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아시아의 시작? 또는 또다른 민족주의
From: 권 태 훈
5th contributionDate: 2011/8/17
Subject: FW: 중국과 일본에서 보는 이순신 장군!
중국과 일본에서 보는 이순신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 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1990년~1998년...약 8년에 걸쳐서
이 책은 크게
- 이순신 장군 생애를 다룬 5권.(이순신은 누구인가?
- 일본 장수가 본 이순신 2권- 명나라가 본
- 1500~1600년 이 시대의 조선과일본 그리고
- 이순신과 임진왜란 5권.- 토요토미 대 이순신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 내용이 25권.
그리고 역사적 근거로 가설을 붙인 내용이 7권으로
이 중에서 좀 특이한 것은 일본 장수가 본 이순신
이순신 장군께서 난중일기를 남기시듯..
일본 장수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들이
우리가 잘 아는 와키자카와 도도 등...
특히 이 두 사람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이
아마 같은 수군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1.일본의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 장군 탄신일에 한국을
와키자카가 이순신 장군을 알게 된 것은 한산대첩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성격이 좀 많이 다르다고
물론 한국에서 바라보는 것과 일본에서 바라 보는 건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는데 명예를
차를 좋아했으며,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전적은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 설은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 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2천의 군사로 5만 이상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의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 장군에 대한 본인의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가 쓴 내용에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적장이지만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2. 명의 사신이 본 이순신
그리고 "운덕 "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은 후일 이순신
'하루는 어두운 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 바람이 칼날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영감 손에는 한권의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중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살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 동안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보면 어찌
내가 본 저 두사람은 조선 장수대 왜군이 아닌 한
통제사 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3.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조선 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휘권을 주었으나 그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은 바로
황제폐하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
4.책의 저자인 쟝웨이링 교수가 본 이순신
1990년 3월 하북에서 제1차 중.일 합동 연구회(
이순신?.. 내가 알고있는 이순신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사실 이 연구회엔 나의 절친한 동료학자의 권유로
사실 조선의 역사에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터라,
나는 그저 일본교수진들의 말만 들을 뿐.....
이러한 내게 작으나마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 가득 보여지는게 있었으니 그것은
저런 배가 400여년전에 있었단 말인가... (본것은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그 시각의 차이는
더군다나 그 차이는 중일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이 아닌 이순신이라는 한
일본 교수진들은 이 연구회를 이순신 이라고 붙엿다.
즉.. 임진왜란 자체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이는 우리 중국 어느 누구에게도 연구해보지 않은
나는 그 학술회가 끝나는데로 일본교수의 도움으로
7권은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관한 책인데. 나는 그
책을 손에서 놓은뒤 내게 있어서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이순신....
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지금까지 우리 중국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조선의 왕 선조는 그들을 막지못하고 의주로 몽진을
그로 인해 명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지금의 청에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
그런데.. 이날 열린 학술회에선 이 모든 것을
바로 이순신이라는 이름으로...
5.장웨이링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거북선.
1997년 10월. 한번은 내게 북경대에서 초빙을
주제는 청나라의 멸망에 관해서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 온 거북선을 가지고
역사학자인 나도 이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 대해서
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이 거북선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었고
학생들은 각자의 생각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으며 모두
그래서 이번엔 다시 질문을 바꾸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영웅 중 청일전쟁 그 당시 누가
'항우. 제갈공명. 손자. 관우.'
나는 잠시 창너머를 바라보았고. 한참 동안이나 내가
나는 이에 만일 지금 또다시 중국이 청나라처럼 되었고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한번 학생들에게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대로 배다.
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이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400년전에 조선과 일본의
많은 학생들과 같이 참석한 많은 다른 교수들도 의아해
여기저기서 이순신이 누구냐고 서로 묻는 소리가 내
나는 여기서 간단히 임진왜란에 대해서 30분정도
그리고 내가 왜 이순신을 선택한지 아느냐고 물었으나
단지 어느 한 학생이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아닙니까?
나는 그 학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해주었다.
바로 해군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구할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가 망한건... 아편 탓도있고.. 황제탓도 있다.
조선 수군 장수 이순신은 5,000명도 안되는 군사와
당시 조선은 청국과 같은 처지였다.
당파싸움에 휩쌓여 있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되는.
그리고 그 승리의 안에는 바로 이 거북선 전투함이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들은 모두 육지에서 뛰어난
그것은 우리 중국역사에는 세계에 내놀만한 수군 장수가
우리 중국은 대륙국가였다..
하지만 대륙만큼이나 우리 중국은 바다가 넓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들며.. "교수님 그렇다면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 보라.. 스페인을 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 이였지만 바다를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년전에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할것이다.
바다로 바다로 눈을 떠야 할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 어느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나는 다시 한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순신이 위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 거북선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사실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 거북선은 나대용 이라는 사람이 만든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거북선을 생각하고
또한, 조선수군은 인진왜란 1년전만해도 허약한
그리고 나서도 1시간정도 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삶과
그 강의가 끝났을 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면서....내가 처음
** 쟝웨이린 교수는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1990년 이 학술회를 시작으로해서 연구하던 중
쟝웨이린 교수는 이 책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말을
역사학자란 후세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역사학자란 두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가지는 숨기는 것이다.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것 보다 그 역사를
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
또 한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진정한 위인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진전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나는 그 위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6.일본의 아리모토라는 역사가가 본 이순신
세계의 전쟁영웅은 피로 만들어진다.
전쟁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랙산더 대왕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그러했고,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 지는 모르 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분..
이순신 장군을 볼 때면 문득 그분이 떠오른다....
두 분 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 보다는 바로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
2000년전의 한 청년이 그래했듯이..
이순신 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 孝. 義.
그러고 보니 한국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장군"
7.장군님의 혁명과 죽음에 대한 논란
1996. 4월 이케다 하야토 교수의 [아시아 역사를
<혁명과 죽음> 이순신의 혁명..
우리들은 왜 이순신은 혁명을 하지않고 죽음을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았다.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으로부터의 의심과
먼저, 우린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12명의 학자 모두 이순신장군은
이순신 장군에겐 2만여명의 수군과 약 5천여명으로
총 3만 5천여명에 다다르고 이 군대에 대응할 조선의
이와 함께 이순신에겐 두가지의 또 다른 무기가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명나라의
명나라 군대 역시 이순신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명나라의 장수 유정은 바로 곧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
혁명 후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 수 있느냐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조선의 선조는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키자 바로 명에게
명나라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자신을 도와줄 군대가 올거라
뜻밖에도 명나라에서는 군대가 아닌 사신이 온다.
조선 조정으로가 아닌 명나라의 장수 유정에게...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의 왕 선조가 아닌 이순신
왜였을까?
이 역시 답은 간단하였다.
그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임진왜란(정유)으로 인하여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케(훗날 청)의 견제가 심해져
전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번 강력한 이순신
이에 명나라는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조선의 민심 역시 이순신에게 있는것을 알기에)
이것은 또한 명나라에게도 커다란 이득인 것이다..
힘없는 선조가 조선의 왕이 되기 보다는 강력한 군대를
명나라의 문록(文錄)을 보면 조선으로 건너간 명나라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그로하여금 북의 오랑케를 견제토 록 하소서..
이순신통제사는 능히 우리 명(明)의 후환을 없애
이에 명(明)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이순신으로 하여금
이는 이미 명나라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오라하라.
이미 각본은 짜여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혁명을 하든 안하든...
이미 명나라에서는 훗날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던
그런데.....
이순신이 혁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왜였을까?
중국역사 조선의역사..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 이와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는 반드시 쿠테타든 혁명이든
아니면 토사구팽이라도....
그런데 이순신은 쿠테타도 혁명도 토사구팽도 모두
이순신은 오직 죽음만을 선택 한 것이었다.
이순신 과연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내용에서는 명나라가 이순신장군을 끌어들여서 북의
우리들은 단순히 이순신 장군이 혁명을 이룩하면 조선이
물론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국제정세란 매우 이해관계가
이순신 장군은 어쩌면 그러한 모든것을 다 아셨는지도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키고 명나라가 장군을
낭떠러지에 몰린 조선 왕 선조와 조정대신 (이순신의
과연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혹시.. 이순신장군은 그러한 모든 과정까지도 생각하지
왜냐하면 이순신장군은 너무나도 치밀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드라마를 보고 흥분해서 가설을 내세우지만...
이순신장군은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고 내가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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