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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애 벤야민과 노신

johancafe 2010.05.14 13:23 조회수 : 3392

중어중문학과

이선애







역사(逆寫)와 정사(正寫)를 오가는 ‘일방통행로’





들어가며: 이 쪽글이 어떤 모양새로 나올지 자신이 없다. 벤야민이 나를 뒤죽박죽 혼란스럽게 만들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른다. 김영옥 교수님 강의는 더 그러했다. 혹시 내가 이방인이 되었나?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후~ 나름대로 벤야민의 계단을 해부해본다.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사유의 길을 독자적으로 뚫고 나갔다는 벤야민의 뇌를 얄팍한 내 지식으로 해부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말장난 같은 언어와 역사인지 정사인지 상황판단을 알 길 없는 제목과 내용의 격리감, 시인 같으면서도 예리한 철학가, 비판가 같은 그의 ‘삐어난’ 문자의 세상으로 들어가 본다.



음악가로 되었다가 건축가로 되기도 하고, 방직공이 되어 글을 짜기도 하는 벤야민의 산문 속 계단으로 주의 깊게 살펴본다. 즉, 말[이야기]은 생각을 정복하나, 문자[글쓰기]는 생각을 지배한다는 것, 단 한 줄이라도 글을 쓰지 않고 보내는 날이 없도록 할 것, 저녁부터 꼬박 다음 날이 밝을 때까지 매달려보지 않은 어떤 글도 결코 완벽하다고 간주하지 말 것, 작품의 결말은 평상시에 일하던 방에서 쓰지 말 것, 거기서는 그렇게 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

(일방통행로, 조형준 옮김 p67) 이러한 무수한 주의(注意) 속으로 조심스레 다가간다.



산문을 읽으면서 벤야민은 20세기를 살았던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대변인 같은 기분이다. 예를 들면 ‘최근에는 누구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만 몰두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도 그렇고, ‘특히 아동용의 무언가를 만들 생각이라면 온갖 요구 사항과 도구가 필요한 어른들의 활동 방식이 그러한 세계 속에 끼어들게 하기 보다는…’ 등의 충고는 스펙 쌓기에 열중하는 우리의 모습과 문제투성이인 교육의 허점을 정통한 대안 같다.



게다가 ‘친밀한 인간관계는 강력한 침투력을 가진 투명함에 의해 통과당하게 되면 거의 존속할 수가 없다.’는 것은 서로가 속물이 되어 냉소만 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이 아니라 등가교환을 원칙으로 하는 ‘연인’들 속에서 ‘소박한 신뢰, 차분함, 그리고 건전함’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는 바로 현재가 아닌가?



즉 ‘사물들에서 온기가 사라져가고 있다.’ 이 말은 요즘 더 심각한 상태가 아닌가 싶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도움도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말은 아주 익숙해진 엄기호 선생님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는 문장과 자연스레 연결되고 있다.



‘최선의 양심’에 따라 발언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 이제 격리 상태에서 ‘최선의 지식에 따라’ 문서에 기입할 수 있는 ‘까다로운 숙녀 분을 위한 미용사’는 문명의 시대라고 자처하는 지금 더욱 필요한 같다.



또한 사회가 곤궁과 탐욕 때문에 퇴폐해지고 있다는 것과 자연의 은혜를 강탈하듯이 하는 현상을 벤야민은 ‘가격이 유리할 때 내다 팔기 위해 충분히 익지도 않은 과일을 따는’ 것으로 형상화하였다.



大著의 원리와 두꺼운 책의 집필 요령은 또 마치 현대인들의 질질 끌면서, 애매하게 아무도 모르는 용어를 도입하는 식과 동일한 논거를 하나하나 따로따로 반론하는 식의 학문적 기풍을 逆寫하고 있지 않나 싶다. 大著의 요령을 말하는 저자의 한줄 산문, 짤막하고 재치 있는 글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e북과 전자도서로 손바닥 안에 넣는 시대와 언제 책을 카탈로그처럼 쓰게 될까 하는 20세기가 닮아가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진다.



벤야민의 시 같은 산문, 말장난 같은 문장 속에는 수채화가 숨어있고, 영화 필름이 돌고 있는 느낌이다. 이별을 고하는 사람과 이별을 전해 듣는 사람이 누가 더 쉽게 사랑받을까? 벤야민은 멀어져가는 자, 배 또는 기차의 창문에서 이쪽을 향해 흔드는, 덧없이 사라지는 손수건을 상기시킨다. 살다보면 누군가를 보내기 마련이다. 벤야민에게 클로즈업된 모습이 보내는 자인지 아님 떠나는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별과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주는 듯하다. 이별을 고하는 사람은 추억의 ‘일방통행로’를 잊기 때문에 가슴이 덜 아플 테고, 이별을 선고받은 자는 그 추억 속에서 가물가물해지는 여운 때문에 집요한 사랑을 하지 않을까 싶다.



사유의 유격전을 벌인 벤야민의 글을 읽으면서 중국의 문호 노신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잡문이란 형식으로 뒤집기와 은유, 풍자의 수법을 활용한 납함, 공을기, 아Q전정… 예술가의 언어로 비평을 하고 또 그 시대에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사유의 전환을 글로 逆寫하거나 正寫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와 정사에 따라 보는 이의 뒤집기와 바로보기란 품이 따른다. 하지만 그들이 이러한 수법으로 벌인 사유의 유격전을, 그 시대를 위한 문학, 교육, 사회, 환경, 도덕, 사랑… 까지 포함한 모든 분야에 대한 진맥을 얼마나 보아낼 수 있을까?



나오며: 근대의 장례식장에 왜 벤야민을 등장시켰는지? 왜 벤야민의 난해하기도 하고 단순해 보이기도 하는 산문을 통해 장례식을 치르는데 도움을 받으려 했는지? ‘일방통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 역사와 정사가 엇갈린 이 길에 20세기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벤야민의 어떤 메시지가 있을까?

 

2010-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