수도 덫일 수도 있다. 그건 세계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신이 누구에게 동일화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 동일시하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후자의 '여유롭고' '풍족한' 삶에 자신을 대입시켜 그려본다는 것을 잘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면, 내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파괴하는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면, 그리고 사실 그들을 억압하는 구조 안에서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면..
너무 극단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아니냐, 이분화된 시각 아닐까 스스로 많이 생각해보고 의심도 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경찰에 맞아죽는 노동자가 있어도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 이 세상은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분노하는 건 내가 유별나게 착한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고 유별나게 도덕적이어서도 아니다. 단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분노라는 감정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은 분노하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냥 네 갈 길 가라고.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그래, 나도 그러려 했다. 하지만 이게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것. 인간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못하게 하는 현실, 이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저항하겠다는 거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놓은 그야말로 폭력적인 이분법 속에서 '운동권' 인 나를 피하지 않을까 몇 번이고 주저하면서도 끝끝내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의 말처럼 난 뭔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나의 감정에 충실하며,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앗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저 살고 싶은 거다.
누군가의 말대로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존재할 수 없다. 침묵이나 무관심은 암묵적인 동의로 해석될 뿐이다.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라' 라는 말은 고도의 정치술이다. 무지나 침묵은 동의와 협조를 의미할 뿐, '잘 모르겠다' 라는 말로 입장을 유예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효과를 낳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결코 자유로움이 아니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정치' 에 자신이 개입되어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달리는 기차 위에 내가 있다면 그리고 그 기차가 이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면 기차에 브레이크를 걸어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다. 많은 권리들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사회가 아니라 권리의 충돌이 더 많은 권리를 만들어내고 확장시킬 수 있는 세상 속에서 그저 살고 싶다.
세계화가 누군가에게는 기회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무덤이라면,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 이 세계화에 반대해야하지 않겠냐고. 그들이 강요하는 빈곤과 폭력을 양산하는 세계화가 아닌 우리들의 세계화로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냐고. 세계화 되어야 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자유, 평등, 연대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들이 아니겠냐고.
사회계열 최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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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지역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와 같은 글 역시 이 수업에서 주류를 형성하던 입장을 대변하는 글들이다. 세계화는 피할수 없지만, 전통성을 수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어찌보면 다분히 정답스러운 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글들은 자신만의 균형잡기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있다.

올리브나무를 들이받은 렉서스
'렉서스는 오늘날의 세계 경제 체제를 세계화시켜 나가고 있으나, 실체가 불분명하고, 초국가적이며, 모든 사람을 동질화시키고, 모든 것을 표준화해 버리는 기술과 시장의 힘을 상징한다.'1)
토머스 프리드먼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라는 커다란 제목아래 '세계화는 덫인가, 새로운 기회인가'(영어로는 어떻게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지만)라는 부제를 붙여놓았다. 그러나 그 물음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답은 명확했다. 오히려 부제를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강줄기이며 그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라고 붙이는 것이 내용 이해에 더 편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새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정치, 문화, 국가안보, 금융시장, 기술, 환경'2)이라는 렌즈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을 읽어낸다. 이 글에서는 세계화를 피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쟁은 하지 않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현재 진행되는 세계화가 기술의 민주화, 금융의 민주화, 정보의 민주화라는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그의 논리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고, 실제로 세계화가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영역도 나의 개인적 생활에도 너무나 깊숙이 침투해버린 강력한 힘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세계화가 어떤 체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도 명확하다. '생활수준 향상에 가장 효과적인 체제가 무엇인가에 관한 한 역사적 논쟁'은 결국 '정답은 '자유시장 자본주의'로 판명'3)나는 것으로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먼은 자유시장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권력자의 선택폭을 펩시와 코카콜라로 제한함으로써 정치 영역을 위축시키고 독자적 문화와 충돌하여 이를 소멸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자본주의의 손을 들어준다.
결국 자유시장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논리아래 이루어지는 세계화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되며, 개인의 생존을 위해선 이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앞서가야 한다. '창조적 파괴'를 끊임없이 이루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세상.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정면충돌, 올리브나무는 힘없이 뿌리 뽑히지만 렉서스는 범퍼하나 망가진 데 없이 깨끗하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는 자기 집을 박탈당하는 것만큼 사람들을 분노케 하는 것도 없다.'1)
저번 시간 추석과 관련해서 수업시간에 자주 논의되었던 '진화'의 개념이 떠올랐다. 개체가 생존할 수 있게 변화해 간다는 진화.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것이 어떠한 한 가치관에 있어서 진보이든 퇴보이든 진화라는 것은 개체들의 생존에 이로운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프리드먼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야 세계화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살아남은 건 올리브나무가 아니라 렉서스가 아닌가.
경제적 효용의 논리로 운영되는 정치적 결정에 의해 올리브나무로 대표되는 우리의 뿌리,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존재의미, 배의 닻과 같이 우리를 한 곳에 정착하게 해주는 가치들은 상처받고 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최근의 사건이 미군기지 확장을 위해 평택 대추리 농민들의 집을 강제 철거했던 것이 아닌가한다. 거대한 미국시장에의 수출과 그로부터의 수입, 정치적 군사적 힘이 막강한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이익은 렉서스가 추구하는 가치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 가꾸어 온 마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꾸려온 공동체, 그 공동체만의 작은 문화는 올리브나무가 상징하는 가치이다. 이렇게 보면 관계는 명확해진다. 그야말로 렉서스가 올리브나무를 들이받아 밀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질적, 실체적 부가 모든 이들이(혹은 모든 권력이) 죽고 못 사는 최고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가 서로 충돌하는 경우 십중팔구 렉서스의 손을 들어주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비단 국제사회에서 국가와 국가 간, 국가와 민족 간의 충돌이 일어날 때 뿐 아니라 한 국가의 정치체계 내에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작동하게 된다.
'다양성'이라는 특성은 인류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다양성이 없이는 그 시대의 주류가치를 뛰어넘는 변혁이 일어날 수 없다. 인류 모두가 '통합'된다면 (전염병에 걸린 닭들이 집단사하는 것처럼)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위협적인 환경에서 멸종할 위험은 당연히 증가하게 될 것이다. 점점 더 광역화되어가는 인간망 속에서 자신만의 정체성과 자신만의 부족, 자신만의 공동체를 더욱더 갈망하게 되는 요즘 사람들의 모습은 렉서스에의 과도한 추구에 지쳐 올리브나무를 찾게 될 인류의 모습을 예견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언제나 해답은 '균형'인 것일까. '통합'과 '다양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나는 또 '균형'이라는 하나의 해답으로만 한정지으려 하는 게 아닌가!
사회과학계열 정명화

당신은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다시 말해서, 적어도 나는, 세계화를 거부하는 것이 근대적 발상이라면 싫든 좋든 그 흐름을 인정하고 어떻게든 인류 전체가 평화롭게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탈근대적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의 균형을 잘 잡으면 되는 것이다. 책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영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올리브 나무를 정신적 측면의 상징으로, 렉서스를 물질적 진보의 상징으로 이분화한 것까지는 비유와 상징의 한계 상 어쩔 수 없다 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올리브 나무를 굳이 '우리'의 뿌리라고 한정한 것에 대해서는 약간 아쉬움이 남았다. 통합이라는 키워드로 세계화를 말하고 있기에 렉서스로 대변되는 세계 시장 역시 통합되고 있음을 이 책은 여러 사례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왜, 올리브 나무 사이의 통합은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이 때문에 프리드만은 올리브나무와 렉서스의 균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치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렉서스 쪽에 좀 더 관심을 두어야할 것 같지 않겠냐는 은근한 뉘앙스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사실이 아니라면 굳이 이 책을 CEO들이 적극 추천할 이유도 없을 것 같고.
물론 렉서스도 올리브 나무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렇지만 렉서스는 어디까지나 수단일뿐이지 목적 그 자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거대하게 통합된 세계 시장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렉서스를 잘 이용하면서 올리브 나무 역시 지켜야만 한다. 전자는 진보와 관련이 있다면 후자는 진화와 좀 더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리브 나무의 통합 문제이다. 잠시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이나 핵전쟁의 위험성을 떠올려보자. 이제는 '우리' 올리브 나무만 지킨다고 해서 '우리'집이, '우리' 지역 사회가, '우리'나라가 생존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우리' 올리브 나무를 통해 얻은 정신적 울타리 안에 렉서스가 사고를 일으키지 않을 적절한 속도로 운행할 수 있도록 잘 관찰하고 감시하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울타리는 여러 올리브 나무로 둘러쌓여 만들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 이제 당신은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상경계열 최한아

"다른 관점에서 해결책을 모색해야해!"
세계화란 주제에 관해서 거의 모든 학생들이 위의 세가지 입장 즉 세계화지지, 전통을 지지, 혹은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글들을 썼으나, 아래의 몇몇글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개념화, 혹은 독특한 시대인식을 통해 자신만의 새로운 해결책을 보여주거나, 관점의 전환을 촉구하는등, 기존의 인식과는 다른 입장에서 세계화논의에 접근하였다.

수정될 수 있는 세계화, 우리의 '신조'
'크레도'(Credo)라는 단어가 있다. 천주교 미사나 개신교의 예배에서 낭송되는 사도신경, 혹은 신앙 신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수백년 동안 이 '크레도'는 곳곳의 예배당에서 읽히고 암송되면서,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이러한 크레도 역시 사람의 체계와 논리에 의해 확정된 것이므로 '언제나 수정 가능하다'는 합의가 이들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일정한 방법과 형태로 존재했다면, 그 존재의 지속성 역시도 일정한 스타일로 검토될 것이기에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논지다.
인문계열 천영준

세계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
물론 국제문제 전문가인 저자도 이러한 점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글 뒤에 보면 특히 환경 문제에 있어서 남북갈등의 예를 들면서 세계화로 환경파괴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이것의 원인이 세계화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세계화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계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환경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혁명에 가까운 기술 발전을 통해서 현재와 같이 많은 양을 투입해서 생산해내고 그것을 버리는 등의 소비적인 생산문화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기술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말이다. '세계화'로 발생한 문제를 '세계화'로 해결하자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옳을 지 모른다. 하지만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경제주체'인 인간이 왜 단기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는,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섣불리 하려고 할까. 그리고 이것을 세계화주의자가 아닌 보존주의자들이 나서서 해결해야 될까. 그것도 왜 보존주의자가 세계화의 질서에 편입해서 이루어져야 하는걸까. 여기에서 나는 저자가 탈근대의 사회에서 미국위주로 질서가 짜여진 현재의 세계화를 유지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런 점은 근대적인 측면이 매우 강한 주장이다. 나는 '세계화'만이 현재 존재하는 수 많은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답인가 에 대해서, 지금은 실패했지만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이론이였던 '공산주의'와 같은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물론 결과적으로도 세계화를 뛰어 넘어 성공할 수 있는, 폐쇄적인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아니라.
상경계열 최정우

도요타는 올리브 나무도 만들어 냈다
렉서스로부터 올리브 나무를 수호하자라는 주장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 세계화로부터 전통문화를 어떻게 수호할 것인가?
우선 전통이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전통이라는 개념이 세계화 이전부터 존재한 개념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전통이라는 것은 세계화가 진행되고 세계화의 논리가 지배하게 되면서 그로부터의 영향력에 의해 생겨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화의 논리, 그리고 전통문화,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차이화 하면서부터 결국 한국 전통문화라는 것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즉, 전통이라는 것이 세계화 이전부터 존재했다기보다는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전부터 존재한 전통 ↔ 전면적인 세계화<표 1)> 기존의 전통에 대한 인식세계화 → 자극 → 전통(차이 → 차이화)<표 2)> 세계화로 인해 전통이 생겨났다고 보는 인식
이처럼 현대가 전통을 구성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물론 과거부터 이어져온 가치체계나 의식의 잔영이 존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부르고 있는 전통이라는 것은 현대 이전의 시기에 전통이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세계화의 자극으로 인하여 전통이라는 것이 개념화 되었고 등장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전통이 존재하게 된 것은 세계화로 인해 외적인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 내적인 영역과 외적인 영역과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러한 차이를 특정 방법을 통해서 차이화하고 개념화함으로써 인간의 인지적인 틀에 자리 잡게 되면서 전통이라는 것이 하나의 별개 개념화 되었으며 새롭게 생산된 것이다. 결국 전통은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정치외교학과 이무형

렉서스는 무엇을 향해 달리나
내가 지금의 내 이야기를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것은 '나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중학교 때 쯤 즐거움과 행복은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을 구분하고 나자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처럼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즐거움은 느낄지언정 행복해질 수는 없었고, 얼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아름다운 옷으로도 행복해질 수 없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아무리 부당한 요구에도 굴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는 이상 권력으로도 행복해질 수 없었고, 지구 어디에선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죽고 있는 이상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약간의 정의를 세운다 한들 행복할 수는 없었다. 그건 나의 성격적인 문제였다. 다른 모두가 그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음 어딘가가 불편하고 내가 누리는 것의 무게가 곧 죄책감의 무게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천적이든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됐든 의식적인 훈련의 결과든 간에 아무튼 나는 그랬다. 그래서 그 깨달음 이후 나는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어야지만 나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란 결코 모두의 행복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 체제였다. 모두가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갖기를 원하고,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은 것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적은 것을 갖는 사람과 많이 일하고 적은 것을 얻는 사람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바뀌어야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결과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고 변화하는지에 대해 이 책은 훌륭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저자가 말하는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라는 두 축이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사회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었고, 그러한 저자의 시선이 매우 날카롭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책을 읽은 후에는 동의와 함께 약간의 내 의견을 첨가하고 싶어졌는데,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라는 두 축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정체성'을 상징하는 올리브나무를 '소유'를 상징하는 렉서스를 통해 더 크게 키우는 것을 원한다. 결국 '더 많이 가진 우리'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고, 올리브나무와 렉서스를 통해 지향하는 '궁극적인 방향'이다.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 집단이 존재해야 하고, 우리 집단과 남 집단이 존재한다면 우리 집단은 남 집단보다 우세해야 한다. 때문에 올리브나무는 렉서스가 없다면 무의미하며, 렉서스는 올리브나무가 없다면 무의미하다. 이 둘은 둘인 한편 하나이다.
그런데 이 방향은 자본주의 사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이 책이 세계화 시대와 구분하는 냉전 시대에도 동일했다. 때문에 나에게는 이 책이 애써 세계화 시대를 냉전 시대와 구분해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세계화는 덫일 수도, 새로운 기회일 수도 없는 같은 방향을 향하는 열차가 내부구조를 좀 바꾼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부구조에 그다지 큰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열차가 향하는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확신 때문이다.
저자는 6장에서 자본주의 체제 하 세계화가 국가에 '황금 구속복'을 입힌다고 말한다. 시장은 너무나 힘이 커진 나머지 국가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국가는 '살아남기 위해서' 시장의 요구에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자본주의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고, 자본주의 하에서는 세계화에 적응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그렇다면, 황금 구속복에 자신의 삶을 애써 구겨 넣고 있는 현 시대의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서 산다는 결론이 나온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올리브나무를 세계화라는 거친 비바람에 말라 죽게 하지 않기 위해 렉서스를 더욱 더 빨리 몰고 있는 것이다. 가장 빨리 모는 사람만이 살아남기 때문에, 전 지구적으로 모두들 엄청난 노력을 들여서 더 빨리, 더 빨리를 외치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달랐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견제해야 했기에 매우 신중했고, 서로보다 더 빠르기만 하면 속도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저자의 표현대로 '기술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두 거인이 달리던 도로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뛰쳐나와 저마다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갈수록 벌어지고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며 승자는 갈수록 적어진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무엇을 향해 달리는가?' 이다.
처음에는 분명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더 많은 생명을 지키고, 더 평화로운 사회를 구성하고, 더 많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달리기는 속도를 위해 생명을, 평화를, 인권을 포기한다. 빨리 달리기 위해 달린다는 것이 가능할까? 신기하게도 가능하다는 증거가 지금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펼쳐져 있다. 그렇다면 그건 합리적일까? 최소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두뇌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닌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여겨지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두뇌가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차라리 달리기가 이렇게 빨라진 것이 다행이다.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달리는 데 너무 바빠서 아직 생각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문제의식을 뒤쳐진 자의 불평 정도로 치부하며 더욱 속도를 올리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 같이 멈출 때이다. 멈추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를 생각해 보고, 진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앞서 달리는 자일수록 멈추기는 힘들고, 힘은 더 세다. 누가 호루라기를 불어 줄까?
"제가 하겠습니다."
인문계열 이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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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지켜보겠습니다."
자신의 피부로 실감을 하고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자신은 아직 이 주제에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기에는 문제에 대한 감을 충분히 잡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어떻게 보면 매우 솔직한 의견이기도 하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답을 얻지 못해 혼란스럽다는 글도 있었고, 자신은 조금더 관찰해 보겠다는 글도 있었다.

세계화를 '관찰' 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탈근대의 초점은, 과제는 결국 '관찰' 아닌가. 난 관찰하고 싶어졌다. 세계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그것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관찰하는 것 보다, 그 글에서 '전통과 현대, 전통-근대-후기근대, 세계화와 전지구화'를 찾는 것 보다 더 쉽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다분히 이분법으로 세계화와 지역화 현대와 전통을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녔지만 세계화는 변화로 지역화는 우리것을 지키는 소중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고 (프리드먼의 시각대로)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것을 잘 지키고 보존해서 이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세계화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중립적 의미의 '변화'인가?
단언컨대, 내게 있어서 그것은 절대 아니다.
세계화에는 분명 그로 인해 이득을 받고 그로 인해 억압받는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가 우리일 수 있고 그 누군가가 내 가족일 수 있고 그 누군가가 인간일수 있다. (이 생각과 가족 중심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또 의문이 든다.) 그것은 단순히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탈 근대적 시각에서 우리는 이를 상당히 면밀하게 살펴봐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그것이 어디에서 작용되는지 그것으로 어떤 것들이 변화해 가는지. 그것을 받아들인다 혹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점에서 본다면 상당히 근대적인 말이다. 그곳에는 관찰보다 판단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더불어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도 상당히 모호하고 피상적이라는 생각이다.
'우리 것'을 왜 지켜야 하는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 외에 우리가 그것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 있는가?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와 '전 게르만인의 단결과 유대인의 박멸'을 이야기 했던 나치즘과 어떤 점이 다른가?
그것은 단순히 배타적이다 아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지점일까? 결국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말로 인해 배타성은 전제되어 버리는데도 우리는 우리의 것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하나다.
'관찰 중입니다.' 라는 것.
단순히 이 고민을 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석사든 박사든) 해결해 버리고 싶지 않다. 끊임없이 고민해서 알아나갔으면 한다. 해결 혹은 대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너무나도 당위적이고 너무나도 '근대적인' 발상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조금 속상하다. 나는 관찰 했고 관찰 중이고 관찰 해 나갈 것이다.
인문계열 조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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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의 수업 시간에는 조한이 지명한 한 학생의 사회로 활발한 논의가 일었다. 각자가 대변하는 입장에 따라 자리의 배열을 바꾸어 토론하기도 하였다. 강의 시간 중에는 각자가 어느쪽을 지지하는지 오른편은 렉서스, 왼편은 올리브나무로 구분지어 성향대로 앉기를 하기도 하였다. 찬성쪽에 두세명, 반대쪽에 네다섯명이 앉고, 그 외에는 대부분 중도에 몰려있는 정규분포 모양을 띠었다. 하지만 역시 학생들은 방황한다. 막연하지만 거대한 현실, 선택을 꼭 해야하는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문제인가? 이 자리배치 실험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달갑지 않았다.

고민이 팍팍 묻어나는 느낌이네요. 하. 정말 오늘 자리를 옮기라는 사회자분의 말에 저도 똑같은 혼란을 느꼈답니다. 올리브 나무와 렉서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그 중간에 비겁하게 앉아있을 수밖에 없는 제 자신이 한심하더군요.
비겁한 경우도 있겠죠. 그냥 신경쓰기 싫어서, 그렇다고 또 생각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저는 중도예요'라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거예요. 다만, 아직 배운 게 많지 않고, 내공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겸손한 분들의 입장에선.. 가장 합리적이고 분명한 선택이 아닐까 해요.. 저도 요즘 들어서 이 나이에 '생각이 강하다'는 걸 어필하는 게, 가당한 일일까 싶은 때도 있구요.
중도=생각없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나름대로 긴 성찰이 있었던 거라고 저는 믿으니까요.. 자리의 스펙트럼에서는 극 올리브였던 저도 명백한 판단을 내리기엔 망설이는게 사실이니까.. 이미 렉서스가 번쩍거리고 서 있는 이 사회에서 렉서스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렉서스쪽으로 앉으면 -안그래도 렉서스가 독주하는 세상인데-올리브나무는 어쩌나..하는 막연한 걱정이 들어 중간에 앉았어요.
갑자기 찬성/반대로 나누어 자리를 옮기라고 하신 사회자님도 미웠지만 그렇다고 가운데에 앉아버린 내 자신이 더 미웠다.

'감지하지 못하는 동안 어느새 깊숙이 침투해버린 세계화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무력감, 혹은 '세계화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다'라는 피해의식, 그로인한 두려움은 학생들이 떨쳐내야할 과제인 것 같아 보였다.

수업이 끝난후 조한의 전차칠판 메모를 보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이버 공간에서는 이런 저런 논의들이 오가고, 정도 오가고, 때론 격하게 감정이 부딪치기도 한다. 한운장의 사회로 마당극을 펼쳐보았다.
"머리와 마음 따로..."
"약발과 친환경..."
"평등이니 자유니..."
"계급이 없다느니, 자유니..."
신자유주의, 불평등주의, 좋다/싫다의 언어, 옳다/그르다의 언어
자리를 옮기는 일까지 그렇게들 순순히 움직이는 모습에 나는 감동 받았다. "선생님, 왜 이러는 거예요?" 한마디 던지며 자리를 옮기던 원망어린 눈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만,
시원하게 풀린 마당극은 아니었지만 극은 아직 반 학기나 남았으니까...
"무기력 하다," "별 생각이 없다."
(너무 생각이 많아보니?, 다 아는데 알아도 별다른 미래가 안 보이니까?)
아마도 지금 시대의 핵심어가 아닐까 싶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수업을 이 수업만이 아닐 것이다. 이 수업에서 우리가 해내려는 것은 무엇일까?
자리를 옮기는 등, 몸을 움직이더니 [왁자지껄] 게시판에 불이 붙었다.
역시 머리가 아닌 몸이 움직여야 한다니까...

2007-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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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2 신자유주의 목차 2010.05.13 3139
3371 저출산 도입부 2010.05.13 2827
3370 서문 자업중 file 2010.05.13 3038
3369 저출산 도입부 2010.05.13 3025
3368 책 머리에 file 2010.05.13 2804
3367 파일 file 2010.05.13 2770
3366 결론 2010.05.13 3171
3365 책머리 수정 file 2010.05.13 2725
3364 서문 file 2010.05.13 3134
3363 새 목차 3월 5일자 file 2010.05.13 3115
3362 책머리0306 file 2010.05.13 3122
3361 2막 시대읽기 file 2010.05.13 3947
3360 신부록파일럿 평가 29매 file 2010.05.13 3252
3359 신편집 후기 file 2010.05.13 2883
3358 신3절 추석 이야기 file 2010.05.13 2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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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6 5장 file 2010.05.13 2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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