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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교정본 (미디어 시티서울)

조한 2014.09.17 22:44 조회수 : 3624

동트기 전의 어둠, 외롭지 않은 안티고네들

조한혜정

 

<웬 할머니 이야기?>

 

521일 박찬경 감독이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주제로 전시를 한다며 글 한 편 써보겠냐는 메일을 보내왔다. 최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둘러싼 국가 간 갈등이 폭력적 근대화 과정에서 ‘할머니의 자리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나게 하지 않느냐면서 할머니가 겪은 피해기도투쟁에 대해 자유롭게 써달라는 주문이었다. 청산되지 않는 냉전의 역사를 집요하게 분석해볼 필요도 있지만, 이 주문은 어쩐지 지루하지 않는가? 가장 억압된 존재를 상정하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듯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도 오랜만에 내 두 할머니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한다. 좀 다른 모습의 할머니’, 그리고 좀 다른 방식의 할머니이야기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여기서 외할머니는 구포 할머니’, 친할머니는 상주 할머니이다. 우리 집에서는 외가와 친가를 차별하지 않았다.

 

 

<구포 할머니>

 

내 외할머니 이정자 님은 1900년에 태어나셨고 구포 낙동강에서 큰 곡물상을 하던 천석꾼 이 참봉의 딸이었다. 나의 외외증조부가 되는 이 참봉은 양반 가문 출신이지만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누나들과 함께 자수성가한 경우라 한다. 당시 참봉이라는 벼슬/호칭은 요즘 박사 학위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아내는 두 딸만 낳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매사에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이 참봉은 두 딸을 아주 귀히 여기며 키웠던 것 같다. 활달하고 영특한 큰딸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기고만장한 여자로 성장했다. 내외관습이 남아 있던 때라 할머니는 집에서 서당 선생이나 일본 유학생들로부터 한문과 한글, 산수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동네 아이들이 가는 학교가 궁금해진 할머니는 학교에 보내달라고 아버지를 졸라 학교에 가게 되었다.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는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가니까 학생들이 다 사라지고 없어서 한참 찾다 보니 이 참봉의 딸이 학생들을 전부 데리고 자기 집에서 공부를 가르치고 있더라는 이야기다. 선생님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는지 그냥 놀고 싶어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나 많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것은 어릴 때나 나이 들어서나 변함없던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큰 이모 말로는 백정의 딸이 있는 것을 보고 학교를 그만 다녔다는데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사람 차별을 하지 않는 분이 구포 할머니인지라 사실 확인을 해보고 싶은 부분이다.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어릴 때 할머니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했던 편이지만 그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서 무슨 말을 누구에게 들은 것인지 가물가물하니 감안하고 들어주기 바란다.

 

구포 할머니는 열여덟 되던 해 동래에 사는 서울서 낙향한 한 씨 집안의 셋째 아들과 혼인의 연을 맺었다. 시아버지는 정교한 장식 조각이 달린 긴 담뱃대 공장을 하셨다고 한다. 시어머니인 현 씨 부인은 구한말 큰 벼슬을 하다가 나라꼴이 말이 아니어서 막 낙향한 집안이었다는데 내 추측으로 서울서 신문명을 일찍이 접한 개화 집안으로 역관이나 사신으로 외국에도 들락거린 집안이었던 것 같다. 더 이상 나라라고 볼 수 없는 구한말의 파국적 상황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낙향한 분들로 매우 합리적인 문화를 가진 집안이었던 듯하다. 담배공장 외증조 할아버지는 동아일보창간 때부터 신문을 보시고 그 신문들을 다 모아두셨다고 들었다. 또 이 분은 이참봉과 달리 군에서 참봉 벼슬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안 받았다고 어머니가 말해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구포 할아버지는 요즘 말하면 졸부 같은 분이어서 동래 사둔 댁에서는 그리 존경을 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 외할아버지의 부친인 담배공장 할아버지는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고 모두 신학문을 익혔다. 첫째는1900년 의사가 되라며 일본 유학을 보냈는데 의대를 졸업하는 해에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그는 집에 돌아오지 않고 중국으로 가버렸다. 중국 상해에서 개업하여 해방 때까지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하셨다. 둘째 형은 일본에서 공과대학을 나온 발명가로 일본과 모국을 오가며 한량처럼 사셨다고 한다. 셋째인 내 할아버지는 정이 많고 특히 어머니를 따른 아들이었다는데 서울 외가에서 기독교계 경신중학교를 다녔다. 넷째 아들은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취직해서 열심히 돈을 모아 바이올린을 사더니 바이올린에 미쳐 살았다고 한다. 나중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미국 유학까지 가셨는데 이 분은 <행복의 나라>를 쓴 대중음악가 한대수의 할아버지이시다. 다섯째 아들은 상과를 나와 평생 회계 보는 일을 하셨다.

 

내 외 할아버지가 구포의 부잣집 맏딸에게 장가를 든 것은 장인이 일본 유학을 보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고 실제 장인이 유학을 보내주었다. 데릴사위로 간 셈인데 계산이 빠른 장인은 영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사위가 점점 못 마땅해졌다. 비싼 유학비를 쓰기보다 사업을 잘하면 일본 유학생을 몇 명이라도 고용할 수 있는데 무슨 쓸데없는 공부냐면서 사위를 구포로 불러들여 곡물상을 차려주었다. 고지식한 샌님 스타일인 내 할아버지는 장인의 귀국 명령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심기가 뒤틀려서 자기 식대로 친구들에게 돈을 마구 빌려주고 비가 와도 곡식을 걷지도 않는 등 열심을 쏟지 않다가 결국 망하고 말았다. 술도 마시지 못하면서 음악을 아주 좋아하여 창을 들으러 기생집에 계속 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말괄량이 같은 구포 할머니는 중매쟁이로부터 신랑감이 두루마기 자락 하나 흩트리지 않고 걷는 참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덜컥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결혼 후 과묵한 남편이 답답해서 늘 가슴을 쳤다. 엄마의 어릴 적 기억에 따르면 구포 할머니는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담배도 피웠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저 멀리서 오면 모두가 담배 연기를 쫓아내느라 법석을 떨었다고 하였다.

 

혼인 후 답답하게 지내던 차에 구포 할머니는 호주에서 온 젊은 여자 선교사가 묵을 곳이 없다고 좀 묵게 해달라는 부탁에 기꺼이 집을 내주었고 친화력이 뛰어난 할머니와 선교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호기심이 많은 할머니는 그를 따라 종종 교회에 다니고 성경도 읽으셨다는데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다. 구체적 계기는 큰딸인 내 어머니 아래로 아들이 줄줄이 태어났는데 그 아들들이 모두 서너 살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이어 억장이 무너져 불공 들이는 것을 그만두고 개종을 해버리셨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할머니는 파란 눈의 미혼 선교사 와 사귀면서 여자가 꼭 결혼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여동생을 일본 여의전으로 유학을 보냈다. 여동생(이모할머니)은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언니가 떠밀어 보내니까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유학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충격에 입이 돌아가 버린 이모할머니는 다시 일본을 가지 않고 집에서 쉬다가 그 근처 정미소집으로 시집을 갔다. 어릴 때 기억으로 그 이모할머니네는 아주 높은 담벼락에 아름다운 꽃이 황홀하게 핀 대궐 같은 집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 관료쯤이 살던 집이었던 것 같다. 내 할머니는 큰딸인 나의 어머니에게도 개화한 시대를 살라고 일렀다. 할머니는 너는 한 남자를 섬길 필요 없다. 나라를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고 한다. 말수가 적은 어머니가 내게 이 말을 여러 번 한 것을 보면 이 말은 또한 어머니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었기도 한 것 같다. 어쨌든 이광수 소설의 애독자였던 어머니는 그의 변절에 분노하면서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 채영신처럼 농촌에서 계몽운동을 할 꿈을 키웠다. 어머니는 무의촌에서 의사가 될 생각이셨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통에 의대 행이 좌절되었지만 독신으로 어려운 이들을 도우면서 나라를 위해 살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전쟁 말기 미혼여성은 정신대로 끌려간다는 흉흉한 소문 속에서 1944년 일본 유학 중이던, 마르고 창백해서 오래 살 것 같지 않아 보이던 문학도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다시 구포 할머니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호주 선교사를 보면서 점점 더 인습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게 되면서 남편과 헤어져 살면 좋겠다는 마음을 키워갈 때?아직 나혜석 씨도 출현하지 않았던 시대라 할머니에게 헤어진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궁금하지만?샌님 남편이 드디어 사업을 말아먹었다. 의리가 있는 할머니는 남편이 제대로 살 수 있을 때까지는 같이 살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네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할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이주했다. 그때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평양에서 공부를 하던 동생의 주선으로 태안양행이라는 선교사들을 위한 백화점에 지배인으로 고용이 된 것인데 사업도 해보았고 영어도 잘하는 할아버지에게는 최적의 직업이었다. 그렇게 3년 일을 하다가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함께 신학공부를 하자고 제안하셨다고 한다. 기독교 계통인 중학교를 다녔고 사업이 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또한 선교사들의 생활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결정을 하게 되신 듯하다. 그래서 부부는 나란히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나중에 신사참배 거부로 퇴학을 당하는 바람에 어머니도 신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할머니는 매일 지각을 하는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이었고, 어머니는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가장 어린 학생이었다고 한다.

 

구포 할머니의 무용담은 화려하다. 젊을 때는 국채보상운동을 위해 강연을 다니셨다고 하는데 강연 갈 때는 바느질 솜씨 좋고 신분 의식이 강한 증조할머니가 딸이 무명옷을 입는 것이 못마땅하여 안감을 비단으로 지어 입혔다고 한다. 할머니는 누구든 보면 이름을 부르고 내외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면장이 된 동창을 보고도 크게 이름을 부르고 일이 있으면 어디든 가셨다고 한다. 평양에 있을 때 조선 사람을 무시하는 선교사의 행태에 기분이 상한 할머니는 그에게 당장 당신 나라로 가라. 사랑하러 왔으면 사랑을 하고 그러지 않으려면 이곳에 있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는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 큰 사위인 내 아버지를 끔찍이 예뻐했지만 어머니에게 잘 못 하면 헤어지라고 난리를 치는 장모였기도 하다. 어릴 적에 할머니를 따라 동래 온천장에 온 냉탕을 하러 자주 갔었는데 할머니는 물을 그냥 틀어놓는 사람을 보면 혼쭐을 내셨다. 길다가 휴지를 버리거나 소변을 보는 남자도 마찬가지로 혼이 났다. 친척들은 말 잘하고 화통한 할머니를 보면서 박순천 씨처럼 국회의원이 돼야 했다는 말들을 종종 했었다. 할머니는 매일 일기를 썼는데 31일에는 3?1절 만세를 부른 이들 이름을 일일이 쓰면서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나라 사랑을 확인하셨다. 어머니는 종종 내게 간이 작은 것을 빼면 내가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백화점 지배인 일을 그만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1941년 즈음이었다. 목사가 된 할아버지는 설교가 아닌 다른 일로 하나님의 나랏일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던 중 내 자녀들을 돌보라는 말씀을 듣고 부산부두에 서성거리는 고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웃 사랑(애린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일제 말기 탄압이 심해졌고 경찰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감옥에서 옷고름으로 목을 맬 수 있기에 고름 있는 옷을 못 입게 했다고 하는데, 할머니는 감옥에 갈 생각으로 옷고름이 없는 한복을 입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런데 순사가 어느 날 가만히 두 분을 불러서 누군가가 고아를 돌봐야 할 테니 잡아갈 수가 없다면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이 참봉 부친을 설득해서 구포의 산과 논밭을 받아내어서 가족과 고아들이 모두 이주를 하게 된다. 할머니의 부친은 부스럼 덩어리이거나 계속 설사를 하는 거지 아이들을 돌보는 딸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아무도 못 말리는 딸이 땅을 내놓으라고 마당에서 구르기까지 해서달라는 대로 다 주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몇 십 명의 고아와 과부들의 애린 공동체는 열심히 밭을 개간해서 농사를 지었지만 부족한 경비를 따로 마련해야 했다. 기도만 하는 할아버지에 비해 할머니는 생활력이 있어서 아주머니들과 수를 놓은 손수건을 전국의 교회나 친척들에게 보내서 후원금을 받아오게 하였다고 한다. 그 역할은 붙임성 높은 중간 외삼촌의 역할이었다. 할머니는 발이 워낙 넓어서 식량이 다 떨어질 만하면 어디선가 식량이 들어오곤 했다고 한다. 전쟁 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숨어 다니던 많은 분이 이 구포의 아지트에 몸을 숨기고 지냈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농장을 운영하고 큰아들에게 목욕탕을 경영하게 해서 공동체의 생활비를 충당했다. 할머니는 더 이상 성격이 맞지 않는 남편과 이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두 분은 동행하는 파트너로서 상호 존중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사셨다. 큰딸인 내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맞지 않는 두 분 사이에서 중재인 역할을 하느라 늘 신경을 썼어야 했지만 말이다.

 

육이오가 터지고 고아들이 늘어서 할아버지는 부산에서, 할머니는 구포에서 백여 명의 고아들을 돌보아야 했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나는 귀신을 보는 아이, 밤마다 불났다고 소리치는 아이들과 같이 지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꼭 새벽기도에 참여하게 했다. ‘큰방에 살던 우리에게는 강요하지 않으셔서 철이 들었을 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랬더니 부모의 사랑을 못 받는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을 하셨다. 말이 적고 인자한 할아버지는 교사나 보모들에게는 매우 무서운 분이지만 절대 아이들을 때리거나 혼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고루 나누어주는 조용한 분이었다. 그러나 성질이 급한 할머니는 아이들이 잘 못 하면 때리기도 하고 혼쭐을 내는 스타일이셨다. 애린원 50주년, 60주년 등 홈커밍 자리에 가서 알게 된 것이지만 인자한 할아버지보다 불같은 할머니의 사랑에 대한 기억들을 간직한 이들이 더 많았다.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 중 하나는 자기 아이와 남의 아이를 차별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당신 아이를 여섯이나 낳았고 원래 좀 약골인 데다 다혈질이어서 병이 많았다. 늘 몸이 쑤신다고 해서 나도 많이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허리를 밟아드리기도 했다. 할머니는 1963년 어느 봄날, 치과에 가서 이를 빼고 목욕을 하고 동네 문상을 다녀온 후 세상을 떠나셨다. 환갑을 갓 넘긴 나이. 내가 중학교 때이다.

 

 

<상주 할머니>

 

이쯤 해서 나의 친할머니인 상주 할머니가 구포 할머니와 만나게 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상주 할머니 강봉우 님은 양반을 몹시 따지는 재령 강씨 종손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마을 안에 사는 친척이 별로 없지만 토지는 좀 있는 집안에 시집을 간 할머니는 아들 하나 딸 셋을 낳고 한창 행복했는데 느닷없이 남편을 잃었다. 장티푸스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스물여덟 나이에 홀로 남겨지니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할머니는 매달 돌아오는 제사에 네 명의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할머니에게는 현명한 큰 오빠가 있었는데 한학만이 아니라 주역동의보감등에도 능통한 분으로 인근 환자들을 고쳐주는 명의이기도 했다. 큰 오빠는 영리한 동생이 과부로서 차별을 당하며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고심을 하다가 대구에 가서 목사님을 한 분 모셔왔다. 신문명을 받아들임으로 유교적 가부장제가 과부에게 부여한 질곡에서부터 여동생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세상을 꿰뚫어보는 유학자 오빠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너른 집터 한쪽에 교회를 지었다. 이로써 그 많은 제사를 내려놓게 되었고 그 돈으로 자식 교육을 시킬 수 있게 되었다. 개종한 이후 상주 할머니는 아들을 대구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내고 일본 유학도 보냈다. 큰 딸은 평양의 신학교로 보내고 둘째는 대구 신명여고를 보내는 등 신교육을 시켰다. 흥미롭게도 그 현명한 종손 오라버니는 자기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자식이 너무 많아서였는지 지금도 내게는 궁금한 부분이다. 영리하고 과단성 있는 상주 할머니는 동네 과부들을 다 교회에 다니게 했고 그래서 많은 동료들이 생겼다.

 

상주 할머니의 큰딸이자 나의 큰 고모는 나의 어머니와 평양신학교 동창이다. 학교를 졸업한 어머니는 친구 집이자 교회인 상주에 종종 가서 목회를 돕기도 했는데 그때 할머니의 오빠인 집안 어른은 나의 어머니를 보고 하늘을 이고 있는 귀인이라며 극찬을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시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쌀 한 가마를 가지고 구포를 찾아왔고 그 이후 두 할머니는 사돈이 되셨다. 사돈이 된 두 할머니는 금방 절친이 되었고,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전통을 무시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사는 동지가 되었다. 상주 할머니가 구포 할머니의 꼬임에 빠져 파마를 하셨던 일로 가족들이 두고두고 놀리던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두 분은 팔도강산 유람도 가셨고, 수영복을 입고 모래찜질도 하셨다. 사실 종갓집 자제로 자란 상주 할머니는 한문으로 된 긴 문자를 자주 쓰셨는데 내게는 그것이 상대가 양반인지 아닌지를 떠보는 게임같이 보였다. 그리고 철이 들었을 때 손주들에게도 무슨 성씨는 상놈이니 혼인을 하면 안 된다며 기억해두라는 식으로 말하셨는데 나는 그런 말이 마음에 거슬렸다. 구포 할머니는 한문을 잘 아는데도 문자 따위는 안 쓰는데 왜 남의 기를 죽이고 사람 차별을 하나 싶어서였다. 사실 내게는 곁에서 일상을 공유한 구포 할머니가 할머니이지 상주 할머니는 손님이셨는데 불쑥불쑥 드러내는 그분의 고질적 반상의식에 거부감이 났던 것이다. 할머니가 어려운 문자를 자주 쓰시지만 한문으로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나중에 더욱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이는 그냥 생각이 짧은 손녀의 판단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두 할머니의 우정을 모두가 부러워했다는 점일 것이다.

 

상주 할머니는 부산에 오면 사돈을 따라다니는 처지지만 상주에 가면 그 동네의 해결사이자 여왕이었다. 안동, 상주 지역에는 해방 전후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영향으로 많은 청년들이 빨간 물이 들었고 사상투쟁과 6. 25전쟁 전후로 많은 남자들이 죽어갔다. 내 아버지는 당신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사회주의 활동을 했을 것이고, 구포로 장가를 가지 않았다면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벌써 죽었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먹을 것은 없는데 매달 돌아오는 제사로 더욱 힘든 삶을 살던 과부들에게 상주 할머니는 든든한 구원의 손길이었다. 교회를 다니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고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 상부상조하면서 과부들은 마을에서 기를 펴고 살 수 있었다. 자식 교육에 집중하면서 희망을 갖고 말이다. 상주 할머니는 아픈 이들, 특히 정신이 이상하게 된 이들을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그들을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주고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고아들과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지낸 구포 할머니와는 달리 상주 할머니는 친척 남자들이 간첩과 빨갱이로 몰려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꼴을 다 봐야 했으며 어처구니없는 좌우대립 와중에 큰 사위와 둘째 딸도 잃었다. 그렇지만 과부들끼리 서로의 자식과 손주들을 보살펴주면서 교회가 달린 상주 집에서 사시다가 답답해지면 동지적 사돈이 있는 부산 아들네 집을 오가면서 상주 할머니는 과부로서의 서러움을 모르고 구순 장수하시고 돌아가셨다.

 

 

<내가 읽는 할머니들의 시간, 그리고 할머니가 된 나의 시간>

 

나의 두 분 할머니는 광기의 역사 한가운데를 사셨지만 간첩과 귀신들과는 좀 빗겨나 사셨던 것 같다. 좀 다른 초월적 질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특히 구포 할머니는 고아를 돌보면서 비혈연 유토피안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 같다. 어쩌면 두 할머니는 자신이 먼저 간첩이 되기도 하고 귀신이 되기도 하면서 남들을 헷갈리게 하면서 나름 즐겁게 사셨는지도 모르겠다. 구포 할머니 여동생이 집안 길흉을 보려고 점집에 갔을 때 언니 점도 좀 봐달라고 하니까 무당이 언니네 신이 너무 세서 볼 수가 없다고 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구포 할머니는 점쟁이들도 무서워했고 상주 할머니는 자신이 잡귀신을 쫓는 사람이었다. 원래 담이 크고 능력이 있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분들이 그 암울한 시대를 어렵다고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새벽의 시간으로 먼저 이동함으로써 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분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식민지 상황과 어둠의 질서를 낙후시키며 자신들끼리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갔던 것이다. “‘할머니는 권력에서 가장 먼 존재이자, ‘귀신과 간첩의 시대를 견디며 살아온 증인이다라는 이 전시회의 취지문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력을 너무 집중화시키고 있는 것 아닌가? 권력은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고 누가 누구에게 주고 또 받으면서 생성되는 것이다. 내 할머니들은 일제에도, 가부장제에도 권력을 일임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삶의 주인이었고 서로를 돌보면서 권력을 만들어갔다.

 

이 두 할머니의 이야기는 근현대 동아시아의 여성의 시간을 전형적으로 재현하고 있지 않다. 고독한 유령, 한 맺힌 말을 품고 있는 유령의 삶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일 지배세력에 빌붙었던 시간을 재현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은 주어진 역사 안에서 좀 다른 시간대를 살았고 후손에게 기성 질서에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갔다. 그분들은 동트기 전 어둠을 어둡지 않게 살아낸 돌연변이였던 것 같다. 할머니들이 살았던 백 년 전처럼 어둠이 짙게 깔린 지금,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새벽을 기다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형성이 아니라 돌연변이에 대한 상상과 변신의 감각이 아닐까? 여전히 현 체제의 본질을 캐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한다면 가장 억울하고 희생된 자를 찾아내려 하기보다 아주 헷갈려 있는 가해자적 피해자들을 살펴보라고 말하고 싶다. 증오와 적대에 가득 차서 종북주문을 외우는 이들, 구시대 간첩 노이로제에 걸린 할아버지 특공대들을 소환하고, 돈만 벌면 된다고 믿는 돈 귀신’, 틈만 나면 게임에 빠져드는 청년 귀신들을 드러내고 치유의 시간을 갖게 해야 하지 않을까?

 

어둠은 점점 짙어지고 있다. 이 어둠은 새벽을 위한 어둠일까? 우리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현장에서, ‘4대강 사업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현장에서, 해군기지가 들어서고 있는 강정에서, 765kV 초고속 송전탑 공사를 강행하는 밀양에서, 세월호 참사로 인한 슬픔과 분노가 짙어지는 현실 앞에 망연자실해 있다. 국가의 이름을 내건 도구적 권력은 종횡무진 질주하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다. 영토 분쟁 시대에 형성된 근대국가 조직은 현재의 위기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자폐적이고 사악한 조직이 되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국왕의 질서가 들어설 기미는 안 보인다. 여기서 국가란 단순히 현 정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만금 개발과 해군기지와 초고속 송전탑 건설, 그리고 참으로 터무니없는 4대강 사업 등 거대 국가사업들을 기획하고 무리하게 추진했던 과거 정권과 국회, 그런 사업을 막아내지 못하거나 사실상 동조한 야권 등 집중화된 국가 권력의 주체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에 사실상 동조한 국민을 포함한다.

 

1980년대에 위험사회론을 내놓은 울리히 벡은 최근 서울에서 한 강연에서 지금의 파국적 상황을 해방적 파국이라 부르면서 거대한 전환, 탈바꿈의 움직임이 글로벌 시민/국민/주민들의 성찰적 학습을 통해 벌써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기후변화,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 그간에 일어난 참사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현실을 보여주고 있고 그것은 일국에 해당된 것이 아니라 글로벌 차원의 문제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자멸 중인 근대 이후의 시간이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성찰적 학습의 현장은 바로 시장과 국가에 의한 강탈이 자행되고 있는 현장들이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성실한 국민들의 과수원과 마을을 가로질러 초고속 송전탑을 세우려는 공권력의 현장, 여섯 명의 할머니들을 끌어내기 위해 2000명의 경찰을 동원하고 주민들의 목숨을 건 반대투쟁을 비웃는 그런 현장이다. 중앙집권화된 그 권력은 맞붙어 싸우기에는 이미 너무 부패하고 사악해져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정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고 단순한 체제 변혁이 아니라 개인의 근원적 변신이 요구되는 시간대인 것이다.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쳐서 나비가 되듯 우리의 비약적 성숙이 요구되는 때이다.

 

사실 고치를 치기 위해 나는 일전에 학생들과 밀양에 다녀왔다. 몇 세기 전 식민지 제국의 사령관들이 지도를 놓고 금을 그었듯 마을을 가로질러 선을 긋고 초고압 송전탑을 세우고 있는 국가권력의 민낯이 드러난 밀양. 그 민낯을 드러나게 한 여자들을 만나고 왔다. 고향을 지키겠다는 시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반대투쟁에 앞장선 덕촌댁 할매, 그 엄한 일제 치하와 전쟁을 겪은 후 이 전쟁이 제일 큰 전쟁이다라 말하는 말해 할매, 여군이 되고 싶었다는 탁월한 연설가 영자 총무님, 전원주택을 짓고 꽃밭을 조용히 가꾸다 투사가 된 교장 사모님 미현 씨, 일본과 서울에서 공부하는 두 딸을 그리워하며 강아지 록키와 매일 농성천막에 출근했던 귀영 주부, 4남매를 키우랴 친환경 농사지으랴 분주한 대책위 위원장 댁 은숙 씨, 이분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법을 어기고 오빠의 시신을 묻어준 안티고네들이다. 할머니들은 안타까워한다. 자신들은 국가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말해줄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 왜 국가가 들을 줄 모르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이다. 자신들은 산이 우는 것을 들어서, 그것을 말을 해주려 할 뿐인데 왜 역적 취급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하신다.

 

6?11 행정 대집행 이후 다시 일어나 시즌 2’를 이야기하는 그곳에 나는 더 자주 갈 것이다.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 이 할머니들은 손주들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들의 삶이 곧 내 삶이고 내 손자의 삶임을 알기에 외부세력이 아닌 내부세력으로 그분들과 접속할 것이다. 그곳에서 강정 이후’, ‘밀양 이후’, ‘세월호 이후를 이야기하며 탈핵운동을 벌이고 협동조합을 만들고 있는 그분들의 활동에 동참할 것이다. 고통의 시대를 가볍게 살아내신 내 두 분 할머니를 기억하며, 그분들의 축복 속에, 새벽을 여는 할머니들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Darkness before the Dawn: Antigones who are Not Lonely

 

by Cho (Han) Haejoang

 

Why the Story of Grandmothers?

 

On May 21, director Park Chan-kyung sent me a letter to say that an exhibition was scheduled under the theme of “Ghosts, Spies, and Grandmothers,” and asked me if I could write an essay for the event. He said that conflicts between countries on the subject of comfort women reminded us of grandmothers’ role in the violent process of the modernization of society. He asked me to write about the damages and struggles that they went through. The history of the Cold War, which has not been settled yet, needs continuous analysis. However, such a request seems somehow boring and so is the attitude of presuming the most suppressed people and acting as if trying to save them.

 할머니가 겪은 피해기도( 문맥에서 모호하여 영문에서 생략), 투쟁에 대해 자유롭게 써달라는 주문이었다. 청산되지 않는 냉전의 역사를 집요하게 분석해볼 필요도 있지만, 주문은 어쩐지 지루하지 않는가? 가장 억압된 존재를 상정하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듯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Still, I’m going to tell you about my two grandmothers, hoping that I can tell readers about a somewhat different aspects of grandmothers in a somewhat different way. In this essay, the grandmother on my mother’s side is called “Gupo grandmother (grandmother in Gupo)” and the one on my father’s side is called “Sangju grandmother.” In our family we equally respected both our mother’s family and father’s family.

 

Gupo Grandmother

My grandmother on my mother’s side, Lee Jeong-ja, was born in 1900 to Chambong Lee, who was a rich grain dealer in Gupo by the Nakdong River. Her father Chambong Lee (my great grandfather on mother’s side) was from a noble class family but lost his parent early before he made his own fortune with his older sisters. It seems that in those days, the title Chambong was something that one could buy for money like some Ph.D degrees today. His wife gave birth to two daughters and no more children, but Chambong Lee ? who was active and diligent in everything -- adored the girls. Favored by her father, the first daughter grew up as a woman with high spirits. It was in the days when there was still the old custom of not allowing men and women to socialize freely. Gupo grandmother learned subjects like Chinese letters, Hangul, and arithmetic at home by inviting teachers and people who studied in Japan. Then, all of a sudden, she was curious about the school for neighborhood children, so she begged her father to send her to the school. There are many stories about her. For example, when her homeroom teacher entered the classroom one day he found no students there and later he found that Chambong Lee’s daughter took all the students to her home where she was teaching them. It is not clear whether she didn’t like the teacher or she just wanted to play with her friends, but having her own way and bringing many people with her was my grandmother’s style consistently from her childhood to old age. Although my aunt says Gupo grandmother stopped schooling because she found a girl from a low-class family was in her class, I want to check if that was true because Gupo grandmother was someone who didn’t discriminate against people ? she was more open-minded in that respect than anyone else I met. She died of a heart attack when I was a second grader in middle school. I asked her many questions in my childhood but time passed and now I don’t clearly remember who told me which story. The following text is based on stories from different sources.

 

At the age of 18, Gupo grandmother got married to the third son of the Han family who lived in Dongrae and originally came from Seoul. Her father-in-law ran a factory for long smoking pipes with elaborate decorations. Her mother-in-law, Mrs. Hyeon was said to be from a family of a high government official who returned to his hometown frustrated at the condition of the country in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I guess the family accepted new, foreign culture earlier than others in Seoul and there were also some interpreters and envoys to foreign countries in their family.  In the catastrophic situation when Korea was practically no more an independent country, they gave up everything in Seoul and returned to their hometown. It seems they had a reasonable culture within their family. My great grandfather (who ran the pipe factory) read The DongA Ilbo, a daily newspaper from the time when it was first issued in 1920, and collected all of them. Also, my great grandfather didn’t accept the post of Chambong when the county offered it to him, unlike the other great grandfather Chambong Lee, my mother once told me. Looking back, it seems that Gupo grandfather was like today’s nouveau riche and was not very respected by his daughter’s in-laws in Dongrae. The great grandfather of the pipe factory (The father of my grandfather on my mother’s side) had five sons, who all studied in modernized schools. In 1900, he sent his first son to Japan to make him a doctor, but the son heard the news of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in the year he graduated from the medical school. Then, he did not come back home but went to China instead. He opened a hospital in Shanghai and his whole family joined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until the liberation of the country. The second son was an inventor who graduated from an engineering college in Japan. He led an idle life in Japan and Korea. The third son, my grandfather was warm-hearted and especially a loving son to his mother. He attended a Christian school, Gyeongshin Middle School in Seoul. The fourth son got a job after graduating from high school, worked hard to save money, and then bought a violin. Then, he was passionate about playing the violin all his life. Later, he majored in music at Sungsil College and even went to the U.S. to continue his study. This person is the grandfather of a famous singer-songwriter Han Dae-soo, who composed the popular song, The Nation of Happiness. The fifth son majored in business at university and worked on accounting all his life.[1]

 

My grandfather on my mother’s side (Gupo grandfather) married the first daughter of the rich family in Gupo because he believed that his father-in-law would support him so that he could study in Japan, and his father-in-law actually did send him to Japan. However, the calculating father-in-law gradually felt offended about his son-in-law who was studying English literature. Therefore, he called in Gupo grandfather to Korea, saying he could hire many people who had studied in Japan instead of spending money at the school in Japan. The father-in-law let Gupo grandfather run a local grain shop. Although Gupo grandfather had to come back following his father-in-law’s instruction, he was in a bad mood. Therefore, he lavishly lent money to his friends and was lazy about handling business before he finally failed in it. He didn’t drink but loved music, so he stayed in a gisaeng house (a Korean geisha’s house where some musical performances were staged) for a long time in order to listen to their traditional music. The tomboy-style Gupo grandmother was startled when she first heard that her bridegroom was a gentleman who was tidy from head to toe even while walking. After they got married, she often felt heavy because of her taciturn husband. According to my mother’s childhood memory, Gupo grandmother socialized with her friends every day and even smoked, but when Gupo grandfather was seen from a distance everyone hurriedly hid the traces of smoking.

 

As she was feeling limited due to her marriage, Gupo grandmother gladly rented a room when a young, female missionary from Australia asked for a place to stay. As Gupo grandmother was a very sociable woman, she and the missionary became friends soon. My curious grandmother often went to church with her and read the Bible, too. After a while, she came to believe in Jesus. One specific reason may have been the fact that she had several sons after she gave birth to her first daughter (my mother) but the sons died one after another before they are four years old. After that, she stopped worshipping at Buddhist temples and converted to Christianity. Anyway, while socializing with the blue-eyed, unmarried missionary, she found that a woman can live a good life even without getting married. Then, she sent her younger sister to a medical school in Japan. Her sister (my great-aunt) didn’t want to be a doctor but went to Japan, persuaded by her older sister. But when her mother died while she was studying in Japan, my great aunt was so shocked that her mouth turned to one side of her face. She had to take some rest at home and didn’t go back to Japan. Then, she got married to a son of a neighborhood family running a rice mill. In my childhood memory, my great-aunt’s house was a big mansion surrounded by high walls with beautiful flowers on them. Looking back now, it was the style of a residence for a Japanese official. My grandmother told her first daughter (my mother) to live a life fit for an enlightened era. She said, “You don’t need to serve one man. Be a person who serves our country.” Being a taciturn person, my mother told me this story many times, so I guess my mother also wanted to give me the same message. Anyway, a big fan of Lee Gwang-su’s novel, my mother was angry with Lee’s sell-out to the Japanese, and she dreamed of working for the enlightenment of farming villages like the heroin Chae Yeong-shin of Sangnoksu (Evergreen Tree) by Sim Hun. My mother was thinking of becoming a doctor for doctorless villages. As she refused to do shrine worship in her high school days she was not allowed to enter a medical school by the Japanese government, she still hoped to help the disadvantaged and to live for Korea. However, there was a chaotic rumor that unmarried women would be mobilized as comfort women for soldiers, so she was married to a Korean student in Japan in 1944. He was studying literature and was so thin and pale that he didn’t seem to have long life expectancy.

 

Back to the story of Gupo grandmother; as she watched the Australian missionary she longed for a free life not limited by old customs. Gradually she even thought of parting with her husband ? I’m curious about how she thought about parting with her husband because divorces were still unthinkable in Korean society. At that time, the gentleman husband finally failed in his business. Being faithful, Gupo grandmother thought that she had to stay with him until he could live a decent life alone and she moved to Pyeongyang with her four kids following her husband. She was 28 at that time. Arranged by his younger brother, Gupo grandfather was hired by a manager at a department store, Taeanyanghaeng, a place for missionaries. It was the best job for Gupo grandfather as he had experience in business and was good at English. After working for three years there, Gupo grandfather suggested to Gupo grandmother that they study theology together. He attended a Christian middle school and went through the failure in business, while at the same time watching missionaries’ lives. All these may have naturally influenced him in making such a decision. Therefore, the couple entered Pyongyang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together. Later, their daughter (my mother) who was expelled from school due to her refusal to do shrine worship, also attended the same seminary. Gupo grandmother was the oldest student who was late for school every day and my mother was the youngest student adored by teachers.

 

There are many well-known stories about Gupo grandmother in my family. When young, she often gave speeches for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across the country. When she went to give speeches, my great grandmother (who was good at sewing and very conscious of social status) didn’t like her daughter wearing humble cotton clothes and so made clothes with silk lining for her. Gupo grandmother always called others by their names instead of their titles and did not keep distance from men. She loudly called the first name of a former classmate who became the head of a town and she freely went everywhere she had to go. When in Pyongyang, she felt offended at missionaries who ignored people in Joseon and she sternly scolded, “Go to your country right away. If you came here to love people do love them. Otherwise, you should not stay here.” Although she adored her first son-in-law (my father), she pushed him to have a divorce when he was not good to my mother. In my childhood, I often went to a spa in Dongrae with Gupo grandmother, and I saw her scold people who kept tap water running. Men who threw waste paper or urinated on the street were also scolded by her. Our relatives often said that the grandmother, an eloquent speaker and broad-minded person, should become a lawmaker. She kept a diary every day, and on March 1 each year she wrote the names of the people who joined the independence movement to commemorate those independence fighters and remembered their love for the country. My mother often said that I resemble Gupo grandmother a lot except I’m not as courageous as she.

 

After graduating from Pyeongyang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my grandfather quit the job of a department store manager and the couple went back to their hometown by the year 1941. Gupo grandfather -- who became a pastor -- prayed that God would let him work for God’s Kingdom through some other kind of work but preaching when he received the message “Take care of my children.” Therefore, he started to take care of orphans who were wandering around Busan Port. He made a community called Aerinwon (Love for Neighbors) and started to live with orphans, but the Japanese suppressed Koreans further in the end of the Japanese ruling period and the police started to arrest people who refused to do shrine worship. In those days, coats with strings were not allowed for Korean people in prison because they could hang themselves with the strings, and Gupo grandmother was wearing a coat without strings, ready to go to prison. Then, one day, a policeman called my grandparents secretly and asked them to move somewhere the police could not easily find. He did not want to arrest them because someone needed to take care of the orphans. Therefore, my grandmother persuaded her own father Chambong Lee to donate a mountain and farmland in Gupo so that all her family and orphans could move to. Her father could not understand his daughter who was taking care of “child beggars” with severe skin problems or diarrhea symptoms, but he had to donate all she wanted because the persistent daughter even “rolled on the ground” while begging for the land, they say.

 

Dozens of orphans and widows at Aerinwon community worked hard in the farmland, but they needed to make some extra money for their living. Unlike my grandfather who just prayed for things, my grandmother was a good breadwinner, so she sent products like embroidered handkerchiefs to churches and relatives across the country to get some donations. And there was one of her sons who was very sociable to facilitate the process. Gupo grandmother had so wide a circle of acquaintances that they could get food from somewhere whenever they almost ran out of food. In the end of World War II, many Korean people who refused to do shrine worship against the Japanese’ order hid themselves in the community’s hiding place in Gupo. After Korea’s independence from Japan, Gupo grandmother let her first son run a public bath to support the community. My grandmother did not think of divorcing her husband despite their bad chemistry any more. They thought of each other as a partner in God’s work, so they maintained mutual respect. Their first daughter (my mother) has always had to be careful since her childhood in order to play a role as a mediator between the two parents with clearly different characteristics.

 

After the Korean War broke out the number of orphans increased, so my grandfather had to take care of children in Busan while my grandmother had over 100 orphans in Gupo. I lived with my grandfather when I was a child, so I grew up with other children including a child who insisted he saw ghosts and a child who shouted “fire” every night. My grandparents let children join the prayer meeting every dawn. They didn’t force their own grandchildren to do so. I asked them for the reason when I grew up. The answer was that children without being loved by their own parents could not live without knowing God’s love. The taciturn and generous grandfather was strict with teachers and nannies but never beat or scolded children. He was a quiet man who consistently loved each child. However, quick-tempered grandmother sometimes beat and harshly scolded children when they did something wrong. At Aerinwon’s homecoming parties, such as the 50th anniversary and 60th anniversary, I found that many people remembered the quick-tempered grandmother’s love more than the generous grandfather’s. My grandmother earnestly prayed that she would not discriminate orphans from her own children. She gave birth to six children and was delicately built and hot-tempered. Probably because of this, she often suffered from diseases. She always said she had a muscle ache, so I massaged her legs and back many times. On a spring day in 1963, she went to a dental clinic, took a bath, and paid a visit of condolence to a neighborhood family. Then, she died at home. She was just over 61 and I was a middle school student.

 

 

 

 

Sangju Grandmother

 

Now, I think I need to talk about how my grandmother on my father’s side (Sangju grandmother) met Gupo grandmother. Sangju grandmother, Mrs. Gang Bong-woo, was born as the youngest daughter to the Gangs, a family that originated in Jaeryeong. They were strictly conscious of belonging to the noble class. Sangju grandmother married a man from a neighborhood family with not many relatives but with some land. She was happy being married with a son and three daughters. However, she suddenly lost her husband due to a contagious disease, typhoid. It was a catastrophe for a Korean woman at 28 in those days. She had to support four children and prepare special food for the memorial services of the family members almost every month. She had a wise older brother who was versed in Chinese classics and traditional medicine. He was a noted doctor in his neighborhood. Her brother could not accept the situation that his smart younger sister had to live as a widow who was socially discriminated against in those days. Therefore, he brought a Christian pastor from Daegu in order to introduce new civilization so that his sister could be saved from the ordeal that the Confucian patriarchal system imposed on widows. With the help of the insightful brother, Sangju grandmother converted to Christianity and built a church on one corner of her large yard. As a result, many people became Christian and could give up memorial services for their ancestors. Instead they could focus on the education of their children. After converting to Christianity, Sangju grandmother sent her son to a Christian school in Daegu and even sent to Japan for studying. She also let her first daughter attend Pyongyang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and her second daughter study at Shinmyong High School in Daegu. In that way, she provided all her children with a modernized education. Interestingly, her wise older brother did not send his children to school. I still feel curious about him and want to know whether he didn’t because he had so many children. The smart and bold Sangju grandmother led all widows in the village to church, so she had many colleagues at church.

 

Sangju grandmother’s first daughter, who became my aunt on my father’s side, is my mother’s classmate at Pyeongyang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After graduating from the theological seminary my mother often went to her friend’s home and church in Sangju where she helped their pastoral work. At that time, Sangju grandmother’s older brother praised my mother saying that she was a “noble person destined by the Heaven.” On the other hand, my father was dating with a woman in those days but Sangju grandmother did not like her. One day, my father visited Gupo with a big bag of rice and after that he came to marry my mother soon. The two grandmothers became best friends right away, and also they were companions who lived in a new era ignoring tradition that they did not want to accept. I still remember that family members often made fun of Sangju grandmother about the time when she got a perm, lured by Gupo grandmother. The two grandmothers went sightseeing across the country and took sand baths in swimsuits together. Actually, Sangju grandmother grew in the head house of a family, and she often used long phrases in Chinese letters. For me, it looked like a game to figure out whether the listener was from a noble family or not. And when her grandchildren grew up she told them to be careful not to marry people from certain families, as they were originally of low birth. I was annoyed at such words because she seemed to discriminate against people and put people down. On the other hand, Gupo grandmother did not use Chinese phrases although she knew them well. For me, Gupo grandmother was my true grandmother emotionally, as we shared our everyday lives, but Sangju grandmother was just like a visitor, so I felt offended about her incorrigible consciousness of the noble class and the low class. I remember I was even more disappointed with her when I found later that she did not know how to write those difficult phrases in Chinese letters although she often used them in speech. However, this was just a mushyheaded granddaughter’s judgment but what is important is that everybody envied the two grandmothers’ friendship.

 

Although Sangju grandmother followed Gupo grandmother in Busan, when in her hometown Sangju she was a problem solver with great leadership in the region. Around the time of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in Andong and Sangju, there were many students who returned to Korea after studying in Japan. Under their influence, many young men were “colored in red” or accepted communism. Later, many men died in the midst of ideological struggles and the Korean War. My father often said he would have been involved in socialist activities if he had not been a Christian, and that he would have died earlier as a student soldier if he had not married a woman in Gupo. Sangju grandmother was a reliable helper for widows who lived miserable lives because they had to conduct memorial services for their ancestors every month although they did not have enough food to eat. If they attended church, they didn’t have to conduct memorial services. Instead, they could meet friends in similar conditions and live confidently by helping one another in their village ? focusing on the education of their children with hope. Sangju grandmother took care of some sick people in her house, especially those who were mentally challenged. They say she drove out ghosts from those people and distributed food for them. Unlike Gupo grandmother who lived a poor but happy life with orphans, Sangju grandmother suffered from the sad deaths of relative men who were framed as spies and communists. Also, she lost her first son-in-law and second daughter in the midst of unreasonable conflicts between the leftists and the rightists in Korea. However, she enjoyed her life in her own way. She and other widows in Sangju took care of their children and grandchildren together at the house in Sangju with a church attached. When she needed some change, Sangju grandmother freely visited her son’s home in Busan where her friend Gupo grandmother lived. She wasn’t conscious of sadness as a widow until she died at around 90.

 

 

 

Grandmothers’ Time and My Time as a Grandmother

 

My two grandmothers lived in the middle of Korea’s turbulent history, but they seem to have been a bit distant from spies and ghosts. It may be because they accepted a somewhat different type of transcendent order in their lives. Especially in the case of Gupo grandmother, it may be because she formed an unrelated utopian community to take care of orphans. Perhaps the two grandmothers had their own enjoyable lives as they themselves became like spies and ghosts who confused others. When Gupo grandmother’s younger sister went to a fortuneteller, she asked the person to tell Gupo grandmother’s fortune, too. At that time, the shaman said, “Your older sister’s god is too strong and I cannot tell her fortune.” As such, even fortunetellers were afraid of Gupo grandmother, and Sangju grandmother drove out ghosts herself. Maybe she was originally brave and able, but I guess she would not let fear eat anyone’s soul. I think these grandmothers were able to live in the gloomy era with relative easiness because they moved earlier than others towards the time of “dawn.” They created a new “society” as they left behind the situation of the colonized nation and the order of darkness that they could never accept. This is why I don’t like these sentences “In our everyday vocabulary, grandmother is someone who is perhaps least associated with political power. In real life, grandmothers are living witnesses who have endured the ages of ghosts and spies” in the overview of the biennale theme. Isn’t power concentrated on some people in that case? Power is not something fixed but something that is formed while being given and received by people. My grandmothers did not entrust power to the Japanese ruling class or patriarchal system. They were the owners of their lives and created “power” as they took care of each other.

 

The stories of these two grandmothers do not represent typical women’s experiences during the early 20th century in East Asia. They did not live like ghosts with deep sorrow or surrender to the power of the pro-Japanese ruling class. They lived in a different time zone within the given history, and left to their next generation a message that we do not need to obey the established order. My grandmothers were like “mutants” who lived in the time of darkness before dawn with courage instead of being suppressed. Today, thick darkness surround us like it did one hundred years ago when my grandmothers lived. Still, we wait for dawn with hope today, and what we need may not be typicality but imagination about mutants and a sense of transformation. If some people insist that we first figure out the essence of the current social system, I want to tell them -- instead of trying to search for the most seriously hurt victims -- to check the “assailant-like victims” who are very confused with today’s reality. We should summon those who (usually filled with hatred and hostility) call people with different opinions from theirs as followers of the North Korean government; the special group of grandfathers who are neurotic about spies as in old days; “money ghosts” who believe that everything is okay if only we make money; and “youth ghosts” who just absorbed in video and computer games whenever they have time. Maybe we should reveal them and provide them with time for healing.

 

Darkness is getting thicker. Is this darkness just the sign that dawn is near? We are devastated at the site of Ssangyong Motor Company’s layoff; in places where the damages of the Four River Project are clearly revealed; in Gangjeong where a naval base is to be established without residents’ agreement; in Miryang where the construction of 765kV high-voltage transmission towers is forced; and in our reality of having sorrow and anger about the Sewol ferry disaster. The instrumental power under the name of the government has its own way and tells people to sacrifice their lives for the country. The modern nation formed in the era of territorial conflicts has no ability or will to solve today’s crises. It is becoming an autistic and wicked organization, and there is no sign that a new order will be established soon. Here, I don’t’ simply mean the current Korean administration by the word “nation.” I mean the past administration and National Assembly that planned and forcibly conducted mega-sized national projects such as Saemangeum Development, the construction of a naval base and transmission towers, and the ridiculous Four River Project. In other words, “nation” includes the subjects of concentrated state power including the opposing parties that did not stop such projects or almost agreed with them. Furthermore, Korean people who followed their decisions are also included in the power under the name of a nation.

 

Ulrich Beck, who presented the risk society theory in the 1980s, recently gave a lecture in Seoul. He called Korea’s current situation as “emancipatory catastrophism” and declared that the huge shift or move towards Verwandlung (Metamorphosis) already started through global citizens/people/residents’ reflective learning.[2] The recent disasters such as climate change and the Fukushima nuclear power plant accident directly show our reality. As people recognize that such disasters are not limited to one country but are problems on a global level, the time after the modern times (which is being self-destroyed) is emerging, he thinks. The sites of reflective learning are none other than the places where robberies are conducted by the market and the government. The state power tries to build high-voltage transmission towers across the orchards and villages owned by diligent tax payers; and mobilized 2,000 policemen in order to take just six grandmothers away from the construction site while laughing at residents’ life-and-death resistance. The centralized state power has already become too corrupt and wicked for anyone to fight against. Therefore, now it is the time that we need emotional determination rather than reasonable judgment; not simple regime change but fundamental transformation of individuals. Just like caterpillars make cocoons and become butterflies, a rapid maturing is required now. 

 

I actually went to Miryang the other day with my students in order to make our “cocoons.” As commanders from an empire to colonies divided land by drawing lines on the map centuries ago, the bare-faced truth about the state power was revealed in Miryang as the high-voltage transmission towers are being built with lines across villages. I visited those women who revealed the bare-faced truth. Mrs. Deokchon, who took the initiative in the struggle against the transmission towers in order to keep her promise to her father-in-law about preserving their hometown; Malhae grandmother, who says “This war is the biggest war” even as a person who experienced the Japanese ruling era and the Korean War; Manager Yeong-ja, an excellent speaker who had wanted to be a soldier; Mi-hyeon, the wife of a local school principal who was just a quiet housewife before she became an activist; another housewife Gwi-yeong, who visited tents for sit-in demonstrations every day with her puppy Rocky while missing her two daughters studying in Japan and in Seoul respectively; and Eun-sook, the wife of the countermeasure committee chair, who is busy raising her four children and farming. These are all Antigones who buried their brother/father Oedipus by violating the “law that kills people.” Grandmothers in Miryang feel sorry and say they don’t know why the government would not listen to them, although they are not trying to fight but trying to tell something to the government. They say they heard the mountains cry, so they want to tell about it and cannot understand why the government considers them rebels.

 

I will go to the region more often from now on as the residents are starting their second season of resistance after the government’s violent destruction of their tents for sit-in demonstrations on June 11, 2014. These grandmothers in Miryang would not allow something that will make their grandchildren’s lives dangerous. As I know their lives are my life and my grandchildren’s lives, I will meet them as an “insider” instead of an “outsider.” I will join their activities in no-nuclear movement as they look for ways to continue positive actions after people’s struggles around Gangjeong, Miryang, and the Sewol ferry. Remembering my two grandmothers who had lived in the age of pains with courage I will -- with their blessing -- join the group of grandmothers who are opening the dawn of a new era.

 



[1] Of four different branches of my family tree (my four grandparents’ families), I especially respect the Han family. Most of all, I liked an uncle nicknamed “Faraway Cloud.” He gave me a calligraphy work “A deep-rooted tree” when I was leaving for the U.S. to study; and another calligraphy “Love your country with passion” when I was getting married. This uncle composed Joseon Dynasty’s first musical Arirang during the Japanese ruling era, and also served as creative director in the Independence Army’s art troupe, which was formed in China. Later, he refused to be buried in the National Cemetery and was buried in a family burial ground. They say he said “I don’t want to be buried in the same cemetery as thieves” when choosing the family burial ground. He was angry with the Korean government because the government did not support the Independence Army members who were short of money for coal in winter and he used to spend all his salary to heat their residence. This uncle was an excellent artist and a man with very “feminine” aspects so I used to visit him whenever I went to Busan. Although it is digressing from the story of grandmothers, I cannot miss this uncle when I talk about our relatives. For me, uncle Faraway Cloud is an exemplary person who loved himself as well as his family, hometown, friends, neighbors, country and the world.

 

[2] Ulich Beck, “Emancipatory Catastrophism: What does it mean to Climate Change and Risk Society?” July 8, 2014. Lecture at the Seoul Conference 2014 jointly held by the Joongmin Foundation for Social Theory, Center for Social Sciences in SNU, National Assembly Forum on Climate Change, and the Climate Change 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