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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멕시코 탐방 1

johancafe 2010.11.04 15:48 조회수 : 4028

<태평양을 가로 지르는 교실: 2010년 여름, 아파치 부족을 찾아가다!>

이 글은 7월 21일 탐사를 끝마친 후 8월 11일부터 쓰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현장 조사가 아닌 예비조사이고 우리끼리 돌려보면서, 다음에 갈 사람을 위해서 정리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메모에 의존해서 정리한 것이다.

<들어가며>

‘글로벌리제이션’은 지금 시대를 칭하는 가장 대표적 용어일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 살든 일정하게 전 지구적 차원에서 시공간 압축성 time-space compression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먹는 음식부터 옷, 보는 텔레비전 프로부터 학교제도까지가 사실상 시공간을 초월하며 공유되고 있다. 1980년대부터 대학생들은 의도적으로 글로벌 주민이 되기 위한 필수 과정으로 자비로 배낭여행을 떠났고, 이어서 돈을 꾸어서라도 어학연수, 교환학생에 조기 유학 행렬까지 이어지는 것도 다 우리가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대학들은 세계 100위권에 들어가야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는 대학이 될 수 있다며 내국인 학생들을 위한 영어 강좌와 교환학생제도를 강화하고, 반면 외국인 학생들을 적극 초대하면서 명실 공히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대학으로 변신하겠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교육부도 그런 방향에 적극 동의하면서 대학 간 경쟁을 시키고 있고, 학부생들에게 ‘글로벌 역량 강화’를 시키는 획기적인 프로그램들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학부생들과 매학기 국내 현장연구를 가는 문화인류학과에서는 마침 해외 현장조사를 위한 계획을 세우며 어떻게 재원을 마련할까 고심 중이었던 때라 김현미 학과장과 나는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기획서는 큰 틀을 잡고 논의를 한 후 대학 졸업 후 하자센터와 티팟, 그리고 다음 재단에서 기획 일을 하다가 대학원에 온 정수 조교가 그간 갈고 닦은 기획서 쓰기 실력을 발휘해서 이틀 만에 만들어 제출하였다. 그 때가 ( )일 이었고 ( )일에 우리가 낸 기획서가 통과 되었다는 통지가 왔다. (첨부 기획서 참조) 이 탐사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교실>의 핵심 과제로 사회과학대 학부생 10명과 조교 2인, 그리고 교수 1인이 7월 6일부터 15일간 미국 콜로라도와 뉴멕시코 미국 원주민 보호구역을 다녀오는 현장 연구로 진행되었다.

<주제 선정과 학생 선발>

글로벌리제이션에 대한 이미지는 다양하여 학자에 따라 글로벌리제이션은 세계 대전 이후에 일어난 현상이라거나 1980년대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전환 이후의 현상임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글로벌리제이션을 5, 6세기에 걸친 근대화 과정과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근대적 전지구성이 탈근대적 전지구성으로 이동하고 있는 새로운 역사가 열리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조만간 우주적 전환을 이루게 될 지모를 이 글로벌리제이션 현상의 핵심을 보고자 한다면 어디를 가장 좋은 현장일까? 그 중에서도 짧은 탐사 기간 중에 시공간 압축성을 가잘 잘 볼 수 있는 곳일까? 현재의 질서를 주도하는 미국 뉴욕의 월가? 샌프란시스코의 번화가? 시애틀의DIY 족이 모인 도심 주변? 아니면 아주 전형적인 대학 도시?

나는 잠시 봄 학기에 온라인으로 함께 토론 수업을 했던 일리노이 대학의 인류학과 학생들과 뭔가 공동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수업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대학생들은 아르바이트와 자기 전공공부와 연애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쁘다. 아주 다른 대학 입시 체제를 거쳐 상당히 다른 취업 전망 속에서,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인 한국과 미국의 학생들이 여유를 가지고 지적 토론을 벌일 시공간을 마련하기는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이들은 이른바 ‘탈근대적 글로벌리제이션 post modern globalization’ 상황을 각자의 시공간에서 상당히 분열적으로 살아가고 있어서 함께 뭔가를 해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준비기간이 서너 달 밖에 안 된다면 서둘러야 하고, 또한 이미 있던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 나는 ‘마스터 형’을 생각해내었다. 마스트 형 또는 ‘형관장님’이라고 불리었던 그 분은 1980년대 초 대학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지금은 일리노이 대학 캠퍼스 타운에서 큰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분이다. 그는 인문학에도 관심이 많고 가끔 유학생들을 돌보기도 하며, 두 마리의 말을 키우는 목장 주인이기도 하다. 사람은 기운 있게 살아야 하다고 믿고 있는 그는 또한 후기 근대적 우울증과 ADHD 환자들의 ‘치유’에도 관심을 가져 혼자 탐구를 계속하는 중이다. 7, 8년 전쯤에 내가 잠시 일리노이 대학에 안식년 가 있는 동안 알게 된 그 분은 몇 번 장난스럽게 미 원주민 아파치 부족 축제에 가자고 제안을 했었는데 나는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현장 조사할 것이 너무 많아 죽을 지경인데 이 먼 뉴멕시코에 원주민 축제 연구를? 별로 갈 가능성은 없지,"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마스트 형은 자신은 7월 4일 미 독립기념일 축제를 자기 도심부에서 원주민의 복장으로 참여한 후 바로 뉴멕시코로 근 20시간을 운전해가서 그 도시의 파우와우 (대동 춤 축제)에 참석한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아주 절친한 로드리고라는 친구가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마스터 형과 로드리고를 믿고 일단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관의 일이 대부분 그러하듯, 제안서가 통과되었다는 통보는 왔는데 돈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학생들을 뽑았다가 실망시킬 낮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안 되니까 학생을 선발할 수도 없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드디어 학기가 끝나갈 즈음에 인터뷰를 해서 6월 1일에 선발을 끝냈다. 김현미 과장과 나, 그리고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나윤경 문화학 협동과정 교수가 도와주었다. 학생들은 생각보다 잘 할 것 같아 보였고, 학과 별로, 다양한 재주를 가진 이들로 선발 했다. 문과대 상경대 등에서 문의가 왔지만 일단 사회과학대 학생들에만 한정을 해서 열 명을 뽑았다. 대학 지원금이 각 대학 중심으로 나가는 것이고, 기본적으로 각 대학에서 자기 대학에 맞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게 되어 있어서 타전공생들은 데리고 갈 수 없었다.

6월 1일에 나는 선발된 학생들에게 간단한 메일을 보냈다.

좀은 특이한 글로벌 탐사에 동행하게 된 것 축하해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글로벌 역사의 슬픈 현장 속에서, 이번 방학을 의미 있고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 같군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 우리 여행팀은 '드림팀'이 되어야 하는 것일 테고 그러기 위해서 조율이 필요할 겁니다.
면접 때도 말했지만 이번 탐사는 일회용 여행 프로그램이 아니고 야영 비슷한 생활을 하는 탐사 프로젝트 인지라
1) 즐겁게 '올인' 할 결심, 그리고 그런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해요. (시간 지키기, 분주함의 조정, 타인에 대한 배려, 함께 할 수 있는 자세와 습관, 건강)
2) 각자가 맺는 인연과 화두를 잘 가져가야 합니다. 한 팀이 되어 탐사를 한다는 인연의 중요성, 그리고 지금으로는 apache 부족의 공연 팀이 10월에 한국에 올 것 같으니 그 공연 팀을 지원하는 일도 즐겁게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 개별/집단으로 각자가 가장 잘하고 즐거워하는 작업을 통해 책 작업, 영상 작업 등을 통해 문화 생산을 해냅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가는 것이고 이를 위해 두세 번의 오리엔테이션 자리를 갖습니다.

(1) 6월 17일(목)6시 백악관 청년문화원에서 피자를 먹으면서 박정선 교수 (캘리포니아 주립 대, 도밍거스 힐 캠퍼스)와 만납니다. 박정선 교수는 노스 웨스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할 때 Zuni 주니 족 보호구역 방학 탐사 조교를 해서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때 담당교수 (Werner 교수) 가 은퇴해서 그 근처 (알바키키)에 살고 계셔서 연락이 되면 우리에게 강의를 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노스 웨스턴 대 필드 학교는 2006년부터 성격이 바뀌어서 지금은 시카고 지역에서 현지조사 를 한다고 하네요. (Ethnographic Field School을 보세요.).http://www.anthropology.northwestern.edu/about/labs.html#4
(2) 6월 24-25일(목, 금) 탄광촌 폐광한 정선에 들어선 카지노 (하이원)에서 본격적으로 탐사 계획을 짜고 문제의식을 정리하는 자리 가지려 합니다. 그곳에 계신 하이원 사회공헌 책임자 김창환 선생과 이우 연구소 등에 관여하면서 이 마을 재생에 힘을 쏟고 있는 이 광호 선생님도 와서 이야기를 해주실 겁니다. 도박을 안 해본 친구들은 도박도 해보나?(3) 7월1일 목 총점검
요즘은 번잡하게 많은 일을 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으니 한 프로젝트, 한 집단과의 인연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정성들이면서 가도록 해요.
이번 여행이 서로에게 큰 선물이 되기 바라며…….

조한 혜정

추신: 오리엔테이선 참석 힘든 친구들은 미리 연락주세요.

매사에 철저하고 신속하게 챙기는 정수씨도 학생들에게 신속하게 실무관련 이메일을 보냈다.

여러분들은 여름 글로벌 액션 리서치 워크숍에 참여하게 되셨습니다.

1. 항공권 예약을 하려고 합니다.

저한테 보내셨던 지원서에 적힌 생년월일일과 영문 이름이 여권에 기재될 정보와 반드시 똑 같아야 합니다.
혹시 음력 생일을 적으셨거나, 가족들끼리 보내는 생일을 적어주신 분은,
얼른 저에게 호적상의 생일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여권 없으신 분들, 3일이면 만들 수 있으니까 얼른 서둘러 신청하시고.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북문 쪽에 있는 서대문구청입니다.)

미국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전자여권(무비자)을 가지고 있거나, 미국 비자가 있어야 합니다.
둘 다에 해당하지 않는 분들은,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

2. 오늘 저녁에 부모님 동의서를 보내드릴 겁니다.
성년인데 왜 부모님 동의가 필요할까 싶으시겠지만…….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행사이고, 길게 해외에 나가있는 것이라 부모님 동의서가 필요합니다.

저녁에 메일로 보내드릴 테니, 출력하여 이번 주 금요일 이전에,
백양관 517호 문화학협동과정 사무실에 맡겨주세요.
부모님께 이번 여행에 대해서 잘 설명해드리고요~ :)

3. 혹시 이번 여름 필드웤에 대해서 부담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으면,
저에게 상담하러 오세요. 저는 주로 학교에 있으니까 연락주시고요.
출발 직전에 취소하는 일이 없도록…….
혹시 갈등하는 분들이 있으면 조속히 저와 면담하고, 마음의 정리를 하도록 해요!
신 정수 Jeong Su, Shin

<사전 특강과 강원도 하이원 카지노 타운 예비 탐사>

6월 17일. 우연히 캘리포니아 대 박정선 교수가 1980년대 후반 노스웨스턴 대학을 다닐 때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현장 조사를 돕는 조교를 한 것을 알게 되어서 초반 오리엔테이션에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실은 많은 일들은 이렇게 우연히 일어난다. 많은 즐거운 일들은 이런 선물로 인해 이루어진다. 박정선 교수는 우리를 위해 밤새 준비했다면서 지도와 그림을 보여주고 자신도 오랜만에 그때 생각을 하면서 즐거웠다고 했다. 그곳의 상황이 아주 열악하다는 것, 기숙학교가 있는데 창문도 제대로 없어서 온실처럼 더워 지내기 정말 힘들다는 것, 우리가 가는 곳은 ‘네 귀퉁이 (four corners)’라고 불리는 곳인데 아파치만이 아니라 나바호와 푸에블로 등 원주민들이 많이 사는 편의 지역이라는 것, 보호구역에서는 술을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도시에 가서 술을 마시고 음주 운전을 하는 이들이 꽤 있어서 교통사고가 날 위험이 상당히 높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현장 조사 갔을 때는 미 전국에서 학생들을 모집해서 가는 것이고 한명씩 어디에 배치해서 조사를 시키는 것인데 한 학생이 그곳에서 술을 팔아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이미30년이 지났으니 많이 달라졌겠지만 너무 기대 하지 않고 가라는 말을 해주었다. 토니 힐러만의 Ghost way 소설을 꼭 읽으라고 했다. 백인으로 원주민과 같은 학교를 다녀서 자신의 추리 소설에 원주민의 삶을 많이 그려내고 있다고 하고 그의 기념관도 근처에 있을 것이니 시간이 되면 꼭 찾아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메사 베르디 나바호 주거단지도 꼭 가보라고 권한다.

교통사고 이야기에 나는 갑자기 그곳에 가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사고가 나면 크게 나는데 그 삭막한 사막 이동은 쉽지 않겠군. 일단 운전자가 찾아져야 하는데 지금 일리노이 대학에서 박사 과정에 있는 규호 씨가 함께 가주면 다행이고, 그 외에도 두어 명 운전을 잘 할 사람이 구해져야 한다. 정수조교는 운전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지만 운전경력이 짧고 나는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고산에서 체력도 달릴 것이고…… 갑자기 혹시 사고 날까봐 수학여행도 가까운 데만 가거나 아예 가지도 않는다는 중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밀수도 없으니 난감하다. 김현미 선생님과 상의하니까 운전기사가 있는 큰 버스를 대절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한다. (그런데 실은 어제 8월 12일 여기 이 글을 쓰고 있는 일본 뉴스에 따르면 일본 관광객을 태운 15인승 미니버스가 라스베이거스를 떠나 브라이스 캐넌 가는 길에 사고가 나서 승객 3인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버스 운전은 여행사가 임시 고용한 라스베이거스에 사는 26세 일본 학생이었다고 한다. 운전기사가 있다고 믿을 것도 못 된다.) 어떻게든 풀어야 할 난제가 나타난 것이다.

다음 주, 6월 24-25일에는 보호구역과 비슷한 성격이 비슷한, 탄광촌을 카지노 촌으로 전환한 정선에 예비 현장 탐사 겸 오리엔테이션 겸 하루 밤 함께 자면서 많은 논의를 하였다. 인터넷 검색의 시대라 학생들을 각자 관심 있는 자료들을 찾아보고 나누기 시작했고, 우리가 왜 이런 탐사를 가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뭘 읽고 와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집중적으로 시작했다. 60년대-80년대 중반까지 "개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사북, 이제는 폐광지역 특별법으로 인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내국인 카지노를 해도 좋다는 인가를 받아 지역주민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익수당도 나오게 했다는 것이다. 카지노 리조트인 하이원 고용원만 해도 4천명이라 한다. 타운에 들어가니 전당포 간판만 즐비하다. 차도 맡아준다고 한다. 하이원 고용원이 그렇게 많아도 자녀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 도시로 보낸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러기 아빠가 남는 셈이다. 1997년 IMF 이후 방치된 아이들, 조손가족이 많고 부자 가족인 경우, 아버지는 도박장, 아들은 찜질방에서 지낸다고 한다. 우리를 인도해준 함께 여는 교육 연구소의 이 광호 소장은 이곳을 ‘정서적 로밍화’라는 말로 표현했다. 아이들 그림을 보면 그 어두움이 그대로 나타나 있고 농산어촌 학교는 학생 수 감소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한다. 교사들은 주로 초임이거나 40대들로 점수를 잘 따서 교감, 교장 승진을 하려는 분들이라고 한다. 태백시만 해도 가계비의 12%가 교육비로 고등학교 보충수업비, 학원비가 나간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하루 종일 잡아두고 수능공부를 시키는데 실은 이곳에서 수능으로 대학가는 학생은 별로 없다고 한다. 하이원 사회공헌 프로젝트로 10억을 들여 13개 학교를 지원하고 artist 마을을 만들어보려 하는데 쉽지 않다고 한다. 철원에 원기남 목사님이 동네 아이들을 잘 키워보려는 노력을 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하이원에는 여자 남자 없이 많은 사람들이 도박을 하러 왔고 분수쇼, 부티크 등이 있었다. 나름 초호화 호텔이다. 카지노에 들어가려면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어야 하고 만 19세가 넘어야 한다. 그래서 한 달에 15번 이상 출입한 이들은 도박 중독 예방 교육을 반드시 받도록 되어 있다. 마을 분은 한 달에 딱 한번 출입가능한 날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정말 자주 하고 싶으면 주민등록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니까 이런 것이 별 효과는 없다. 조만간 폐광지역 특별법이 만기가 되면 이곳 경제는 또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미 원주민들처럼 이들도 보호구역에 지금은 살고 있는 셈이다. 고환읍 시장을 탐사하는데 식당마다 [콤푸 마감]이라는 글이 붙어 있다. 알아보니 도박을 많이 하면 그 돈 액수만큼 포인트가 적립되는데 그 포인트로 식당, 여관, 술집, 찜질방, 이발소 등 어느 곳에서나 쓸 수 있다고 한다. 도박을 아주 많이 해서 완전 망해도 그간 축적해둔 콤푸로 먹고 살 수는 있는 것이다. 일종의 사회보장제도 인 것이다. 카지노 도박인 들을 위한 사회보장제. 그리고 이 주변에는 고리대금업자(전캔업자라고 부른다고 한다)들이 많다. 바다 이야기 사고 이후 불법 카지노가 많이 지면서 이 회사에서 200명이 일시에 퇴직을 한 적도 있다. 이직을 한 것이다. 월수 3000만 원 정도를 버는 이들이었다.

사북 항쟁 기념관(사북 석탄 유물 보존위원회)에 들어가 보았다. 한창 때 쓰시던 것들이 고스란히 잘 보존이 되어 있다. 대단한 분들이다. 탄광 ‘막장’으로 들어가는 작은 기차도 기념물로 남겨져 있고 일 년에 한번 여름 방학에 체험 축제를 열어 어린이들이 막장에 들어가 볼 수 있게 한다고 하신다. 80년 군부가 계엄군을 충돌한 처음 사태, 전두환 씨는 이를 계기로 대통령이 된 셈이라고 이 분은 말한다. 사북 항쟁은 생존권을 걸고 싸운 아주 처절한 광부들의 항쟁이었을 것이다. 생존이 막막해지면서 94년에는 핵폐기장도 좋다고 주민들이 유치를 하려고 했다고 한다. 1995년 3월 3일에 탄전개발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2000년에 카지노가 들어서고 2005년에 골프장과 스키장이 들어섰다. 하이원을 운영하는 강원 랜드라는 회사는 공공성을 가장 중시 여긴다. 정부 운영체로 36%를 지역 사업단이 갖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이곳 주민들이란 누구인가? 그때 광부가족들은 대부분이 떠나고 없다고 한다.

그곳에 계신 광부출신 선생님은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다 와보고는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해보자’고 하고 가지만 가면 다 그만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오히려 설치 작가들이 열심히 와서 뭔가를 하고 가시긴 하지만 ? 집단 샤워 실에 조명을 달아 그 느낌이 나게 한 설치작업 등- 그분들은 예술가들이라 힘이 없다고 한다. 일본의 오부타 폐광 유바리 타운과 교류가 있었는데 그곳에 너무 무리하게 투자를 해서 도시 자체가 망했고, 영국에서 탄광촌을 제대로 멋진 관광도시로 재활력화 시켜낸 ‘빅 민시’라는 도시도 있는데 그쪽 분들도 이곳을 찾아보시러 왔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쪽에서도 그곳에 갔는데 광부출신들을 못 가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네트워크가 안 되는 것이지. 분명 방법은 있는데 찾아서 활용하기에 너무 걸림돌이 많다. 고민의 시작은 여기 서다. 오래된 ‘보호구역’ 자율과 공생의 원리가 희미해진 곳. 그래서 분명 해법은 있는데 잘 찾아질 수 없게 되어버린 지역. (지역공헌팀 인터뷰 등 승구, 승헌이 따로 정리한 자료 참고)

미국의 장기 탐사를 위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1)자율과 공생의 원리로 가도록 한다. 각자 멀티 테스킹을 잘 할 수 있으면 한다. 왜 가는가? 뭘 보고 무슨 작업을 할 것인가? 개별적으로 질문을 하나 장기적 전망에서 큰 틀에서 그것을 보려고 노력해달라고 했다. 개별, 집단 목표가 있고 (축제와 관광산업을 보겠다. 근대성과 미국이라는 국가 형성에 대해 보겠다, 소설을 읽고 구술사를 취재하겠다. 등) 그들은 어딘가에서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냥 취재 인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권운동가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냥 축제 도우미를 하러, 공익을 하러 소박하게 가면서 그곳에서 삶을 느끼고 관찰하고 배우려는 것이다. 관찰자의 태도, 기술, 숙련, 노하우에 대해서도 아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관찰자의 태도는 실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그러니 표가 나지 않아야 한다.
2)우물 파기: 현장에서는 늘 질문을 던지게 된다. 끝없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물을 파듯, 이곳저곳을 찔러보다가 물이 나올 듯 하면 그곳에 머물면서 깊게 파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해저의 해류를 볼 수 있게 되면 많은 것이 분명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도달 가능한 한 깊이 파보도록 하자.
3)서로의 인연을 소중히 하자- 보름동안 한 밥솥 밥을 먹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닐 것이다. 그 관계를 고맙게 여기고 잘 키워가자. 서로 돌보기. 안전을 위해buddy로 짝을 지어서 챙기면 한다. 주도 하면서 주도 하지 않는 것, 자신이 주인이면서 주인이 아닌 것이 공동으로 뭔가를 만들어갈 때의 원리일 것이다. 창의적 공동체가 되면 한다.
4)실무팀 영상, 기록, 공연, 실무회계 등 체계를 잡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고 일머리 제대로 익히도록 하자. 대학생들, 특히 입시공부에만 익숙한 경우에 가장 키워야 할 능력이 일머리이니 이번 여정에서 일머리를 키우도록 한다.
5)일상을 소중하게: 각자의 독특한 버릇을 미리 공유 하여 공동생활을 좀 덜 힘들게 하고자 했다. (잠버릇, 음식 못 먹는 것, 멀미 등) 나는 잔소리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각자 알아서 잘 하도록 하자. 할 말 있으면 다 하고….별명을 부르는 것이 좋으면 그렇게 하도록 하고 수시로 룰이 필요하면 정하고 간다.

<구체적인 미국 탐사 계획과 준비>

마스터 형은 초반에는 우리가 다 일리노이로 가서 그곳에서 운전을 해서 가기를 원했지만 길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콜로로다 덴버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는 우리가 덴버로 들어가면 바로 거대한 로키 산맥 국립공원으로 가서 웅장한 자연과 만나고 그 자연을 어떻게 관광지 화하였는지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원주민 타운에 들어가기 전에 경치가 좋은 Buena Vista애서 강을 거슬러 타보는 래프팅도 꼭 하고 가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최근에 꽤 큰 규모의 카지노를 지은 Ute 윹 족 타운 (Ignacio) 을 둘러보고 하루 밤을 지낸 후 그 근처에 있는 나바호 유적지인 메사 베르디를 둘러본 후 타오스로 가자는 것이다. 토요일에 타오스 (Taos)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대동축제를 이틀간 구경하면서 축제에 대한 감을 익힐 수 있을 것이라고 했고, 타오스의 축제는 꽤 알려진 축제라고 했다. 축제가 끝나는 일요일 저녁에 우리의 목적지라 할 수 있는 달시 Dulci로 떠나서 그날부터 그 주말에 있을 축제를 준비하고 마을에서 여러 가지 자원봉사를 하면서 8, 9일을 보내는 일정을 짜주었다. 그 중간에 백인들의 축제인 ‘마운틴 맨 랑데부’라는 행사도 끼어있었다. 퍼레이드용 달구지도 나뭇가지로 틀을 짜고 멋지게 장식해야 하고, 그곳 타운 지도자들도 만나고 수시로 동네 일손 필요하면 가서 돕고 또 수시로 사물놀이 공연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마침 사물놀이를 잘 하는 성덕이가 있어 안심이다. 사물놀이 팀이 급조되었고 곧 연습에 들어갔다. 일머리가 좋은 발 빠른 친구들이 꽤 있어서 티셔츠부터 퍼레이드용으로 내걸 깃발까지 다 주문제작 하였다. "Greetings form Yonsei Youth Tribe of Seoul Nation, South Korea, Earth!"이런 좀 장난스러운 문구도 넣고 지도도 티셔츠에 넣었다. 그리고 호텔 예약, 비행기 표 구입에 들어갔는데 이것도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항상 실무라는 것은 생각보다 일이 많고 힘들다. 물론 잘하는 이들에게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닐 수 있겠지. 형관장은 바빠졌고 규호 조교는 그와 회의를 하지 않고 한국에 일단 와버렸고 나는 6월에 파리에 회의가 잡혀있고, 비행기 값은 올라버렸고…… 우리 특유의 순발력으로 (대학원 다니는 동안 인터넷으로 일종의 여행사 알바를 해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마구 여행 다녔던 규호 조교가) 좀 복잡한 행로로, 좀 싼 가격 (170만 원 정도)으로 표는 구입했다. 학생들에게는 일단 200만 원 정도의 비용을 걷어야 하겠다고 한다. 나는 150만 원 정도만 걷자고 했는데 정수 조교는 다시 걷기는 힘들 것이니 돌려주는 한이 있어도 충분히 걷는 것이 더 낫다고 하여서 그의 말대로 하였다. 그가 학생들 입장을 나보다는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형관장은 부족민들에게 ‘인디언’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 자신들을 ‘nation’이라고 부르고 president, vice-president, 위원회 등이 아주 막강하게 조직화되어 있다고 했다. 그 분들에게 준비할 선물로는 원주민들에게는 북이 아주 특별한 귀중품이니 사물놀이 때 쓰는 북을 사오라고 했다. 이어서 좀 더 자세한 프로그램을 로드리고가 보내 왔다. 자동차 예약 등을 형관장이 할 것인지 여기서 할 것인지 고민 하다가 한국에서 보험 같은 것이 잘 되어 있는 렌터카 회사가 있다고 해서 (그야말로 글로벌 시대이니까…) 서울서 렌터카 예약을 하였다. 운전자가 충분치 않아 고심하다가 등산과 스키 광에 드는 스포츠맨이면서 의사인 닥터 조에게 SOS를 쳤다. 우리가 익숙해질 때까지 전반부에 운전을 해주면서 함께 다녀주면 좋겠다고 했더니 한참 후배들인 청년들과 함께 가는 여행인데 얼마나 즐겁겠냐고 꼭 합류하겠다고 했다. 닥터 조는 마스터 형처럼 원주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가 있어서 자기를 ‘와탕카’로 불러달라고 했다. 그는 인디언 영화를 보다가 ‘와탕카’가 great spirit 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 자신 인디언이 자신의 선조라 느낀다면서 원주민들에 대한 큰 호감을 드러냈는데,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 호감의 정체성은 어디일까? 미국에서 비백인으로의 동지의식? 할리우드 영화에서본 기상어린 인디언무사의 이미지? 어쨌든 또 한명의 성격배우가 우리 여정에 이렇게 해서 동행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 점검으로 그곳 어른들께 드릴 북과 장구 등 선물용을 하고(우리가 쓰다가 드리고 올 계획으로)학생 윤영의 아이디어로 학교 국제처와 홍보처에 연락해서 핸드 폰 고리, 볼펜 등 선물도 얻어내고, 개별적으로도 선물을 생각해보고 그곳에서 친해질 분을 위해 준비를 하라고도 부탁하고, 각자 기호 식품 챙겨올 것을 당부했다. ‘급조 사물놀이패’를 앞세운 Korean delegate- 원주민들이 우리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학생 10명 (남녀 반반)과 조교 2인, 나와 닥터 조까지 전부 14인이 두 대의 렌터카에 나눠 타고, 형관장은 자기 트럭을 몰고 길을 떠났다. 형관장은 마침 집을 방문하고 있던 한국서온 택견 인간문화재 일행 2인을 동반하셨다. 이분들과는 8일간 함께 할 예정. 결국 7일간 계속 이동하는 길위의 탐사, 그 이후 8일의 정착 탐사를 떠나게 되었다. 여행을 많이 해본 와탕카는 미리 짐 실을 자리를 걱정을 했고, 나는 첫날 14,000 피트에 올라야 한다고 해서 고산병을 염려했고 심한 멀리를 하는 학생이 있어서 그 역시 우리 모두가 염려해야 할 변수가 되었다. 어쨌든 혼자가 아닌 ‘우리’들이 지지고 볶고 할 여정은 시작되었다.

7월 6일 화요일 오후 3시 탑승

자료집을 비행기 속에서 자세히 읽었다. 6월에는 유럽 가는 등으로 나 자신 시간이 없었고 또한 그렇게 일일이 챙기지 않고 가기로 했으니 이제부터이다. 그런데 목차도 없고, 박정선 교수 특강 기록도 없고 정선 하이원 방문 예비 탐사에 대한 기록도 없다. 그냥 일정만 검색 자료들이 있다. 자료집 정리자 이름도 없고 내가 읽어주지 않았나? 송기원씨의 "인디언 이니까" 정도의 시라도 한 수 끼어 넣을 법한데 그런 것도 없다. 이렇게 과정에 대한 감각이 없다니… College of Social Science는 Department of Social Science로 되어 있고, 그래도 좀 챙겨서 보고 제대로 만들게 가르쳤어야 했나? 아니, 이 정도로 아주 잘했다고 생각해야 할까.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이번 현장 조사의 목표? 소박하게 가자. 의기투합하고 정붙이고 소박하게. 일단 현 상태 에서 감사하면서 간다. 길 위에서 우리 스스로를 만나는 것이다. 길 위에서 배울 것이니까…

덴버 근처에 태풍이 불어 비행기가 spring field에서 내려 한참 기다렸다. 결국 밤 9시 반에 도착해서 예약해둔 렌터카를 픽업해서 출발하니 모두 배가 고파 야단이다. 미국 국내 비행기에서는 먹을 것을 안 주고 샌드위치를 사먹을 수 있는데 아무 것도 안 먹은 모양이다. 11시 반에 24시간 여는 맥도널드에 가서 식사를! 참 기막힌 일이 아닌가? 맥도널드나 보다 올까봐 이 먼 길을 왔는데 첫 음식을 가장 미국적인 페스트 푸드 점에서 먹다니, 어쩌면 가장 제대로 된 여정일 테지. Ester Park Condo라는 콘도를 겨우 찾긴 했는데 관리인을 퇴근을 해서 한참을 열쇠를 찾고 난리를 쳤다. 콘도는 강가에 호화판 3 bedroom 콘도를 둘 빌렸는데 앞으로 고생할 테니 첫날 호강을 좀 해도 될 성 싶지만 밤늦게 도착해서 돈이 아깝긴 하다. 각 집에 딸린 자꾸지에서 목욕을 하고 나니 새벽2시. 다들 피곤해서 뻗었다.

7월 7일 수요일 티피에서 자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떤 규호 조교가 사온 시리얼과 팬케익과 꼬마 당근과 딸기를 먹고 Zi-pot이라는 영양제겸 고산병 예방약을 먹고 점심 즈음에14,000 피트 로키 산맥을 차로 둘러보았다. 다행히 고산병 심하지 않게 다들 잘 내려왔다. 그리고는 근처 대형 마켓에서 가서 슬링핑 백 등 쇼핑을 했다. 그곳에서만 잘 터지는 전화도 사고 (20불짜리로 돈을 차지하는 것이다.) Salida 캠프장으로 왔는데 로드리고가 아내와 함께 늦게까지 티피와 텐트 5개를 쳐두고 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형관장과 모두 인사를 하고 잠시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은1993년부터인데 2001년에 여기에 태권도장을 낼 생각을 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하는 대로 하면 되지 구태여 태권도장을 낼 생각은 지금은 없다고 했다. 한때 이 지역에 땅을 사서 한국서도 와서 연습하는 큰 도장을 지으려고 아내를 데려와서 보여주었는데 아내가 저 아래 건물이 뭐냐 물어서 모른다고 했다가 물어보니 감옥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사지도 않았다고 한다. 1998년 national geography 4월호인가 11월호에 이들에 대한 기사를 읽었고,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도 마이너리티로 미국서 살아가다보니 더욱 쉽게 동일시를 하게 되었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는 multiculturalism 붐이 일어서 각ethnic group의 자체적 문화 활동을 고조되었던 때이다. 특히 그는 인디언들의 무사 정신과 철학이 좋았고, ‘조상을 찾아’ 축제를 벌이는 것도 마음에 들고 북소리, 심장소리를 듣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에게 이들이 너무나 오래 당하면서 살아서 피해의식이 강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조심해달라고 했다. 이들을 기독교인화 하기 위해 원주민 아이들을 강제로 기숙학교에 보내고 원주민 언어를 쓰면 비누로 입을 씻게 했다는 에피소드와 가장 호전적인 히커리아 아파치 족은 사막 끝 골짜기로 몰아넣었는데 그곳이 마침 natural gas와 기름이 나와서 실은 인디언 중에서는 부자 부족에 속한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텐트를 치고 우리에게 전등을 나눠주던 로드리고는 우리와 인사를 하러 왔었다면서 회사로 갔다가 나중에 Ignacio에서, 그리고 주말에 타오스에 만나자며 아침에 아내, 그리고 손녀딸과 돌아갔다.

7월 8일 목요일 강을 거슬러 타다.

아침에 일어나 근처에 가서 river rafting을 하면서 확실하게 몸과 마음을 풀었다. 형관장의 생각대로 강에서 물에도 빠지면서 한바탕 풀고 미국 문화도 느껴보면서 서서히 ‘깊은 그 곳으로’ 가는 것이다. 나와 조교들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동네 카페에 가서 한 나절 작업을 하였고 나머지는 신나게 놀고 샤워를 한 후 Ignacio로 향했다. 슬슬 시간을 안 지킨다느니 차가 사라졌다느니 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돈을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감사를 해야 하는지 등 정보교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자칫 돈도 안 내고 갈 뻔했다. 세 대의 차가 계속 이동해 다니는 것도 예상은 했지만 그리 쉽지가 않았다.
이제 제대로 만남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운전에 관해서는 구글 맵과 네비게이터를 믿는 1990학번 규호, 자신의 오래된 기억을 믿는 형관장의 길 독법, 그리고 지도를 주로 읽고 길을 찾아가는 식의 닥터 조. 이 세 명이 각자 가장 좋은 방식으로 협력을 할 수도 있겠지만 세 명이 다 다른 방식으로optimize하는 터라 그렇게 되는 것이 쉬울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유의 세대 차이, 일하는 방식의 차이, 성향의 차이들이 나타나면서 크고 작은 긴장감이 감돌기도 한다. Cheer leader를 하는 사람과 그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 사람, 허무주의자와 실행주의자, 골목대장들과 사령관 스타일, 도구적 인간과 표현적 인간, 개그적 말투와 진지한 어법 등등이 이어지면서 보이지 않은 주도권 쟁투가 일기도 한다. 함께 스물 네 시간 다니는 팀이면 당연히 생기는 사람 사는 곳의 역학이다. 어떻게 가는지 잘 살펴보자.

7명씩 나누어 탄 렌트카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나 분위기도 자못 흥미롭다. 닥터 조는 운전을 하면서 연신 음악을 듣고 질문을 하면서 가는 모양이고, 나와 규호가 탄 차에서는 앞에서는 우리 둘이 이런 저런 일 이야기, 공부 이야기를 하고 다른 이들도 두어 명씩 개별적으로 이야기 하거나 주로 잔다. 바꾸고 싶으면 차를 바꾸어도 되니까 이래저래 갈등은 회피를 할 수 있다. 수와 덕이 나누는 대화: "요즘 우리 엄마 유머책 보신다? 그런 엄마가 참 안 됐어." "그래그래 우리 엄마도 유머 책 보셔" "송년회때 애들 노래 부르시겠다고 노래 가르쳐 달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고등학교 때는 참 많이 웃고 즐거웠는데…’우리 오빠대학 다닌다?’하면 까르르, ‘용돈 40만원 받는다?’하면 까르르. 그런데 요즘을 왜 안 그런지 몰라, 고 3 개그 …" 자동차 분위기가 시트콤 분위기가 될 때가 많다. 서로 진지하기보다 이런 것이 자연스러운 모양이다.

Ignacio는 Southern Ute Nation의 근거지이며 3년 전에 꽤 큰 카지노를 지었다. 작은 타운이다. 예약을 해둔 캠핑장에 비도 좀 올 듯 하고 어제 잠들을 잘 못 잤고 여전히 패드를 마련하지 못했으므로 모텔에 묶는 것이 어떨지를 의논하였다. 축제기간이라 호텔 예약이 어렵다고 하는데 서로 약속 장소를 잘 못 정해서 또 기다리는 등 이동으로 인한 에너지 소모가 꽤 크다. 그러려니 하면 그런대로 잘 가는 것인데 내가 워낙 정확하게 이동하는 팀들과 살아서 그런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차를 어중간하게 세워놓고 있었더니 경찰차가 왔다. 여자 경찰이라 나는 반갑게 ‘Fargo’ 영화를 떠올리며 묵을 곳을 찾고 있다니까 카지노 호텔에 전화를 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또 호화판 카지노 호텔에 묵게 되었다. 하이원에 비하면 전혀 호화롭지 않은 아담한 곳이고 카지노에도 별로 사람들이 없었다. 형관장은 호텔 카운트 사람에게 매니저를 불러오라고 하고는 가격 흥정을 한다. 한국서 학생들이 왔고 내일 여기 프레지던트와 만날 것이며 이곳을 연구하러 왔다고 하면서 스위트룸을 아주 싼 가격에 머물 수 있게 하였다. 다들 재주도 대단하다. 어제 밤 고생을 해서인지 다시 호화 호텔에 들은 것에 대해 학생들을 흡족해한다. 전화가 와서 정수를 찾더니 "실은 계산이 잘 못 되었다"고 한다. 정수가 놀라서 눈이 동그래지니 규호가 장난 쳤다고 한다. 무슨 이런 장난도 치나…흠 호텔에서 파는 식사를 적당히 하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카지노 딜러 중에는 필리핀에서 온 이들이 좀 보인다.

7월 9일 금요일 카지노 호텔 미팅룸에서 Southern Ute 부족 대표와 만나다.

점심을 부족 관련자들이서 대접한다고 한다. ‘인디언 타코’가 준비되어 있고 부족홍보국에서 그들 로고가 새겨진 가방과 물통, 그리고 볼펜 등 선물을 푸짐하게 주었다.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나… 부족 대표와 전쟁에 나갔다온 전역군인 (베터란) 대표, 그곳의 문화기획회사 사장 부부, 호텔 매니저, 부족의 홍보 담당 분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시작하니 이제야 원주민 동네에 왔다는 느낌이 확연하게 든다. 사물놀이 팀이 공연을 했고 안 상수 선생님이 만드신 생명 평화 무늬를 소개하고 배지를 드리고 악기를 소개하는 것을 보면서 로드리고는 아주 흡족해 했고, 형관장도 뿌듯해하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어쨌든 우리는 한국 사절단이 된 것이고 사물놀이 팀이 그것을 해낸 것이다. 각자 소개를 하고 우리가 온 목적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가 온 목적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베터란 조직의 대표도 와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1차 대전까지 원주민들은 시민권이 없었다고 한다. 1924년에 42명이 참가했고 2차 대전 때도 42명이 참여했고 2차 대전 후에 비로소 참정권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이 마을에서는 베트남전에 43명 이라크 전에도 81명이 참석했다고 하였다. 이어서 Eddie and Betty 부부가 자기소개를 했는데 허밍버드 humming bird Mobile Entertainment라는 문화기획사를 공동운영하고 있다. 베티가 자기 소개한 것을 요약하면, 스페인계로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 때 남편과 연애 한 후 결혼해서 이곳 유지집안 며느리로 시어머니 가르침을 잘 받들며 살았고 아이들도 잘 키워 큰 아들이 이 카지노 사장이다. 특히 시어머니인 Blue Misty Woman을 언급을 하면서 전통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월경통이 있으면 혼자 월경 오두막 Menstrual Hut에 가 있어야 한다. 여성이 막강하면 남자가 아파지고, 월경 때 특히 강해지기 때문에 그 때 남자를 가까이 하면 남자가 또 아파진다고 했다. (www.sandmanhummingbird.com)

에디는 늘 상냥하고 즐겁게 사람들을 대하는 호인스타일이라면 베티는 아주 영리하고 자부심이 강하고 부지런해 보인다. 베티는 오늘 밤 sun dance 의례가 있는데 다 환영하지만 월경중인 여성은 절대 가면 안 된다는 것, 선 댄스는 3일간의 의식인데 남자들은 3일 동안 물도 안마시고 금욕, 금식을 하면서 창조자에게 부족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것, 3일 내내 소리하고 춤을 추는 남자들을 위해 땀을 닦을 뜨거운 물수건을 아내는 새벽으로 밤까지 갖다 바쳐야 한다는 것,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치 대단한 종갓집에 시집을 간 며느리가 그 집의 문화에 감복하고 그 누구보다 충실한 학생이자 열렬한 홍보 인사가 되듯, 이 분이 바로 그런 케이스가 된 듯하다. 에디는 늘 상냥하고 즐겁게 사람들을 대하는 호인 형이고, 베티는 아주 영리하고 자부심이 강한데, 남편을 언급할 때도 아주 다정하게 ‘lover’라고 불렀다. 우리는 대단한 달변가에, 능력이 대단한 여행사 사장이자 기획사 사장을 만난 것이다.

오후에 메사 베르디라는 백여 년 전에 나바호 부족이 살았던 특이한 주거공간의 흔적을 보러갔다. 시간이 충분치 않고 안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그곳에 아들을 데리고 온 백인 한분은 우리가 그렇게만 보고 가는 것에 대해 너무나 아쉬워했다. 이곳은 평생 꼭 봐야 하는 곳이고 이곳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오는데 우리는 그곳까지 와서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사실 고상한 박물관 문화를 감상하는 분들에게 이것보다 더 훌륭한 곳은 없으리라. 오는 길은 타르고프스키의 <희생>에 나오는 황량함과 광활함으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저녁식사를 하자고 전망이 아주 좋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와탕카는 그런 자리를 잡아놓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학생들은 전망을 아랑곳없이 자기들끼리 어둑한 곳에 그냥 앉아 먹으려 한다. 가서 여기로 오라고 말하는 와탕카. 나는 그에게 그냥 두라고 말한다. "그 친구들이 하고 싶은 대로 둬. 자기 나름 생각이 있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제일 싫어하는 세대야." 와탕카는 그래도 안타까워하면서 "그래도 말을 해주어야지. 여기 앉아보면 다르잖아" "그게 우리 세대가 하는 일이지만 저 세대는 달라. 그냥 물을 때가지 별일 없으면 가만히 둬" 이게 이번 여행에서 내가 학생들과 관계를 맺는 기본 원리라 했다.

그들이 히키코모리로 혼자의 성에 박혀 있다고 해도 그런 시간이 필요해서이라 생각하고 그냥 둘 수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우리에게 좋다고 그들에게 좋다는 보장도 없고 우리가 좋아한다고 그들이 좋아하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은 것이 현명한 자의 태도일 것이다.



우리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돈과 공간을 제공하는 것일 테고, 서로 좋은 에너지를 낼 자신이 있을 때 시간을 내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아주 강한 사람으로 자랐고 살았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던 반면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이 세대는 자신들이 할 일이 별로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모든 새것을 이미 이야기 된 후기 근대를 살아가는 것이고, 이들은 자기도 모른 채 어른들에게, 기존 시스템에 많이 눌려 있다. 그것을 모를 정도로 많이…. 와중에 상처도 받고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그런 것 없이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면서 살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이 자란 환경은 소비와 상업주의 브랜드, 인터넷, 개그맨적 말투가 중심이 되는 곳이고, 그들의 세상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곳도 아주 많다. 그들이 우리를 모르는 것처럼. 나는 이번 여행이 그런 시간을 공유하는 여행이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면서 정신과 의사인 그에게 그런 식으로 참여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실은 나는 이런 식의 말을 전날 형관장 차를 타고 오면서 하였다. 좀 다른 식으로 ‘자율과 공생’의 원리를 강조하면서… 내가 이번에 총기획자이자 디렉터로서 해야 한 주요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다. 큰 틀에서 각자가 의미를 만들면서 함께 여행하는 것. 크게 필요한 조율만 하는 것, 함께 일정한 과정을 만들어가면서 그 과정 자체를 보는 것, 그러면서 배우는 것, 그것도 즐겁게….

베티와 선댄스가 열리는 곳에 가겠다고 약속도 했고 해도 이미 저물어 서둘러 행사 장소로 향했다. 원래 그들과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시간도 그렇고 내내 얻어먹는 것이 무척 힘이 들다. 교환개념이 확실해진 존재라 그런가.… 베티 말대로 월경하는 친구들을 빼고 선댄스 장에 가니 베티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모두에게 선물도 준비해두고 있었다.(여학생에게는 귀걸이, 내게는 구슬 팬, 남학생에게는 머그) 그리고 선댄스의 효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시아버지가 막내아들 심장에 구멍이 난 채 태어난 것을 알았는데 3일을 꼬박 선댄스를 하면서 기도하고 나서 병원에 가보니까 구멍이 없어져 있었다고 한다. 선댄스에서 하는 기도는 하늘이 들어준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닥터 조는 태어날 때 심장이 구멍이 난 애가 좀 있는데 저절로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타이밍이 맞아서 그렇게 기적으로 믿게 된 것이라는 세속적 인간의 말이다. 기적을 믿는 것, 신성함, 거룩함의 느낌을 갖고 사는 것, 그리 나쁜 것은 아니지.

현장에 가니 정말 남자들은 대단한 주술자이자 의례관장자들처럼 의자에 띄엄띄엄 앉아 있다가 춤을 추곤 했다. 여기서는 어떤 술도 마시지 못한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어둠 속에 옹기종기 모여 구경을 하기도 하는데 가끔 북소리가 대단하게 울릴 때면 요들 같은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 경건한 기운에 어쩐지 나도 좀 거룩해진 것 같다. 이 날도 밤늦게 집으로 왔다.

7월 10일 토요일 드디어 파우와우가 열리는 ‘타오스’로 왔다.

계속 차를 타는 여행은 멀미도 잘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별로 즐겁지가 않다. 서로 길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너무 길다. 이동하느라 형관장과 이야기도 제대로 못했고 더구나 형관장이 따로 택견하시는 분들과 트럭을 타고 가다보니 조율이 잘 안 되는 부분도 생기고 있어서 내가 형관장 트럭에 타는 식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우리 여행의 그간 준비과정에 취지에 대해 다시 설명을 해드리고, 우리 여행에서 꼭 이루어야 할 구체적 목표 등은 없다는 것, 그러니 예상대로 되고 있는지 기대대로 인지 염려 말라는 것, 여러 경험을 하고 과정을 거치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이번 캠프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리고 형관장으로부터 로드리고에 대해, 그리고 요즘 그 분의 근황에 ㄷ해서도 물었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친해지는 것이다. 타오스 근처를 지날 때 지하에 묻혀 있는 집들이 꽤 보였는데 earth house라고 한다. 사막은 덥고 물도 귀해서 사실상 땅속에 집을 잘 짓고 빗물도 받아쓰고 태양열로 쓰면 자연과 잘 어울리는 주택이 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런 집들이 팔리지 않아 지지부진한 상태라 한다. 이런 환경 친화적 가옥에 살면 아주 좋을 것 같은데… 여러 면에서 자생성이 적은 편인 보호구역에서 이런 창의 사업이 잘 되기는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파우와우가 열리는 곳에 오니 축제 분위기가 완연하다. 음식 파는 스탠드가 즐비하고 이곳저곳에 텐트와 임시 장막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살리다 캠핑장에서 슬리핑 백 아래에 까는 패드가 없어서 잠을 잘 못 잤던 학생들은 또 다시 캠프를 할 것을 걱정했다. 다행히 근처 모텔이 방이 비었다고 해서 하나를 잡았다. 미국은 모텔방이 대개 콘도처럼 되어있고 식사도 준비할 수 있고 규모가 커서 사실 많은 사람이 가서 있을 수 있다. 입구도 차가 진입할 수 있게 따로 되어 있어서 인원수가 좀 많아도 신경 쓰는 사람도 없다. 아무래도 식사를 준비할 수도 있고 씻기도 해야 하면 여러 가지로 비용도 절약되고 편리하여 그렇게 했다. 나는 티피에서 북소리를 들으면서 자기로 했다.

입장식을 한다고 해서 북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더니 로드리고 팀도 달시에서 와 있었다. 각 부족 내지 북 팀이 자리를 잡고 돌아가면서 소리를 하고 (전부 16개 팀이 참가했다) 이에 맞추어 춤들을 추었다. 처음에는 다 같이 입장, 종목별로 하다가 손님들도 다 추게 하다가 다음 날도 비슷하게 하면서 ‘최고 춤꾼" 또는 소리 팀에게는 상금이 걸려있다. 상금은 지자체에서도 일부 대지만 카지노나 주변 기업체에서 홍보겸 나오는 모양이다. 전문적 앵커맨이 이런 축제에 돌아다니며 엠시를 봐주는 것 같다. 초반에 그 지역 유지들, 특히 베터란 팀의 입장이 인상 깊다. 미국이라는 국가를 거부하는 발언을 인사말에서 분명 했는데 동시에 미국 군대에 간 베터란을 왜 의식의 중심이 놓은 것인지….의식의 중심부에는 지역 정치, 관료들, 미스 타오스 관련, 베테랑이 핵심이다.

파우와우는 기본적으로 춤과 북으로 이어지는 3인간의 부락제이다. 1990년대에 시작했는데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한다. ‘정체성의 정치학,’ ‘문화의 정치학’이 거세기 인권운동의 핵심으로 떠올라 "black is beautiful" 슬로건이 만들어지고 각 인종 집단이 자기들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시작한 때이다. ethnic studies가 붐이 되어 각 대학에 학과가 만들어진 때도 이 때이다. 여성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때 역시 이때이고…. 로드리고의 아내와 로드 네가 친 텐트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조가 똑 같은 숄을 두개 꺼내더니 함께 추자고 하며 중앙으로 나선다. 그래서 한참 걸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로드도 나왔다 학생들도 춤을 추었다. 춤인지 산보인지…. 남자들은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traditional, chicken dance, Grass Dance (medicine men의 길을 닦는 것), Fancy Dance 등 종목이 다른 춤을 추고 결승에서 그랑프리가 뽑힌다. 여자들은 숄을 걸치고 음전하게 걷는 것이 춤이다. 징글 댄스라는 방물을 달고 추는 춤과 아이들이 숄을 걸치고 깡충거리는 춤이 좀 발랄하다. 어쨌든 나는 미스 타오스가 그렇게 서양적인 미인이 아니어서 일정하게 안도하고 있다. 축제를 참여하다보니 상업화와 정체성의 정치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를 땋은 백인 중년 마른 남자가 아주 흥겹게 뛰어다니며 연신 춤을 추고 있었고 백인 중년부부나 히피 같은 청년들도 나름 흥겹게 참여하고 있었다. 원주민이 아니면서 이런 데를 기웃거리는 이들을 연구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형관장과 이 춤추는 백인 남자 등. 형관장의 또 다른 오래된 친구인 thunder hawk는 이런 춤마당에서는 나름 스타인데 fancy dance를 춘다고 한다. 한 반년은 춤추면서 여러 타운을 이동해 다닌다고 한다. 사실 상금이 많아 그 것을 타고 실업수당 받으면 나름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아주 잘 사는 삶이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을 하면서 말이다. 또 한명의 아이다호에서 온 댄서는 grass dance를 추는데 열 살 난 아들은 fancy dance, 다섯 살짜리는 grass dance를 춘다고 한다. 그 아내는 춤 복을 만들고 장신구도 만들어서 팔면서 공예 가게를 갖고 있다. 파우와우 축제를 중심으로 이런 사람들,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자 생계방법이자 학교를 가진 분들이 네트워크 되어 있고 축제 판에서 자주 만나면서 느슨한 마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밤이 깊어 티피마다 화톳불을 둘러싸고 소곤소곤 이야기도 하고, 우리 캠프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백인 한명이 술주정을 하면서 이곳으로 다가 왔다. 아무도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하자 한 십분 있다가 그는 스스로 물러났다.

7월 11일 일요일 두 명의 ‘와탕카’의 눈물

새벽에는 늘 무대 뒤가 보인다. 물 뿌리는 차가 지나가고 쓰레기를 버리고 전기 소켓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축제를 오래 해본 것을 알게 하는 장치들이다. 푸세식
화장실의 오물 퍼가는 차,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가게들. 각 집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신의 선조들이 했던 식으로 나무를 얼개로 가건물을 짓고 먹을 것과 식탁, 아이스박스를 가져다 놓지만 또한 피자, 인디언 타코부터 옥수수, 레몬주스 등 먹을 것도 아주 많이 판다. 축제가 다시 시작하는 것 보면서 우리는 길을 떠났다.

모텔에서 잔 사람들이 아침을 거하게 준비해두어서 잘 먹고, 로드리고의 아내의 친척이 사는 푸에블로 타운에 들렀다. 그를 방문한다고 하면 입장료를 안 내도 된다고 하면서 입장료도 안 내었다. 확실히 한국처럼 규칙보다 관계가 우선하는 데가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좀 먼 중심가에는 가게들과 교회, 시냇가 등이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다. 예술가들이 한 다양한 작업 물들을 파는 가게들, 오래된 흙집과 빵굽는 오븐 등 볼 거리가 많다. 제주도 민속 마을처럼. 마을 자체가 기독교와 스페인 문화와 미국 문화와 원주민 문화가 절충된 예술작품이다. 관광 가이드를 하는 청년들은 푸에블로 부족의 자손들로 대학생인데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아예 이 직업을 가진 이들이라 한다. 6월에 다녀온 비엔나의 백인 청년들처럼 이들은 자신의 족보와 문화를 이야기 하면서 먹고 사는 것이다. 물건을 팔고 이야기도 팔고 노래도 판다. 정교한 바구니며 드림 켓쳐며 사고 픈 것들이 꽤 있다. 음악을 직접 지어서 시디를 낸 분이 차린 가게에서는 악기도 만져보고 북도 만들고 춤 복도 만드는 공예가들 craftsmen의 집에서는 작업 구경도 할 수 있다. 이들은 요즘 불경기라 어려운 모양이다.

드디어 Little Beaver Festival이 열리는 달시Dulci에 왔다. 사막의 막다른 곳, 활량하다. 마을 뒷산에 UFO가 오는 언덕이라고 히피들이 찾아오기도 한다고 했다. 여기서 앞으로 9일을 묵게 된다. 우리는 원래 학생들 기숙사 (Jicarilla Student Residence)에서 머물고자 했는데 정부에서 전원 신원조회를 해야 한다고 해서 3개월 정도는 잡아야 하는 것이라 마침 아주 큰 집을 갖고 있는 로드리고 아들집에 머물기로 했다. 그 집에는 네 살짜리 로건, 그 위로 한 두살 터울로, 알렉스, 레오라는 아이들이 있고 로드리고의 아들인 자라드는 응급실에서 일하느라 없고 (주 3일을 꼬박 외박하면서 일하고 나머지 4일은 논다고 한다. 술 주정을 하면서 죽겠다고 하는 일이 가장 괴롭다고 한다.) 며느리 제니퍼가 무척 반기며 우리를 맞이한다. 방학이라 아이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면서 우리가 와서 너무 반갑다고 했다. 학생들이 아이들과 놀아줄 것이라 자신이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가족은 이층에 따로 있고 우리는 일층과 베란다에서 지내기로 했다.

이 집은 상당히 크고 베란다도 넓어 그 집 식구와 우리 열세명이 지내기에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어쨌든 캠핑을 해본 바라 슬리핑 백안에서 자는 것은 익숙해져있고, 찬 기운이 올라오는 생땅바닥보다 카펫에서 잔다는 것에 모두 흡족해하는 모양이다. 나중에는 카펫에서 냄새가 나느니 불평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첫날에는 모두가 감지덕지한 분위기. 그런데 이 집은 실은 이달 말에 이사를 가게 되어 있어서 좀 어수선했고 개수대가 고장이 나 있었다. 그래서 싱크대 아래에 물받이를 두었다가 차기 전에 비워야 쓸 수 있다. 이 불편을 감수할 것인가? 우리 각자가 일원이 되어 이런 것을 챙기는 것은 나쁠 것 같지 않아 불편을 감수하기로 했다. 얼마나 물을 차고 넘치게 하나 봐야지. 식사 당번을 정했다. 주말이라 슈퍼는 이미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런데 술은 늦게까지 판다고 로드리고가 분해하면서 말했다. 로드리고는 부모가 모두 알코올릭이었기 때문에 술을 전혀 마시지 않고 자신은 언젠가 이 알코올릭 문제를 풀고 싶다고 했다. 그는 베스트 웨스턴 호텔 바로 옆에 있는 동네 술집을 두고 ‘동물원’이라고 불렀고 그 술집은 꼭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선 선생님이 보호구역에는 술을 살수 없다고 했는데 변하긴 많이 변했나부다.

형관장에서 이 부족과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를 들었다. 우연히 길을 잃어 길을 물은 사람이 로드리고 이었고 로드리고가 자기 집에 가자고 했고 그 이후 가족끼리도 함께 놀러 다니면서 형제애를 다진 의기투합의 관계이다. 형관장은 인디언들이 당한 역사를 말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용사의 눈물이 우리를 좀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는 재앙의 날이 오면 이곳에 와서 살거라고 했다. 미국내 피난처? 하기야 이런 숨어 있은 곳이 필요한 시대이긴 하지. 뒤늦게 자라드가 오니 형관장이 소년 적에 보았다면서 오래 못 본 조카를 만났듯 머리를 만지고 뽈을 다듬으며 다정함을 표시한다. 두 집안이 아이들 데리고 몇 번 만났었고 자라드가 대학 1학년 때인가 한국에 한번 왔었다고 한다. 그래서 교육부에서 하는 영어교사로 올까 했는데 백인을 원한다고 해서 못 왔다고 한다. 엥? 나는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사실 자라드는 여학생들도 연신 말하지만 미남 중 미남이고 사실 피도 섞었을 것이고, 국적은 미국인인데 100% 백인을 원하는 건가? 잘 모를 일이다.

형관장 팀은 다음 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여정이어서, 학생들이 한마디씩 쓴 카드와 선물을 준비하고 송별 모임을 가졌다. 학생들 한명씩 돌아가며 감사의 이야기 겸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형관장은 일일이 코멘트를 하였다. 닥터 조도 화요일에 떠나는 여정이라 겸사겸사 감사 인사를 했다. 그 많은 짐을 말끔하게 트럭에 정리해서 싣곤 하던 형관장은 아침에 커피를 막 갈아서 최고의 향과 맛을 가진 커피를 끓였고, 이동을 지도하느라 힘이 들었을 것이다. 닥터 조는 긴 여정 운전을 해주었고, 정수 조교 운전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최근 LA 라디오 방송국에서 노래와 시낭송 한 것을 녹음한 시디를 틀어놓고 차안 분위기를 띠우면서 즐겁게 여행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나이 들어도 늘 청년인 피터 팬들이다. 멋지게 살다 죽고 싶은 사람들, 쾌락주의자이면서 허무주의자인성향이 농후한 이 두 남자 덕에 우리가 좀 특이한 여행을 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스타이기만 했던 이 세대 잘 나가는 남자, 팬덤에 대한 인식이 없는 이 세대 남자 두 명과 스타가 되고 싶지만 더 이상 스타가 되기 어려운, 그러나 팬덤의 일원으로서의 경험과 즐거움을 아는 아래 세대 친구들이 정말 진지하게 만날 수 있을까? 이는 대단한 실험이 될 일이다.

내심 나는 이동하는 동안 이 두 남자, 일생동안 스타이자 ‘캡틴’이자 ‘배우’이자 ‘기획연출자’로 살았던 두 명이 싸우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둘이 아주 다정하게 지내주어 고마웠다. 학생들은 진솔하게 이 두 남자 어른과의 만남을 의미화하면서 화기애애한 송별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닥터 조는 한 사람 한사람 이름을 부르며 덕담을 하였고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려고 시를 읊는 시도를 하다가 울고 말았다. 그가 낭송한 시 중에 "울지 않고 헤어지려 했는데 그만 울어서 스타일 구겼다"는 시처럼 되어버렸나? 남자들이 왜 이리 눈물이 많아졌을까? 최근 두 분 어머니가 돌아가시긴 했지만 많이 외로운가? 생물학적으로 마음이 약해지는 나이이기도 하고 시대적으로 외로운 시대이기도 하고…

그 두 분은 많이 아쉬워했지만, 솔직히 나는 이 정도에서 헤어지는 것에 안도한다. 이동을 하는 한 주일 동안 터지지는 않았지만 작은 불만과 갈등이 쌓였는데 이대로 한 주일을 더 가야 한다면 한바탕 대대적인 회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세대간, 남녀간, 성향과 취향 상의 차이들을 조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함께 오래 지내려면 특전의 방법이 필요하다. 이 정도로 같이 가는 것은 그런 면에서 적절하다.

이제 이동의 시간은 끝나고 정주하는 시간이 시작된다.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어려워질 테고 이제 좀 다른 상호작용이 시작되겠지.

7월 12일 월 또 한명의 꿈꾸는 남자 로드리고

로드리고와 본격적 상견례를 했다. 그는 하자 센터 기획부장 ‘강구야’처럼 꿈꾸는 사람 부류에 드는 인간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 엮고 기획해내는 일이면 신이 나고 자신은 때때로 예술 작업에 몰두하기도 하는, 여러 면에서 포용력이 엄청난 사람. 로드리고는 이번 우리 여행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네트워크를 총 동원해서 직장도 휴가를 내고 완전 헌신봉사를 하고 있다. 순수 그대로 받아들이긴 하겠지만 여전히 인류학자로서는 조만간 그를 파악해야 한다. 그는 우리와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그냥 우리와 친구? 아니면 마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싶은가? 그의 이 타운에서의 위치는?

오전 중에 Jicallia Apache Nation이라는 크게 쓴 정부 건물에 갔다. 에너지 회사와 중요한 사업관련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라 좀 기다리라고 한다. 기다리다가 그 지역 최고위원들이 모인 국회의사당 비슷한 방으로 안내 되었다. 학생들의 사물놀이 실력은 날로 늘고, 인사말도 날로 발전하고 있다. 나는 매번 그 자리에 맞는 인사말을 생각하느라 고심을 해야 했다. 이분들에게는 " It’s time to deconstruct the world centering on the concept of nation state and to construct the world through reconstructing tribes"라는 식으로 운을 떼었다. 알아들으시던 말았던 뭐 그 정도로 개념 을 쓰면서 우리 팀을 소개하는 것이 이런 공식적 자리에서는 나을 듯해서다. 아닐 수도 있지. 오히려 공식적이고 공손한 태도가 내용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고… 어쨌든 학생들의 사물놀이와 에너지로 모두가 우리를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로드리고는 우리 연대를 소개하면서 미국의 예일대학 같은 대학이라고 비교를 했다.
로드리고가 짠 스케줄을 보니 1) art and craft 센터 2) Rehabilitation 노인 센터 3)Gas 회사, 4) 교회 등에서 주로 식사를 대접한다고 되어있다. 특히 가스 회사가 두어 군데서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하게 되어 있는데 이날 점심은 한 가스 회사에서 지원을 해서 베스트 웨스턴에서 먹기로 되어있고, 저녁식사는 로드의 친구인 린다네 식당에서 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식사를 계속 얻어먹어도 되는지 도무지 불편했다. 특히 교회에서 왜 식사를 준비해주는지, 그렇다면 우리가 헌금을 해야 하는지 등등 질문을 전부터 이메일로도 묻곤 했는데 로드는 신경 쓰지 말라며 별 신통한 답을 주지 않았다. 와탕카 닥터 조는 심심한 시골 생활에 재미난 팀이 와서 반가워서 손님 대접을 하는 것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우리로서는 식사비용이 많이 절약되어 좋긴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그들이 우리를 초대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천천히 알아가도록 하자.

점심을 Jayco라는 회사가 산다고 해서 Best Western 호텔에서 먹었다. 이동하던 삶이 이제 서서히 정착하는 삶의 패턴으로 바뀌고 있다. 오기 전에 나는 일본에서 사온 젓가락 집을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가능한 한 일회용을 쓰지 않도록 하고 그런 면에서 컵도 가지고 오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행해지지는 않는 듯하다. 이런 것도 강제로 하지 않기로 했으니 안 하면 할 수 없지. 그러나 한번 섭섭함을 표시하기는 해야 할 테지. 젓가락을 가지고 다니면 뭔가 작지만 많은 것이 근본적으로 달리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좋겠다. 잔소리를 되도록 않고 일이 굴러가는 것을 관찰하면서 가기로 한다.

Art and Craft센터를 둘러보았는데 타오스의 나바호 타운과 비교하면 아주 초라하다. 집들도 타호는 흙집들이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은 그냥 보통 조립식 양옥들이다. 센터에는 13명이 일하는데 작업자들이 한두 명, 컴컴한 방에서 따로 따로 자기 책상에서 작업을 쉬엄쉬엄 하고 있다. 이런 만드는 작업은 둘러앉아 이야기 하면서 해야 하는데 작업장은 정말 실망스럽다. 여름 직장으로 이런 일이 해보고 싶어서 이 일을 지난달부터 하고 있다는 명랑한 30대 여성은 구슬로 화병을 만드는데 대략 하나 만드는데 한 달 반 걸린다고 한다. 재료가 떨어지면 중단해야 해서 더 걸린다고 하고… 히커리아 아파치 부족 멤버의 경우, 직업이 없다고 관청에 찾아가면 24시간 안에 일거리를 찾아준다고 하는데 그 일들이 바로 이런 일인 모양이다. 사회보장제의 차원에서 이런 일들, 다시 말해서 꼭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을 연결해주는 것이다. 솔직히 사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버펄로 키우는 집에도 갔다. 로드리고는 자기들이 버펄로를 키워 먹기도 하고 털을 신발도 만들고 티피 짓는데도 쓰고 여러 가지로 공생하면서 살았는데 1890년에 정부에서 사냥꾼들이 마음대로 버펄로를 잡게 해서 (주로 백인) 사냥꾼들이 총으로 마구 쏘아 죽이고 털만50불씩에 팔아넘기면서 거의 멸종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원주민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버펄로와 공생하던 삶의 뿌리를 흔들어버렸다. 그 이후 원주민들은 미국 국가에 의존하는 보호주민이 되었고 패스트푸드 등을 먹어 다이어트도 바뀌었다고 한다. 연주는 원주민들의 비만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고 했다. 소년이 우리를 안내하는데 할머니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할머니가 가족의 중심임을 느끼게 한다.

저녁은 로드리고의 친구인 린다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했다. 친척 중에 한국여성이 있었다면서 김치 비슷한 것도 만들어두었다. 로드리고의 가족, 손주 시드니, 이들 부부가 양자처럼 키웠다는 조카 둘도 와서 함께 식사를 했다. 라이언과 달시는 부모가 없는 고아가 되어서 친척인 이 두 부부가 자식처럼 키운 경우라 한다. 이들은 이후에 계속 시간만 나면 우리 집으로 와서 티비를 보고 있었고 우리를 도우고 싶어 했다.

자라드와 막내아들, 그리고 닥터 조는 사냥 하러가고 로드리고는 해질 즈음 우리를 자신들의 신성한 예식 터인 고지야에 데리고 갔다. 붉고 하얀 색의 두 팀으로 나누어 릴레이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홍군이 이기면 여름이 덥고 과일이 풍년들고, 백군이 이기면 겨울이 길고 곡식이 잘 된다는 등 예견도 한다. 축제라기보다 부락제 비슷한 행사로 타운의 모든 사람들이 타운을 비워놓고 그곳에 움막을 짓고3일간 캠핑을 한다고 한다.

로드리고는 우리에게 별이 나올 때까지 숨을 죽이며 소리를 듣자고 했다. 그는 자기 땅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느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로드리고의 욕망, 소원,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은 뭘까? 아파치성과 원주민 역사를 되찾는 것? 워크숍을 하고 퍼레이드를 준비하며 같이 노는 것? 자기들의 삶과 제도에 대해 알게 하는 것? 그는 그냥 우리가 즐겁게 있다 가면 된다고 했다. 이문열의 안개마을에서처럼 아직은 이 마을은 우리에게는 안개가 자욱한 마을이다.

7월 13일 화 안개 마을을 산책하다.

학생들이 벌써 아이들과 친해져서 잘 지낸다. 그리고는 곧 이 가족이 우리의 관찰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 가족을 통해 아주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연구 윤리위원회’를 거치지 않았고 프라이버시 문제가 조금 걸려서 가족 이야기는 안 쓰기로 한다. 단 제니퍼의 부모는 둘 다 변호사였고 아버지는 아주 존경받는 원주민 인권 변호사였는데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 그 분들이 이 마을의 실제를 아니라는 것, 어쩌면 외부로 나간 분들이어서 오히려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 자라드는 고등학교 졸업 하자마자 히스패닉 계통 여성과 결혼해서 세 아이를 낳았는데 최근 헤어졌고 제니퍼는 새 아내라는 것, 둘이가 지금 적응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자라드는 의사 공부를 하러 외부로 나갈까도 생각하고 있고, 제니퍼는 earth house 사업 같은 것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전통적인 8각형 집인Hogan, 그리고 최근에 나오고 있는 earth house가 있는데 Hogan은 대부분 여유 있는 이들이 갖고 있고, 아니라도 여유가 생기면 제 2 하우스처럼 다 하나씩 가지려 한다고 했다. 그러나 earth house는 재활용 자재 (타이어등)를 쓰고 여러 가지로 innovative 하지만 집에 대한 이미지가 안 바뀌는 한 잘 사지 않아 사업이 어렵다고 한다. 나중에 로드나 애쉴리 등에게 물어보니 실제로 보호구역의 집들은 정부에서 지은 것이고 그것을 원주민들의 수입에 따라 적절한 비용을 받고 살게 하여 십여 년 후에는 돈을 다 지불해서 자기 집이 되는 식으로 가기 때문에 이런 모델 집이 나와도 살 만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대학원까지 나온 제니퍼는 도서관 같은 곳에서 일을 했는데 좀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제주도 같은 규모와 역사적 배경을 가진 경우가 그렇듯, 나갔다가 들어온 이들에 다시 정착하기에 텃세가 심한 편이고, 이 부부가 그 문제로 힘들어하는 것 같다.

베란다에 한가득 걸려있는 빨래를 보니 브라자, 팬티가 다 늘려있다. 남녀평등이 되긴 된 것이지. 아직도 월경을 하면 월경 초가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하는 베티는 이렇게 하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학생들을 식사 당번을 정해 잘 움직인다. 조교의 지도력도 큰 몫 하는 것이겠지. 농활경험을 한 친구가 꽤 되는데 이런 것이 이번 탐사 과정의 일상적 생활을 조직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실은 어떤 경험이든 진한 경험은 소중한 것이다. 농활은 극기 훈련, 매일 자기반성 시간을 갖고 선배로부터 비판을 받는다고 하던데 이 모임을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보통 워크 캠프와 뭐가 다르며 EU탐사 등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가능한 한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까? 질문을 던지는 것, 무엇이 알고 싶은지를 알아내는 것, 서로 껄끄러운 부분에 대해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것. 지금은 그 단계이다. 그러나 그때그때 이야기하기보다 각자 그냥 끌어안고 가는 시간을 늘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게으름일까? 우리는 모두 수의 묘한 재채기 소리에 익숙해지면서 식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부족 관저 뒤에 있는 주민 센터에는 샤워실과 수영장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제니퍼네 집 샤워실도 하나는 고장이 나서 이곳에서 샤워를 하는 식으로 했다. 그러나 실은 차가 없으면 이동이 어려워서 그리 많이 활용을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오전에 전체 마을 전경도 볼 겸, 일단 고등학교에는 모두 가보기로 했다. 어제 교장과 약속을 했는데 회의 있다고 안 나타나고 며칠 전에 부임했다는 남자 교사를 만났다. 특별활동 교사인데 그 방에는 자신이 군대 있을 때 사진과 훈장으로 장식이 되어있다. 활발한 친구이고 금방 이라크에서 돌아와 제대하였다고 한다. 아내와 함께 둘 다 이곳 교사가 되었다고 아주 신이 나 있고 의욕도 대단하다. 조는 이런 분이 많으면 학교가 좀 달라질 텐데… 라고 말했다. 정말 많은 돈을 들여 최첨단 장치를 구비한 학교이다. 학생들은 이곳의 제도적 차원을 보고 있는 셈이다. 학교가 전국에서 아주 성적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하여간 자치정부에 돈을 많은 모양이다. 주정부에서도 돈을 지원했겠지만 대단한 건물에 비해 학교의 수준에 대해서는 주민들의 불만이 많다고 한다. 다목적실에 첨단 작곡 가능한 컴퓨터 등 시설은 정말 좋다. 교환학생제도를 활용해보자고 했더니 아주 좋다고 한다. ‘Isolation room’이라는 팻말의 벌주는 작은 방도 있다. 쉬는 시간을 3분으로 줄였다 한다. 아이들이 딴 짓 하거나 싸우지 못하게 하려고… 학교가 아니라 감시와 통제의 공간이로군. 시간이 되면 와서 학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고픈 곳이긴 하다.

오늘부터 일이 많다면서 로드리고는 학생들을 팀으로 나누어서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겠다고 한다. 나는 조와 Cultural Center에 잠시 들렀다. 아이들을 위한 캠프를 한 사진도 벽에 붙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의 장소인 듯하다. Sookie Vicente라는 영리하게 생긴 할머니가 계셔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통성명을 하고 내일 오겠다고 했다. Vicente가 여기서 꽤 큰 집안인 모양이다. 로드리고의 친구이자 소리꾼인 vice president도 비센테이다. 이곳 원장은 계속 한국의 남북한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전쟁이 터질 것 같으냐고 묻는다. 역시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분들은 군대를 자원해서 간 베테랑 들이고 그래서 이런 것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막강한 조직이 바로 베테랑 조직인 것이다. 각 집안 외에는 그 외 별다른 조직이 없다. 원장에게 센터에서 하는 일을 물으니 건성으로 원주민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고 전통을 되살리려 한다고 했다. ‘dominant culture’라는 단어도 자주 쓴다.

지역방송국에 들렀는데 다들 바빠서 설명해줄 사람이 없다. 자라드가 학교 다닐 때 하루 6시간씩 방송을 했다는 소문도 있다. 그 뒤에 있는 법정 건물. Jicarilla jurial에서 ‘커리어 fair’ (직업 박람회)를 하고 있었다. 아이폰 경품이 있다고 다들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업이란 주로 oil company 관련 일, 삼림 보호, 공무원일 등이다. 그곳에도 부채, 햇볕막이, 물통, 볼펜, 핸드폰 집, 포스터, 사탕, 가방 등 아주 많은 선물들이 있었다. 선물공세가 축제의 주요 부분인 모양. 현과 송이송이 미스 히커리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부지런하고 눈치 있는 친구들이군. 끝나고 나오는데 로드리고가 일하던 친구들이 선물 가져갈 수 있게 하려고 몰고 오고 있었다. 다 끝났는데… 샤워 하러 커뮤니티 센터에 갔더니 강당에서 미스 히커리아를 뽑는Traditional royalty pagent를 하고 있었다. 잠시 보는데 그야말로 개별 장기자랑이다. 매니저 맘과 가족 지원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곳이군. 나는 일찍 집에 오고 현과 수만 남아서 끝까지 보고 왔다.

제니퍼 집에 이라는 영화가 있어서 다 함께 보았다. 두 청년이 원주민 청년으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인데 실은 전형적인 버디 로드 무비이기도 하고 한편 원주민 사회의 모중심 가족의 일면을 보게 한다. 한창 민권운동이 일었던 1990년대를 지나면서 나온 영화일 것이다. 미국의 변두리에 사는 흑인, 빈민층에서 나올 법한 영화이고 원주민 감독이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인권운동은 그래서 보편적이면서 또한 특수한 것이고 우리는 이 둘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질 즈음에 원주민 민권운동이 아주 활발한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니퍼 가족을 몇 번을 보았다면서도 즐거워하면서, 노래를 따라하면서 함께 보았다. 어린 아이까지.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가!

7월 14일 수요일

학생들은 ‘공익’을 하러 가고 나는 연과 함께 가서 수키를 인터뷰 했다. 33년 출생, 기숙학교에 대해 물으니 좋지 않았던 기억을 다 말한다. 원주민 말을 하면 비누를 먹였다던데 정말이냐고 물으니까 혓바닥을 내라고 해서 비누를 묻혔다고 했다. 어두운 벽장에 가두거나 자로 때리거나 해바라기인지 아주까리인지 기름을 먹이기고 머리를 끄댕기고 자르기도 했다고 한다. 어디나 체벌을 비슷하다니까… 자기가 결핵 같은 병에 걸렸다고 어릴 때부터 몇 년 동안이나 sanatorium에 감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선생님들이 대개 Dutch 계통 reform church 사람들이고 이름에 Von이 붙어 있었다고 하였다. 37년부터 기숙사 학교가 생겼고 50년대 중반에 public school이 생겨서 기숙학교는 많이 없어졌다고 했다. 아마 이 주제는 연구가 잘 되어 있을 것이다. 수키 씨는 이동하면서 살았던 어린 시절에는 가축을 돌보면서 텐트 같은 곳에서 살았고 화장실도 없고 청소 개념도 없었는데 학교 다니면서 그래도 청소하는 법, 다림질 하는 법을 배운 것에 대해서는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위생관념’을 통해 원주민 아이들은 자기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국민’으로 키워낸 것인 게다. ‘위생개념’은 정말 막강하다. 수키는 그때 배운 대로 깔끔하게 청소하고 다림질 하는 것을 좋아하며, 이 센터에서도 그 일을 하면서 산다. 그는 생각보다 이야기가 풍성한 분은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대해 물어보니 ‘종말의 시대’라고 하면서 기후 변동, 2008년 뉴욕의 주식 폭락이 재앙이고 물, 식량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라 했다. (그래서 비상식을 많이 사두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중학교에 교회 사람들과 가서 했다가 학부모가 아이가 공포에 떨게 되었다고 해서 이제 학교에도 안 간다고 했다. 나중에 보니 침례교회를 다니시는 분이셨다.

Jayco 회사에 전날 점심 식사를 호텔에서 제공해준 데 대한 보답방문을 했다. 회사 사무실들이 큰 조립식 건물 안에 모여 있었다. 히커리아에 공유지가 백만 에이커도 넘고 1946년에BP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유지는 청정지역은 사냥터를 사용하는 권리를 팔아서 돈을 벌고 (일 년에 9천불 정도한다고 한다. 확인 필요한 정보), 그 외 땅은 나누어서 회사에 빌려주는데 현재 3500개의 기름샘이 있다고 한 것 같다. 기름이 나오면 기름의 일부도 자신들이 갖게 되는 계약. 현재 이 회사는 Sect 17구역을 빌려서 사업을 하고 있다. 사장과 세 명의 직원이 이번에도 가방과 물병, 볼펜 , 노트 등 선물을 가득 준비해서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백인 엔지니어인 사장은 1976년 대학 졸업 후에 계속 이 분야에서 일하는 데 여기 온 것은 1996년부터라 한다. 그는 자연 가스와 석유, 그리고 히커리아 지자체 (nation)의 몫, 그들이 가진 아직도 광활한 자원이 많은 땅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은 회사 지분이 26%밖에 안 되는데 80%까지 올리겠다는 말을 했다. 지도를 보면 실측을 하지 않고 그냥 사각형으로 나누어놓고 그 중 일부를 회사에 떼어주는 등으로 분배하는 것을 보게 된다. 식민지 시대 땅을 나누듯 그렇게 위에서 땅을 나누어서 팔고 사고하는 것이다.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볼 주제. 사물놀이 공연을 한 차례하고 나는 마치 앵벌이를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다. 한국의 대표단으로 자부심을 느껴야 하는데…

옆 건물로 이동해서 로드리고 회사에서 점심을 먹었다. 각자 요리를 해온 것이어서 학생들이 가장 맛있게 먹은 점심이다. 특히 백인 청년이 해온 파스타와 닭죽 같은 요리가 인기를 끌었다. 로드리고의 회사여서 인지 분위기가 더욱 화기애애하였다. 또 한바탕 각자 소개, 우리 팀 소개, 공연. 이제 국제 사절단으로 익숙해져가고 있는 것인가…

Game and fishing department도 들러보았다. 수백만 에이커의 사냥터가 있는데 13명이 패트롤을 보고 있다고 했다. 패트롤 보는 분에게 싫은 일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페이퍼 워크,’ 그리고 "자동차 사고로 찌그러진 차 치울 때’라고 답한다. 하루에 300마일을 달린다고 한다. 히커리아 아파치는 herding sheeper로서 1887년에 보호구역으로 내몰려 들어왔고 1937년 ‘nation’ 자치구가 되었고 1946년에 오일 가스가 나왔고, 1952년 투표권을 갖게 되었고, 1980년대 닉슨 때 bill 통과시켜서 지금의 권리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다른 곳으로 나눠진 동안 나는 로드리고의 아내인 조와 학교, 그리고 교육청을 돌아보았다. 자기는 아이들을 근처 차마 Chamma라는 곳에 보냈다고 하였다. 매일 46마일을 운전했다고 하니 대단한 분이다. 히스패닉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고 학교가 좋았다고 했다. 외국과 교환학생 제도도 있고… 아이들이 유타 주에 있다가 이곳으로 왔는데 적응하기 힘들어해서 그렇게 했다고 했다. 실제로 성적이 거의 전국 바닥인데다가 아이들이 외부에 나갈 생각을 않고 여기서 그냥 안주하려 한다고 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대학에 가고 싶거나 외부로 나갈 생각을 하게 키우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냥 직장을 원하면 18세 되기 전에 청소하는 일(beautification)을 주고, 그 다음부터 원하는 곳에 배치해서 이 지역에서 그냥 주저앉아 살게 하는데 조카인 달시가 마침 이번에 졸업을 해서 좀 더 잘 알고 있었다. 취직이라고 해야 이곳에서 하는 일이란 주로 단순 사무직, 노동, 가게 점원, law enforcement (감시자, 경찰 비슷한 일)이라고 한다. 남자들은 사냥터에서 외부인들을 감시하는 일을 주면 되고, 그래서 원주민 상당수가 경찰 비슷한 패트롤 일에 관련하고 있는 듯하다. 마침 직업 박람회가 주민회관에서열리고 있어서 그런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스 회사에 취직을 안하면 거의가 산림쪽 일이다. 카지노와 오일 회사에 취직하는 것은 월급도 좋고 모두가 원하는 일이지만 아주 어려운 일이다.

조의 생애사를 듣게 되었는데 로드리고가 고교 졸업하고 salt lake city에 가서 대학을 다녔고 그 즈음에 만났던 것 같다. 졸업 후에 그곳에 살고 싶었는데 로드리고 어머님이 아파서 돌아왔다고 했다. 실은 양가 부모님이 다 알코올릭인데 로드리고는 할머니가 키웠고 자신의 경우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려서 아버지가 매우 강하게 키운 경우라 한다. 몇 년 전 어머니가 찾아서 만나긴 했는데 별로 마음이 안 가더라고 했다. 자신이 버리고 갔으니 별로 알고 싶지도 않더라고 했다. 딸 둘이 다 외부에 살고 있는데 지금 외손주를 방학 동안 봐주고 있었다. 자신도 이제 학부모 노릇이 끝났으니 직장을 찾는 중인데 사실은 외부로 가서 카운슬링 같은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많다고 했다. 그런데 로드리고가 이곳을 너무 좋아하고 사실 헤어져도 되고 이혼 한 사람이 안 한 사람보다 더 많지만 그렇게 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는 약간 무시하는 투로 여기에는 느리고 무지하고 뚱뚱한 사람들이 남아있다고 했다. 작년 미스 히커리아가 아주 똑똑하더라고 말했더니 그가 너무 똑똑하다고 비난을 받았다면서 이곳은 결국 쪽수로 밀어붙이는 사회라 한다. 부족민들에게 복지 제도가 잘 되어 있다고 해도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아서 자기의 딸도 이곳에서 서류를 제때 못 만들어주어서 결국 개인적으로 대출을 받아 대학원 학비를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제대로 돈이 있어도 탈 수가 없을 정도의 무능한 관료제라니…

저녁 식사는 다른 가스 회사 사장 Ashley씨가 산다고 했다. 동네 공원에 가니까 뷔페가 배달되었다. 이 분은 이 지역 출신으로 회사 직원으로 시작해서 사장이 되었으니 가장 성공한 분이 아닌가 싶다. 그 집 딸이 재작년 미스 히커리아 이었다고 한다. 애쉴리는 근처 대학을 다니고 넷째 딸로 아버지와 똑 같이 얇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록을 좋아하고 집 고치기 등을 좋아하는 touch girl 이미지. 홍대에 데려다 놓으면 아주 잘 놀 친구이다. 그 공원에서 한바탕 사물놀이를 치고 소화를 시키고 있는데 로드가 깜빡 했다고 침례교회에 식사를 하러 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부리나케 두 번째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수키도 있었다. 교회 목사의 친척들, 아름 아름이 모여 있다. 노을을 보며 또 한바탕 사물놀이 공연을 보고 춤도 추었다. 아주 상쾌한 저녁이었다.

밤에 잠시 애쉴리 집을 방문해서 그의 옷도 구경하고 집도 구경했다. 전형적인 미국 중상층 거실이다. 대단한 스테레오 장비며 TV가 있어서 학생들이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이른바 이 타운의 엘리트 집안이라는 것이 물질적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집. 특히 애쉴리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능력 있는 매니저 맘 유형이다. 애쉴리는 그것이 좀 부담스럽지만 또 그런대로 괜찮다고 한다. 마을 축제가 있으면 결혼한 자녀들이 다 와서 그 큰 집에 가득차고 텐트를 쳐야 하기도 한다고 한다. 아주 큰 개도 두 마리나 기르고 있다.

학생들은 개수대를 잘 비우고 있고, 그런 대로 즐겁게 지내고 있다. 슬슬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쑥덕거리기도 한다. 편이 갈리기는 듯 하고, 한명을 조금 따돌리는 듯하다 하고 별로 문제가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갈등을 풀려는 자생적 시도도 이루어지고, 서서히 자신들의 성향을 그대로 노출시켜내고 있다. 그 차이들, 그 불만들이 어떻게 조율이 되어갈 지… 회의를 한번 할까 하다가 왠지 잘 될 것 같고 해도 소용이 별로 없을 것 같아 긴 호흡으로 가기로 한다.

7월 15일

학생들은 다시 팀으로 나뉘어 여러 일로 분주하다. 나와 9시에 조와 함께 미리 약속을 잡아둔 장학관을 만나러 갔다. Dr Rose Rooth superintendent. 히스파닉계의 자신만만한 여성이다. 이곳 학생 95%가 히커리아 아파치 부족이고 자신은 이곳의 낙후된 고등학교를 과학과 기술 특화 학교로 만들어서 학생들을 잘 키워보려고 한다고 했다. 컴퓨터실에는 smart lab이라는 곳에서 개발한 창의 학습용 기자재와 교재를 일습 다 들여다 놓았다. 제대로 사용이 되는지, 되더라도 도움이 되는 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학습 회사가 개발한 Creative Learning Schemata 제품인데 글쎄, 이곳 아이들에게 맞는 시스템일일까….너무 자신만만해서 그냥 별 말 하지 않고 나왔다. 그는 현재 가장 자살방지라고 했다. 작년에 5명, 올해 2명의 아이가 자살을 했다고 한다. 역시 가정 폭력과 술 중독이 심각하다고 했다. 그는 내게 당장 수학교사를 좀 구해달라고 했다. 교사들이 이곳까지 안 와서 외국인이 특히 여름학교 교사로 많은데 필리핀에서 온 과학교사도 잠시 만났다.

로즈는 막 부임한 중학교 교장을 만날 겸 중학교에 가자면서 안내를 해주었다. 중학교도 5-6년 된 듯하다 좋은 시설이었다. 키가 큰 백인 교장은 근 60대가 된 나이인데 여기 학교가 문제가 많아 자기가 특채로 왔고 새롭게 학교를 살리기 위해 기존 교사도 면직시키거나 다른 곳으로 보낼 자격이 주어져있다고 했다. 교장실을 학부모들 대기실로 바꾸어 학부모들이 동생을 데리고도 학교에 올 수 있고 보다 학부모 친화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나름 구상이 있는 듯 한데 명함을 달라고 하는데 주지 않았다. 다음에 오면 이 분을 제대로 인터뷰해도 좋겠다. 은퇴한 분들이 이곳에 이렇게 와서 지낸다.

오후에 학생들이 노인 센터 (Senior Citizen’s House)에서 잔디를 깎을 것이라고 해서 가보니 학생들은 다른 곳에 가버렸고, 국제 스팸 커빙carving 대회를 한다고 센터장이 반긴다. 공짜 점심을 그곳에서 먹자고 해서 앉았더니 마침 수키가 그 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반가워하면서 금방 다녀온 학교이야기를 꺼내니까 그는 학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34명 중에 17명만 졸업하고 아이들 대학 보내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probation 중이다."라고 말했다. 학교 무용론. 실제로 수키 세대의 경우 기숙학교를 다녀서 전통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고 구박을 받는 세대이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이분은 꽤 존경을 얻고 있는 듯하다. 수키 옆에 있던 한 노인여성이 이 동네 진료소에서 준 약을 먹었는데 피부 알레르기가 심하다면서 자기들을 ‘기니아 피그’로 약물 실험을 한다고 흥분을 하였다. 약을 잘 못 주었다는 것이다. 이분의 딸은 산타페에서 왔는데 변호사라고 한다. 오늘 스팸 카빙 심사 위원으로 초등학생 딸을 데리고 와서 일을 돕고 있다.

뉴욕에서 사진으로 학부를 마치고 이곳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Gouger Vigil이라는 청년과 어제 공원에 이어 여기서 또 마주쳤다. 자기 이름이 ‘산 사자’이라는 의미를 가졌다면서 한국어로 써달라고 한다. 이들은 이름을 아주 중시한다. 그에게 고등학교에 가서 사진반 같은 활동을 하면 재미있지 않겠냐고 했더니 자기 나름의 사진 철학을 만들었기에 정규교사나 교수가 되어서 자기 시스템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그러려면 작은 경험부터 해야 하는데 도통 그럴 생각은 없는 듯하다. 이 친구 역시 ‘과정’에 대한 감각이 안 생긴 모양이다. 식민지 주민일수록, 과정에 대한 감각이 퇴화되기 쉽다는 사실은 이 많이 배운 친구를 통해서도 확인하게 된다. 우리 팀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고 한다. 학생들은 벌써 이 친구에게 ‘신촌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촌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모습이라고… 그는 자기 어머니가 여기 무슨 센터장이라고하고 학교 시스템의 문제를 아주 잘 알고 카운슬러로 일을 제대로 하고 계신 초등학교 교사를 알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 소개를 받아야지.

그런데 스팸 카빙 carving, 스팸을 조각하다니… 조각해서 그것을 먹나? 버린다면 먹는 것을 그렇게 버려도 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노인센터 책임자가 계속 나와 촬영차 간 영에게 100명이 되어야 스팸 커빙 콘테스트 시작한다고 꼭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것이라고는 취지도 재주도 없지만 할 수 없어서 관찰도 할 겸 다시 식당으로 가서 손으로 스팸을 만지기 시작했다. 스팸 한 통, 칼, 이쑤시개 한통, 그리고 손 닦을 위생 물 종이를 주었다. 한국 같으면 비닐장갑을 주었을 테지. 다들 시작하자마자 생각을 해둔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슴도치도 만들고 영은 모자도 만들고 각자 재미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메사 베르디처럼 절벽 아래 집들이 들어서 있는 모양을 좀 흉내 내 보았다. 나이별로 완성된 작품을 놓는 곳이 있었고 심사위원들이 열 명 정도는 되었다. 나와 영은 3등 상을 받았는데 이 콘테스트가 명색이 국제 콘테스트인데 외국인이 우리 둘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상을 주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이 콘테스트 후원은 스팸 회사가 하였다. 내가 받은 상은 스팸이라고 새겨진 빨래집게 이었다.

저녁을 모르몬 교회에서 먹었다. 아주 깔끔한 교회이고 숲속에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이 교회가 로드리고 부부가 정을 붙이고 가는 교회이다. 그 교회 장로(?) 한분은 알바키키에서 우리를 위해 김치를 사서 오셨다. 마침 연대 동문이자 서울시 공무원이신 주용태 과장이 아내와 세 아이와 함께 왔다. 그 가족도 합류해서 교회에서 식사를 하고 또 한 번 우리 사물놀이패는 연습을 하고 흥겹게 놀았다. 먹이와 조는 피아노도 치고 교회의 친교모임에 아주 흡족해 하였다. 로드리고가 모르몬 교회 성실한 교인이라니…. 사실 좀 예상외의 일이다. 어쩌면 이해가 가는 일이기는 하다.

또 인사말을 하라고 한다. 가는 곳마다 고맙다는 인사를 격에 맞추어해야 하는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버지와 엄마가 해온 일이고 나대신 다른 친구들이 해준 것인데… 이런 것이 싫어서 사실 친척들 자리에 잘 안가고 (어머니는 내 할일 집중해서 하라면서 안 가도 된다고 하셨지만), 학교 보직 같은 것도 안 했는데, 현장에 오면 안 할 수 없어서 좀 괴롭다. 그래서 로드리고에게는 인사 그렇게 많이 하는 것은 내가 좀 힘들다 말했다. 현장의 인류학자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최소한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 너무 과하게는 하지 말자는 말이었다. 양해가 되겠지.

7월 16일 금요일

로드리고는 또 우리를 위해 또 다른 깜짝 여행을 준비해두었다. 아마도 자신이 늘 가고 싶었던 곳이었던 듯하다. 이른바 Mountain Men Rendezvous. 파고사 스프링스라는 유명한 온천 리조트 타운을 지나 Creed라는 곳에서 열리는 것이다. 리조트 타운을 지나며 음료수를 마시러 전형적 백인들의 빵과 머핀 냄새가 나는 카페에 오니 다들 집에 온 듯 행복해한다. 이미 이들은 거의 ‘백인’인 것이다. 원주민 타운에만 있었더니 오히려 역효과가 났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 이들은 이곳의 분위기를 즐겼다. 집에 온 듯이… Creed가는 길에는 백인 타운도 보이고 산으로 들어가니 천막이 늘어서 있다. 이른바 Trappers 나무 도벌꾼(?)들의 캠프장이다. 개별 가족들이 텐트들을 치고 1840년 이전의 모습으로 그 때의 생활을 재연하며 2주간을 지낸다고 한다. 그런 복장을 하지 않은 우리는 캠프촌에 입장할 수 없다고 한다. 로드리고가 친구에 대해 언급하고 그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 하니까 한 의심 많게 생긴 아주머니는 절대 못 들어간다고 하고, 다른 남자는 구경이야 괜찮지 않냐면서도 그 여자의 기에 눌려, 지도자에게 상의하러 어디로 가더니 어떤 분을 모셔왔다. 그 대표적인 분은 앞 동네는 구경할 수 있지만 뒤에 있는 텐트 장은 입장 금지라고 하였다. 이미 지난주에 일반 공개를 하였고 지금은 일반 공개 기간이 아니어서 입구 쪽만 보고 가라는 것이다. 가죽으로 다리를 가리고 팬티 없이 엉덩이가 보이는 의상을 입은 아저씨가 연신 우리를 가이드 해주고 소개도 해주었다. 그간 우리 같은 이들이 안 와서 아주 심심했다는 듯이….

여자들은 가죽옷이나 예전 스타일 목면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Native Indian도 친구이며 같이 그때 돕고 살았다면서 그곳에 몇 개 끼어있는 티피를 가리키기도 했다. 한 소년이 도끼 던지기를 하며 놀고 있고 구슬, 돌 같은 것을 내다 놓고 파는 아저씨, 가죽 옷 가게, 뜨개질을 한 모자 등을 파는 집도 있었다. 남편은 변기 사업을 했고 아내는 트럭 운전을 했었다는 부부는 여름마다 여기에 와서 이런 식으로 피서를 한다고 하고 조만간 손주들이 나오면 그들을 키워주느라 못 올지도 모른다고 한다. 남편은 피리도 만들기 도자기, 목각, 가죽공예 등 재주가 많아 이런 것을 하면서 여기서 지낸다. 끼가 많은 사람들이 그 기운을 펼칠 곳을 스스로들 만들어낸 것이다. 취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자기들 선조를 선택하여 만들기까지 하면서…. 이들의 축제는 마치 캘리포니아의 버닝맨 축제처럼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나눌 것 나누고 사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 축제에 와서 보니 갑자기 파우와우가 이해가 된다고 한다. ‘적절한 비교’라는 것이 인식의 큰 비약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틀림없다.

내일이 바로 퍼레이드 하는 날이라 달구지 장식도 마쳐야 하고 할 일이 많다. 내일 저녁을 vice president 인 타이 비센티 Tai Vicente 집에서 초대했다고 해서 불고기를 해가겠다고 했다. 슈퍼마켓 정육점에 가서 서성이니까 청년이 웃으면서 꾸물거리지 말고 들어오라고 한다. 바비큐를 하기에 적합한 부위를 찾는다니까 벌써 소문을 들었는지 한국서 왔냐면서 자기도 한국에 군인으로 가 있었다고 한다. 가장 좋은 부위를 자기가 가진 기계로 가장 얇게 썰어 줄 텐데 그래도 좀 두꺼울 것이라 한다. 내일 점심때쯤 찾기로 하였다. 정말 사람의 이동이 많은 면에서도 글로벌 세상이군. 군대가 확실히 큰 역할을 한 군사주의 근대를 여기 이 작은 만남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불고기 양념은 규호가 산타페 갔을 때 산 것으로 하기도 했다. 형관장이 사온 김치도 아직 많이 남아서 거의 쉬어서 못 먹을 정도이다. 학생들은 라면을 아주 많이 먹었는데 김치 소비는 별로 인 것을 보니 김치를 잘 먹지 않는 편인 듯. 대신 아침에는 시리얼을 많이 찾고 식성이 다양하면서도 많이 ‘백인화’되어 있어 일단 여행하기에는 편한 인구이다.

저녁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사물놀이 고수를 하는 분이 닥터 조 소개로 이곳을 찾았다. 안 그래도 풍물패가 레퍼토리가 달릴 텐데 잘 되었다. 그 분도 자녀 두 명과 부부가 왔다. 파우와우 입장식에 잠시 가봤는데 미스 히커리아 대관식 비슷한 것하며, 너무 동네잔치 같아서 실망을 하였다. 이 축제는 파우와우가 큰 축제의 일부분 일뿐이고 로데오, 그리고 일시 건설 된 놀이기구 등이 들어서서 그 동네가 아주 시끄러운 놀이동산처럼 되어버렸다. 얌체공은 타오스와 비교를 하면서 타오스에서 햄버거를 팔던 백인 할머니가 왜 달시같이 후진 동네를 가냐고 하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타오스 춤판에서 잡화를 팔고 계시던 한국분이 이곳에서도 물건을 팔고 계시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좀 어수선 하다고 할까? 그러나 저러나 많이들 모이기는 모였다. 원래 리틀 비버라는 이미지는 red rider라는 유명한 백인 만화 작가가 등장시킨 인물이고 우리가 막 지나온 파고사 스프링스에는 red rider 퍼레이드가 오래전부터 열렸다고 한다. 그것을 모방해서 이곳에서 리틀 비버 축제가 열리게 된 것이라 오히려 백인들의 퍼레이드 축제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어쨌든 히커리아 아파치 부족은 가스가 나온 바람이 약간 졸부 비슷한 낌새가 느껴지는 타운을 만든 것 같다.

계속

 

 

2010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