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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저출산

johancafe 2010.05.13 18:32 조회수 : 2783

저출산, 연애, 결혼

마당극에 조한이 손님을 초대 했다. JSC(JUNIOR SCHOLAR CLUB)라는 학회 학생 둘이였다. JSC에서는 출산율이 낮은 현재의 상황을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다. 조한은 이들의 논문을 우연하게 읽게 되었는데, 학부생 연구이면서도 매우 치밀한 구성을 가지고 열심히 하였다는 점, 그리고 열띤 토론 거리가 될 것 같다는 점때문에 초대를 했다고 하였다. 그들의 연구 내용은 사람들은 gain보다 loss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인센티브 정책 대신에 패널티 정책을 도입하자는 것이였다. 즉, 아이를 많이 낳는 사람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 못지 않게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출산율을 높이는데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라는 논지였다.

발제가 끝난 후 이어진 질문 시간에 출산율이 낮은 것이 과연 문제인지 ? 출산 문제를 꼭 그렇게 국가에서 정책으로 다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JSC의 연구에는 출산의 주체인 여성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출산과 육아가 여성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았는지를 되묻거나, 그런 식으로 출산을 통제하려는 나라에서 누가 아이를 낳겠냐, 자기라도 다른 나라에 가서 낳겠다는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당황한 발제자가 ‘여성학 수업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짧은 시간의 정적이 흐른뒤 수업 시간이 지나버려서 그의 극적이고 상징적인 말로 수업은 마무리 되었다. 정말 감정어린 토론이 오간 마당극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 “여성학 수업입니까?”라는 제목으로 한 학생이 왁자지껄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질문 뒤 이어진 정적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글이었다.



여성학 수업입니까?


섹스와 젠더가 관련되면 문제들은 너무나 쉽게 '다른 차원의 것'이 되고 '여성주의'에서 다뤄야 할 것이 된다.

나는 어제의 토론에서 여성과 관련되어 제기된 문제점들이 실은 '사회학적 접근입니까?' 라는 말로도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특히나 출산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면 꼭 여성주의가 아니여도 괜찮았다.

경영학이든 통계학이든 그 어떤 학과이든(그들의 입장에 서더라도) '출산'이라는 문제를 다루었다면 저출산과 관련된 대책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여성에 대한 고려는 반드시 그리고 '당연히' 필요했다.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정책방향을 제시하기까지 하신 분들이 그 정책의 실질적 대상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경영학적 통계학적 마인드'로 보아도 나로선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이 전제한 많은 것들 중 가장 치명적인 문제였던 (무한반복하지만) '낳지 못하고 낳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 '개인'의 삶'에 대한 이해부족의 원인은 그 분이 '여성학 수업입니까?'라는 질문 속에 많은 부분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출산이 문제라면 어디가, 왜 문제인가, 문제는 왜 발생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푸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위에 대한 바른 이해와 고민없이는 그들의 정책은 그다지 옳지 않고, 심지어 유효하지도 않을 가능성이 크다. 낳지 않는 사회, 낳기 어려운 사회이다. 정책의 대상자는 주로 지금의 20-30대의 사람들(이 수업을 듣는 우리들)이며 실제로 그들의 삶의 주기와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대상들은 여성들이다. 이들은 결혼을 해도 적은 수의 아이를 갖는 것이 보통일 것이며 결혼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그리고 저출산은 소득의 문제만이 아니다. 중산층의 사람들이라도 3명 키울 돈을 한명에게 투자하는 것이 더 낫고, 저소득층은 적게 갖는 것이 생활에 편하다. 다양한 삶을 살지만 출산에 관련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게 낳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어떻게든 출산을 하게하자'(출산률을 높여야 한다는 참 고상한 말이다)'라는 것이 해결책이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 들 것이다.

다시말해 출산률 저하의 문제는 가정이나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인센티브나 페널티를 준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영역의 문제에서, 돌봄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이해와 그 회복,생성되기 위한 조건들을 살피는 일에서부터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인센티브 정책과 페널티 정책이 결과적으로 같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들이 나왔다.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센티브 정책이나 패널티 정책이나 경제성장과 출산률을 강하게 연관시키고 심지어 인과관계를 세우는 등

개개인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더 큰 중요한 문제'들로 인해 무시되거나 배제된 채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도구화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근본적으로 같다는 말은 이런 점에 대한 지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센트나 페널티나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과 페널티와 인센티브 정책이 같다는 것은 별 개의 문제이다. 특정인이 1을 더 갖는 것과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이 -1이 되는 것은 같지 않다.
직접적인 인센티브나 페널티 정책은 모두 각 가정의 자녀수를 '양적인' 수치로 계산해서 개인에게 실시하는 것이다. 아마도 직접적인 인센티브 정책의 '수혜자'는 적어도 2명,3명 이상의 자녀가 있는 가정이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이 정도의 자녀수는 소위 키울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 택할 수 있다. (요새 애 세명나면 야만인~혹은 부의상징이라고 한단다) 따라서 인센티브 정책은 실제로 이미 있는 사람들, 인센티브 없어도 키울 능력되는 사람들에게 플러스로 '더' 주는 정책일 가능성이 크다. 정책적으로'도' 이런 직접적인 인센티브를 받게 될 대상들이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 특별한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란 이야기다.



하지만 그 대상이 상당히 모호한? 페널티정책은 더 치명적이다. 자발적? 비출산과 비자발적? 비출산의 경계는 과연 무엇인가. 이런 식의 모호한 경계는 실제로 대부분의 비혼가정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으며 출산하지 않는 여성에게 패널티를 주는 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페널티의 대상이 되는 여성들의 삶이

유형화하기 힘든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다는 것이 그 정책이 '여성피해자'를 만들 것이며 따라서

인센티브정책보다 더 위험한 이유다. 출산이 가정의 문제라지만 여성의 재생산 능력에 대한 이해정도가 지금과 같다면 편리한 규제대상이 되는 것은 여성일테니 말이다.



아니 사실 이런 인센티브정책이나 페널티 정책이 있다고 해서 애를 낳는 것을 선택할 사람들은 없다.

정말 해결책을 원한다면 개인들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삶의 조건들을 구성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출산에 대한 해결책이라 하며 인센트,패널티를 준단다.

이런 식으로는 정부도 개인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사실 어떤 방식이든 출산에 대한 개입과 규제만으로도 정부는 얻을 것이 있지만)


대부분의 댓글은 이 글의 내용을 지지하고 있었으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격한 토론이었던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는 내용들도 있었다.

이어진 수업시간에는 그 즈음에 한국을 방문해서 ‘저출산’ 관련 일본 사례로 세미나를 했던 동경대 우에노 치즈코 교수의 파워 포인트를 보면서 저출산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조한은 문제의 지점을 짚어내는 두 연구의 특징을 비교해보면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연구자의 나이와 경험 등을 참고하면서 그들의 의도와 접근방법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표피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니까 습관화 하도록 노력하라고 말했다. 쪽글 과제는 저출산에 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쪽 글은 그 날 토론 분위기의 연장선에 있었다. 저출산과 연애. 그리고 결혼을 연결시키면서 그것을 자신의 삶, 한국의 삶, 나아가서 지구촌의 삶까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해내고 있었다. 국가와 개인의 삶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보는지, 그를 바탕으로 어떠한 가치 판단을 내렸느냐가 쪽글을 분류하는 주요 기준이 됐다. 또한 인상 깊었던 점은 많은 학생들이 연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점이다. 연애 전에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연애를 하고 난 다음에는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지금 연애 중이기 때문에 ,나는 연애를 해보지 못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등 저출산과 연애 결혼 문제를 다룰 때 그 기준은 주로 연애였다. 그 덕분인지 여느 때보다도 공개 쪽글 의 조회수가 높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서 일부의 학생들은 출산율이 낮아지는 원인을 출산과 육아의 과정이 불편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봤다. 수업에서 진행되었던 토론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에게 경제적 이익 혹은 불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출산을 유도하기 보다는 출산과 육아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사람들은 아이를 낳고 싶어 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사회학과 2학년 장미진

나는 내가 감성적이기 보다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정의내리고 또한 실제로도 나는 그런 인간형 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창시절 있었던 한 두 번의 나의 가벼운 연애는 항상?‘미안. 연애는 내 체질이 아닌 것 같다.’는 나의 일방적인 종료 선언과 함께 ‘초단기’로 끝나버리곤 했다. ‘연애지상주의의 온상’인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애‘질’을 하는 대다수의 그들을 보면서 겉으로는 "좋겠네. 부럽다."라고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나 혼자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어떻게 저들은 서로의 삶에 저리도 깊숙이 관여하며,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오르락내리락? 하는 감정의 기복을 겪으며? 귀찮게 사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내게 있어 연애는 원래 나를 위해 주어져 있는 내 시간을 ‘들여서’ 해야 되는 ‘그 무엇’이었으며, 스킨십조차도 내겐 ‘찝찝한 그 무엇'의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할 일 없는 주말 저녁에 혼자 드러누워 ‘외로움’이라는 원초적 감정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성’이나 ‘연애’라는 것을 생각해 본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이랬던 나. 올해 초, 정말 오랜만에 연애를 하게 되었다. 몇 번 만나지 않았는데도 ‘서로에게 뭔가 땡기는’ 감정이 내 안에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순식간에 시작되고 진행된 연애였다. 그러나 연애가 진행되면서 물론 좋기도 했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감정 노동’에 이끌려 다니는 내 모습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도) ‘나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연애’라고 하는 내 삶에 있어서 비정상적인 요소를 없애고 다시 ‘원상복귀’시켜놔야겠다고 느꼈다. ‘그래도 이번엔 꽤 오래 버텼다. 이쯤 했으면 됐지.’ 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또 다시 "그동안 즐거웠어. 우리 연애 이제 그만!’"이라는 종료 선언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게 웬 일. 나이 쫌 먹고 한 연애라서 그런지, 쌍방적인 감정의 교류를 너무 확실하게 느꼈던 연애라서 그런지,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 하여튼 나는 연애 종료 선언을 하고 난 이후, 연애 진행 중이었던 그 시간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나답지 않게 왜 이러지. 역시 연애가 나를 망쳐놨어. 괜히 했다. 조금 버티면 감정이 예전처럼 돌아오겠지.’ 라는 수십 번의 다짐 이후에도 나는 그 따뜻했던 순간을 매일 그리워하고, ‘종료선언’을 외치던 그 순간을 매일 후회했으며, 결국은 연애가 진행되었던 딱 그만큼의 기간이 더 지난 후에야 ‘아이고 이거 큰일 났다;’ 싶어서 인생 최초로 자존심을 다 버리고 "진짜 미안한데 내 말 취소. 그냥 다시? 그 전처럼? 어떻게 안 되겠니ㅠㅠ"를 한 바가지의 눈물 콧물과 함께 외치고 말았다. 물론 그 친구는 연애 중에도, 연애 후에도 너무나 ‘냉정’했던 나의 모습에 이미 ‘정이 떨어져’ 마음이 돌아선 후였다. 아,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절실하게 와 닿는 순간이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나는 내 안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차라리 애초에 안하는 편이 나았으려나?’ 생각도 했지만, ‘그럼, 다시 그 전으로 돌아갈래?’ 라고 묻는다면 뭐 그것도 사실 싫다. 나는 그 일을 겪기 전의 내 모습보다 지금 내 모습이 훨씬 더 좋다. 사실 나도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수업에서 여러 가지 주제를 다뤄 왔지만 그 와중에도, 항상 공통된 논의가 있었다 - 돌봄. 공동체. 의 영역. 으로. 돌아감이 세 가지 말이다. 아마 열 번째 쪽 글에 이런 글을 썼던 것 같다 - 나는 돌봄의 가치, 공동체로 돌아가자, 이런 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머리로는 이해해도 내 가슴속에서, 삶에서 안 느껴진다고. 나는 아직 ‘근대’적인 사람인가 보다고 -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연애이야기를 써 가면서, 그게 무슨 말인지 갑자기 알 것 같았다.

기준이 생겼기 때문일까. 연애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차가웠던 나는 이제 따뜻한 연애를 꿈꾼다. 나는 매일 같이 "가부장제의 온상, 두 집안간의 경제계약인 ‘결혼’을 할 생각은 없다", "내 개인적인 삶을 포기해야만 하는 이 구조적 맥락에서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도 없다." 고 외치는 사람이지만 - 그래도 결혼은 안 하더라도 살 부대껴가며 같이 ‘살’ 누군가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길에서 아장아장 걷는 아가를 보면 꼭 한번 씩 안아보고 뽀뽀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수업의 말미에 와서야 느낀다. 돌봄. 공동체. 돌아감.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어쩌면 정말 인간이 ‘미래’라는 것을 꿈꾸고,갖고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내포하고 있을 가치 일 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저 출산이 문제인가? 내 생각대로라면 ‘아이 안 낳겠다!’고 똥고집을 피우는 ‘여성’혹은 ‘개인’이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책도 ‘개인’에 초점이 맞춰진 인센티브나 페널티 가지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돌봄. 공동체. 라는 인류의 원초적인 감수성조차 ‘그건 내 것이 아닐 것’ 이라며 막아버리고 말게 하는 - 무서운 출산과 육아의 과정에 있어서 불편한 사회적 맥락과 시스템에 대한 성찰(아니 성찰은 충분히 있었으니) 제도적 수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굳이 낳아라, 낳지 마라. 하지 않아도 (우리도 모르게) 따뜻한 공동체를 꿈꾸고 있는, 우리들은 행복하게 애를 낳을지도 모른다.


인문계열 1학년 이경은

‘소녀가 자라나 어른이 된다. 자신을 너무나 행복하게 해 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남자와 평생을 함께할 것을 약속하고 결혼을 한다. 자신과 남자를 닮은 아이를 낳고 사랑한다. 아이의 동생들을 낳아 규모 있고 균형 잡힌 공동체를 이룬다. 아이들은 사랑받으며 자라나 또 다시 부모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왜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까? 왜 여성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고, 하더라도 왜 더 늦게 하려 하고, 왜 결혼을 해도 아이를 갖지 않으려 하고, 아이를 낳아도 왜 한 명만 낳으려고 할까? 원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위의 이야기는 거의 모든 여성들의 꿈이기에, 원하는 사람들만 성취해도 저출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원하는데도 다른 여건 때문에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 ‘다른 여건’이 문제이다. JSC에서는 그 다른 여건을, 조한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조작적으로’ 바꾸려는 해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나왔던 반박, 특히 여성의 발언 중에는, ‘이해’가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왜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여성들에게 아이를 낳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처음 연애를 시작한 고등학교 친구에게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 남자친구는 경찰대를 졸업해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키 크고 잘생기고 집안 좋은 6살 연상인데, 사귀자고 하기에 연애를 시작하긴 했지만 도저히 필이 꽃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조건을 보면 놓치는 것이 바보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1학년인데 벌써 조건보고 사귀는 것도 웃기지 않느냐고 한다.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벌써 조건보고 사귀는 것은 웃기다”는 표현이다. 그 말은 풀이하자면 이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기도 힘든데 조건을 보고 사귀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뜻이고, 다시 말하면 결혼으로 이어질 연애라면 조건을 보고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현대의 풍조만은 아니다. 결혼은 먼저 본인의 사회적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나아가 자녀의 사회적 지위와 더불어 생물학적 조건에까지 영향을 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지만 흔히 무시하는 문제 하나는, 본인의 사회적 지위가 자녀에 대한 것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결혼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본인의 사회적 지위를 낮추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고, 결혼이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연애는 사회가 고의적으로 장려하지 않아도 이미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연애는 성을 동반하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지향한다. 때문에 결혼과 출산이 여성에게 부여하는 페널티 - 이것이 페널티인 이유는 두 가지로 분리해 이해할 수 있는데, 결혼과 출산이 여성을 직장인에서 가정주부로 전환시킨다는 것과 가정주부가 직장인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것이다 - 를 해소한다면, 연애결혼을 통해 자연스럽게 저출산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가치가 돈으로 치환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입도 없고 승진의 기회도 없는 가정주부의 사회적 지위를 직장인과 동등하게, 또는 그 이상으로 높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여성이 아이를 낳아도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사회 구조가 변화해야 하는데, 3세 이하의 영아의 경우 보호자가 24시간을 함께 보내며 무조건적인 애정으로 보살피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이것저것을 생각하다 보면 저출산 해결의 답은 매우 어려워진다.

하지만 현재를 생각하지 않고 이상만을 그려 본다면 문제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는 것이 여성에게든 남성에게든 패배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사회적으로 고립하지 않고 공동으로 육아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가질 수 있으며, 육아에 충분한 수입이 보장되고, 아이가 자랐을 때 재취업의 기회도 보장되면 굳이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지위가 없어져야 하고, 기업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가 수입을 결정하지 않아야 하고, 내 아이만 잘나길 바라는 부모들 간의 경쟁심도 없어져야 한다. 나는 이것이 내가, 한국이, 지구촌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나와 한국과 지구촌의 삶으로 연결 시킬까의 문제는 쪽글을 쓰는 동안뿐이 아니라 평생 고민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략)

서로 사랑해서 하는 연애 서로 즐거운 섹스라면 좋다. ( 하지만 '피임'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원래 성욕을 못참아. 더군다나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어떻게 참겠어 ? " 라는 말로 '강요'하진 않았으면.
성은 [먹는] 음식물도 아니고 선물로 [주는] 물건도 아니다.

나와 같은 이유 일수도 있고 혹은 다른 이유일 수도 있지만 상대방이 즐겁지 않다면 연애 관계에서
섹스는 꼭 필요한 과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쎄 ? 임신이 무서워서 섹스를 못한다는건 말도 안된다고 ?
원하지 않는 생명을 지우든 키우든 그 고통을 이겨낼 자신이 난 없다.
저출산과 관련된 쪽 글을 쓴지 약 십일 뒤에 성관계, 그리고 낙태, 현실적으로 라는 제목으로 토론방에 발제가 올라왔다. 14개의 글이 올라왔고 그 중 한 여학생의 글에 반박 댓글이 달리면서 여러 학생들이 댓글과 답글을 통해 열띤 토론을 나누었다. 그 중 위 글들의 맥락에서 함께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을 발췌했다.


임신할 가능성은 생물학적으로 똑같은데 성문화는 나라마다 다른걸 보면 임신이 무서워서 섹스를 못한다는 건 말도 안될수도 있죠. 서구라고 임신에 따라오는 부담감이 적은 건 아닐테니까 말이죠. 나는 상당부분 교육과 관련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성 자유를 외치면서 섹스를 거부할 권리만 외치는 걸 보면 사회적 관습으로 도피할 멋진 근거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0.0009이면 교통사고 사망률의 10배 정도인데.. 이거 무서워서 자동차 이용안하는 사람 없듯이, 섹스도 다른 이유가 없다면 마찬가지여야 하는 것 같은데요. 설마 임신의 부담이 죽음의 부담보다 더 강하다는거? 미혼모가 되느니 죽는게 낫다? 이러면 모를까.

이 댓글은 임신에 대한 공포가 교육에 의한 결과라는 지적이였다. 서구와 달리 왜 우리나라 여성들이 임신에 대한 공포가 높은지에 대한 의문의 제기와 나름의 답이였다. 일반화 시키는 것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으나 출산과 육아.낙태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에 여남간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과 쪽글에서 많은 여학생들이 우리 사회에서 출산과 육아가 여성의 삶을 얼마나 고단하게 하는지를 열렬히 토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댓글의 의문 제기에는 이 부분이 크게 고려되지 않은 듯 했다.


일부는 국가가 개인의 문제를 기획하려 하는 것은 옳치 않으며 국가의 기획아래서도 어차피 결혼과 출산은 개인의 가친판단이라는 의견을 냈다. 결혼에 대한 견해 차이, 출산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는 분명히 나타났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상황아래서 자신은 어떠한 판단을 내렸는지 낳는 것과 낳지 않는 것의 극단적인 개인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단락의 세 번째, 네 번째 글이 낳는 것과 낳지 않는 것에 대한 솔직한 접근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회계열 1학년 정명화

지구와 국가의 계획 속에서 개인은 소외되고 사용할 수 있는 일개 개체로 몰락한다. 개개인이 행사하는 삶의 결정권이 온전히 주어지는 곳이 있기는 할까? 지구촌에서 앞서나가기 위해 국가는 바람직한 가족상, 그 가족에 편입된 개인상을 요구하는데. 조한선생님이 이야기한 자동차 운전석에 아버지, 조수석에 어머니, 뒷자석에 토끼같은 자식 둘이 바로 그 상일 것이다. 이 그림을 벗어날 용기 있는, 아니 괴짜이고 개인주의적인 사람은 불행하다. 이 완벽한 가족상이 가지는 힘은 개인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든 말든, 아니 그러한 성찰마저 방해할 만큼 강력하다. 차를 몰고 다닐 여력이 되는 중산층에 이성애자가 아니면 사회에서도 국가에서도 이미 소외되고 마는 것이다. 광고에서건 드라마에서건 행복한 사람들은 그들이다. 이제는 정책에서도 그들만이 존재한다. 아이를 낳지 않기를 선택한 이들은 그가 여력이 되건 그렇지 않건, 육아를 삶의 귀중한 가치로 생각하건 말건 간에 ‘국력을 생각하지 않는 파렴치한 이기주의자’가 되고 만다. 이제 패널티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단다. 자신에 삶에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는 삶의 형태, 공동체의 형태마저 국가가 지정해준다. 이러한 문화와 국가정책의 힘은 사실은 이러한 형태를 벗어난 공동체가 매우 많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온 지구가 아버지, 어머니, 자식 둘의 4인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아프리카 대륙의 한 부족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인 풍습이며 프랑스에서는 수많은 동성애자 커플들이 소박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다. 이들의 삶이 열등하거나 비주류인 형태로 보이게 만드는 힘,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의 선택권을 한가지로 제한하는 힘.
내이야기로 마무리하자면, 나는 결혼하고 싶지 않고 육아는 하고 싶다. 결혼이라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관계가 부담스럽지만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튼튼한 끈은 가지고 싶다. 국가의 출산 장려책이 짜증나는 것은 내가 온전히 결정할 수 있는 내 몸뚱아리 하나와 내가 맺는 관계들마저 국가가 개입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결혼을 할 것인지, 아이를 가질 것인지는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들이며 나는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고 싶다. 내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을 위해서가 아니란 말이다! 내가 결혼을 하기 싫어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기반인 가족이라는 것의 가치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란 말이다! 같은 관점에서, 나에게 낭만적 사랑을 강요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연애라고 생각하는 행위들을 나에게 요구하지 말아주었으면. 내가 그러한 행위들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방법이 달라서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제발, 내 멋대로 살게 해주세요.


인문계열 1학년 장혜영

나 : 언니
언니 : 왜?
나 : 애 낳을거야?
언니 : 응.
나 : 몇이나?
언니 : (잠깐 생각하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나 : 왜?
언니 : 그래도 늙어서 같이 목욕탕 가서 때 밀어줄 자식은 필요할 것 같아.
나 : 성별이 다른 건, 아빠와 엄마를 모두 고려한 선택?
언니 : 당연하지. 그리고 오빠를 낳을거야.
나 : 왜?
언니 : 어쩐지 여동생을 보호해 줄 것 같으니까.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났으면 좋겠어. 미연의 사고를 방지해야지. 오빠 친구들은 집에 못 오게 해야지.
나 : 그러셔. 근데 만약에 바람과 달리 딸이 먼저 나오면 어떡할래?
언니 : (두 손바닥으로 볼을 누르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나 : (낄낄댄다)
언니 : 그래도 딸 하나에 아들 하나. 누나는 남동생을 내키는대로 대할 것 같아서 별로지만 그래도.
나 : 그럼 딸 둘 아들 둘은 어때?
언니 : 절대 안돼.
나 : 왜?
언니 : ...하나에 3억이래. 내 때엔 한 5억쯤 되겠다. 내가 부자야? 내가 오프라 윈프리쯤 되면 후보선수까지 스무 명자리 혼성 축구단을 만들겠다만. 돈이 있다면 싱글맘도 괜찮지.
나 : 아빠가 다 다른 축구단이라. 그거 묘하게 고전소설 중에 뭔가 생각나..
우리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너무 길어서 다 적지 못하겠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랬다. 나는 내가 아이를 낳는다는 생각을 전혀 해 본 적이 없다. 대신 언니가 낳은 아이들에게 좋은 이모가 되어주겠다는 것을 언니와 약속했다. 그러니 마음 편히 낳고 싶은 만큼 낳아라, 라고. 언니는 아이를 정말 잘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돈이 없으면 낳지 않겠다는 얘기는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뭐든 시도해볼 수 있게 도와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는 얘기다. 위에서 알아차렸겠지만, 언니의 미래의 계획은 나름대로 상당히 구체적이다. 그리고 엄청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아마 자기가 설계한대로 살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언니가 인류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안 보는 데에서 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내가 본 바로는 없다. 그렇지만 언니는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 돈이 없으면 돈을 모아서 아이를 낳겠단다. 언니는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크게 봤을 때 언니는 저출산화라는 현재의 상황에 매우 긍정적인 해결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른다. 이러한 개인의 선택들이 모여 사회의 흐름을 만들어내겠지만, 사회의 문제를 모든 개인들이 자신의 문제로 느끼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될 만한 상황 속에서도 개인들은 선택을 한다. 그런 선택들이 또 흐름을 만든다.

저출산이 문제가 되는 것도, 저출산을 문제로 삼는 자들의 주장을 빌리자면, 노인을 부양할 세금을 짊어질 젊은이들의 머릿수가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어이는 없지만 말은 되고 무엇보다 행동이 된다. 자기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기가 속한 시공간에 최선을 다한다. 묘하게 자유주의와 통한다. 아닌게 아니라 같다.

우리 언니에겐 저출산이 대세라는 얘기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정보이다. 내가 아는 한, 언니는 앞으로도 계속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고, 언젠가는 결혼을 하고, 자기와 남편을 닮은 아이를 낳고, 집을 꾸미고 아파트 반상회를 하며 신나게 살아갈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 손이 닿는 것에 애정을 쏟으며 말이다. 내겐 그런 언니가 참 멋지다. 가끔은 대책 없다고도 생각하지만, 어쩌면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계속 살아남아 인류를 존속시키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든 인간이 인류를 걱정하며 살길 바라는 것이야말로 참 우스운 일일지 모른다. 이상하게 내가 손만 대면 모든 문제는 결국 개인의 애정이 답이라는 쪽으로 쏠린다. 내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건가. 근데 나쁘지 않다. 이게 내 스타일이란 소리니까.


사회계열 1학년 나윤경

머리로 생각하며 글을 쓴다면 저출산 문제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어쩌구 저쩌구~ 그런 내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저출산 문제를 생각할 때 내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어떻게 아이를 안 낳으려고 할 수 있지?’이다.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나 논리적으로 말해야 할 때 나는 분명히 ‘낳든 말든 개인의 선택인데 금전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로 개인이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은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솔직해져 보자. 내 속마음을 까놓고 말해보면 어떻게 생명을 낳고 기르는 그런 놀라운 일을 금전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로 포기하는지 어쩔 때는 화가 난다. 화가 난다기 보다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는 그렇다. 오늘 내 얘기는 아마도 연애, 결혼 이런 거 다 제끼고 저출산에 대한 게 될 것 같다.

저출산이 사회의 존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다 뭐다 하는 건 솔직히 하나도 신경 안 쓴다. 원래 인간은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이 제일 중요한 법인데 내가 지금 사회의 존망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그것보다는 아이를 기름으로서 느끼는 개인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출산과 양육이라는 중요한 일을 꼭 현실의 잣대로 일일이 재봐야 하는 건가? 나는 출산과 양육이라는 경험을 함으로써 생명의 소중함과 신비를 자신이 직접 느껴보는 것이 개인의 정신적 성장에 필수적인 일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출산과 양육 또한 인생을 살면서 넘어야 할 한 관문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그래서 나는 출산과 양육을 하지 않고 여유 있게 사는 것보다 아이 낳아서 쪼들리고 힘들지라도 키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많이 낳자고 하는 게 아니라 한명은 낳자는 말이다.

물론 출산과 양육이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고 아이를 낳고 땡이 아니라 낳아서 잘!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금전적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교육비로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다고 아이가 잘 자랄까? 전혀 아니다. 적어도 내 주변은 그렇다.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용돈주고 과외 시켜주고 한 내 친구들, 정에 굶주려 있다. 아이 키우는데 돈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오백만배 중요한 게 관심과 애정이다. 사랑해줄 자신이 없다고? 아이가 생기면 모성과 부성이 생기는 게 사람의 본능이다. 아, 물론 아이를 가져도 모성이 생기지 않는 모성 거부증이나 기타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경우는 제외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경우, 일단 자기 아이를 가지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럴 때 내가 주는 사랑보다 내가 아이로 인해 받는 기쁨이 더 크다. 나처럼 속 썩이는 경우가 80%인 애도 가끔 있지만.

사랑해서 결혼하고 부부가 되면 일단 사회적으로 아이를 가져도 되는 관계라는 인정을 받는 거다. 나름대로 멍석까지 깔아줬는데 안 낳는 건 너무 하잖아.


사회학과 2학년 배정훈

지금보다 좀 더 어렸던 때에는 사랑하는 한 '여자'와 나를 닮은 자식들과 함께 사는 것이 꿈이었던 것 같다. 그때에는, 그러니까 적어도 고등학생이었던 시절만 하더라도 당연히 그리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 '이상'에 처음으로 금이 가게 된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서였다. 첫째, 어떤 특정한 사람과 굉장히 오랫동안 함께 한다는 것이 내게는 힘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러니까 좀 속되게 말한다면, 좀 빨리 질리는 사람이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취미에 있어서도 흥미를 쉽게 잃고 다른 것을 찾아 헤매는 경향은 일반적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당연하게도, 사랑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감정에 있어서도, 다른 이들보다 감정의 회전이 훨씬 빠른 편이다. 좋아할 때는 미칠 듯이 빠져들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해 진다. 이런 내가 과연, 법적 제도적 결합인 결혼이라는 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둘째, 내 사회적 꿈과 결혼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언론사에 취직해 일하기를 희망한다. 물론, 난 잘은 모르지만 흔히들 알고 있기에 언론사는 정신없이 바쁘고, 가정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직장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런 '언론인'의 이상을 꿈꾸는 나에게 '가정에 충실한 가족의 구성원' 이라는 딱지는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셋째, 나의 배우자가 될 사람이 겪게 될 온갖 불합리를 눈 뜨고 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극히 경상도적인 우리 집에서 이른바 '가문의 맏며느리'가 어떠한 행실을 요구받고 그에 따르기를 강요받을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훤하다. 만약, 내가 평생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가정에도 충실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는다고 해도, 과연 그러한 광경을 견뎌낼 수 있을까?

백 번 양보해서 부모님과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어찌어찌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하자. 그렇게 된다고 해도, 아마 난 결혼이라는 것에 그다지 큰 의무감을 갖지 않을 것이며, 더더군다나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물론, 가끔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가 있다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역시 그 '사랑스러운 아이'는 나와 내 배우자의 삶을 지나치게 구속할 것이다. 그로 인해 가정에서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지만, 역시 그로 인해 사회적 행복을 놓치는 부분이 생길 것이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

행복한 결혼과 출산, 육아를 꿈꾸는 누군가가 보면 내 글은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이른바 '까칠한' 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 육아가 개인에게 의무로 짐 지워져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에 맡겨진 문제라는 나의 문제 인식에는 어느 정도는 분명히 동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나 같은 사람도 있다.' 라는 것이 이 사회에 다양성의 폭을 넓이는 측면에서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맨 처음 꾸러미로 묶어 보았던 글들과는 조금 다르게 자신의 개인적인 부분이 더욱 강조된 부분이다. 글도 그렇지만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의 적절한 비유와 삶에서 느껴지는 점들을 자신의 글을 통해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극한 개인성의 모습 속에서도, 아이를 낳지 않을 수 있냐는 나윤경의 글과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는 배정훈의 글이 극명히 대조됨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부와 정의 반대 부분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으며, 많은 패러다임의 양끝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제도가 어떻든 나의 삶이 중요한 현재이다.


토론시간에 나왔던 이야기와 쪽 글의 주된 흐름과는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정부에서 아이를 낳는데 방해가 될 요소를 줄이거나 제거하는 것은 그들의 소임이라는 의견이었다. 한쪽으로 치중되는 수업공간의 분위기를 비판하며, 극명히 반대되는 입장을 보인다.


1학년 박재준

penalty정책과 incentive정책은 그 본질이 다르다. penalty는 공격적인 개념이다. 즉 강제성이라는 것을 띠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달리기에서 몇 초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그 사람만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과 같다. 이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제성의 느낌을 띠고 있다. 모두가 그 race에 동참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정책을 지키지 않으면 제제 받게 되는 이것은 '벌을 받음'의 이미지이며 정책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만든다. 안하면 채찍을 맞는 것이다.

비판하는 대부분의 여자들의 착각의 상태도 좋지 않다. 먼저 이들은 penalty와 incentive라는 개념에 너무 예민하며, 그것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나에게 떨어지는 잿밥, 떡고물에 관한 문제가 모두를 괴롭힐 것이라고 생각하는 환상의 공포에 빠져있다. 그리고 penalty라면 '왜 남들은 다 받는데 나만 못받아?' incentive라면 '왜 경제적인 이윤효과로 우리를 강제적으로 출산하게끔 유도하지?'라고 생각한다. 명백한 이기주의적이며 자의적인 왜곡된 해석이다. 사실 이 정책 사안은 그럴 듯 하지만, 더 핵심으로 들어가면 원론적인 언어로 '출산 및 양육의 정책적인 보조금 장려'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아이를 낳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애를 낳아서 키워서 독립시키기까지의 돈은 상상을 초월한다. 부모-자식간의 관계는 그 혈연적인 특성상 보통 이익관계를 초월해서 이루어지며, 일단 출산한 후에는 경제적 문제에 현실적으로 시달리면서도 그것에 대하여 부모가 지고 가야할 본질적인 짐으로 생각하는 숙명론적인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사실 자식 키우기는 그것이 굉장히 경제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인 수위로 이야기를 할 때는, 과다한 집값이나 학원비, 등록금등의 문제의 간접적인 형태로 나올 뿐이다. 한국에서는 결혼의 목적은 곧 '아이의 출산을 한 후에 한 가족을 만들어 나가는 것' 정도가 표준적 개념이다(뭐 아닌 사람들은 굳이 돈 들여 가면서 결혼까지 하지 말고 장기적 동거상태에 머물러도 나쁘지는 않겠다). 하지만 출산 전에는 애를 낳기 전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에 대하여 한 번쯤은 고민을 하고 넘어간다. 그리고 '시기'를 조절하며 언제쯤에 아이를 낳을 것인지를 생각한다. 이 결혼과 출산의 '시기'를 결정하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자식키우기의 경제적 부담의 현실적 고려가 실제로 어느 정도로 강한지를 알 수 있는 강력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부터 ‘ 서로를 끈끈하게 엮고 있는 관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좋은 것일까? ’라는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혼을 해야 하는가 ?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한 것일까라는 고민은 많은 이들을 거쳐간 혹은 요즈음 우리의 고민을 담고 있다.


사회계열 1학년 김새별

"새별이는 커서 결혼할거야?"
"아니~ 나는 결혼 안하고 평생 엄마 아빠랑 살 거야"

어렸을 때,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음직한 상투적인 질문을 받을 때 마다 누구나 해보았을 상투적인 대답으로 응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지금은 결혼을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결혼 안하고 평생 엄마 아빠와 살 거라는 대답까지는 아니어도 너무나도 쉽고 당연하게 "응 할 거야."라고 말할 것 같지는 않다.

할 필요가 느껴지면 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굳이 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 필수가 아닌 선택? 이것이 나를 비롯하여 요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아닌가 싶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생각나고...)

출산에 대한 생각도 시들시들한 것은 마찬가지. 갈수록 아이를 낳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어지고 있다. 아예 낳지 않겠다는 사람들, 많으면 두 명까지 낳는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주위 또래 친구들의 생각을 들어보아도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동안 이러한 결혼, 출산에 대한 (과거에 비한) ‘시들시들함’을 자연스러운 흐름, 추세정도로 생각했다. 결혼이라는 것에 얽매이고. 자식을 낳아 대를 잇는 것에 집착했던 과거와는 달리 그런 것들에 ‘쿨’해지는 모습은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저 출산 문제가 정말 ‘문제’라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걱정하는 요즘이라 그런지 그러한 ‘쿨’함에 대한 단순한 나의 호의를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것, 자식을 낳는 것, 그동안 우리를 옭아매고 있었던 끈끈한 관계에서 한 없이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솔직히 지금 얘기해봤자 별로 와 닿지 않는 결혼, 출산얘기는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이번엔 ‘연애’에 관해서... 얘기를 해보려 해도 사실 이에 대해서도 별로 할 말이 없다. -_-내가 이제껏 연애란 것을 한번도 안 해봤다고 말하면 ‘너 공부만 했지’ ‘이제까지 뭐했냐..’이런 반응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학사지도교수님과 면담을 하던 중에도 접할 수 있었던 이 ‘뭐했냐’는 반응...) 부모님이나 선생님, 연애 경험을 보유한 친구들은 항상 말한다.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한다는 것은 이전의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와는 다른,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그 관계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배울 수 있다. 그런 말들은 "길들여진다는 게 무슨 뜻이야?" 라는 여우의 물음에 "사람들은 너무나 그걸 쉽게 잊지. 그건 관계가 생긴다는 뜻이야...지금 내게 넌 세상에 흔한 여러 아이들과 전혀 다를 게 없어. 그래서 난 네가 필요 없어. 너 역시 내가 필요 없지. 나도 세상에 흔해빠진 여우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여우일 뿐이니까. 그러나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 필요해져.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아이가 될거라구."라고 대답했던 어린왕자의 멋들어진 멘트도 떠오르게 만들어준다.

처음 쪽글을 쓰면서 들었던 , ‘사람들이 서로를 끈끈하게 엮고 있는 관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좋은 것일까?’ 라는 의문. 아직 한번도 ‘특별하게’ 얽혀있는 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나이기에 더욱 대답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최용락.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별로 이성적이지도 않고 타당한 견해가 담겨있지도 않을, 한 달 전의 가봤어도 한심하다고 생각했을 내 글에 대해 변명 좀 해야겠다. 지금 내 사랑은 진행 중이다. 꽤나 길었던 짝사랑도 두 번 경험했고, 누군가를 좋아하기 위해 애써본 적도 있었지만 이번 같은 만남은 처음이다. 첫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게다가 만남은 아직 한 달을 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사랑과 결혼과 저출산에 대해 이성적인 성찰을 담은 글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 물론 내 본래의 역량 탓이 가장 크겠지만 - 무리다. 심지어 연애라는 말마저 부정탈까봐 입에 선뜻 담지 못하는 바보 같은 21살 남자아이에게 "저출산과 연애,결혼을 연결시키면서 그것을 자신의 삶, 한국의 삶, 나아가서 지구촌의 삶까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해서 글을 써주세요"라는 과제는 너무 잔인하다. 변명은 여기까지.

왜 신은 세상 모든 연인을 화투패 처럼 딱딱 맞아떨어지게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열받아하던 때가 있었다. 짝사랑을 너무 길게 한 탓이었을 게다. 당시의 나는 신을 만나면 복부에 훅을 꽂아주고 턱에 어퍼컷을 넣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이야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저, 저기 로또라도 한 장...' 뭐 이렇게 빌고 싶지만 말이다. 돌아서서는 분명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데 대해 안타까워하며, '나 참 세상 더러워서'를 중얼거리며 바닥에 침을 뱉게 될 것이고.

"영원을 안 믿으면 되더라구. 사랑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저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마음속이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맞아. 사랑과 영원은 별개지. 사랑한다고 해서 꼭 영원해야만 하는 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것도 아니야. 지금 내 감정에 충실하면 돼.' 이제 나는 알았다고 생각했다. 쿨한 사랑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충실하게 현재를 즐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설령 헤어지더라도 그리 힘들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앎과 삶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발생하는 법인 모양. 지금은 또 그때와 달라졌다. 여전히 불안하다. 헤어짐은 가장 두려운 일이다.

어쩌다 보니. 모든 것은 변한다, 는 사실 하나만 절실하게 깨달은 한 학기였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 있지 않을까,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PPT에는 신흥종교라고 적혀 있었다. 백번 맞는 말씀이다. 언젠가 변하게 되겠지, 라고 나도 생각은 한다. 별로 합리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냥 믿어보기로 했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고 믿어보자고 각오했다. 감수성이 워낙 삼류연애소설 수준인 탓이다.

사실은 별개인 영원과 사랑을 연결짓다보니 자꾸만 결혼과 출산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된다. 물론 지금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내 생각을 설득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아이는 말한다.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아이에게 메이는 삶은 끔찍하고 가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을 상상하는 것도 끔찍하다고. 나도 전혀. 기대를 갖고 있지 않다. 벌써부터 그런 먼 미래의 일을 상정하고 집착하고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그저 환상을 갖고 있을 뿐이다. '뭐. 때로 그렇게 살아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 정도의 환상. 수업중의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그렇게 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들은 한 20% 정도밖에 안 될 거라고 보는데..." 지당하신 말씀. 모두가 그렇게 해서 행복해질 수는 없다. 연애와 결혼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도 극소수지만 존재할 것임은 분명하지만 모두가 그런 식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이데올로기에서 막 벗어나기 시작한 세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안정적인 토대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행복한 가정을 대체할 만한 다양한 모습의 공동체를 각자가 찾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개인으로 부유하며 삶은 애초에 안정적인 토대에 놓일 수 없음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일까.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결국 자신에게 솔직한 상태에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저 짐작해 볼 뿐이다. 여전히 연애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있는 내게 그 다음의 일을 생각하는 일은 벅차다. 애초에 그런 걸 결정하고 산다고 해서 그대로 살아지는 것은 아닐터이니, 언젠가 해야 할 때가 오면 그 때가 되서 고민하겠다는 변명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해보려 한다. 글을 읽는 여러분이야 나도 한 때 저랬지, 라고 코웃음을 치시든. 그 걸 벗어나야 한다니까, 라고 격분하시든.


이런 혼란스러움 혹은 결정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가치주입자들이 등장한다.핵가족화가 되면서 자식의 삶의 ‘기획자’가 된 부모이다. 부모가 기획하는 연애에는 경제적 능력 ,학벌 등의 문제가 개입된다. ‘기획하는 부모들’ “기획하는 부모들” 이란 표현은 수업 중에 조한이 사용한 말이었고, 보통 직장인 보다 더욱 더 빠듯하고, 학교와 학원가와 과외시장 속에서 성공하는 자녀로 만들기 위한 연애인 매니저만큼이나 학생들의 시간을 관리해주는 부모를 의미한다. 자식의 학습을 벗어나, 그 외의 생활 또한 설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은 선택을 유보시킨 학생에게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하고 자식의 가치관 정립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1학년 김예람

연애 혹은 사랑에 완전 쑥맥인 내가 얼마 전에 잠시, 소위 '썸씽'이 생겼었다. 정말 '조건'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완전 명석하고 우수한 머리에, 큰 키에, 잘생긴 얼굴에, 겸손하고, 괜찮은 집안(?). 흠. Well.. 영화 가타카에 나오는 우수한 인자로 구성된 사람이랄까. 큭.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필이 꽂히지 않았다!' 오 마이 갓, 이런. 그래서 감히 내가 발전해가는 관계에 선을 그어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우리 어머니는, 정말 20년 동안 살면서 한번도 나에게 그런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는 공부 때문에도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며칠 동안 잠을 안 재우면서 나를 설득했다. 밤 12시가 되어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와 이제 한 숨 자려고 하면, 방으로 들어와 새벽2시까지 얘길 하자고 하질 않나, 인터넷 기사를 뒤져서 그 아이의 사진을 찾아보질 않나, 정말 힘든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순종하질 않자, 일주일간 나와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셨다.

세상에.....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 일이 시발점이 되었다.

우리 엄마의 생각 속에는, 연애=결혼=출산. 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성인자를 가진 사람이니까 손주, 손녀에게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었을까. 어쩌면 비약적인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일부분 그런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 - 그래, 나도 '마지막 연애=결혼=출산 에는 동의를 해요. 하지만, 마지막 연애는 아니었고, 아무 느낌이 없었다구요!



1학년 공은비

나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가치관을 지킨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이기적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자식에게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 택한 방법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직 연애도 안 해 본 처지에 결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엄마가 이때까지 키운 게 아까워서 시집 못 보낸다고 농담처럼 한 말대로 부모님과 계속 살고 싶기도 하고, 내 바램대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난다면 결혼을 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나는 꼭 우리 부모님처럼 아이를 하나만 낳아서 잘 키워볼 예정입니다. 가치의 세습? 내면화? 라는 것이 이래서 무서운 걸까요(웃음) 또 한가지 나를 망설이게 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병이 내 아이에게 갈 확률이 높은데 굳이 고통을 되물려 줄 필요가 있을 까하는 점입니다. 엄마는 종종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나 혼자 먹고 살기도 벅찬 사람들이 기를 쓰고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문제는 좋은 양육 환경을 만들어 줄만큼 돈도 많고, 몸도 건강한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는 헨드메이즈 식의 사고방식으로 귀결되는 군요. 정말 그런 세상이 도래하려는 것일까요?


사회계열 1학년 신윤정

선생님이 쓰신 연애는 ‘신흥종교’와도 같다는 그 단어에 너무나도 동감이 돼서, 난 그 동안 잃었던 집중력을 모두 회복하고 나머지 수업시간을 집중해서 들었다. 고등학교 때도 느끼긴 했지만 대학교 들어와서 몇 배로 더 느끼는 건데, 사람들은 연애에 열광한다. (물론 내가 가장 많이 보고 겪는 집단이 대학생이니까 더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만) 뭐 연애까지는 좋다고 치자. 근데, 과연 연애결혼도 그렇게 좋을까? 사랑만 가지고 결혼해서 산다는 것. 난 굉장히 회의적이다. 결혼해서 30년은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인데 3개월 때의 그 눈에 하트가 뿅뿅 뜨는 그 감정만으로 ‘채택’해도 될까? 중매결혼은 촌스러운 얘기가 돼버린 요즘이지만, 난 차라리 신분, 집안 그런 조건 따져서, ‘레벨 맞춰서’ 결혼한 옛날이 더 살기 수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사랑이 식은 2년 뒤 부터는 그럴 거다.(2년 맞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 남녀의 사랑이 식는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데)

2007-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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