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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핵 교수 신년 세미나 원고

조한 2013.01.13 15:30 조회수 : 2757

 김종철, 조한, 윤순진 발제


 

후쿠시마의 교훈, 원자력 시대의 종언과 좋은 삶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작년 67일 일본 여성들 수십명이 총리 관저를 찾았다. 한동안 전면 정지 상태에 있던 원전의 재가동을 정부가 허가할 움직임을 보이자 항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후쿠시마 원전 부근에 삶터가 있는 어머니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자신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눈물과 분노로써 묘사하고, 이 참극에도 원자력을 단념하지 않는 정부의 자세를 격렬히 규탄했다. 한 어머니는 우리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역사가 말할 수 없이 어리석은 역사였음을 알게 되었다라고 비통하게 말했다.

생각하면, 인간의 어리석음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지만, 그 중에서 원자력 기술의 개발과 응용보다도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근대적 기술에는 근원적인 폭력성 혹은 파괴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든, 실제로 거의 모든 근대적 기술이 인간생활에 혜택을 주는 만큼 반드시 부작용을 수반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흔히 혜택은 단기적이고, 피해는 장기간 지속되게 마련이다. 근대적 기술의 이 근본적 한계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간단히 답하면, 그 기술을 뒷받침하는 서구 근대의 과학적 이성이라는 것이 모든 자연은 계산을 통해서 정복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자폐적이고 근시안적 자연관 위에 구축돼 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계는 부분적·단기적으로는 합리적이되 전체적·장기적으로는 비합리적인 사고와 논리에 의해 압도적으로 지배되어왔다.

그러한 사고의 극단적인 산물이 원자력 기술이다. 원자력 기술은 방대한 전력생산 기술로서 유효할지 모르지만, 핵폐기물 처리를 비롯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생태적 비용은 인류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그 핵심적 비용에는 물론 생물체에 대한 치명적인 손상이라는 문제가 있다. 지구 탄생 이후 최초의 원시 생명이 출현하기까지 10?20억 년이 경과해야 했던 것은 방사능이 제거되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방사능은 지구 생물체와 절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자 헤르만 뮐러는 일찍이 방사선과 유전’(1964)이라는 논문에서 2차대전 후 빈번한 핵실험에 의한 대기 중 방사능 증가로 인류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이 축소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뮐러의 이 경고가 나온 지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핵실험 이외에 420기가 넘는 상업용 원자로, 그리고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에서의 핵사고로 세계는 돌이킬 수 없이 심각히 오염되었다. 게다가 작년 5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가 발표한 연구에 의하면, 세계의 원전에서 중대사고가 터질 확률은 10?20년만에 한번이다. 만약 이 연구가 옳고, 원자력 시스템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앞으로 100년 안에 북반구 전역은 인간의 거주가 불가능한, 광대한 방사능 오염지대로 변할 것이 분명하다.

원자력이란, 군사용이든 민생용이든, 이 지상에서 결코 용납돼서는 안될 기술이다. 세계적 반핵활동가 헬렌 칼디콧의 말이 아니더라도, 원자력의 근간에 있는 것은 광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정치가, 관료, 경제인, 과학자, 언론인은 한사코 원자력을 장려·옹호해왔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원자력이 값싸고 풍부한 에너지를 제공한다는 널리 유포된 거짓말을 그들이 믿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원전의 건설과 유지, 폐기를 모두 고려한다면 원자력의 경제성이란 완전히 허구임이 이미 명확해졌다. 그런데도 원전에 집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원전 비즈니스를 둘러싼 강고한 기득권 체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체제에서 절박한 것은 단기적인 이윤추구이지 생명과 자연의 보호가 아니다. 따라서 자본의 이해관계와 긴밀히 결합돼 있는 산업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도, 생명의 논리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 번 대선 후보들의 3차에 걸친 텔레비전 토론에서 원전을 포함한 환경문제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근대국가는 자본주의를 토대로 전개돼온 정치체제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성장·확대에 불가결한 기술혁신을 위한 테크놀로지는 자본과 국가 모두에게 요긴한 존재이다. 설령 그 기술의 궁극적 결과가 세계의 파괴일지라도 단기적인 이익에 골몰한 눈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핵폐기물 처리와 같은 것은 자신들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이게 원전을 옹호·지지하는 자들의 근본적 정신구조이다. 사실상 오늘날 이들이 지배하고 있는 정치와 경제, 법질서 전체가 조직화된 무책임의 체계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지금까지 일본이 지향해온 것은 서구 근대문명을 단시간에 모방하여, 자신도 세계열강의 일원이 되기 위한 대국주의(결국은 제국주의) 노선이었다. 그 길을 따라 정신없이 달린 끝에 전쟁 참패라는 좌절을 겪었으나 다시 전후의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한 듯했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태는 대국이 되고자 하는 꿈의 허망함을 명확히 드러냈다. 후쿠시마 이후 널리 공개된 사실이지만, 지진의 나라 일본에 54기의 원전건설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 전개된 데에는 단순한 전력 확보 이외에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언제든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잠재능력을 보유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발언력을 높이려는”(기시 노부스케) 목적이었다.

군국주의를 통한 제국건설의 꿈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로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경제대국 일본은 후쿠시마 사태로 종언을 고했다. 애당초 화석연료와 원자력에 토대를 둔 경제발전과 대국 지향 노선 자체가 지속 불가능한 것이었다. 후쿠시마 사태는 재생 불가능한 자원과 원자력이라는 광기의 기술에 의존하는 정치·경제체제의 필연적인 붕괴를 상징하는 파국적 재앙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물론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모든 근대국가, 서구 근대문명을 무반성적으로 모방해온 모든 신흥 산업국가의 공통한 운명이다. 이것을 뚜렷이 드러냈다는 점에서 후쿠시마 핵사고는 스리마일이나 체르노빌 핵사고와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 차이의 배경은 후쿠시마 핵사고가 경제성장 시대의 종말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시점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후쿠시마 이후에도 맹목적인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경제성장을 위해서 원자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작태임이 확실하다.

지금 인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진실로 좋은 삶혹은 좋은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좋은 사회란 무엇보다 안심하고 자식을 키울 수 있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사회여야 한다. 그러한 사회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례도 존재한다. 그 중 빠트릴 수 없는 나라는 물론 독일이다. 후쿠시마 직후 독일이 원전의 단계적 폐기를 거국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의 탈핵운동의 성과였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간소한 생활양식을 추구하고, 활발한 대안 에너지 개발 등 진지하게 미래를 대비해온 국민적·국가적 차원의 지혜와 합리성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상황은 아직 절망적이다. 원전 강국이라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재앙을 직접 겪은 일본정부도 별로 나을 게 없다. 후쿠시마의 어머니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쓴 탄원서를 접수한 바로 다음날 노다(野田) 당시 총리는 오이(大飯) 원전의 재개를 결정했다. 시급한 것은 동아시아 주민들의 정치적 각성과 궐기이다.

 

201311일 한겨레 특별기고

2013, 지속 가능성 혁명을 이야기하자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마지막 강이 오염되고 마지막 물고기가 죽어나가고 마지막 나무가 잘려질 때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말이 피부에 와 닿는 시점이다. 화석연료와 공업화, 과학기술과 국민국가, 그리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을 건 근대 자본주의는 이제 자원의 한계, 환경파괴, 핵의 재앙이라는 파국을 맞고 있다.

금융자본주의적 투기와 도박이 일상화된 상황은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근대적 국가체제를 갖추고 부를 축적하게 되면 유토피아가 오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근대사는 돈과 권력에 중독된 공고한 세력과 부자되기를 열렬히 원하는 대중이 만나면 광기의 파시즘을 낳는다는 사실을 일찍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비슷한 양상이 지금 경제대국들이 모인 동아시아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위기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지난 50년을, 아니, 100년의 시간, 천년 그리고 5만년의 시간을 거치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간 인류는 한 문명이 쇠하면 새로운 문명을 일으키면서 지혜롭게 지구상에서 살아왔다. ‘근대문명의 몰락이 역력해지고 있는 지금은 새 문명을 일으켜야 할 때이다. 한국이라는 국가에 속하는 지구주민인 우리는 몰려오는 재난과 재앙의 징후를 직시하고 비상을 위한 방법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다. 사실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교재들은 이미 충분히 나와 있다. 더 이상 시장이 질주하는 사회가 아닌 공유 경제를 만드는 일, 공생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서 말하는 자에 대한 거부감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한때 통찰력을 가진 지식인들이 존경을 받았지만 모두가 신이 된 탈근대적상황에서 그들의 당위론은 식상하고 거부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표방가치와 실행가치의 표리를 극명하게 보여준 이번 대선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투표율 50%를 넘기지 못하는 일본 주민들은 한국을 부러워하지만 50대 투표율이 89.9%이고 유권자의 45%50대 이상이라는 이번 선거는 수상쩍어 보이지 않는가?

20대 대학생들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 전공인 나는 20대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는 50대 부모들이 누구를 위해 투표를 했는지가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입시노동을 열심히 하였지만 대학을 졸업해도 마땅한 사회적 위치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자녀세대의 미래를 걱정하며 소중한 한 표를 던졌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것들을 위해 투표를 한 것은 아닐까?

수치상으로는 선진국이 된 지 오래지만 한국의 장년들은 여전히 선진-첨단을 외치며 달리면서 자녀들에게도 그리하라고 닦달해왔다. 이 성과적 주체들이 멈추지 않고 도달한 곳이 바로 아파트공화국과 입시공화국, 그리고 보험공화국이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공화국을 해체하면서 문명 전환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새 문명을 만들어갈 주체는 누구일까? 그 일은 살아갈 날이 창창한 청년들의 몫이다. 그런데 입시노동외에 제대로 해본 것이 없는 대학생들은 난감해한다. 일부는 자신들이 치른 입시전쟁이 부모를 위한 대리전이었을지라도 이미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것은 공부뿐이기 때문에 스펙 쌓기에 몰두하겠다고 한다. 한눈을 팔기로 한 청년들도 적지 않지만, 망가져가는 세상일에는 말려들고 싶지 않거나 문제 해결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생각에 주춤거리고 있다. 마냥 착한 얼굴로 예의바르게 지내는 것이 최상의 생존 비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 혼자만의 재밋거리를 개발해서 오타쿠로 지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말하는 청년들도 적지 않다.

무시와 모욕을 당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이들에게 사회적 발언은 특별한 자들의 몫이다. 이웃에서 핵발전소 재난이 일어나도 계속 잠잠한 상황을 우려하며 연말에 교수 1052명이 탈핵 서명을 했지만 학생들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태도를 두고 나는 그들을 부모의 귀여움이나 받으며 편하게 지낼 생각만 하는 강아지라거나 모든 것을 잔머리를 굴리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초합리적 바보라고 놀리곤 한다.

사회와 단절하고 스스로를 단속하며 사는 이런 특별한 청년세대의 출현이 나를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었지만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 피로와 과로, 그리고 멘붕을 토로하는 이들, 바닥을 친 걸까? 슬슬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수업에서 시키는 일, 목공으로 책상을 만들고 캠퍼스 안에서 친구들과 텃밭도 가꾸고 폐자전거를 해체해서 새 자전거를 만드는 작업을 기꺼이 하기 시작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보이지 않는 가슴이 있었기에 지속가능했다. 보이지 않는 가슴, 곧 돌봄 영역이 파탄나면 더 이상 사회는 지속할 수 없다. 서로 말을 나누지 않는 무언가족’, 혼자 살다 혼자 죽는 무연사회’, 연이 끊어져 작은 일로도 쉽게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하게 만드는 사회를 우리는 지금 만나고 있다.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힘을 주는 관계, 최소한의 바람막이와 비빌 언덕이 만들어져야 한다. 내 수업이 불안감만 가중시킨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학생들에게 나는 마사키 선생의 나비문명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뭇잎을 다 뜯어 먹어버리면 나무가 말라서 죽고 애벌레들도 다 죽게 될 테지만, 고치를 열심히 쳐 나비가 되면 나무도 살고 애벌레도 산다. 그러니 고치를 열심히 치며 동굴에서 나올 용기를 가지라고 권하면서 내가 해주는 우화가 있다.

숲이 타고 있었습니다. 숲속 동물들은 앞을 다투며 도망을 갔습니다. 하지만 크리킨디란 새는 주둥이로 물고 온 한 방울의 물로 불을 끄느라 분주했습니다. 도망가던 동물들이 그 모습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저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 크리킨디는 대답했습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

새 문명을 향한 혁명은 지속가능한 삶을 고민하는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돌봄이 있는 식탁, 난감함을 공유하는 원탁회의, 상부상조하는 이웃들이 모이는 우정과 환대의 자리들일 것이다. 과도한 기술파괴 시대에 적정기술을 발전시키는 일,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풀어낼 새 대학을 만드는 일, 인터넷 시대의 세계지도를 새로 그리는 일, 이런 일들은 모두 돌보는 마음을 가진 청년들과 그들을 진정 사랑하는 부모들의 자원이 연결된 때 가능해질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은 그간의 고도 압축적 방식이 아니라 압축을 푸는 느슨하고 느린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헛바퀴를 돌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제주 바닷가, 공유의 원리로 운영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는 고치를 치고 있는 청년들을 만난다. ‘이면서 내가 아닌 우리들의 창의적 공유지대가 많아질 때 새로운 문명과 만날 수 있다. ‘우리를 만나기 위해 고치를 치고 함께 나비가 되어 비상할 꿈을 꾸는 새해 아침이다.

 

201311일 경향신문 특별기고

 

한겨레 칼럼 등에 게재한

생명과 돌봄,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이야기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201318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을 대학은?

디지털 시대, 대학의 변화가 심상치 않다. 작년 1222일치 <이코노미스트>무크스’(MOOCs, Massive Open Online Courses, 대규모 온라인 공개강좌)에 대한 소개와 함께 전세계 대학들이 온라인 교실로 연결되면 몇 개의 슈퍼 대학만 남고 나머지는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시사잡지 <아메리칸 인터레스트>50년 안에 미국 4500개 대학 중 절반은 사라지고 하버드대 수강생은 10년 내에 1000만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 온라인 교실 시스템은 강의뿐 아니라 질문, 분반 토론도 하고 시험도 보며 졸업장도 주는 제도로 진화하고 있다. 최신 발명품인 유튜브와 위키피디아, 페이스북을 활용한 정교한 시스템을 통해 수십만명이 서로의 글을 읽고 논평하고 인기투표를 하는 지구촌 교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학습 생태계는 1971년 영국의 개방 대학교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활용한 새로운 실험에서 시작해서 미국의 매사추세츠공대(MIT), 하버드, 스탠퍼드대학교가 주도하는 온라인 강좌 시스템과 만나면서 새로운 플랫폼으로 완성되어 가는 중이다.

이런 학습 생태계의 출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일단 학생들은 세계 석학과 전문가들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많아진다. 물론 영어가 걸림돌이 된다. 중국은 이미 대대적인 번역을 통해 이 제도를 활용할 채비를 해왔다. 한국은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을 인재를 키우겠다는 집념으로 정부와 부모들이 합심해 영어 교육에 아낌없는 투자를 한 덕에 영어를 제2모국어처럼 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와 동시에 번역 시스템을 잘 마련한다면 이 제도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폭을 한층 확장시켜줄 것이다. 교수는 어떨까? 일단 강의 부담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초기에 강의 구상을 한 뒤 그 분야 최고 강사의 강의를 선정해 학생들과 함께 들으며 토론한다면 수업의 질도 높이고 강의 준비 시간도 줄일 수 있다. 특히 서구의 최신 교재를 수입해 가르치는 이공계나 정보지식형 분야는 딱히 강의를 하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경험이 풍부한 조교들이 지도를 잘하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교수들은 연구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반면 온라인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인문사회계 수업들은 늘어날 것이다. 학생들과 교수가 구체적인 역사적 시공간에서 전면적 관계를 통해 토론하고 사회문제를 풀어가는 지식 생산의 장이 더욱 풍성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국의 명문 대학들은 이런 추세를 감지하고 발 빠른 준비를 해왔다. ‘세계 100위권에 들어야 한다는 강박도 이 와중에 생긴 것이며 세계 유수 저널에 논문을 싣지 못하면 탈락하는 교수 계약제, 영어강의 의무수강제도 이 와중에 생긴 것들이다. ‘노벨상급 학자를 유치하겠다고 엄청난 돈을 지급하기도 했는데 이제 그럴 이유가 없어지고 있다. 온라인 강좌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우리 문제를 제대로 다룰 적정기술과 자생적 지식 생산 체계를 튼실하게 만들어 가는 일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한국 대학이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학생들의 멘붕’(공황상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학생 다수가 승자독식 경쟁 판에 휘둘리다 떡실신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후진국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구체제의 위기서열에서 ‘100안에 들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대학도 실은 지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대학은 외형적 확장과 숫자 놀이에 지나지 않는 외부 평가에 연연해하지 말고 교수와 학생들의 건강 상태부터 돌보기 시작해야 한다. 글로벌 대학은 글로벌 시장에 몸을 파는 떠돌이 인력이 아니라 인류의 삶을 지속가능케 할 건강하고 탁월한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

중세의 신성한 전당이었던 성전이 시장 바닥이 되면서 중세와 운명을 같이했듯, 근대의 신성한 전당인 대학도 시장 바닥이 되면 망하고 만다. 그래도 공공재로서 본분을 지키는 대학은 살아남을 것이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살아남을 한국의 대학은 몇이나 될까?

 

 

20121218

인터넷 세계지도, 누가 그리나?

1214일 두바이에서는 인터넷 관련 논의로 새 세계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인터넷 세상을 각 국가가 일정하게 규제하자는 움직임이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주최 국제전기통신세계회의(WCIT)에서 일었고, 144개 나라 중 89개국이 찬성표를 던졌다. 찬성을 주도하는 쪽은 중국과 러시아이며 미국을 위시한 24개국이 반대했고 나머지는 유보했다. 국제전기통신연합은 국제전화를 걸 때의 국제코드나 요금 등 국제표준을 정하는 기구로, 1865년 국제통신조합으로 시작해서 1932년 현재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고 1947년에 유엔 산하 기구가 되었다.

1988년 월드와이드웹(WWW)이 등장하기 전에 법규를 정한 뒤 이번에 개정안을 마련하면서 인터넷 관련 내용을 넣을지 말지를 놓고 회의 개막 전부터 신경전에 들어갔던 것이다. 사실상 이 개정안은 서명을 한 나라에서만 효력이 있는 것이지만 3분의 2에 육박하는 나라들이 이 법안을 지지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상 이 전선은 여러 차원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터넷이라는 기술 혁명에 성공한 것은 미국이고 그런 맥락에서 인터넷 영역은 미국 정부가 직접 관리해 왔다. 1990년대 후반 비영리 단체인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 등이 만들어졌고 인터넷 세계 인구가 폭증했지만 연방 정부와 기업과 단체 간의 유기적 결속을 통해 미국이 여전히 인터넷 영역을 통제해 왔다. 국경을 넘는 인터넷 트래픽에 공정한 요금을 부과하자거나 인터넷 성장 환경을 함께 조성하자는 아시아 지역의 제안은 미국의 일방적 통제에 대한 반발이다.

세계 언론에서는 이번 개정안을 둘러싼 분리선이 냉전 시대의 지도와 일치한다면서 디지털 냉전을 거론하는가 하면, 인터넷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시아에 살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며 인터넷의 탈서구/탈영어권화를 거론하고 있다.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인터넷은 늘 개방되어 있어야 하고(오픈 인터넷), 글로벌 인터넷 거버넌스는 점진적으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하지만, ‘후진국에서는 이제 더 이상 구글과 애플 등 미국형 기업과 단체들이 인터넷을 독점해서 부익부 빈익빈(디지털 디바이드) 현상을 악화시키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며 인터넷 자체를 열어갈 것(오프닝 인터넷)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국가들이 나섬으로써 인터넷 확산”(오프닝 인터넷)글로벌 공유지로서의 인터넷”(오픈 인터넷)을 닫히게 할 위험은 농후하지만, 이번 투표로 미국 주도의 패권주의가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렵다는 것도 확실해졌다. 국제전기통신연합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혁명적 기술/문화를 다루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있고, 특히 정부 대표들끼리만 모여 25억 세계 인구가 연결된 인터넷상의 미래를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지만 새로운 세계지도가 그려지는 시점임은 분명하다.

활자 매체의 혁명이 근대적 혁명을 이루었듯 인터넷 혁명은 탈근대적 글로벌 시대를 열어갈 전환의 매체다.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와 정보통신정책연구원, 한국인터넷진흥원 등 정부기관과 통신 3사로 대표단을 꾸린 방송통신위원회는 이 회의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서 그렇게 꾸렸던 것일까?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내년에는 서울에서 사이버스페이스 총회가 열리고 부산에서는 2014년 국제전기통신연합 총회가 열리게 되어 있다. 후진국과 선진국 상황을 두루 경험한 한국은 노력만 한다면 디지털 냉전의 문제를 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이들은 여전히 공유지의 비극을 말하지만 공유지 자체가 소멸된 사유지의 비극에 직면한 지금, 공유 가능한 망 중립성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한국은 그 창의적 공유지의 역할을 해낼 최적의 위치에 있으며 이는 한국이 실질적 선진국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조만간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시민사회, 이용자, 전문가 등 다양한 관련 주체들이 한데 모인 토론의 장이 활짝 열릴 것을 기대한다.

 

 

117일자

살림의 생명정치가 싹트는 밀양을 가다

지난 주말 경남 밀양에 다녀왔다. 765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농성장은 천혜의 아름다운 산세를 뽐내는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잘린 소나무 밑동 주변에는 주민들이 시공사 쪽 헬리콥터와 벌인 힘겨운 사투의 흔적이 남아 있고, 노란 깃발들이 따뜻한 볕을 쬐며 펄럭이고 있었다. “핵발전소를 더 짓지 않으면 만들지 않아도 될 초고압 송전탑” “밀양 송전탑-우린 반댈세” “펑펑 써대지 않고 아껴 쓴다면” “우리는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 한 마을 어귀의 우리 마을에 강도가 들었다!”라는 문구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이곳 주민들 중에는 은퇴자나 한창 일할 나이에 암이 걸려 여기서 평화로운 제2의 삶을 시작한 분도 적지 않았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이 소시민들은 이번 일로 그야말로 난데없는 습격을 받았고, 그래서 모두가 정치적 생태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자신을 위해, 그리고 후대를 위해 핵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심이 대단했다. 귀경길에 핵발전소 유치를 강행하려던 삼척시장의 주민소환이 투표율 25.9%로 무산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추방’ ‘배제’ ‘강제와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이 현장들이 바로 최근 인문사회학계의 핵심 주제가 되고 있는 죽임의 생명정치가 벌어지는 곳 아닌가! 핵발전소, 정말 더 짓는 것 외에 방안이 없을까?

핵산업은 사실상 1960년대에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것이 위험한 판도라의 상자라는 것에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유파동(오일쇼크)과 오존층 파괴로 환경문제가 대두되는 틈에 클린 에너지라는 이름으로 핵발전 사업은 다시 일어났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를 겪으면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긴 했지만 여전히 핵에너지 산업은 엄청난 홍보와 로비로 위기를 넘겼다. 일본 후쿠시마 참사 이후 다시 핵 없는 세상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다. 독일은 2022년까지 핵발전소 100% 폐쇄라는 대국민 협약을 대대적인 공개 티브이토론을 통해 이루어냈다. 핵발전이 초래할 본질적인 안전성 문제뿐 아니라 십만년을 보관해야 하는 폐기물 문제로 세대 간 형평성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스위스는 2034년까지 폐쇄를 결정했고 핀란드는 추가 건설 계획을 포기했다. 이탈리아도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전면 취소했다. 이들 국가는 모두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 나라들이다. 그 나라 국민들은 무한 성장을 전제로 한 근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인식하고, 돈은 덜 벌어도 행복하게 어우러져 살아갈 후기 근대적 삶으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국민 1인당 전기 소비량이 유럽과 일본보다 월등히 높은 한국은 왜 이렇게 잠잠할까?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기를 원한다면 본격적으로 재생에너지 장단기 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이미 원전 의존도가 너무 높아져 버렸다거나 원전 수출로 외화를 벌어야 한다는 등의 패배주의와 패권주의적 변명으로 이를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 일본도 지난달 재생에너지 생산과 에너지 유통 효율화 등을 두고 에너지 장기계획을 내놓았다. 중국은 이미 솔라패널 대량수출을 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풍력, 태양광과 태양열 에너지와 유통에 투자할 것이라고 한다.

당장 모든 것을 중단하자는 것이 아니다. 방향을 정하자는 것이며, 국민과 국가와 기업이 협약을 맺자는 말이다. 위험한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국민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에너지 문제를 풀 해법은 나와 있다. 에너지를 적게 쓰고 에너지원을 제대로 전환해 내면 된다. 솔직하고 진지하게 모여 앉으면 모두 잘 풀 수 있는 문제다. 밀양 농성장에서 만난 주민들은 활기에 차 있었다. 함께 싸우며 시대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의 생명공학을 간파하고 살림의 생명정치로 나아가는 길을 내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말한다. “고마 요대로 살고 싶다!” 그냥 이대로 살기 위해 결단을 할 때다. 지금 교수들 사이에 탈핵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지성의 상아탑이 아직 건재함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1016일자

조한 211.55.5.148 http://chohanlab.net/?document_srl=11167

특별학년제를 제안한다.

1999년 이해찬 교육부 장관은 하나만 잘 하면 대학간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교육개혁을 감행했다. 야간 자율학습이 폐지되고 학생들은 입시 훈련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조치는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그 재수 좋은 세대가 응시한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어느 때보다 어려웠고, 자녀를 사교육 시장에 맡긴 학부모들만 쾌거를 불렀다. 이 획기적 교육 개혁은 결국 교육을 사교육 시장에 위임하고 부모학부모로 만드는 데 한 몫을 했다. 한 공익광고에서 말하듯 부모는 멀리보라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 하는 존재다. 부모는 함께 가라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고 재촉한다. 부모는 꿈을 꾸라고 하고 학부모는 꿈을 꿀 시간을 주지 않는다. 점점 막강해지고 있는 입시공화국에서는 갓난쟁이 부모까지 투자하는 학부모로 만들어버렸다.

대통령 후보들은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기회 균등, 사교육 폐지수준의 논의들을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부모들이 부모가 되기로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어떤 교육개혁도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모들을 학교에 참여시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취지에서 학교 운영위원회 제도가 만들어졌지만 이 위원회도 학부모가 장악 해버리면서 학교장의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은 무기력하다. 그러나 학교안이 아나라 학교 밖을 교육공간화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사실상 이해찬 장관의 획기적 시도가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은 당시 학교 밖으로 나간 아이들이 갈 곳이 마땅히 없었다는 것이었다.

후기 근대 저성장, 위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은 입시에 성공하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사회를 탐구하며 자활의 능력을 키워야 하는 존재이다. 이런 차원에서 아이들에게는 삶에 밀착된 학습의 장이 필요하다. 아일랜드는 15세가 되는 고등학교 1학년을 특별학년으로 정해서 1년 동안 학교를 안가는 획기적 제도를 실시 했다. 학생들이 사회 속에서 다양한 일을 해보면서 스스로 진로를 찾아가게 하려는 정책이었다. 이 제도의 도입에 대해 학부모들의 반대는 거셌지만 국가는 이 제도를 강하게 밀고 나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제도를 아일랜드 전역에서 시행되는데는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나는 교육개혁에 관한 한 별 방안을 내지 못하고 있는 대통령 후보들에게 10-15- 20 안식년제를 제안한다. 아일랜드에서 했던 15세 특별 학년제와 함께 10세 유학제와 20세 공익제도가 그것이다. 이를 실시한다면 학교는 열릴 수밖에 없고, 학부모는 부모가 될 기회를 얻을 것이다. 10세 유학제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시행되고 있는 산촌유학에서 모델을 찾을 수 있다. 5학년 때 집을 떠나 농촌 마을학교에서 또래들과 1년간 지내면서 자립과 상호 돌봄의 감각을 키워가게 된다. 농촌의 아이들은 역으로 도시에서 일년을 보내면 될 것이다. 이는 가족 대 가족의 교류이면서 학교와 마을간의 교류일 것이다. 20세 공익제도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20세 청년들이 자기 동네와 나라와 세계를 구하는 일년을 보내는 제도를 말한다. 중국에서 넘어 오는 황사 현상을 20세 아시아 청년들이 함께 모여 풀어간다면 어떨까? 20세 청년들이 자신 세대가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풀어가는데 공헌을 하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은 부쩍 성장할 것이다. 점점 어려지다 못해 이제는 초등학교 2학년 수준의 행태를 보이는 초합리적 바보대학생들을 만나다보면 갈수록 획기적인 교육 제도의 변화를 필요성을 절감한다.

제대로 부모가 될 수 있도록 노동시간을 줄이고 현재의 성과 없는 성과주의사회를 바꾸어내는 것. 학교를 인간적인 규모인 120명 이내 규모로 나누고 교사 회의가 다시 활성화되는 것, 부모들이 마을 안에 다양한 학습공간들을 직접 만들어가는 것을 적극 지원하는 것, 이런 차원의 변화가 필요하다. 교육이 다시 희망이 되고 학교가 다시 배움과 성장이 가능한 우정과 환대의 장소로 되살아나기 위해 학부모는 가고 부모들이 와야 한다. 2012년 대통령 교육 정책은 적어도 이런 수준에서의 정책 언어로 상상과 실천의 장을 열어야 할 것이다.

 

815일자

블록 어택에 맞선 도시 마을의 산들바람

집은 살기 위한 곳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시대를 말한다. 지금 서울 토탈미술관에 가면 서울을 낯설게 볼 수 있는 전시회를 만날 수 있다. 전시장에서는 수직의 뼈대 안에 다양한 모습의 집들이 위로 포개져 올라가는 특이한 구조물을 보게 된다. 이 전시는 네덜란드 건축가 그룹(MVRDV)과 글로벌 싱크탱크 와이팩토리(The Why Factory)3년간의 아시아 도시 조사를 끝낸 뒤 준비한 아시아 순회전이다.

이 전시회에서 작가들은 블록 어택’(아파트나 초고층 건물 등 블록의 공격), 그리고 버티컬 빌리지’(수직 마을)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전시의 디렉터 위니 마스는 동아시아 지역 조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은 주거공간이 주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 즉 공간적 풍부함과 사회적 다양성 같은 것을 담아내지 못한 채 재산 증식의 수단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었다블록들에 의해 포위된 현실을 블록 어택이라 불렀다. 도시들이 삽시간에 대량생산된 주거양식의 침략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는 홍콩과 싱가포르, 그리고 서울은 이미 블록들이 마을을 거의 휩쓸어버린 상태이고, 베이징과 상하이는 블록들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는 단계라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서울이 130만 아파트 단위를 기록하며 가장 강력한 블록 어택을 받은 도시이다. 이들은 고층 건물이 계속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면 그나마 주민들의 다양한 삶의 욕구를 담아내는 수직 마을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건축 공법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제안이다. 그러나 살고 싶은 집과 마을에 대한 그림을 가진 주민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걱정이 된다. 게다가 이것은 또다른 토건사업이 될 우려가 있지 않은가? 나는 이들이 수직 마을이라는 발상을 통해 진심으로 하려는 말은 사람 사는 주거공간, 곧 마을을 되찾자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마을은 농경적 마을이 아니라 근대 초기부터 만들어졌던 도시 마을이다. 철근콘크리트의 고층 주거타워들이 들어서기 전에 존재했던 온기 있는 동네, 삶의 지혜가 묻어 있는 공동체적 삶의 그릇 같은 장소 말이다.

편리하고 평등한 주거를 외쳐온 서울은 지난 10여년 동안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블록 어택을 당한 도시의 표본이다. 재개발의 물결 속에서 서울은 물리적, 문화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엄밀하게 말하면 공격을 당했다기보다 정부와 시장과 주민이 합세해서 닥치고 경제!”를 외치면서 삶의 터전을 팔아넘겼다. 다양성이 포용되는 활기차고 친밀한 지역사회를 건강한 커뮤니티라고 본다면 서울은 그런 커뮤니티를 꿈꾸지 않은 지 오래다. 서울은 친척도, 이웃도, 때론 가족도 없는, ‘한 몸관리하기에 바쁜 무연의 개인들이 분주하게 밥벌이를 하면서 살아가는 공간일 뿐이다.

이런 서울에 다행히 마을 만들기 바람이 불고 있다. 사업성과 수익성의 기준으로 계획한 도시건설의 파괴력을 간파한 시민들이 도심에서 마을 만들기를 통한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아이들이 뛰노는 골목, 항상 열려 있던 동네 미장원의 수다, 형들과 어울릴 수 있는 만홧가게와 헌책방, 흥겨운 마을 주막과 진지하게 마을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들의 사랑방을 기억한다. 개인성과 집단성이 상치되지 않는 삶, 돈이 전부가 아닌 삶, 품앗이와 단골의 개념이 살아 있는 동네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 공동육아와 어린이 도서관, 녹색 도시 등을 주제로 새로운 도시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롭다며 도시로 간 이주민 2, 3세대는 이제 도시의 공기는 정겹다면서 도시 안에 마을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이 신선한 도시 마을 만들기 바람을 서울시도 전격 지원하겠다고 한다. 이 바람이 아시아에 부는 블록 어택의 광기도 잠재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자, 천천히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둘러보자. 버티컬 빌리지 전시회는 107일까지이니 전시장을 둘러보는 것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725일자

보이지 않는 가슴되살려낼 육아정책

내겐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천사와 같은 친구가 하나 있다. 세살배기 아들을 둔 그가 최근 편지를 보냈다. “선생님, 저희처럼 소득이 낮은 가정은 요즘엔 보육료 전액 지원해 준답니다. 저도 요즘 아이를 종일반에 맡기고 일 나가는걸요. 어린이집 환경은 아주 열악하고요. 허나 아이를 맡길 방법이 달리 없어서 찍소리 못하고 보내지요. 또 정부에서 주는 혜택 중에 인지발달향상 서비스라는 바우처가 있어요. 10개월 동안 국가에서 2만천원 지원해주고 본인부담은 2만원이에요. 우리나라 유수의 학습지 빨간펜, 씽크빅, 구몬 등에서 골라 신청하면 집으로 학습지 선생님이 오세요. 그런데 그분들이 무슨 실적이랑 연관이 있나 봐요. 너무 급하게 나가시고 교재도 별 내용 없구요. 결국엔 이 와중에 학습지 회사 배만 불려줬구나 한숨이 나와요. 그 예산을 좀더 잘 쓰면 좋을 텐데, 이런 건 엄마들과 의논하고 하면 안 되나 싶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아이, 낳으십시오. 제가 키워드리겠습니다라고 환하게 웃으며 말하던 텔레비전 속 장면을 기억한다. 한국은 여전히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고,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계속 기발한 출산장려책을 내놓고 있다. 출산장려금, 시간제 영유아실, 육아정보센터, 영유아 플라자, 가정보육사, 산모도우미, 경력단절여성 등 생소한 단어들도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이 덕에 여성들 직장도 늘었다. 그러나 군사작전을 펼치듯 만든 정책의 효과는 의심스럽다. 가정보육사가 우는 아기를 죽어라, 죽어라하며 마구 흔들어대는 장면이 폐쇄회로 화면에 잡혀 뉴스거리가 되었다. 나라에서 하니까 당연히 믿고 맡겼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부모는 땅을 쳤다. 며칠 전 이웃집 애엄마가 8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동네 유아정보센터에 갔다가 그 공간은 만 한살 반 이상이 쓸 수 있는 장난감들이 구비되어 있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했다. 보호자가 데리고 가서 놀겠다는데 빈 공간을 두고 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지 참 이해할 수 없다.

나의 베를린 천사가 지적했듯 육아 지원이 결국 시장의 배만 불리거나 보육계 직장을 늘리는 효과에 그칠까 걱정된다. 아기는 사랑과 정성을 먹고 자란다. 육아는 부담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경험이다. 그런 면에서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는 엄마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그것은 호르몬 문제라고 하지만 실은 엄마가 행복할 수 없는 조건 때문이다. 돈이 매개되지 않은 호혜의 관계망 안에서 아기는 자라야 한다. 그런데 홀로 아기를 키워야 하는 엄마들이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사회에서 뒤처질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젖을 먹이면서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게 된다고 한다. 사랑의 눈길을 맞추고 느긋하게 아기에게 젖을 먹일 여유가 없는 것이다.

오랜 기다림의 임신, 출산의 고통과 환희, 아기와의 비언어적 소통, 지속적인 관찰 학습을 통해 엄마는 지혜롭고 자상한 인간으로 성숙해진다. 바로 그 성숙한 모성적 소통과 경영능력이 지금껏 돌봄 결핍의 시장 사회를 받쳐준 버팀목이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주도하는 시장은 보이지 않는 가슴/돌봄의 영역이 건재했기에 돌아가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들이 우울해지고 불안해졌다. ‘보이지 않는 가슴의 세상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육아를 즐거운 경험으로 되살리는 일, 불가능할까? 삶을 보는 시각을 바꾸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엄마들이 놀이터와 동네 사랑방에 모여 아기를 키우는 일과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그리고 자신들의 경험과 활동을 선배 어머니들과 함께 마을기업이나 사회적 기업으로 영글어가도록 하면 된다. 다시 직장에 다니고자 하는 어머니들에게는 육아 경험을 경력으로 인정하여 일터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게 하면 된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는 돌봄과 상생의 감각을 가진 아줌마들을 공채해서 육아정책특별반을 만들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모성 경험을 제대로 살려내는 국가만이 후기 근대의 복합적 위기를 슬기롭게 넘길 수 있다.

 

 

74일자

유쾌한 청춘들의 삽질

지난주 아주 유쾌한 행사가 있었다. 행사 제목은 삽질의 레이스’. 2011년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이 지원한 청년 등 사회적 기업가 육성사업참가자들끼리 실패 사례를 나누는 자리였다. 한 참가자는 아시아 소셜벤처 대회 실패, 소셜벤처 경연대회 실패, 세상 콘테스트 실패, 디자인 공모전 실패, 마케팅 공모전 2번 실패, 창업 관련 정부지원 사업 2건 실패, 캐릭터 지원사업 실패, 10월에 팀원 1명 퇴사, 12월에 팀원 1명 퇴사, 5월에 팀원 1명 퇴사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축제 관련 일을 했던 팀의 대표는 춤추면 미친 건 줄 앎 무계획적으로 떠나면 살아갈 의지가 없거나 미친 건 줄 앎 성공한 사람(일명 멘토)이 아닌 사람이 스스로의 삶을 정의 내리고 표현하면 미친 건 줄 앎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미친 건 줄 앎. 바로 이런 상황이기에 자기 사업은 무수한 삽질로 끝났다고 했다.

삽질은 쓸데없는 짓을 말한다. 위키백과에서는 용례로 군대에서 상급자들이 졸병에게 규율을 세우려는 의도로 삽질을 하게 했고, 공사판에서 중장비를 쓰면 될 것을 돈을 아끼려고 인부들에게 삽질을 시킨 것을 들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미처 자동화하지 못한 수작업을 반복적으로 하는 일도 삽질에 속할 것이다. 사실상 최단 코스로 스펙을 쌓아 안정된 직장에 취업해야 하는 경주마들에게 삽질은 금물이다. 자칭 루저또는 폐인들도 실은 삽질을 하지 않으려고 숨어버린 사람들이다. 숨어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아예 아무 일도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비 사회적 기업가들의 삽질 나눔 자리는 아주 새로운 의미를 지닌 자리이다.

이 행사에 삽질의 레이스라는 이름을 붙인 기획자 양기민씨는 행사를 통해 청년들이 제대로 실패하는 것과 그 경험을 나누는 과정의 중요성을 알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동시에 청년들에게 실패해도 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실패도 못하게 하는 제도상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더 이상 성공이라고 부를 것도 없어진 성장의 한계상황에서 삽질은 청년들의 숙명이자 미학이라고 하면서 다수의 청년들이 과장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삽질조차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했다.

실패 사례 행사를 보면서 나는 2007년 사회적 기업 육성법 제정으로 시작된 사회적 기업 정책이 이제 성과를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간 협동 경제에 대한 개념화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가시적 효과를 요구하는 제도 안에서 이 제도의 수혜자 청년들은 그야말로 헛발질만 했다. 청년들은 난데없이 영수증이나 챙기고 무수한 서류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려 멘붕에 빠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 경험을 공개적으로 나누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삽질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회적 기업에서 말하는 가치와 시장에서 말하는 수익창출의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하는 일이 기존 기업계의 복제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삶의 바탕이 될 새로운 사회원리를 만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실패와 성공이라는 강박에서 풀려나 용기있게 삶을 상상하고 실험하며 서로로부터 배우는 변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사회적 기업계는 앞으로 이런 실패로부터 배우는 자리만 잘 마련하면 획기적인 성장을 할 것이다. 그간 사회적 기업 일을 맡아 하면서 생색내기, 나눠먹기, 중복 수혜, 정부의존 부담 인력의 양산 등의 비난을 받아온 공무원들도 실패 사례를 통해 배우는 자리에 함께한다면 그런 문제도 쉽게 해결해낼 수 있을 것이다. 현 사회의 위기는 기존의 정치경제학으로 풀릴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묻는 생명-정치 경제학으로 풀어낼 일이다. 재미와 보람과 비전을 가진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청년들의 삽질이 실은 더욱 허무한 헛발질들로 가득한 먹튀(먹고 튀는) 시장사회를 변화시켜낼 것이다. 그 무엇보다 동료들과 삶을 일구어낼 거점을 마련하지 않고서 누군들 이 풍진 세상을 살아낼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