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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피로사회와 투표/즐거운 탈주의 하루

조한 2012.04.11 09:00 조회수 : 689

 


[조한혜정 칼럼] 즐거운 탈주의 하루를 보내자!



한겨레


수줍은 듯 숨어 있던 목련꽃들이 해를 따라 고개를 든다. 거대한 목련나무 옆 작은 벚나무는 질세라 연분홍 화사한 꽃봉오리를 틔우고 있다. 투표하는 날이다.

내 나이 환갑이 지났는데 투표장에 간 것은 다 합쳐도 몇 번 안 된다. 찍을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정치 영역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사회가 싫었고, 무의식의 구조를 바꾸어내는 문화적 실천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부지런히 투표장에 간다. 최근에는 부재자 투표까지 했다. 이제야 철이 든 것일까? 아니다. 투표를 한다는 것이 나를 생기 있게 만드는 행위, 본격적인 문화적 실천 행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모두를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로 몰아넣는 체제로 굴러가고 있다. <피로 사회>의 저자 한병철씨는 이를 ‘성과 사회’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20세기가 ‘결핍의 시대’이자 ‘규율 사회’였다면 21세기는 ‘과잉의 시대’이자 ‘성과 사회’라고 규정한다. 성과 사회에서 국민들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온 힘을 다해 달리며 성과를 추구하는 주체가 된다. ‘속전속결’, ‘선진첨단’을 달리는 이 체제는 ‘성능 없는 성과’를 내는 사회이며 인간을 인공지능기계와 경쟁을 시키는 사회이다. 피로와 우울을 모르는 인공지능기계와 피로를 느끼고 우울해지는 존재인 인간 사이의 경쟁에서 이기는 쪽은 물론 기계이다. 기계처럼 되고 싶은 똑똑한 인재들이 ‘초합리적 바보’가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성과 사회는 시민들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오늘 내/우리가 투표장에 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탈진과 피로를 낳는 자기 파괴적 체제를 멈추기 위해 나/우리는 오늘 그곳에 간다. 보상구조에 이상이 생긴 체제인데도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나는 할 수 있다”고 수시로 읊었던 주문을 더 이상 외우지 않기 위해서 그곳에 간다. 멈추면 모든 것이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 자체를 불온한 것으로 여기던 과거와도 결별한다.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과주의 롤러코스터를 멈추기 위해서 나/우리는 투표장에 간다.

“모두가 투기꾼, 사기꾼이 될 때 자본주의가 완성된다”는 명제가 현실화된 카지노 자본주의. 정치·경제·문화의 경계가 사라진 피로와 우울의 시대에 나/우리 개개인이 곧 국가이고 세계이다. 이런 시대에 개인의 변화는 곧 사회의 변화이고, 지금의 투표 행위는 국민국가 시대의 투표 행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국민의 권리를 잠시 특정 정치가에게 위임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함께 지낼 파트너를 선택하는 행위이다.

일본의 후기 근대적 지역 운동을 하던 시민운동가 출신 가다 유키코는 도지사로 선출된 뒤 자신의 당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마추어지만 나를 뽑은 현 주민은 프로다.” 새로운 시대의 정치계의 프로는 정치가가 아니라 시민이다. 규율 사회에서 성과 사회의 주체로, 성과 사회에서 새로운 생성 사회의 주체로 진화하고 있는 시민들이다. 그들은 시민의 권한을 4년간 믿을 만한 이에게 위임하기 위해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문명 전환기에 풀어야 할 핵심 문제를 함께 풀어갈 파트너를 찾아 표를 던진다.

이번 선거에서 멀리할 후보는 시민들의 두려움을 이용해서 표심을 사는 정치꾼들이다. 대신 가까이할 후보는 자신의 지역구를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 가려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다. 목적 달성을 위한 구체적 방법론과 성과 리스트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 사색하고 창조하는 시간을 가질 여유이다. 삶을 반추하며 사색하고 산보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우울함과 두려움을 직면하는 그런 사람이다.

나/우리는 이벤트에 참여하듯, 게임을 하듯, 개그를 보듯 오늘 투표장에 갈 것이다. 투표를 한 뒤 무장해제의 시간을 즐길 것이다. 모여 있는 것 자체를 즐기며, 무위의 시간, 놀이의 시간, 막간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마침 여기저기서 플래시몹을 한다는 소식들이 들리니, 즐거운 탈주의 하루를 보내시라.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