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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johancafe 2010.05.13 18:31 조회수 : 2389

5절
아이스 브레이킹의 시기 : 인류의 희망과 절망을 말하다

지난 시간 우리의 수업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읽고 토론을 가졌다. 세계화, 신자유주의 등 먼 얘기 같았던 개념들이 개인의 삶에 깊숙히 들어와 있는 밀접한 현실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그저 막연히, 단순히 삶을 바라보던 시선들도 변화하고 있었다.
요즘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모르겠다. 는 말인 거 같네요.
정말 모르겠어요.(또 썼다;;) 내가 이걸 왜 하는지, 뭘 하는지, 해도 되는 것인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왜인지...수업얘기가 아니라 그냥 요즘 그러네요.
맞는지, 틀린지, 내가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선택해주는 것인지, 그러다보니까 선택은 자신있게 하지만 불안하고.
..아..그러니까 잘 모르겠어요; 하고싶은 말이 뭔지, 내가 갖고있는 생각이 뭔지. 잘 모르겠군요. 아아아악!! ?11월 16일 자유게시판 / 김경무
생각한 적 없었던 세계화의 암울한 면들을 보게 되면서 비판적인 시선, 그리고 회의와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이전에 확신했던 가치들도 '아닐지도 모르겠어'라는 의문으로 다가오는 '아이스브레이킹'의 시기였다. 게시판에는 지난 화두를 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기도 전에 현실과 미래에 대한 또 다른 화두를 던진다고 불평하는 글이 올라왔다. 수업은 불확실하고 불안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인식 속에 입밖으로 무언가를 낸다는 것이 조심스러워지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수업의 분위기는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세상을 낙관적으로 본 것은 실은 자기 삶의 공간, 좁은 시각에서 보았을 때 뿐이었다. 미래는 생각만큼 그리 밝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래의 글들은 11월 7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제인구달의 특강 <희망의 이유>와 영화 핸드메이즈핸드메이즈 ? 90년에 만들어진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의 영화로 20세기말, 길리아드 공화국, 무분별한 중절 수술, 핵 화학물질의 오염으로 대부분의 여성들이 불임 상태, 정부는 가입 여성을 컴퓨터로 관리하면서 우수한 남성의 가정으로 보내는데 이 씨받이 여성을 '핸드메이즈'라고 한다. 그들은 빨간 옷만 입어야 하고 베일을 쓰며 바깥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며 다른 남자와 간음하거나 수태하지 못하면 공개 처형된다. 그들은 임신을 위해 남자, 본부인과 함께 특별한 성의식을 치러야 하고 남자와의 농도짙은 사랑 행위는 절대로 금지되어 있다.를 읽고 인류의 희망과 절망에 대해 쓴 아홉번째 쪽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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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과제



생명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침팬지도 사람만큼의 감정을 지니고 있고,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 할 세상을 아름답게 보존해야 한다는 그러한 얘기들이 우리는 왜 이곳 저곳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일까. 당연히 요즘 세상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도 생명으로 보지 않는 시대에 동물원의 침팬지의 목숨은 뭘로 보일까. 초원에서, 밀림에서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동물들을 잡아다가 철창 속에 가둬놓고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든 동물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생명에 대한 모독인 것이다.

요새 내가 가지는 문제의식은 이런 것들이다. 귀로 듣는 ‘희망’의 이야기들은 나의 뇌수 속에서 ‘절망’ 혹은 ‘허무’의 이야기로 바뀌어 버린다. 그래도 아직 다행인 것은 이런 나의 버릇이 현재 세계에 대한 판단에 그칠 뿐이지,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도 그러한 것은 아니다. 사실 확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신문을 읽으면 읽을 수록, 뉴스를 들으면 들을 수록, 나에게는 암울한 생각만이 들 뿐이다. 세상에는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너무 많다.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파오는 일들이 너무 많다. 나는 세상을 보는 데에 있어서 점점 더 시니컬함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 같다. 20년이란 시간으로 빚어져온 나란 인간은 이렇게 세상을 칙칙한 색깔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는,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속은 어두침침한 인간이다.
사회계열 유원정

암울한 인류의 미래에 대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도 좋아?

노트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는 ‘무슨 질문을 던질거냐’고 씌어 있었다. 질문이야 많지. 그런데 잘 구조화가 안 된다. 얘기들이 조각난 채로 그림이 그려질 듯 말 듯 한다. 수업의 큰 화두인 세계화, 인류의 생존, 페미니즘. 수업 때에는 어쩐지 신나게 들었지만 막상 쪽글을 쓰려고 보면 그건 ‘내 것’이라기보다는 ‘조한의 것’. 내 더듬이로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냥 내가 좀 지친 것일 수도 있다. 판 그리는 것에 지쳤다고나 할까.
  이번 쪽글의 주제도 거창했다. 인류의 미래와 희망에 관련된 얘기였던가. <핸드메이즈>도 있고 제인 구달도 있지만, 인류와 관계된(혹은 관계 없는) 모든 것들은 사실 죄다 인류의 미래와 관련이 있다. 과연 인류의 ‘암울한’ 미래는 <핸드메이즈>의 배경인 ‘잘못되어 가고 있는’ 길리아드 공화국의 모습과 얼마나 다를까? 비슷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뭔가 틀림없이 암울하다는 건 느낄 수 있다. 그건 눈치로 알 수 있다.
  눈치. 감. 그래, 이거다.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다른 동물들보다 뛰어난 ‘감’에 있는 게 아니었을까. 날씨가 추워지지 않을까, 이걸 땅에 뿌리면 같은 게 열리지 않을까 등등. 눈치 빠르고 감 좋은 사람이 일 잘 하고 잘 살아남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의 인류가 불안에 처해있는 건, 감이 녹슬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 오던 방법이 먹히지 않는다. 이건 줄 알았는데 저거다. 세상이 삐거덕거린다. 통하려면 감이 잡혀야 하는데, 엉뚱한 전파만 온다. 제인 구달의 이대?연대?서강대 특강도 마찬가지의 경우다.
  나는 구달 할머니의 강연을 들으며 ‘할머니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당췌 감이 잘 오지 않는 얘기다. 모두가 노력하면 세상이 바뀌어요. 인간의 기대. 자연의 힘. 어린 사람들의 힘. 인간은 뭐고 자연은 뭐고 어린 사람들은 누구며 힘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막연한 기대를 품게 만드는 말은 그만 듣고 싶다. 아니, 무작정 그만 듣고싶다기보다는 이제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적어도 자기는 어떻게 해 왔다는 얘길 듣고 싶다. 책 읽으면 다 나오는 그런 얘기 말고.
  한국까지 와서 침팬지 인사까지 가르쳐준 구달 할머니에게는 정말 고마우면서도 미안하지만, 내게 와닿는 희망의 이유가 있다면 그건 밥하고 청소하는 소소한 삶에서 결코 소소하지 않은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도 좋다. 지구를 구하는 세일러문이 아니라도 좋다. 다정한 사람이 이웃을 구한다. 그런 다정함은 전염된다. 그게 희망이 아닐런지.
사회계열 장혜영

젊음의 이유

생명의 기운?
  구달 여사를 이 수많은 청중 앞에 세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20대 초반의 수많은 눈과 귀 앞에, 그녀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일종의 '희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갑자기 이런 생각도 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으며,(사실 경청하지는 못했지만) 또 그의 이야기를 듣고 느낀점을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자체가 희망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하는. 지나치게 낙관적인가? 하지만, 나는 이러한 순간을 그냥 지나치고 싶지는 않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했던가. 나도 가까운 곳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고 싶어하는 것 같다.
 
희망이라는 것은 정말 일체유심조의 문제다. 어떠한 관점으로 어떻게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희망의 존재여부는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환경도 바뀐다. 환경이 희망적이냐 절망적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인 구달의 말처럼, 우리가 젊기 때문이다.
사회계열 이예나

희망도, 이유도 없을지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대상 중 첫 번째가 가족이었다. 올해 들어서는 아기 때처럼 가끔씩 손 꼭 붙잡고 아니면 동생을 껴안고 자기도 하지만, 그 시절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가족과의 대화를 아예 단절해버렸다. 명절 때 남녀가 식사를 따로 하는 집안에서 장남으로 자라서 사회적 성공을 이룸으로써 권위의 최고봉에 다다른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 교수님께서 자주 언급하시는 ‘매니져 엄마’의 전형인 어머니에 대한 반항심과 그로 인한 이탈감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난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국가라는 공동체까지 벗어나고 싶었다.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당연한 현상이었다.)
  결국 사춘기를 겪으면서 나에게는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사라져 버렸다. 나와 친한 친구들은 나를 엄청난 개인주의자라고 표현하면서, 넌 나중에 조직 문화에 편입하기 힘든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가족, 학교, 동아리, 국가 등 나의 소속을 정의하는 모든 단체와 공동체, 집단에서 나는 ‘돌봐지기를’ 거부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좀 더 거시적으로 볼 때는? 그 또한 그닥 희망적으로 보이지만은 않았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그리고 이런 저런 학문적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난 현재에 대한 비판에 익숙해졌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 마초적 분위기에 대한 비판, 그리고 세계화에 대한 비판. 비록 지금은 한 물 간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1984’같은 경우만 해도 그렇고, 얼마 전 본 ‘핸드 메이즈’도 그렇고 사회가 이런 식으로 굴러가다가는 이런 저런 식의 암울한 미래를 접하고 말 것이라는 소식들뿐이다. 현재에 특별히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지나가버린,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지나치게 아름답게 미화시켜 회상하거나, 미래에 대한 단꿈을 들이쉬며 살아가기 마련인데, 딱 내가 그랬다. 세상은 나로 하여금 달달한 앞날을 기대하게 내버려두지 만은 않았다.
 ‘희망의 이유’? 희망에도 이유가 있을까? 앞으로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유토피아가 될 지, 디스토피아가 될 지에 대해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불협화음이 난다고 해도, 다들 믿고 싶지 않을까.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돌봄 공동체’인지 사실 난 잘 확신이 서지만은 않는다. 그냥 뭐든지 믿고 싶을 뿐이다. 이유가 없을 지라고 해도. 영화 ‘핸드 메이즈’를 보고 구역질이 나고, 저런 사회가 도래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없다고 해도, 어떻게든 아등바등이라도 대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라고 밖에는.
경영학과 이유진

내 위치에서 찾는 ‘희망의 이유’
글쎄, 우리가 결혼을 꿈꾸기엔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결혼은 가부장제의 온상이고, 꼭 커리어 여성이어야만 하나? 하며 가정주부를 ‘돌봄’의 영역으로 미화되기엔 너무 모순이 많은 지점들이 있다. / 특별히 우리 가족이 나를 힘들게 하거나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되도록이면 빨리 독립해서 방 한 칸이라도 얻어서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픈 사람인데, 이런 내게 이젠 ‘공동체의 영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때’ 라는 말은 썩 와 닿지가 않는다. / 갓 태어난 신생아의 울음소리 위에 ‘이 아이는 48,396,208번째 붉은 악마입니다.’ 라는 카피가 오버랩 되는 광고를 보면 난 아직도 소름이 끼치고 너무 싫은데, 다시 ‘애국심의 영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논의는 수긍할 순 있지만 받아들이기엔 아직 나는 먼 것만 같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맹목적 애국심 ? 반성적 애국심의 차이가 있겠으나 아마도 전자에서 맴도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시 돌아가는 사람은 생각이 깨어있는 소수라는 생각.)

 내 주변에는 아직 시작도 안 된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저기 보이는 길이 맞는 것 같긴 한데, 나 혼자만 가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다 같이 함께 데려가고 싶은 그런 욕심이 내겐 있다. 그런데 이 수업만 오면 ‘이제는’ 이런 영역! ‘이제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때! 라고 논의가 자꾸 생성될 때 마다 그 길은 점점 많아지고 또 멀어지고. 나는 그 길이 옳다고 믿고 따라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이건 이 교실에 모인 엘리트들 (여기서 말하는 엘리트란, 연대생이라는 학력 자본을 가진 엘리트라기보다는, 논의형성에 있어서의 엘리트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향에 대해 많이 생각해본, 그런 기회를 많이 가져본 엘리트.) 의 이야기 일 뿐이 아닌가? 라는 고민이 있었다. 어쩌면 이런 논의들도 유행처럼 자꾸자꾸 바뀌고 거기에 따라가기에 급급한 것이 아닐까. 라는 어쩌면 황당하고 쓸데없을지도 모르는 걱정으로 최근 꽤나 머리가 아팠다.

 그러던 중, 제인구달의 특강이 있었다. 나는 그 날 선약이 있어서 앞부분만 듣고 나가야만 했는데, 내가 앞부분을 조금 들었던 바로는 뒷부분의 내용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게시판을 들어와 보니 역시 그랬다. 특별할 건 없는 낙관적인 ‘희망의 이유’. 그러나 그녀가 말하기에 힘이 되는 ‘희망의 이유’. 사실 나는 그날 대강당을 꽉 메운 학생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시문 수업에서 만나는 사람들처럼 insight가 있는 사람들은 소수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제인 구달이라는 이름에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는 사실이 묘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어릴 적 책에서만 보던 제인구달 할머니가 머리를 곱게 묶고 침팬지 인형을 들고 내 눈앞에 나타나 홍~홍~ 거리면서, 어쩌면 흔할지도 모르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젊은 지식인들을 이렇게 모이게 한다는 것이...



 “새로운 논의, 다 맞아. 그런데 그거 엘리트들만의 논의 아니야? 아직 뭔지도 모르고 시작도 안 되고 자기 앞길만 급급한 친구들이 내 주위엔 수두룩하단 말이야. 다 같이 가야지. 똑똑하고 아는 사람들만 가면 어떡하나.” 했던 나의 괜한 걱정. 그 사이에서 나도 그냥 따라갈까 아니면 좀 늦더라도 모두 같이 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길 같은거 그냥 못 본 척 하고 그냥 이대로 편하게 주저 앉아버릴 것인가. 애매한 정체성을 가지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에게 제인구달의 강연내용 ? 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제인구달의 강연 그 자체, 제인구달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러 모인 사람들 그 모습 ? 이 내 고민의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찾아준 듯하다.
 완전히 똑똑하지도,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지도 않는 (눈을 떠서 이미 봤는데 못 본 척 하고 다시 감아버릴 수는 없는) 내가 싫어했던 나의 이 애매한 정체성은 이제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장점이 되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나는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모두를 설득시키고 이해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새로운 논의를 멈출 수는 없는 것이리라. 새로운 생각과 논의와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고, 그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고.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각자 자신의 역할을 알고 그 역할을 다해 나가는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나도 있다는 것이 소박한 내 희망의 이유라면 이유랄까.
사회학과 장미진
희망? 글쎄...
 
희망의 이유라. 구달에게 오늘의 상황이란 희망의 근거마저 찾을 정도로 절박한 것일까? 사실 난 희망이란 걸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참 어려운 길을 걸어오셨군요...”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의미와는 좀 다른 이야기다. 나는 희망이란 걸 가질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있어본 경험(또는 그런 상황을 인식했던 경험)이 없다. 물론 개인적인 난관은 있었지만 그런 난관의 때에 나는 희망을 갖기보다는 분석하고 재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성을 가늠하고 추진하거나 포기하거나 했을 뿐이다. 이런 일은 희망을 갖는 일하곤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현대 사회에 대한 희망, 또는 미래에 대한 희망, 또는 나의 미약한 개인적인 몸부림이 세상의 억압과 불의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희망. 그런 희망을 가진다는 것 역시 인식해본 적이 없다. 물론 나는 (권력을 가진)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된 후에 정말 훌륭한(겸손하고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되고픈 욕심은 있었지만, 그것은 희망을 가지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필요한 것들을 열심히 할 열정과 노력이 필요했던 일이었다.
아마도 내가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건, 내가 인류의 미래를 그리 비관적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오늘날처럼 전세계적으로 위력을 과시할 수 있는 대량 살상 무기가 개발된 적이라든지, 환경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적은 과거엔 없었지만, 한편으로 오늘날처럼 민주주의가 발달한 적도, 환경문제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이 증대된 적도, (물론 아직도 많은 극빈자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오늘날처럼 많은 사람들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았던 적도 없었다. 이런 생각들은 너무 naive한 것일까? 오늘날 권력과 부에 대한 불평등과 억압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도덕을 강요할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다. 도덕과 선은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도덕과 선을 향해 움직이고 싶고, 이왕이면 나의 그런 몸부림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바른 사람이 되고 싶고, 나아가 바르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언행이 조약돌이 되어 우리 공동체에 던져지고, 그것이 신선한 파동이 되어 새로운 문화가 될 수 있다면 죽어서 신을 만나도 떳떳할 것이다.
이런 것은 희망을 갖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다소 무례하고 무식한 말일 수는 있겠지만 희망을 갖는다는 건 젊음의 사치로운 향유 같기도 하다. 나는 희망보다는 반성을 하고 싶고, 꿈보다는 목표를 갖고 싶다.
사회계열 윤지민

가임여성이 통제가능한 자원으로 그려지는 영화의 충격적인 스토리에 토론은 다시 열띤모습을 되찾았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단어와 ‘전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며 말문을 떼는 여성에 대한 생각까지. 제인구달의 특강이 너무 당연한 메시지만을 전달하고 간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유명 인사도 별거없구나 라는 식의 분위기로 게시판이 흘러가고 있을 무렵 조한의 재미있는 리플이 하나 달렸다. 아래 글은 그 리플에 대해 한 학생이 쓴 글이다.

넌 지금 왜 하고 있니.
# 불평과 불만
 이번 학기, 이 수업을 수강하면서 나는 너무 큰 기대를 가지고 들어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첫째 수업하시는 선생님에 대한 기대였고, 둘째 수업하는 방식에 대한 기대였다. 조한 선생님이라는 책속에서만 익숙한 이름을 실제로 본다는 기분에 연예인을 만난다는 설렘과 얼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게다가 학생들이 만들어가는 수업(?)이라는 수업 방식도 대학에서 처음 접해보는 것이었기에 내가 가진 기대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나는 그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켰는가. 우선 선생님에 대한 기대는 나름대로의 만족을 거두었다고 느꼈다.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알게 모르게 'Force'가 느껴지는 선생님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항목은? 수도 없이 지적 되었던 이야기지만 우리가 만들어 가는 수업이라지만 우리가 너무 크다는 아쉬움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쪽 글과 팀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 혹은 흥미가 처음보다 많이 떨어졌다. 의무감처럼 느껴지기 까지 하는 지금의 상태에서 즐거움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수업의 정체성도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세계화, 혹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토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우리는 인류의 문제로, 그리고 여성의 문제로 발 빠르게 주제를 옮겨갔다. 지지부진한 토론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겉핥기식으로 논의가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문제다.

#선생님의 리플 
제인 구달이라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동물학자가 강연을 한다는 커다란 포스터가 백양관에 붙었다. 난 또 그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거 한 번쯤은 가봐야지’라는 자본주의의 산물. ‘경험이 많아야 좋다는 것은 필연 자본주의의 산물이다.’라는 송두율 교수의 지적이다. 역시 난 자본주의가 만든 모범생이다. 특히 대학생들에게는 더욱 해당된다. ‘대학생은 이것  저것 해보는 게 남는 거야.’ 라는 무시무시한 말. 난 이런 무시무시한 말의 명령으로 제인구달의 강연장으로 향했다. 지시문 수업에서 간다고 했지만, 수업을 빼고라도 갈 의양이 있었다. 이렇게 가게 된 제인 구달의 강연장에서 나는 서론과 결론만 듣고 나머지 시간은 아마도 졸았던 것 같다...
 별 다른 감흥과 소름 돋을 만한 message를 얻어서 돌아오지는 못했다. 이 또한 너무 기대가 큰 탓이었던가. 제인 구달이라는 저명함이 나에게 무언가 혜안을 안겨 주리라고 생각했다, 아니 기대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러한 생각의 글들이 무수히도 많이 달렸다. 그리고 그러한 글 들 사이에 조한 선생님의 리플이 한 개 달렸다.

“아직도 메시지 들으러 다니냐? 참여관찰을 하면서 자기 생각을 숙성시켜야지...”

 잊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그렇게 들었지만 막상 실제 생활에 도입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20년 가까이 메시지만 쫓아다닌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아니 나에게는 절실하다. 메시지가 부족한 사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메시지를 구한다. 왜, 그것이 필요한지라는 질문은 생략되어있다. 그저 하라니까 하는 것이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 하는 것이다. 메시지는 그렇게 소비되고 소비 불가용 메시지를 만났을 때는 실망과 함께 다른 메시지를 찾아 헤맨다. 뜨끔한 선생님의 이 message는 그간 루주해진 나의 마음에 조그마한 불씨를 밝혔다.
 
#넌 지금 왜 하고 있니
 선생님의 수업일지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왜 그런 조사를 하는지” 지금 사회에서 우리에게 ‘왜’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더구나 그 질문이 나를 향한 것일 때는 더욱 의미가 없어진다. 의미가 없기보다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는다. 약 2주 전쯤, 서울대학교에 맑스의 『자본』강의를 들으러 갔다. 6주 강의였는데, 난 그 이후 그곳을 가기를 그만 두었다. 대학 YMCA 간사 누나가 나에게 한 조언 때문이었다.

 “요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본』을 소비하는 경향이 많아. 비단 자본이라는 책뿐만이 아니지, 친자본주의적 사상이던지, 반자본주의적 사상이던지, 사회주의 사상이던지 사람들은 그걸 소비해. ‘『자본』정도는 한 번쯤 읽어봐야 지식인이지’라는 말이 ‘왜’라는 질문을 상실케 하는 것이지. 넌 그런 의미로 『자본』을 만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병렬적으로 나열된 무수한 경험으로 구성된 인간이 아니다. 내가 ‘왜’라는 질문을 통해 얻어낸 경험으로 얻은 message와 feeling으로 이루어진 것이 나다. 이번 수업의 절반이 지난 지금, 내게 남은 과제는 ‘참여·관찰’, ‘왜’라는 질문을 일상화 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아무래도 지금의 수업에 이르기 까지 얻어낸 문제의식이 아닐까.
인문계열 송시원


핸드메이즈의 충격이 너무 강렬했던 터라 논의는 계속되었다. 한주간의 쪽글과 수업시간으로는 부족했다. 그 다음주에도 제인구달의 특강과 핸드메이즈 영화, 두가지의 밑바탕에 다른 자료들을 연관지어 토론을 이어나갔다.

학기 후반부는 후기근대적 삶, 인류의 미래에 대한 대안들을 이야기 해보면서 감을 잡아갈 것이다. 일단 지난 주와 이번 주는 <핸드 메이즈>와 제인 구달의 특강을 자료로 인류의 암울한 미래와 ‘희망’에 대해 운을 떼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번 주 쪽글은 <핸드 메이즈> 토론과 제인 구달의 특강, 그 외 자료실에 올라있는 자료들을 골라 읽으면서 자기가 이 수업을 들으면서 갖게 된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는 글을 쓰면 된다. ? 11월 7일 조한의 수업일지 중

사회 전반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각자가 가진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풀어놓는 장이 벌어졌다. 핸드메이즈 영화에서 현재 대한민국의 문제점에 대한 칼럼 및 성명서까지 어떻게 보면 동떨어진 파편들을 이어붙이고 분석함을 통해 각자의 새로운 그림들이 태어났다.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 300여명의 KTX 여승무원들이 철도공사의 직접고용과 성차별 해소를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한지 240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 번의 계절이 바뀌고 또 다시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습니다.

KTX 여승무원들이 최소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힘겹게 싸워오는 동안 우리 교수들은 침묵으로 방관해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KTX 여승무원들의 정당한 요구가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역할을 다 할 것임을 밝힙니다.

KTX 승무원의 성차별적 불법 고용은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동문제와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 집약되어있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 문제가 어떻게 풀리는가에 따라 앞으로 우리 사회 비정규직 문제의 방향이 정해질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노동부와 철도공사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깊은 우려와 절망감을 떨칠 수 없습니다. 노동부는 스스로가 만든 법을 어기고 있으며, 공기업 철도공사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성차별적 고용을 개선하라는 권고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KTX 승무원 외주 위탁이 불법파견이 아니라는 노동부의 판단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법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이라는 데에 거의 모든 법조인과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동부의 판단은 모든 위장 도급과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며, 파견법과 남녀고용평등법, 근로기준법을 포함한 노동관련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노동부의 판단대로 KTX승무원 외주위탁이 적법한 도급이라면, 앞으로 외주위탁이 가능하지 않은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현행 노동관련법과 정부가 제정하고자 하는 비정규보호법안 또한 단순한 종이 조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파견법이나 비정규보호법을 피하려면 도급으로 위장하면 그만이게 되었습니다. 위법한 성차별을 행했어도 국가기관의 권고를 무시하면 그만이게 되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KTX 성차별 고용 사건에 대한 결정문에서 철도공사와 여승무원들이 불법파견 관계이든 위장근로계약관계이든 여부를 막론하고 실질적 차별행위자로서 철도공사는 여승무원들에게 행한 차별을 시정할 의무가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철도공사가 여승무원에 대한 정당한 고용조건 보장을 통해 성차별을 해소하라"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최종 결론은 결국 여성무원 직종을 정규직화하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명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철도공사는 "철도공사에는 성차별이 없으며, 이미 개선되었다"는 주장으로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전혀 받아들일 의사가 없음을 반복적으로 천명해 오고 있습니다.

철도공사 경영진이 거짓과 탈법으로 불법파견과 성차별을 은폐해 오고 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힘없는 근로자들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 방식은 가장 낮은 수준의 경영입니다. 연봉 1500여만원을 받는 400여 여승무원들의 인건비를 줄여서 수천억, 수조원에 달하는 철도공사의 적자를 해결하겠다는 철도공사의 주장은 어떠한 설득력도 없습니다.

철도공사 경영진은 KTX 여승무원을 정규직화를 포함한 성차별 개선조치를 취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3만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한 공기업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최소한의 권고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다른 여타 사업장에서의 부당한 인권침해나 성차별 개선, 그리고 여성노동권 확보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철도공사와 노동부의 태도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용인하여서는 안 되는, 용인할 수 없는 수인한도를 넘어선 것입니다. 철도공사와 노동부의 태도에서 우리는 최소한의 합리성이나 법적 정당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임금 여성 비정규직을 비용 절감의 일차적 대상으로 삼는 정부정책과 공기업 경영은 약자에게만 희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비도덕적일 뿐 아니라 양극화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입니다.

KTX여승무원 간접고용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문제가 KTX 승객 안전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인정한 것처럼, KTX의 승무업무는 '핵심업무'로, 외주위탁방식으로는 업무 수행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들 업무를 외주화 하는 것은 '고객의 안전한 수송'이라는 철도공사 사업의 핵심과 공공성을 방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시속 300킬로미터로 고속 주행하는, 1,000여명의 승객이 탄 열차에서 단 한명의 열차팀장만이 '안전'을 담당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열차팀장이 여승무원에게 아무런 '지시'나 '지휘 감독'을 하지 않는, 완전히 독립적이고 분리된 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한다면, 위급한 상황에서 승객의 안전은 보장받기 어렵습니다.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는 KTX 기계적 고장은 엄청난 인적 안전사고를 일으킬 수 있으며, 이때 승무원들의 역할은 그러한 사고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결정적입니다.

KTX 여승무원에 대한 성차별적 불법고용을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는 여승무원들을 직접고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거듭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미 지난 4월에 철도공사는 승무원 업무의 정규직화를 고려한 바 있으며, 공기업 경영평가 결과 공사 임직원에게 지급된 1천여억 원에 달하는 성과급의 20분의 1에 해당하는 비용만으로도, 혹은 철도공사가 전현직 임직원에게 무료로 지급한 KTX 탑승권 비용만으로도 승무원들을 직접 고용할 수 있으며, 올해 초 현재 500여명 여유가 있는 정원으로도 충분히 승무원들을 정규직화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논리나 합리성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회적 대화나 대타협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어떠한 법적 논리도, 경제적 합리성도 통하지 않는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투쟁'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으며, 정부와 기업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불신이 존재하는 한 우리 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회적 합의이나 사회 통합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의 사회적 비용은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입니다.

KTX 여승무원들에게 이제 또 다시 추운 겨울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겨울을 나지 않도록, 노동부와 철도공사는 10월 31일까지 KTX 여승무원 직접고용에 대한 약속을 할 것과 그러한 약속을 이행할 계획을 발표하기를 요구합니다.


2006년 10월 25일

[특별기고] 카지노 자본주의의 폐해/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

생선회집 선전 문구로도 알려졌던 ‘바다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암세포처럼 번지고 있는 ‘카지노 자본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지는 최근 사설에서 도박 산업을 통해 재정 수입을 늘리는 ‘카지노 자본주의’가 일부 국가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사행산업은 지난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부터 존재했던 경마, 1969년 옛 주택은행에서 발매를 시작한 주택복권의 2종에 불과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 국내 취약 산업 육성, 지방 재정 지원 등을 목적으로 경륜, 경정, 카지노, 새로운 복권들을 위한 관련법이 마련되고 운용 기관이 구성돼 사행 산업의 성장세가 빨라졌다. 특히 최근에는 ‘음반비디오 및 게임물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근거로 사행성 게임장이 무분별하게 허용됨에 따라 국내 사행 산업 시장 규모가 급격히 증가했다.

사행 산업의 급속한 성장은 단기적으로는 해당 산업에서 투자와 고용을 증대시키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더욱이 사행 산업으로부터 공공 부문으로 이전되는 자원이 제대로 활용된다면 사양 산업이나 재원 자립도가 낮은 지방 정부 그리고 취약 계층 등에 대한 지원을 통해 경제 양극화 해소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볼 경우 사회 비용이 경제적 이익을 초과해 사행 산업의 성장은 경제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사행 산업의 확산은 고용을 축소시키고 성장잠재력을 약화시킨다. 사행 산업에 대한 투자 증가는 이 부문에 대한 취업을 증가시키는 고용 증대 효과가 있지만 도박 등 사행업에 빠져 일확천금을 꿈꾸며 취업을 포기하는 경우를 감안하면 오히려 고용 인구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또한 공인된 사행 산업 시장의 확대는 사회 내 사행 심리를 만연시키기 때문에, 경제 내 음성적 불법 도박 산업을 동시에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탈세 등을 통해 지하 경제 규모를 급증시키는 원천이 되게 마련이다. 불법적이지만 막대한 경제적 이권을 지닌 지하 경제의 확대는 단속 회피와 이권 확보를 위한 업주?공무원간의 뇌물 공여 수수 등의 부정부패를 확산시키는 첩경이 된다. 사행업의 발전에 의한 배금주의 확산, 지하 경제 확대 그리고 부정부패의 만연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가장 심대한 악영향은 근로 의욕과 윤리 의식을 마비시키는 점이다. 건전한 경제 정신의 실종은 우리 경제의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사행업의 무분별한 발전은 분배 측면에서도 소득 양극화를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 국내외 많은 연구에 따르면 사행 산업의 주된 소비 계층은 저소득층이라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따라서 업주이외에는 패자만 있는 사행업은, 저소득층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어 사회 내 소득 양극화 문제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사행업의 부작용이 방치되면 사회적 비용이 그만큼 증가하게 되는 점도 문제다.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도박이 합법화된 지역에서는 도박 중독자 치료 비용, 사행 기업 관리 감독 비용, 범죄 예방 시스템 구축 비용, 증가한 범죄자에 대한 교정 비용과 같은 사회적 지출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적 지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민간의 기부, 세금 부담 등의 사회적 비용은 단기적 이익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생산적 투자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지나치게 빠른 국내 사행 산업의 확산은 단기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에만 집착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 정신이 결핍된 천민 자본주의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 해악만 끼치는 카지노 자본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사행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강화하는 것 등을 통해 사행 산업을 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각종 사행산업에 대한 통합 감독 기구 설치, 공공 부문이 운영하는 사행 산업에 대한 감독 강화, 민간 부문이 운영하는 사행 산업에 대한 범법 행위 색출 강화 등으로 사행 산업의 공공성과 투명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 사행 심리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치와 허영을 경계하고 근면과 절약이 덕목이 되는 올바른 ‘경제 정신’을 확립하는 학교 및 사회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이를 위해 가장 절실한 과제다.
파이낸셜 뉴스?2006.09.18???????????????????????????????????????????????????????????????????
그렇게도 비참한, 하지만 비참하지만은 않은...

 작명하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악취미라고하지 않던가? 우리가 막 빠져나온, 아니 일부는 아직도 그곳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그 시대의 별명만 해도 부지기수다.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미래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이 아닐까? 중세, 근대, 그리고 탈근대라는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무력함이 느껴진다. 앞으로의 미래가 너무 급하게 바뀌어 예측하기 어려운 한편, 그만큼 다른 사람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그 정도만 나도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술판에 안주와 같이 빈번하게 오르내리는 주제이다. 프로야구 우승을 누가할 것이냐는 문화적 미래(?)부터 시작해서 투쟁을 앞둔 노동자들의 절박한 미래까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그린 미래상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내게 주어진 4가지 단상을 살펴보자. 첫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소녀들을 empowering 방법에 대한 글을 읽었다. 역사적으로 변화해 온 3가지 유형의 페미니스트들에 대하여 고찰하며, 새 방향을 제시한 글이었다. 둘째는 사행성 자본주의에 대한 염려어린 글을 읽었다. ‘바다이야기’를 비롯한 국가에서 행하는 다양한 사행성 사업들이 주는 폐해에 대하여 역설한 글이었다. 셋째는 KTX 승무원에 관한 교수진의 성명서를 읽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성명서였다. 비정규직 문제와 여성차별문제가 뒤섞여 있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항의 글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난 단상은 ‘핸드메이드’라는 미래학적 영화였다. 불임병이 만연한 사회에서 일부 여성이 아이를 낳기 위해서 격리되고 관리되는 사회를 그린 영화였다.

#1. 사행성 자본주의
사행성 자본주의에 빠져들면 단기적인 자본은 축적될지 모르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사행성 오락은 인간 개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리고 사행성 오락은 빈부격차를 더욱 양산한 다는 것.
허리 빠지도록 일해도 내게 돌아오는 노동의 대가는 벤츠 끌고 다니는 김 사장님에게는 어림없다. 벤츠는 고사하고 소나타 한번 끌고 다니고 싶어 그간 모아놓은 돈으로 ‘바다이야기’로 향하고, 로또가게로 향한다. 노동의 즐거움과 그 성과를 모르는 놈이라고 욕할 수 없다. 그런 즐거움을 느끼기에는 매번 판에서는 따는 사람만 따가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과 빈부격차는 다시금 그 박탈감과 격차를 양산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격이 되어버린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미래이다.

#2. 비정규직노동자; KTX 여 승무원
  신자유주의 아래서 최대한 기업에게 유리하게 최대한 자본에게 유리하게 판이 그려지고 있었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것이 기업이라면, 양산해도 무방하도록 법을 제정하는 것은 국가이다. 이렇게 된 이상 노동자는 편이 없다. 기업과 국가가 짜고 치는 고스톱에서 독박 쓰는 건 노동자뿐이다. MT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은 외국 단어로 번역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형태가 외국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속성을 띤 직장은 없다는 것이다. ‘계약’이 불안정 하고, ‘임금’이 불안정한 것이 한국의 비정규직이다. 언제든지 해고당할 수 있고, 언제든지 삭감 당할 수 있다. 기업가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은가. 노동가 개개인은 중요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관계도 중요치 않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구조일 뿐이다. 만들어 놓은 구조에 노동자가 누구든 채워주면 된다.
 KTX는 여기에 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복잡한 문제가 섞여 있다. 승무원, 항공기로 말하면 스튜어디스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이들은 모두 미모가 출중한 여성이다, 아니 그렇게 뽑았다. 뒤집어 보면 미모가 쇄하면(?) 필요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KTX가 원하는 승무원은 예쁘면 그만이고, 호감을 주는 여성이면 그만이다. 안전과 고객을 위한 편의는 이미 뒷전이다. 교수 성명서에도 언급이 있지만 outsourcing할 경우, 안전교육은 그만큼 미미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기차에 탑승하는 남자 승무원은 모두 정규직이라는 것은 성차별적 인사행정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남성들은 미모가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얼마나 구식인가. 박정희에게도 굽히지 않았던 이철의 고집은 여전했다. 私益을 앞장서는 私企業의 경우도 이제는 비정규직노동자의 권리 신장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런데 공익을 위해야 하는 철도 사업이 이러한 식으로 노골적으로 돈 냄새를 풍겨야겠는가? 어찌되었든지 이것이 우리의 미래임은 틀림없다. 그러함에 불구하고 희망적인 것은 그러한 KTX 여 승무원들이 투쟁을 한다는 것, 진보적 매체와 노동연대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성명서를 제출하는 교수들이 아직 이 사회에 존재한 다는 것 또한 우리의 미래의 단상임에 틀림없다.

#3. 페미니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핸드 메이드』를 중심으로
 페미니즘은 우리의 미래라고 하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현재완료 혹은 과거시점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는 할머니, 엄마, 그리고 소녀가 각기 다른 위상을 지니고 있다. 저항적 세대, 떠돌아다니는 세대, 그리고 다시 새로 정착한 세대. 피해자로서의 제 1세대 페미니스트.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제 2세대 페미니스트. 그리고 명확한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제 3세대 페미니스트. 신자유주의라는 판 속에서 돈 많은 남자랑 결혼 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세우는 여성, 여성이 지닌 ‘성적 매력’을 이용해 권력화 하려는 여성. 그 가운데 위축되어가는 소년들. 이러한  구도에서 주위의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얼추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핸드 메이드’는 미래 사회 여성에 대한 가감 없는 그림을 그린다. 더 이상 여성은 단일화로 볼 수 없는 대상이다. 권력화된 여성이 있는 반면, 피지배적 여성이 존재한다. 영화에서 파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제 1세대 페미니스트, 할머니 세대의 여성이다. 남성 권력을 복제한다. 동일한 power를 지니고서 그들은 피지배층 여성위에 군림한다. 마치 옛 시절, 남성이 여성위에 군림하듯이. 그리고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라고는 볼 수 없는 피지배층으로서의, 억압받는 계층으로서의 여성이다. 하지만 영화를 자세히 보면 이들이 빨간 옷을 입기 전에는 제 2세대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성을 사랑하며, 아이를 가지기를 원치 않는다. 남성 권력에 대한 비판도 좋지만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려는 것이 제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다. 이들은 할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만다. 아쉽게 영화 앵글에는 제 3세대 페미니스트, 즉 포스트 페미니스트들이 담겨 있지는 않다. 포스트 페미니스트, 즉 포스트 여성의 실체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강한’자에게 붙으려는 몇 몇 여성의 움직임이 포착될 뿐이다. 사적 영역의 시대적 증대의 필요성은 여성에게 자신의 방에서 나와 새로운 가족을 만들라고 요구하고 있고, 이러한 요구는 충분히 우리의 미래에 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도 비참한, 하지만 비참하지만은 않은...
 인생역전 노리면서 ‘바다이야기’에서 익사(?)한 김철수씨. 명문대학 나와 탁월한 미모로 KTX 승무원으로 입사하였지만, 비 정규직이라는 계약아래 서울역에서 투쟁중인 양숙자씨. 어렸을 적부터 전략적으로 좋은 대학에 입학하여,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편한 인생을 즐기려는 이말자씨. 이것이 4가지 단상을 통해서 본 우리의 미래이다. 얼마나 암울한가. 하지만 이러한 암울하게 현실을 진단하는 이면에는 또 다른 미래의 꽃이 피어나고 있다. ‘바다이야기’와 같은 사행성 자본주의에 대해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시민들, 비정상적인 비정규직 노동 조건에 투쟁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시민들, 가족을 꾸리는 여성을 꿈꾸고 현장에서 일하는 선생님과 학생들. 비참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도록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갈 주체들이자, 그 미래에서 꽃 피울 주체들이다.
사회계열 송시원


나는 아직 사필귀정(事必歸正)을 믿는다
  세상에는 언제나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존재한다. 누가 지배자이고 누가 피지배자인지에 대해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존재했지만,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구분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계급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구분하는 대표적 기재였으며, 출신 국가와 재산은 지금까지도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는 기재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계급, 출신 국가, 재산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여성은 피지배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핸드 메이즈’의 핸드 메이드들과 KTX 비정규직 여성 승무원의 처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피지배자이며, 지배자의 부당한 횡포에 분노한다. 그들에게는 원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을 얻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그들은 포기해야 하는 걸까?
  영화와 현실은 모두 ‘아니다’라고 말한다. ‘핸드 메이즈’에서 피지배자인 핸드 메이드들은 자신을 도구화하려는 지배자인 정부에 반발해 자신의 삶을 구제하기 위해 탈출을 시도하거나 자신의 욕망에 따라 지정된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잔다. 그들은 KTX 비정규직 여성 승무원들처럼 조직적이며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작은 반란을 꿈꾼다. 그들 개개인의 행동이 정부의 전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여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어쨌거나 그들은 지배자의 부당한 횡포에 쉽게 자신의 삶과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자신의 삶을 구제하고자 하며 욕망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들의 현실은 비극적이며 그들의 미래 역시 쉽게 달라지지 않을 테지만, 그들은 자신을 쉽게 포기하거나 방치하지 않는다.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횡포에 자신을 체념하지 않는 것, 모든 변화는 이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반면 KTX의 비정규직 여자 승무원들은 ‘핸드 메이즈’의 핸드 메이드들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파업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 시대의 또 다른 지배자로 군림한 거대 기업은 그들을 탄압한다. 그들은 ‘핸드 메이즈’의 핸드 메이드들처럼 자신의 삶을 구제하고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투쟁하고, 그들의 투쟁에는 영화 ‘핸드 메이즈’에서와는 달리 지원자들이 존재한다. ?‘핸드 메이즈’의 닉은 국가 전복을 위해 싸우지만 이것이 핸드 메이드들을 위한 것이라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KTX 승무원의 성차별적 불법 고용은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동문제와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 집약되어있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 문제가 어떻게 풀리는가에 따라 앞으로 우리 사회 비정규직 문제의 방향이 정해질 것입니다.”라는 ‘KTX 승무원 고용 촉진을 위한 교수 모임의 성명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과 욕망, 나아가 그들 이후의 사람들의 그것을 지지하는 지원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지원자들의 수가 늘수록 그들의 투쟁을 힘을 얻을 것이기에 그들의 미래는 ‘핸드 메이즈’의 핸드 메이드들보다 덜 어두워 보인다.
  KTX 비정규직 여성 승무원의 글이 주인공의 독백으로 채워지는 ‘핸드 메이즈’의 마지막 장면보다 덜 비극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들의 상황이 ‘핸드 메이즈’의 그것처럼 어둡고 비극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정의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직 사필귀정(事必歸正)을 믿는다.
영어영문학과 정유진
미래, 구체적인

초등학교 동창 중 한놈은 얼마전까지 성인 오락실에서 일을 했다. 그 아이는 공고를 나와 오토바이에 미쳐 살다가, 여자를 만나려면 돈이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 일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7년만에 만난 나에게, 그래도 자신이 하는 일을 조금씩 조심스럽게 표현하려 노력하면서 그 아이는 말했다. 자기는 인맥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오락실에 오는 사람 중에는 말만 하면 안다 싶은 거물들도 꽤 있고, 그 사람들이 하루에 오락실에서 쓰는 돈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고, 오는 사람은 계속 와서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고.

그 아이와 만나던 날, 미니몰에 잠깐 들러서 이런 저런 물건을 구경하다가, 호신용이라고 쓰인 악세사리로 농담하면서 나는 혼자 깔깔거렸다.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 모두를 길게 감싸는 쇠로 된 그것에 대해서 그 아이는 미간을 좁히며 진지하게 말했다. 오락실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조직원들은 실제로 칼조각을 거기다 붙여서 사람을 해치는 데 사용한다. 웃을 일이 아니다.

내가 하는 거의 모든 말이 배부른 소리가 되는 세계가, 내 친구에게는 지금 당장 대면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사실에 아뜩해졌다. 사실, 생각해보면, 굳이 암울한 미래상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세상은 지금도 충분히 더럽고 추하다. (어딘지 모르게 삐딱한 성격때문인지, 내가 생각하는 미래 역시나 그다지 밝지는 않다.)한탕 해보겠다고 밤새워 오락실에서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는 그 녀석이나, 한 몫 챙겨보겠다고 오락실 기계 앞에 충혈된 눈으로 꼼짝않고 앉아있는 사람들이나, 제멋대로 사회의 규율을 재단하며 칼을 가는 사람들이나,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학교 밖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정말이지 살벌한 현실과 만나게 될 거라는 어른들의 엄포는 거짓이 아니었다. 건전한 경제정신,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충실한 개인과 같이 일반화 된 개념 속에, 그토록 오묘하고 독특한 개인들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저 사회의 병적인 요소, 사회재활이 필요한 요소로 치부될 뿐이다.

핸드메이즈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건, 조한선생님 글의 소재였던 페미니즘이나 여성의 임파워먼트과업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구조나 사유의 추상성에 관한 것이다. 잘 정돈된 듯한 사회를 보고 만족해하는 고위층의 사람들은, 자신을 결코 책하지 않는다. 그것이 권력을 가지고 안주하려는 개인의 욕망 탓이기도 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탓도 있는 것같다. 하나의 본질적인 원리가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에 대한 은유에 우리는 꽤나 익숙해져있다. 그것이 설사 윤리적이고 이상적인 가치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해도, 근본적인 폭력성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에게 '살아있고 욕망을 가진 구체적인 케이트'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일 뿐이고, 남성적인 영역을 위협하는 '여성'일 뿐이다.

ktx사건 역시나, 신자유주의적인 이상에 충실한 경영진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나가고 있는 것이지, 한 명의 살아있는 개인을 '착취'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한 명의 온전한 개인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승무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정말로 악덕하거나 권력욕에 환장하는 무리여서 라기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각자 다른 방식의 사유구조를 바탕으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21세기 십대여성 임파워먼트를 위한 비전과 과제" 속에서 '가정적인 돌봄과 상호 학습의 원리가 살아있는 작은 공동체'가 대안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나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다. 진부하지만 나에게는 전부인 고뇌들을 대체 어디에 털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괴로워하는, 고립된 광장의 개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사람들의 온기일 거다. 자의식 과잉의 시대에, 제각각 자기가 보고 싶고 볼 수 있는 만큼만을 보며,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힘없이 고꾸라지며 피해의식을 키워가는 개인이 제법 많은 세상, 병적인 활력과 무기력함이 동시에 공존하는 현세상에서, 미래를 꾸려나가야 하는 살아남은 사람들은 수전 손택의 말처럼, 타인의 고통을 감지할 수 있는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휴머니즘'의 기치를 내거는 것도 좋지만, 여전히 지나치게 구조중심적인 논의와 추상화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견제의 목소리로 철수와 영희와 바둑이를 사랑하자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나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문계열 손송이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다. 이들은 서로 얽히고 ?霞? 가며 세상을 산다. 그리고 세상을 살다보면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건 아니다’ 싶은 상황(예>소득 양극화 등)에 대처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순종(?)형이다. 상황이 참 삐리리해도 개인으로서의 무력감을 체감한 후, 마음에 ‘忍’자를 새기고 살아가는 유형의 사람이다. 이 시대 대부분의 서민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물론 속으로, 혹은 친한 사람들끼리 상황의 불합리성에 대해 토로하고, 비난할 수는 있지만 공개적으로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둘째는 의분(?)형이다. 그들은 불합리한 사회현상에 이의를 제기한다. 각종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힘이 없다. 열심히 외치고 요구하지만, 결국에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미미하다. 생각했던 만큼 이루지 못한다.
셋째는 패권(?)형이다. 마찬가지로 자존심이 강해서 자신에게 불리한 현실을 참아내지 못한다. 그들은 피지배층으로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노력한다. 피지배층인 경우에는 지배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지배층인 경우는 계속 그것을 유지하려고 한다. 마침내 그들은 불합리한 상황의 머리꼭대기에 앉는다. 즉,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
넷째는 은둔(?)형이다. 그들은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패권형과는 다른 방향으로이다. 그들에게는 현실에 맞설 용기도 의지도 없다. 그들은 되도록 지배?피지배가 흐릿해지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들은 복잡한 세상을 떠나 변두리로 간다. 삶을 조용히 음미한다.
물론 다른 유형의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은 극소수이며, 대부분 위 3가지 유형, 혹은 어느 정도 융합된 편에 속할 것이다.(저는 순종?은둔 형에 속하는 것 같군요)
위와 같이 볼 때, 모순점을 가진 현실을 시정하는 것은 패권형의 사람에게 맡겨진다.(특히 피지배층에서 지배층으로 올라온 사람에게) 그들은 이런 모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은 예전에 자신이 겪었던 억울함을 금세 잊어버린다. 아니, 잊지는 않았더라도 그것을 진심으로 시정하려고 하지 않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런 불합리한 면이 변화된 자신에게는 유리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한 예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그는 정보부에 의해서 큰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것의 최대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평화와 인권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뒤편으로는 도청을 했다고 한다.(어디서 들은 거라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병역 논란이나 바다이야기 사건 또한 지배층으로 발돋움 하면서 부여받은 권력을 모순 시정보다는 개인, 혹은 가족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진정 비난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법한 이야기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게 그런 권력이 주어진다면 자신을 위해 손톱만큼도 그 힘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말할 자신은 없다. 예수가 남긴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과연 우리들 중 누가 국회의원을 돌로 칠 자격이 있을까. 가만히 하늘을 우러러보면 여러 점의 부끄러움이 나타나곤 한다.

위와 같은 인간의 속성을 통해서 볼 때, 소득 양극화 문제는 공산주의, 사회주의로 체제변환을 하지 않는 이상 온전히 해결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생각하기로 미래의 사회에서 소득분배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방관하고만 있을 것인가? 개인에 따라서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다가오는 미래사회에 대중심리에 의해서가 아닌, 소신껏 대응하는 자세를 가지길 권유하고 싶다. 현대문명의 미래가 장밋빛이든 그렇지 않든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만족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상경계열 이형준

같은 자료를 보고, 같은 논의를 통해 낸 생각들인데도 신 자유주의 시대를 바라보고 느낀 절망과 희망은 서로가 달랐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가 현재 시대에 대한 인식이라면 이번 글들은 그 시대 인식을 밑바탕 삼아 자신이 인류의 미래상을 어떤 모습으로 품고 있는가 혹은 앞으로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라를 생각해보는 글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수업기간 동안 매우 중요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조한은 수업일지에 이 수업기간에 쏟아진 이야기들을 이렇게 정리했다.

1) 불평불만 분자가 많아지고 갈등이 심화되면서 군사력을 가진 파시스트에 의한 국가가 들어설 가능성,

2) 너무 암울하고 불안하지만, 함께 살 생각을 하면 마음이 놓인다. 공동체의 기반이 처벌하게 무너진 상황에서 공동체를 상상하기.

3) 가족에 대해서 “여성운동이 애 낳는 것보다 자아실현, 사회적 활동을 강조했는데 실은 애를 많이 낳고 싶다.” 아이를 많이 낳아 잘 기르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 지 살펴보자. 결혼에 대해서도, 근대 가족은 유례없이 성과 결혼과 낭만적 사랑의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제도였다는 점과 관련된다. 성과 결혼과 사랑의 삼위일체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결혼할 때 불행은 더 커진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결혼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

4) 가정주부와 취업 주부간의 심화되는 괴리, ‘된장녀’를 둘러싼 논쟁은 실은 현재 한국의 급격한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낳고 있는 현상일 것.

5) 페미니즘: 세 단계로 진행됨: 그러나 두 번째 단계에서 세 번째로 가는데 저항도 만만치 않다. 페미니즘 내부에. 특히 페미니스트가 된 것이 자기의 유일한 정체성이자 유일한 라이프스타일이 되어 버린 경우 독단적으로 될 위험성이 높다.

6) “군대와 gender? 군대 근무를 끝낼 즈음의 보상”에 대한 관찰과 성찰. 상관/군대 조직은 말한다. “이제 제대해 사회로 복귀하면 너희들은 염려 없다. 힘든 일을 거뜬히 해낼 힘이 길러졌기 때문이다. 허약한 여자들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조그만 일에도 찔찔 울고 직장을 그만 둘 것이다. 그러나 군대에서 훈련된 그대들은 그 시련들을 꿋꿋이 견디어 승진도 하고 아내도 거느릴 것이다?” 이런 메시지는 부족사회 ‘남아 성년식’에서 남아를 군사력으로 훈련시킬 때 빠짐없이 나오는 말이다. 부족을 위해 몸을 바칠 청년을 기르는 사회에서는 소년들에게 가혹한 훈련을 거치게 하면서, 동시에 그 과정에서 여자들을 비하하고 그들과 거리를 두면서 우열감을 느끼게 만든다. 남녀간의 비극은 여기서 더욱 커진다. 비교문화적으로 볼 때 평화로운 사회는 남녀평등한, 여성의 공적 발언권이 존중되는 사회였다.

7) 이런 이미지를 보는 것 자체: 강력한 어두운 이미지를 보는 것은 좋은 일일까? 예: 어릴 때본 [전설의 고향]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2007-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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