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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사회에 대한 소감 (강성혜)

조한 2012.04.09 11:08 조회수 : 4325

 

피로사회

<Public Information ? 교보문고에서>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 03 05일 출간

 

저자 : 한병철

저자 한병철은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피로사회』(2010)를 통해 독일에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가장 주목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올랐으며, 한국에서는 2011년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하이데거 입문』『죽음의 종류- 죽음에 대한 철학적 연구』『죽음과 타자성』『폭력의 위상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역자 : 김태환

역자 김태환은 1967년 소사(현 부천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독어독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 대학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하며 등단했으며,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했다. 덕성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푸른 장미를 찾아서- 혼돈의 미학』 『문학의 질서- 현대 문학이론의 문제들』 『미로의 구조- 카프카 소설에서의 자아와 타자』, Vom Aktantenmodell zur Semiotik der Leidenschaften. Eine Studie Zur narrativen Semiotik von A. J. Greimas(『행위체 모델에서 정열의 기호학으로- 그레마스 서사 기호학에 대한 연구』) 등이, 옮긴 책으로 페터 V. 지마의 『모던/포스트모던』등이 있다.

 

<My review : 2012. 4. 8.>

 

어제 선생님과 여의도 한강 둔치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나는 여전히 아직도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 여기 나와 운동하는 사람들은 건강하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 딸기 쥬스를 만들어 애들에게 먹이는 어떤 단체를 여전히 핸드폰 카메라에 담고 계셨다.

 

이제 겨우 신제품의 라인업을 정리하고 마켓팅 준비에 분주하기 짝이 없는 나에겐 과분한 시간들이었다.

 

이거 한번 봐라!” 가시는 길에 불쑥 주시는 얇고 조그맣고 보랏빛 문고판 책은 흡사 책의 느낌만으로도 선생님의 이미지와 겹쳐졌다.

 

마치 맛있는 초콜릿 상자라도 여는 기분으로 책의 첫 장을 넘겼다. “어 왜 한국 사람이 쓴 책을 번역을 했지?” 학교를 떠난 지 오래된 나는 저자나 역사 그런 것들을 꼼꼼히 보며 책을 읽은 지 괘 오래된 셈이었다. 한병철 재독학자, 고려대 출신. 근데 왜 한글로 안 썼지? 그는 한국 말을 할 줄 알지만 현재 독일에서 연구하고 살아가는 독일학자였다. 하이데거의 책을 번역하듯 그런 거 였구나. 책을 펼치기 전부터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펼치니, 더더욱 난감했다. 하이데커의 불안사회에 대한…, “뭐야 철학 책이잖아. 내가 아직도 학교 다니던 시절의 학생이라고 생각하시나!” 슬슬 잡지나 보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던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연필을 들고 밑줄을 그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내게 있어서 근대란 역사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단어로 기억되는데, 필자에게 근대란 지난 세기이며 역사책의 시작에 있는 곳이었다. 후기 근대와 포스트 모더니즘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논란의 대상이긴 하지만 현재 진행형이란 게 대강의 나의 박제된 지식 속에 있는 단어들이었다.

 

필자는 20세기를 면역학적 방어의 시대로 보고, 부정성에 근거한 이질성과 타자성으로 규정한다. 21세기는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면역저항이 아닌 소화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반응으로 저항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20세기적 규율사회는 21세기적 성과사회로, 그래서 20세기적 타인의 착취에 대한 거부와 저항은 분명한 타자를 대상으로 한 동력이었으며, 이는 한 시대에 의미를 부여했다. 21세기 성과사회에서는 성과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그래서 해야한다에서 할 수 있다로 바뀌면서 극단적인 상황에서 광인과 범죄자에서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생산해낸다. 불편한 어떤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군!

멀티태스킹에 대한 필자의 해석은 앞에서 다룬 심히 철학적 언어의 정반합보다는 내게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 자신 멀티태스킹이 안되어 늘 약간의 컴플렉스를 느끼며 살아온 내게 필자의 핵심은 사색하지 않는 인간이 멀티태스킹이 가능하고 이는 수렵시대를 사는 동물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후기 근대의 노동과 정보사회 그러니까 소위 최 첨단사회를 사는 인간이 자랑스럽게 하는 멀티태스킹이 수렵시대 동물의 속성이란 필자의 해석은 탈컴플렉스 이상의 충격이며 철학적 심오감으로 다가왔다. 성공적인 삶에 대한 과잉집착은 생존 자체에 대한 인류의 깊은 사색적 주의를 분산시켰다. 정보의 원천과 처리과정에서 빠르게 초점이 이동하여 산만주의를 양산한다는 것이다. 이는 심심한 것에 대한 참을성이 없어, 창조의 과정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깊은 심심함이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한다.

 

멀티태스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한 순간에 후기 근대의 아이콘인 산만과 분주함으로 연결되고, 이는 깊은 사색이 없어지는 원인으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나친 활동성은 노동의 극단적 개별화를 초래하였으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죽음의 공포를 지속적으로 덜어주던 종교도 무의미해진 세상을 필자는 탈서사화(Entnarrativisierung)로 규정하고 있다. 서사성을 지닌 죽음의 기술이 부재한 현실은 벌거벗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다는 것이다. 벌거벗은 생명 넘어 무엇이 있다면 건강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화되었을 것인가? 필자는 반문하고 있다.

 

사색까진 아니더라도 항상 생각이 많은 나는 멀티태스킹에 대해 생특적인 거부가 존재했음을 느끼며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멀티태스킹이 부재한 영역에서 나는 마음껏 숨쉬며 내 맘대로 생각하고 자유를 느꼈구나! 설명 안 되는 불편했던 어떤 영역이 명쾌하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건강지상주의에 대한 인간 수명 연장이라는 설명이 얼마나 궁색한 지, 얼마나 깊은 사고를 하지 않은 채 붙여진 피상적 설명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호모 사케르, 원래는 조개 껍질에 이름을 써서 추방한 자, 죽여도 괜찮은 공공의 적을 의미하는 것인데, 후기 근대에서는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신분증 없는 불법체류자, 난민들, 산소호흡기에 묶인 채 간신히 연명하는 중환자실의 식물인간으로 치환되어, 사케르는 저주받은에서 신성함으로 바뀐다. 그것은 벌거벗은 생명 자체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존해야 하는 존재로 치환된다. 이러한 과잉활동은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새로운 강제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기 근대의 사케르들에 대한 나의 반인권적인 생각들-그들에 대한 과잉보호와 과잉징계 사이에서-때문에 나는 늘 보이지 않고 말하지 않는 어떤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그냥 누군가 판단해서 실행하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주고 위로해주면 안 되는 거야? 이 단순한 나의 사고 뒤 편에 그렇게 깊은 사색적 의미가 있을 줄은 정말 상상 이상의 영역이었다. 사색 능력의 상실은 삶의 활동성의 극대화를 담보하고 이는 히스테리와 신경증의 원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필자는 지적한다.

 

니체를 인용하며 필자는 인간은 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는 것을 배우기 위해 머뭇거림이 허용되어야 하는데, 이는 행동이 노동의 수준을 넘어서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막간, 머뭇거림이 아주 적은 시대, 적어도 적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의 새 제품의 테마가 “Waiting control”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 바로 시대 상황이라는 설명으로 귀착되었다. 기다림의 주체를 사람에서 컴퓨터로 치환함으로서 효율성을 극대화

 

내가 엊그제 썼던 기획서의 문안을 곱씹어보게 하는 순간이었다. 컴퓨터가 엄청난 연산능력이 있으나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어 어리석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필자를 보면서 나 신 후기근대를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그래서 우울증 환자를 양산하는데 가장 일조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거 아닐까? 생각하기도 싫지만 어느 한부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필자는 분노는 새로운 것의 원동력이라 했다. 짜증과 구별하여 후기 근대의 분주함은 분노의 여지를 없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될 수 있는 능력을 증발시켰다 주장한다. 즉 짜증과 분노는 공포와 불안으로 치환된다. 공포는 특정 대상에 대한 것이며 불안은 존재 자체에 대한 것이다. 전체에 대한 부정성을 이미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 전체의 긍정화는 부정성의 부재로, 사유를 계산으로 전락시켜, 극단적 긍정 기계인 컴퓨터를 천재백치로 보고, 이것이 개인과 사회를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시키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성의 부재는 돌이켜 생각하기를 불가능하게 하고 긍정성의 과잉으로 오직 계속 생각하기만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이든지 지속 가능 사회에 대해 얼마나 많이 논의하고 있는가? 끔직한 소름이 돋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과잉반응일까? 지속 가능한 것에 대해 과잉 집착하는 나는 늘 계속성과 반복을 위한 매뉴얼 만들기에 열 올리고 이는 나 자신에게 정말이지 지속적으로 새로운 동기부여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내 사유의 토대가 바뀌는, 이는 점잖게 말하는 것이고 사실은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나의 사유가 우리 사회 정확히 말해 후기근대의 속성을 가속화시키는 기재로서 작용한다? 나의 새로운 테제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나는 이제 나의 지속 가능한 어떤 것의 단절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가 말한 거절할 수 있는 힘, 어떤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이를 후기근대의 병리학적 현상에 대한 대안이라 생각한다면 나는 정말 단세포적 인간일까?

마지막 장에서는 필자는 극단적 성과사회는 도핑사회로 발전하며, 이는 성능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극단적 피로와 탈진상태를 야기하며 고독한 피로이며 분열적 피로라 주장한다. 우리의 피로가 아닌 너의 피로가 있고 다른 쪽에 나의 피로가 있다, 이러한 분열적 피로는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를 초래, 즉 탈창조의 형태로 만든다. 이러한 분열적 피로에 대립하는 근본적 피로라는 개념을 끌어내, 사라진 생존과 공존의 형식으로 귀결짓는다. 이는 동양적 무위의 개념이며 느림의 미학으로 승화시킨다. 지친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의 사랑을 얻었고, 피로는 치유의 근원이 된다. 반복하면,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이며,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이다. 즉 그만둔다는 것에 기인하는 안식의 의미이며, 이는 하이테거가 말한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즉 막간의 시간이다. 창조가 끝난 신은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정했다. 이는 바로 막간의 시간을 의미한다. 놀이의 시간이며 무장 해제의 시간이다. 이를 오순절의 시간이라 부르며 바로 미래의 피로사회라 규정한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 뭔가 사유의 치환이랄까, 논리의 점프가 막연히 느껴지는 것은 아직도 내가 논쟁을 좋아하는 80년대적 사고의 틀을 못 벗어난 걸까? 하는 자조적인 생각도 든다.

 

20세기를 극대의 시대로 규정했던 에릭 홉스바움을 좋아했던 나는 이를 면의 시기라 불렀던 필자를 응시하기까지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1964년생, 세기말이라 하기에는 너무 일찍 태어났고, 20세기의 인간이라 하기에는 21세기 동안 너무 많이 산 나는 여전히 20세기의 병리적 현상인 면역력의 문제에 시달리며 21세기에 적응하고 생존하느라 힘겨워하고 있다. 그런 내가 하지 못하는 영역, 예를 들어 멀티태스킹은 나의 20세기적 성향이 만들어내는 성향에 기인하는 것이고, 내가 아직도 힘겨워하며 버리지 못하는 끊임없는 reflection, 역자는 돌이켜 생각하기라는 멋진 말을 썼는데, 내겐 가장 오래되고 친근하고 그렇지만 좋아하기에는 너무 못된 친구 같은 존재이다. 목표가 정해지면 달성할 때까지 계속 생각하며 절대 그만두지 못하고 달려가는 나는 전혀 후기근대적이지 못하고 전형적인 근대의 목표지향적 인간이리라. 그런데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면 멈출 수 있는 강한 힘도 지니고 있다. 끊임없이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계속 생각하기를 유지하기 위해 생각을 짜내고 있다. 어느 순간 대안을 찾아 접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도 한다. 후기 근대의 병리적 현상을 바라보며 대안을 찾아 고민하고 실천해 보기도 하며 좌절도 하고, 분노도 한다. 그런 나에게 오늘 이 책은 새로운 담론의 장으로 초대해 주었으며, 나의 돌이켜 생각하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아직도 이런 지적 유희에 초대받을 수 있는 영광을 누려도 되는지, 가능하게 해주신 분에게 다만 황송하고 죄송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