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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스콜라의 “남미에서 배우다, 놀다, 연대하다“를 읽고

조한 2013.03.04 07:42 조회수 : 2987

 

로드 스콜라의 남미에서 배우다, 놀다, 연대하다를 읽고

 

<전환기, 배운다는 것에 대하여>

 

조한 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하자 마을 주민)

 

커다란 배움, 대학의 새로운 시작?

부모와 시장이 키운 스펙 세대는 포기를 해야 하는 걸까?”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요즘 들어 자주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사회현상을 관찰해오라고 하면 대부분이 남의 이야기 하듯 논술을 써온다. 자기 이야기로부터 풀어보라고 하면, 개인의 테두리를 벗어나 자신을 바라보며 쓰는 글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학원 강사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자라서 일까? 자기 고집대로 하던 신세대에 비해 이들의 세상은 너무 작고 성격은 너무 온순하다.

 

특히 일류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입시공부할 때가 행복했다고 하고 스펙 쌓기를 할 때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단기적으로 수행해야 할 작업은 숙련공처럼 잘 해내지만 금방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듣기도 싫다. 친구와 오랜 관계를 맺어가는 것, 물론 어렵다. 그래서 엄마가 가장 친한 친구라 말하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엄마라고 한다. 초딩처럼 순진하고 즐거워보이던 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멘붕이 왔다면서 사라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채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므로 안전보장이 확실해질 때까지 탈원전 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내 말에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동의는 하지만 움직이기 어려운 이유를 수십가지를 생각해낸다. 그래서 대안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말이 없다. 그런 질문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또는 움직일 수 없는 청년들!나는 그들을 초합리적 바보라고 놀린다. 인사도 잘하고 늘 착한 얼굴로 말을 잘 듣지만 막상 해야 할 일은 피하는 학생들에게는 귀여운 강아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강아지들은 재산이 좀 있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냥 좀 편하게 살아가겠노라고 하는 친구들이다.

 

인문사회과학의 기본인 자신과 남의 경계를 들고 나는 경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훈련을 이들은 지금껏 받은 적이 없다. 그것은 실은 열 살 정도가 되면 이런 저런 책을 읽고 친구를 사귀면서 저절로 갖게 되는 훈련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스펙 쌓는 것에 빠져서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취직을 한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간들, 이들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게 될까? 불확실성의 시대에 점점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 일이 많아질텐데 무슨 힘으로 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부모에 의해 기획되고 관리된 아이들은 어른이 될 수가 없다. 특히 스스로 어려움을 헤쳐나간 경험이 박탈될 때 어른이 될 수가 없다. 반응(reaction)은 하지만 창조적인 움직임(proaction)을 할 줄 모르는 소극적 인간으로 남게 된다.

 

이는 딱히 일류대학을 가느라 12년을 입시공부에만 몰두했던 경우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부모들이 입시교육의 무상함을 깨달아 자녀를 대안학교에 보낸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 자기 앞가림 못한 채 하루하루를 어영부영 보내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불안과 강박을 어쩌지 못하는 면에서는 기존학교에 다니든, 대안학교를 다니든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세대는 잃어버린 세대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조만간 잃어버릴 세상의 시작이 되는가?


이런 암울한 질문을 하고 있을 때 원고 뭉치가 날아왔다. [로드 스콜라, 남미에서 배우다, 놀다, 연대하다] 책이 나오니 추천의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로드 스콜라는 열 다섯살부터 스물두살의 청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로 하자 센터의 네트워크 학교 중 하나이다. 트라벌러스 맵이라는 사회적 기업이 지원하는 학교이기도 하다. 나이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의 별명을 부르면서 꽤 빡센 글쓰기 훈련을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봄학기 강의 준비로 꽤 분주한 중에 원고를 짚어들었는데 한순가에 글을 읽어내렸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 추천사를 쓰기 시작한다. 읽는 동안 밑줄 친 구절들을 나누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2. 시간의 발견, 시공을 초월한 만남을 통해 온전해지기

 

아옌데의 소설은 나무랄 데 없이 재밌었지만, 그녀의 소실을 릭고나면 나는 항상 어딘지 한 구석이 불편해졌다. 이게 뭘까...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감정은 질투심 비슷한 거였다. 특히 [운명의 딸]의 엘리사. 기존에 정해져 있던 길, 제도를 벗어나 종횡무진하며 마침내 자유를 얻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기가 죽었다. 제도를 벗어났지만 늘 어딘가에 얽매여 있고 헤매고 넘어지기만 하는 내 모습이 그런 엘리사는 위로 오버렙 되었기 때문일까? 고등학교를 그만 둔 내게는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었다. 잘 산다는 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만 빼고 다른 동료들은 다 한뼘씩 성장하는 것 같아 초조했다. 난 왜 이렇게 해맬까? 이러다 계속 헤매기만 하는 건 아닐까? (서지현, ‘페이스북을 탈퇴한 이유’ 311-312)

 

이런 질문을 던지는 여치 서지현은 그 대단한 작가 역시 바로 그런 두려움 속에서 이 소설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작가의 아버지가 해준 말, “다른 사람들은 너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단다에 밑줄을 친 여치는 외로움과 열등감,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일면 이 말을 되새기면서 기운을 차린다고 한다. 여치는 페이스북을 탈퇴하는 선취적인(proactive) 행동을 한다. 페이스북에서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불안해하는 를 끊고 그냥 불안하고 두려워하기로 한 것이다. 누구나 헤매고 넘어지는 순간이 있고 원래 삶은 헤매고 넘어지는 순간의 연속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라고 그는 이제 큰소리를 친다.

 

여행과 책과 글쓰기를 통해서 큰 깨달음의 시간을 가진 이는 여치만이 아니다. 이띠 또한 그런 경험을 나누어주고 있다. 이띠는 실은 대안고등학교 학생이 아니다. 대학에 입학해서 둥둥 떠다니다가 따분한 대학수업에 실망하며 학교를 듬성듬성 다니다가 조금 더 흥미로운 전공으로 바꾸어 마음을 잡으려 몇 번이다 다짐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은 친구이다. 결국 그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고 아빠를 속이고 로드 스콜라를 찾았다. “대학도 싫고 집구석도 싫고 혼자 여행하는 건 무섭고 아무것도 안 하자니 불안한 터여서 도망치되”(330) 잠시 속할 집단을 찾으려 했었다고 회고한다. 막상 로드 스콜라에 입학해서는 또 환상이 깨지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냉소도 아니고 무기력도 아닌 이런 부유 상태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학기를 다니고 여행경험을 책으로 펴내면서 내 손으로 무언가 완성해나가며 발바닥부터 차곡차곡 힘이 쌓여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함께 만든 것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고 동료 작업자들에게 애정과 신뢰도 느끼게 된다. ‘그들이 좋고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고 같이 작업하는 것이 괴로우면서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동작업자의 품성을 기르고 스토리 텔러의 능력을 함양한다.”는 교육의 목적이 자신의 몸속에서 피어남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322). 그래서 로드 스콜라의 여행과정은 일단 적어도 두명에게는 기적을 일으켰다.

 

나에게 네루다는 연애시로 강렬하게 각인 됐지만 그건 초기의 시일 뿐이다. 전 생에 걸쳐 그의 시는 변했다. 사랑했고 이별했고 우울하고 방황하고 좌절했으면 절망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을 겪으면 꽝 머리를 부딪치고 세상과 사람들을 만나러 나섰다. 끝내 그는 모든 걸 노래했다. 뿐만 아니라 그도 한때 찌질했고 소심했고 가난했다. 나는 안도 했다. ... 그의 청년시절이 나의 지금과 같고 후의 삶이 내가 살아갈 삶이지 않을까? (황지은, 이띠, 길위의 친구들, 파블로 네루다 시집을 읽고, 327)

 

분초를 계산하면서 사는 고도압축적인 근대를 살아가노라 시간의 감각을 잃어버린 시대에, 용케도 이들은 여행과 책을 통해 시간을 되찾아낸다. 그 시간과 함께 그 안에 갇혀있던 선배와 스승과 동료들이 돌아온다. 긴 여행, 어쩌면 짧은 일생을 함께 해줄 든든한 지원자들을 만난 것이다. 어찌 커다른 배움이며 큰 축복이 아니랴!

 

3. 글쓰기를 통해 얻은 시선과 살아갈 힘

 

이띠는 이야기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읽고 보았고,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발품을 팔았고, 전해들은 이야기들이 내 안을 휘저었고, 끙끙대며 나도 몰랐던 혹은 모른 척 해왔던 나의 이야기를 끄집어 냈다. 동네 할머니와 백년전 살았던 소녀와 저토론 무심한 바위가 내게 이야기를 건넸다. 나는 들었고, 기억했고, 글로 썼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나와 마주해야 했고, 나를 겹겹이 둘러싼 것들을 한 꺼풀씩 벗겨냈다. 이제는 질질 짜리 않고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 대학에 가도, 가지 않아도, 삶을 끝장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332-222)

 

한편 서정현 가재는 일찍이 글쓰기의 힘을 알아차린 친구이다. 자신의 조금 다른 정체성으로 인해 자신과 사회를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시선을 가지고 글을 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린 경우이다.

 

창의적 글쓰기수업을 하면서 내가 배우고 익힌 건 삶이었다. 매주 다른 주제로 성실히 글을 쓰고 함께 모여서 다른 친구들의 글을 열심히 읽고 혹평 속 한줄기 칭찬에 다시 다음주를 기대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마침내 겨울이 왔을 대 나는 대학가기를 미루고 다른 배움을 더 해보기로 했다. 순전히 글을 잘 쓰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살아갈 힘 같은 것이 생기는 게 신기했다. 열아홉살에 내가 배운 글쓰기는 두 단계, 하나는 자신의 경험을 멋지게 쓴다. 2단게,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자.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자기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자기를 특별하게 여기지도 않고 글을 쓰려면 얼마나 힘들까? (서정현 가재, ‘브라보 마이 라이프, 319-322)

 

아직 이십대도 되지 않은 나이에, 글쓰기를 통해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고 사회를 감싸 안게 된 이띠와 가재는 행복이 무엇인지 안다. 시선을 갖는다는 것이 곧 살아갈 힘이 생기는 샘을 갖게 되는 것임을 안다. 이들은 신을 죽인 근대의 끄트머리에서 실은 분에 넘치는 신의 선물을 받은 것이다.

 

4. 서두르지 마! 그저 그렇게 함께 가보자

 

그렇다, 나에게는 강하고 단단해져야 한다.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다. 그렇지 못한 자신에 대한 미움도. 스물이 넘어서 대학이 아니라 대안학교에 다닌 것도, 부모님에게 용돈과 학비를 타는 것도, 착은 체구와 별 볼일 없는 근력도 모두 자랑스럽지 않다.....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강해져라, 어른이 되라, 책임질 줄 알아라 등의 충구를 하면 초초하다. 얼른 부모에게서 정신적 독립은 물론 경제적 독립도 해야 하고 혼자서도 척척 뭐든 해나가고, 뭔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 하는데, 얼른.

남미를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삶의 모습과 마주했다. 그들은 역사책에 한줄 쓰일만큼 대단한 업적을 세운 건 아니지만 각자 나름대로 본인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행복해보였다. 변하고 싶어도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무력했던 나에게 그들은 하나의 길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작은일부터 마음을 모아 해나가면 되겠구나. 아래서부터 차곡차곡 쌓여가도록.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지끈지끈 머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살아갈 일이 너무 겁나고 두렵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했다.(김지아 자기, 서두르지마 347-8)

 

독립적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일을 갖는다는 것, 생계를 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회는 일자리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일자리를 만들어낼 교육도 시키지 못했다. 마땅한 일자리도 일거리도 없는 사회에 어른이 되기는 힘들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들에게 자기들과 같은 어른이 되라고 말한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고 그래서 어른과 아이의 개념, 학습과 놀이의 개념, 삶과 노동과 활동의 개념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할 때인데도 말이다.

 

어른이 되기 힘든 구조인데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심하면 병이 난다. 청년들이 자칫하면 잠수를 타거나 멘붕에 빠지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다들 아이로, 부모의 귀여운 애완반려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좋은 팔자를 타고 났다 해도 만족하기에는 이미 모두가 너무 개체화 되어버렸다. 참으로 난감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를 근대의 몰락기, 성장이 한계에 달한 탈근대 사회, 부가 아니라 위험의 분배가 문제가 되는 위험사회,’ 소수만이 살아남은 1: 99%의 사회, 그리고 청년 실업사회의 이름으로 부른다. 이런 어려운 구도 안에서 우리는 각기 불안하게 헤매고 다닌다. 여전히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마나 떠나도 늘상 페이스북과 카톡에 연결되어 있다가 돌아온다.

 

로드 스콜라가 남미를 간 목적은 네 가지였다고 한다. 1) 탈근대 문학이 시작한 남미 문학을 배우는 것, 2) 시장적 자본주의화 속에서 일고 있는 공정무역현장을 둘러보는 것, 3) 잉카 문명과 스페인 문화의 충돌을 통해 형성된 라틴의 근대와 하이브리드 문화를 이해하는 것, 4) 대자연 앞에 서보는 것이다(252). 이들은 실제 이 목적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고 많은 발품을 팔았고 머리에 쥐가 나게 단어를 외웠다.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위해 서버이벌 스페인어를 배웠고 서투른 말을 할 뱃심을 키웠다. 한국의 근대사와는 아주 판이한 데가 많은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사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대학 문학전공자들도 읽어내기 힘들어하는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라거나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은 이들도 있고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을 애송한 이도 있었다. 모두 복잡다단한 근대사에 대한 감각이 없이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텍스트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잊지 않고 거대한 자연 속에서 겸손하게 띠끌 같은 존재감을 느끼며 영적 세계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되었다. 꼭 해야 할 배움의 내용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너무 영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학원과 가정을 오가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한국땅에서 자란 십대들에게는 매우 벅찬 학습일텐데 각자는 자기 수준에서, 그리고 자기 자리에서 아주 훌륭하게 학습을 해냈고 그것을 또한 기꺼이 우리와 나누어주는 노고를 거쳤다.

 

최근 미국의 주요 학부 대학에서는 이런 방식의 세계 탐사 학습이 유행을 하고 있다. 교수 두사람이 열명 정도의 학생들을 데리고 하는 수업이다. 세계인으로 현장에 직접 가서 그곳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두루 체험하면서 질 높은 깨달음을 갖게 하겠다는 취지에서 이다. 이들 역시 로드 스콜라처럼 두달간의 현지 탐방을 위해 한 학기 내내 사전 준비하고 책을 읽고 언어를 배운다. 현지에서 가장 현명한 이들과 접속해서 그들의 지혜를 듣고 생생한 일들이 벌어지는 현장을 찾아간다. 나는 우연히 지난 몇 년 이런 방문자들을 종종 만나서 인터뷰를 해주거나 방문 주선을 해주기도 하였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그들이 로드 스콜라들이 하는 만큼의 학습을 해가는 것 같지는 않다. 왜 그럴까? 온몸을 싣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솔교사와 학생들도 로스 스콜라에서처럼 전인적이지 않다. 게다가 세계의 최고 명문대 학생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이들은 기득권에 연연한다. 여전히 기존 사회에서 기회를 찾고 있는 편이고 그런 태도로 가는 한 비약적 학습을 이루어내기는 힘들다.

 

학습이란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이고 크고 작은 만남이 일으키는 기적이다. 교육이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질문을 갖게 되는 과정이고 그런 질문의 능력이 바로 수시로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때로 그 환경 자체를 바꾸어내는 힘이 된다. 학교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자기를 낯설게 바라 볼 수 있는 거리감을 가르친다. 혼자 멘붕에 빠져 허우적 대지 않도록 서로 돕는 법을 가르친다. 사람은 함께 있는 것 그 자체에서 에너지를 받는다는 것을 일러주는 곳이다. 그래서 어려운 난관이 닥쳐도 삶은 살아볼만한다는 용기를 갖게 하는 곳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학교는 어떤가? 함께 있는 것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는 공간으로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폭력이 벌어진 곳을 외면하게 함으로 어릴 때부터 폭력의 공범자들을 만들어내는 곳은 아닌가? 일류대학 입학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는 한국의 학교체제는 더 이상 학교일수가 없다. 배움이 사라진 지 오래인 곳이다. 십년 전에는 대안이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제는 대안조차 생각해낼 기력이 없을 정도로 병세는 심각하다. 1990년대 중반 나는 너무나 시시해지는 세상이 견딜 수 없어서 이런 주문을 책상머리에 붙여두었었다.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그런데 세상은 날로 시시해지고 있고 낙후시킨 후 떠날 곳 또한 없어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좀 다른 주문을 외운다. 아웅산 수 치 Aung San Suu Kyi여사가 한 말, "무기력하다고 느낀다면, 다른 이를 도우십시오!" 인간은 참으로 묘한 사회적 동물이다.

 

5. 새로운 교재를 쓰다

 

이런 시대에 로드 스콜라와 같은 학교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기적의 학교, 배움이 불가능한 시대에 배움이 여전히 가능함을 보여주기에 기적을 일으키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세대 간 만남과 소통이 가능한 만남, 시간성 장소성에 대한 감각을 여전히 간직한 선생님들, 시공을 넘어서는 연대와 몸을 통한 훈련의 중요성을 아는 교장이 있는 학교. 온갖 체험이 순간에 사라지는 시대에 그를 몸에 온전히 남기고 책으로 펴낼 정도의 집중력을 키우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집단지성의 힘을 확인하면서 어디서건 길을 잘 찾아갈 나침판을 선물하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이런 학교들이 더 많이 늘어날 수 있는 없을까?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로드 스콜라의 김현아 교장 어딘에게 책 출간을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녀는 글 쓰는 것의 힘을 누구보다도 믿고 있는 흔들림 없는 사람이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학교를 더 잘 키워서 크고 작은 기적의 학교들이 주변에 많이 생겨나도록 해보면 어떻겠냐고 은근히 권하고 싶어진다. 십대들만이 아니라 대학에 실망하는 대학생, 숨가쁜 삶을 살다가 롤러코스터에서 내리기로 한 직장인들도 다닐 수 있는 학교 말이다. 옹기종기 모여서 시효가 지난 어른개념을 해체하고 공생하는 삶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시공간이 이곳 저곳에 많이 생기면 좋겠다. 좀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는 제대로된 학교를 만들어가려는 분들에게 이 책은 참 괜찮은 불씨를 전해줄 것이다. (201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