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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이야기로 자기 소개(1절)

johancafe 2010.05.13 18:51 조회수 : 4143

<나의 영어 이야기>
편집-이송규호


chapter 1: 무대 위로 오르다
- 각자 선 자리에 대한 호기심과 이해 그리고 공감

첫 수업의 설레임은 곳곳에서 베어난다. 사이버 강의실 이곳저곳에 이미 한 학기 동안 읽을 자료와 함께 하면 좋을 그림과 음악들이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하며 새로운 친구들을 맞이할 준비가 시작되었다. 덕분에 개강이 1주일이나 남았는데도 사이버 강의실 왁자지껄 자유게시판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아직 수업 시작도 안 했는데 이곳은 벌써 시작되었군요~^_^ 자료실에도 많은 글들이.....ㅠㅠ 한 학기 동안 재밌는 학습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웬지 험난할 듯 하네요-_-) 교실에서 뵈어요~^^ (2006년 8월 24일 노주환)

사이버강의실에서 이런 기대가 담겨있는 글이 하나둘 올라 온 후, 첫 수업이라는 어색함과 기대감은 그대로 강의실로 이어졌다. 첫 걸음은 각자의 소개와 경험, 그리고 앞으로 이뤄갈 학습 공동체를 위해 서로에 대한 말걸기와 말듣기를 위해 ‘나의 영어 이야기’로 시작하였다. 뻔한 자기 소개가 아닌 특정한 주제를 갖고 서로의 경험을 들여다 보기에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주제로 쪽글 보통 연세대학교의 인문사회과학대학에서 쓰이는 ‘지역적’ 언어이다. 1-2 페이지 내의 짧은 글쓰기를 의미하는데 상당히 많은 수업들이 매주 쪽글을 과제로 주어주고 있다. 과제가 주어졌고 이후 강의실에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한두 명씩 앞으로 나와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갔다. 처음에는 아무도 나서지 않지만 시간을 주고 기다리면 ‘어색함과 적막함을 견디기 힘든 성질 급한 사람’부터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한두 명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점차 듣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여기저기에서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물론 말하기의 일정한 규칙도 없고 순서도 없어 이런 ‘두서없는’ 상황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조한의 이전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나와 교수를 ‘조한’이라고 부르면 살짝 놀라지만 놀라움을 은근 슬쩍 감추는 친구들도 있다. 어찌 되었든 무대 위로 사람들은 등장하기 시작했고 서로에게 말걸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놈의 영어’에 대한 이야기로 말이다.

Scene #1: 영어, 세대와 시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99학번 김도원)
나의 영어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영어를 첩하게 되었는데, 사실 처음엔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영어가 별로 재미가 없었고 공부를 안했으므로 성적은 더욱 떨어지고, 그러면서 나는 영어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고 공부할 땐 영어 외의 다른 과목에 집중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께서는 특단의 조치로 ‘윤선생 영어교실’을 사주셨다. 그땐 나도 어느 정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으나 영어성적이 오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방법을 모르고 영어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내가 단어만 외우고 문제만 풀어서 발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지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전까지는 영어수준도 그리 어렵지 않고 문제도 쉬웠기 때문에 시험기간에 공부하고 어느 정도는 요령으로 풀면 되었었는데, 고등학교에서 모의고사를 보니 영어성적이 형편없이 나왔다. 다른 과목에서 틀린 것 모두를 합친 것 보다 영어 한 과목에서 틀린 게 더 많을 정도였다. 학교 시험은 교과서 범위 내에서 나왔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모의고사는 실제 영어실력을 보는 것이라서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학원에 가게 되었는데, 이 학원은 그 때의 나의 수준엔 맞지 않는 학원이었다. 다른 학원처럼 문법이나 문제에 집중하는 학원이 아닌 영자신문을 보는 학원이었는데, 영어를 잘하는 학생에겐 좋은 기회였겠지만, 당시의 나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영어가 더욱 더 멀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도 영어성적은 오르지 않고 수능 얼마 전까진 영어 때문에 정말 힘들었다. 여전히 영어성적은 다른 과목에 비해 수준 이하였고 발전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과목을 소홀히 하고 영어 공부만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 때 학원영어선생님이 나에게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차라리 영어문제만 계속 푸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즉, 문제 감각만 익혀서 수능에 대비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말씀대로 했고 시험에선 우수하진 않지만 예전에 비하면 많이 오른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했으나 기초가 없었으니 입학해서도 영어가 걸림돌이긴 마찬가지였다. 영어과목은 모두 재수강을 했고 영어라면 치가 떨렸다. 그러다 작년에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시기에 나는 결심을 했다. ‘지금 아니면 평생 영어 때문에 고통 받을 것이고 항상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학연수를 결심했고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영어 때문에 간 것이지만 그 곳에서 지낸 시간은 영어 이외에도 많은 것을 배우게 해주었다. 오히려 영어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것이다.
지금은 영어를 접하더라도 떨리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어가 약점보단 강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영어이야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많은 일이 있을 것이고 계속 될 것이다. 그 이야기가 과거처럼 고통으로 얼룩지지 않고 기회로 빛날 수 있었으면 하는 게 나의 영어이야기 두 번째 이길 바란다.

(민웅기)
제 영어 이야기에는 다소 유별난 구석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90년대 중반부터 조기 영어 교육이라는 바람이 불기 전에 외국에서 아주 잠깐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 우리가 요즘 경멸해마지 않는 ‘한국식 영어 교육’을 받고, 또 그 흔한 외국인 과외도 했지요. 따져보면 근 15년을 영어와 함께 살아온 셈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산부인과학을 연구하러 유학길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우리 가족은 모두 호주로 건너갔습니다. 우리는 멜버른에 집을 세받고 곧 적응을 했지요.
그러자 저는 곧바로 영어의 바다에 반강제로 집어던져졌습니다. 먼저 부모님은 저를 그곳 학교(아니면 summer school)에 보내셨지요. 영어라고는 알파벳밖에 모르는 아들을 그 곳에 하루 종일 놔두셨던 겁니다. 제 주변을 금발머리 아이들이 둘러싸고 온갖 질문을 퍼붓는데, 정말이지 아찔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영어완전정복」에 나오는 장면이 우습기는 하지만, 일면 주인공에게 동정이 갔던 것도 그 때문인가 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Heather라는 이름의 외국인 선생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기 시작했고, 저는 집안의 모든 가재도구와 가구, 방 이름을 하나하나 영어로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또 아버지는 영어 동화책을 매일 한 페이지씩 외워서 암송하게 하셨습니다. 암송에 성공하면 근처에 있는 장난감 가게에서 아무거나 골라잡을 수 있었고, 못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크게 혼이 났습니다. 그렇게 당근과 채찍이 동원되었지요. 반년 후, 저는 영어의 바다에서 끄집어내어졌습니다.
아마 2~3학년 때부터 영어 학원이란 곳을 다녔던 것 같습니다. 강남역에 있는 ‘정철학원’이었지요. 중학생 형, 누나들과 한 반에서 공부를 했는데, 시험에서 만점을 받고 반 1등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는걸 보니 거기서 꽤 잘했던 모양입니다. GPR3(중학교 3년)반에 들어가서는 학원 잡지에 난 일도 있습니다. 「GPR3반의 작은 거인」이라는 제목의 한 페이지짜리 기사였습니다. 학원에서는 제가 영어책을 읽는 모습을 녹화했고,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녹화한 테이프를 학부모 설명회 때 상영했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느 날엔가는 대교 방송에서 전화가 와서, 어린이 영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아주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거절하셔서 방송에 출연하는 경험은 결국 못 해보게 되었지만요.
한편 초등학교 겨울방학 때마다 저는 호주와 캐나다 등지에서 한 달 정도씩 어학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주로 summer camp란 곳에 다녀왔는데, 거기서는 현지 아이들의 방학 기간을 이용해 다양한 자연 체험을 시켜줍니다. 승마, 카누 타기, 자연 탐사 등은 영어를 ‘자연스럽게’ 익히는데 큰 도움을 주었지요.
이렇게 영어는 제 자아의 일부로 통합되어갔습니다. 한 아이에게 부모의 칭찬, 거기에 학원 사람들의 관심이 겹쳐졌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우쭐했겠어요. 자만에 빠져 공부를 결국 게을리 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고등학교 영어 과정을 포기했지만, 그래도 ‘당근과 채찍’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영어는 제 자존심을 지탱해주는 기둥으로 단단하게 굳어졌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영어와 한글이 머릿속에서 제각기 다른 영역을 꿰찬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사적인 고민을 털어놓을 때에는 한글로 쓰면 낯간지러워도 영어로는 표현하기가 한결 편합니다. 한글로 대화할 때와 영어로 대화할 때 말하는 습관이나 태도, 어투가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전 영어권에서 거주한 경험이 도합 1년도 안되는 풋내기이니까,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외국 체류 경험이 더 긴 분들은 아마 혀를 찰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지현)
엄마는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할머니는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이모는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할머니에게, 이모에게 영어를 배웠다. 아주 어려서부터.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우리 엄마도 자식의 교육에 관해서는 매우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다. 덕분에 나는 매우 어릴 적부터 미국에 있는 엄마친구로부터 직접 공수해온 영어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보며 자랐다. 수많은 영어비디오 중 미국의 초등학생들이 하는 여름캠핑에 관한 비디오가 있었고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이고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나는 꼭 한번 미국에서 학교를 다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막연한 동경이라 할까. 엄마는 내가 조금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는 영어 동화책을 직접 읽히게 시켰고 영어 동화책에 딸려있는 테이프를 반복해서 듣고 또 따라 해서 결국엔 외울 지경이 되도록 영어공부를 시켰다. 다행히 나는, 그다지 반항적인 아이가 아니었고 다양한 공부 방식에 흥미마저 느끼며 엄마가 이끌어주는 대로 따라갔다. 엄마 뿐 만이 아니라 할머니, 이모까지 나의 영어교육에 동참하였다. 천안에서 살았던 1년 동안 할머니는 일주일에 두 번씩 서울과 천안을 오고가며 나를 영국문화원에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서 나는 ‘외국에 한 번도 가지 않았으면서 영어를 잘하는 꼬마’였다. 세계를 무대로 살아가려면 영어는 필수라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나에게 자신이 원할 때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삶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심어주었다. 나는 엄마 말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었고 무엇보다 공부를 해서 외국인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얘는 확실히 언어적 소질이 있는 것 같다’ 는 주위 사람들의 칭찬도 싫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2달 동안 미국의 가정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그 집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막연한 환상으로 존재했던 미국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체험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침 9시까지 등교해도 되는 학교, 머리를 자유롭게 기르고 악세사리, 화장도 할 수 있는 자유로움, 학교에서 열어주는 발렌타인 파티. 이런 것들이 무조건 제한하고 침묵시켰던 한국의 학교를 다니고 있던 나에게는 너무나 좋아보였다. 백인 이외의 다른 인종이 거의 없던 동네여서 그랬는지 오히려 한국아이라는 이유로 당한 가시적인 차별은 없었다. 다만 학교에서 어떤 백인 아이가 나를 보고“한 중국소녀가 그러길, 엄마~ 젓가락이 없어서 밥을 못 먹겠어요~” 라며 놀렸던 기억이 난다.
영어는 나에게 내가 뭔가 특별한 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고 내가 좋아하는 외국 밴드의 노래가사를 알아듣고 밴드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직접 찾아 읽어볼 수 있게 해주었다. 한 마디로 영어는 나의 자존감이었고 나의 마지막 보루였고 나의 흥미였다. 하지만 영어가 나의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거의 인지하지 못하였다. 아니, 인지하였으나 별 문제라 생각하지 않았다. 영어 시험에서 매번 백점을 맞고 외부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고 전교에서 유일하게 외국어고등학교를 간 아이. 이 사실은 나의 엄청난 경쟁력이자 권력이었다.
모두 다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영어시간에 집중하지 않았고 영어 선생님의 발음을 평가하곤 하였다. 외부 대회에서 상을 타왔을 때 선생님들의 태도 역시 나의 자만심을 높이는 데에 한 몫 하였다. 심지어 고모가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산다는 것조차 나에게는 은근히 알리고 싶어 하는 자랑거리였다. 고모가 미국인이 아닌 베트남사람과 결혼했다면 나는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99학번인 도원의 글은 ‘나의 영어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된다’로 시작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도원의 글 빼고는 수업의 어느 누구도 ‘중학교’가 영어이야기가 시작인 글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공교육에서도 이미 초등학교부터 영어 교육이 시작된 세대들이 본격적으로 대학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공교육이 아니더라도 학원, 학습지, 과외, 캠프, 어학연수, 교환학생, 조기유학 등 다양한 경로로 영어를 시작한 세대들이 대학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윤선생 영어교실, 파닉스, 삼육어학원, 원어민 강사 등은 쪽글에서 많이 나온 단어들이다. 이처럼 ‘영어’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압축적으로 진행되어 굴러가는 한국 사회의 풍경을 고스란히 포착하고 있는 주요한 키워드가 된다. 위처럼 90년대 학번과 2000년대 학번 사이의 ‘차이’도 존재하지만 그 안을 면밀히 보면 계급적인 문제들도 살펴볼 수 있다.


(장미진)
나와 ‘영어’와의 첫 만남은 언제 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만큼 영어와 나는 오랜 시간을 질기도록 함께 해 왔다. 초등학교 입학 후 꾸준히 영어 ‘학원’이라는 곳을 다녔고 학원을 다니지 않는 기간에는 학습지라도 받아다가 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 초등학교 교육과정에는 영어가 없었다. 여느 강남 8학군 부모들과는 다르게 사교육에 비교적 무관심했던 나의 부모님조차도 그래도 ‘세계화시대’인데, 남들 다 하는 영어만큼은 필수라고 생각하셨는지, 적극적으로 유학을 보내거나 않아도 소극적으로 동네 보습학원에서나마 영어교육을 꾸준히 받게 하셨다. 내 주변 친구들도 대부분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그 당시 나의 맥락에서는 영어 학원을 다니는 것이 상당히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이 ‘영어’라는 녀석을 ‘학교’라는 공적인 기관에서 만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한 후였다. 난생 처음 받아본 ‘영어교과서’의 첫 장은 ‘알파벳을 쓰는 법’이었다. 그러나 웬만한, 아니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미 사교육으로 어느 정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수준이었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있다고 해도 최소한 알파벳 쓰는 법을 배울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그 다음 장부터 갑자기 알파벳에서 기초 회화단계로 교육 과정이 터무니없게 훌쩍 넘어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 대해 부당함을 제기하지 않았다. 사교육으로 기본적인 영어실력은 다져졌다는 전제하에서 진행되는 학교의 영어수업은 불편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편한 사람이 더 많았던 상황이었으리라. 그 때 나는 그러한 맥락의 부당함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더라도 ‘만약 내가 이전에 학원에서 영어를 조금 배우고 오지 않고 학교에서 알파벳부터 배웠더라면 과연 이렇게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기는 했다. 수학이나 국어와 같은 다른 과목에서는 특별히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는데 특히 ‘영어’라는 과목에서만큼은 그런 의문점이 남았다. 그게 영어가 내가 유일하게 받은 사교육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실제로 학교 내 영어교육과정이 비합리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때부터 나는, 학교 성적은 적당히 받지만 그 이상의 어떠한 영어능력과도 조우하지 못하는 수준의 영어실력을 유지하며, 영어를 특별히 잘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못하지도 않는 ‘평범한’ 학생의 정체성을 가지며 영어와 용케도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비슷한 고등학교 생활을 거쳐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수시모집이라는 특별전형으로 보통 전형보다 두 달 정도 일찍 합격 소식을 받았는데 전반적인 학교 성적과 교외활동, 그리고 면접접수로 뽑는 전형이라서 따로 영어시험을 보지는 않았다. 대학 합격이 확정된 후 절차상 봤던 (보통 전형의 아이들은 대입여부를 좌우하는) 수학능력시험의 영어성적도 썩 좋지는 않았다. 이러한 내게, 대학에 와서 정시모집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우스갯소리로 하는 ‘수치스럽다 수시. 정정당당 정시.’라는 말을 종종 했다. 남들보다 한 두 달 대입여부가 일찍 결정 난 친구들에게 하는 장난스런 푸념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웃어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괜스레 찔리는 면도 있었다. ‘나는 사실 영어도 잘 못하는데 연세대에 올 자격이 있는 건가?’ 마치 부정입학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대학에 오니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영어가 필요할 때가 많았다. 듣고 싶었던 수업이 영어강의라 수강을 포기한 적도 있었고, 필수과목의 교재와 시험은 모두 영어였다. 동아리의 외국인 교환학생과 친구가 되고 싶을 때도 항상 영어가 걸림돌이었으며 고등학교 때와 다름없이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성공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겁주기성 멘트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한다.’ 소리를 들어가며 자라온 나에게, 영어란 지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도전적’인 부분이었다.
대학에서는 영어능력이 필요한 기회가 많았던 것만큼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외국에서 살다온 친구들도 많았고, 외고출신 이거나 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에 가까운 영어점수를 받은 아이들이 대부분 이었다. 나는 그들 앞에선 왠지 주눅이 들었다. 영어는 다들 나보다 잘 하는 것 같았고 연대에서 영어실력으로 정문에서부터 백양로를 따라 줄을 세운다면 나는 상대본관 끄트머리쯤, 아니 무악학사 쯤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 와중에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은 그러한 (내가 어려워했던) 과정들을 너무나 당연한 듯이 무리 없이 소화해 냈고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지만 괜한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외국에 살아 높은 토플점수를 무리 없이 얻어 교환학생을 가는 친구에게 ‘영어를 잘해서 교환학생도 가고 좋겠다.’ 라고 부러움 섞인 말을 했었다. 그 친구의 대답은 ‘나 영어 잘 못해.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어. 250점만 넘으면 거의 다 보내주던걸?’이었다. 그 친구에게 내가 지금부터 휴학을 하고 하루 종일 영어공부에만 매달려도 토플 250점이 꿈만 같은 상황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자랑하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친구에게 영어는 ‘쉬운 일’이기 때문에 말해봤자 온전히 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교환학생을 갔다 오면 더 넓은 안목을 지니고 많은 경험을 하고 영어실력도 더 좋아져 오겠지. 물론 나도 어떻게든 하면 갈 수야 있겠지. 그러나 그들보다 훨씬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노력이 필요할 테지.’ 라는 생각을 했고 이 때 영어자체가 하나의 자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중학교 때 혼자 물었던 그 질문을 누군가에게 다시 하고 싶었다. 과연 저 영어 실력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부모님이 외교관이 아니어서 외국에 살지 않았다면, 혹은 어릴 때부터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외고에 다니지 않았다면 저렇게 수준 높은 영어실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 시대는 국경의 장벽이 없어지는 글로벌 시대라고 하여 ‘세계공용어’인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맹목적으로 영어를 추종하는 사대주의적 태도에서 문제점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이전에 영어가 온통 사교육에 의존에 있는 상황에서 잘하는 사람들은 더 잘, 못하는 사람들은 더 못하는 영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있어 영어는 그렇게 ‘계급’의 문제로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지금과 같은 맥락의 영어교육은 부당해요!’ 라고 외쳤을 때,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줄 정도의 위치에 가기 위해서, 나의 그 자본과 계급을 어떻게든 높여 보고자, 나는 지하철에서 나눠주는 ‘토플 리스닝 단기완성’ 이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지를 조심스레 가방에 넣고 있다.

(하승효)
나의 영어이야기. 가슴이 착잡해오지만 그래도 입을 열어보려한다.
내가 처음으로 영어를 접한 것은 윤선생 영어교실이다. 그 땐 내가 왜 이걸 공부해야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그렇게 싫은 기억은 아니었다. 12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 들었던 다이나믹한 음성들의 테잎이 떠오르고, 그걸 들으면서 잠들던 여러 날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알파벳을 뗀 나는 초등학교 3학년때 그룹과외를 했다. 동네 아이들 6명정도와 미국 교포와의 수업이었다. 그 수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작은 노트를 두권 사서 한권은 연습장, 한권은 나만의 작은 영어사전을 만들어갔다. 사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발음기호 읽는 법이었다. 한가로운 일요일, 아빠를 붙잡고 배우는 발음기호는 비록 어려웠지만, 지금도 감사할 정도로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했던 공부는 그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고 내 스스로 재밌어서 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어떤 부담도 갖지 않고 어린 나이에 언어를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그 후로도 4~5학년에 걸쳐 3명의 교포선생님과 1:2 과외를 했고, 초등학교 6학년때 처음으로 영어학원이라는 곳에 들어갔다. 학원의 스파르타식 교육은 그동안 놀면서 공부했던 나를 극도로 자극했고 (지금도 생각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매주 A4용지 두장씩 영어로 된 성경을 외우고, 정해진 파트를 선생님 앞에서 시간을 재고 암기하고, 일정시간을 초과하면 매를 맞는 최강의 스파르타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빡센 수업방식에 웃음이 나지만 왜 그 때 내가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 무거운 짐들을 소화해 낼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나는 그 때 영어를 잘 하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재미있었기 때문에 공부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서울, 서울에서도 강남, 강남에서도 압구정, 압구정에서도 현대아파트에 사는 내 주거 배경은 당연히 날 구정초등학교로 보냈고 그 곳에서 난 교육열에 미쳐있는 학부모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후에 우리 엄마, 아빠, 나도 그렇게 됐다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마저 냉소로 변해버린 지금, 상당한 경제력과 상당한 교육열이 만나면 결론은 뭘까? 대다수는 유학이다. 내 친구들은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중학교 1학년에 걸쳐 모두 떠나버렸고 당시 그 사람들에 비해 돈도 없고 순진했던 엄마, 아빠는 우리 세 자매를 한국에서 꼭 안고 살겠다고 유학은 쳐다도 보지 않으셨다.(유학의 불가결성이란 현실을 직시한 지금, 우리언니는 현재 뉴욕 맨하탄에 유학중이다.) 당시에는 하나도 부럽지 않았지만, 다음 해, 그 다음해, 매해 여름마다 찾아오는 내 친구들을 나는 만나기 싫었다. 그들은 미국 혹은 캐나다, 혹은 영국으로 가서 나보다 훨씬 자유분방한 삶을 살고 있었고 그들의 한국어 발음 역시 그들의 달라진 스타일만큼 변해있었다. ‘아, 그렇구나. 살아남아야하는거구나. 영어는 무조건 해야되는거구나’ 피부로 느낀 만큼 나는 영어공부에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고 그만큼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중학교, 특히 고등학교 때 나는 잠시 한국을 들른 그 어떤 유학생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실제로 많이 만나지도 않았다. 한국형 입시지옥에 휘둘리는 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을뿐만 아니라 유학생들과 얘기하면 저절로 튀어나오는 영어 한마디, 한마디에 작아지는 날 느끼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영어와 그들의 자유로운 생활방식에 대한 부러움, 하지만 나는 한국에 남은 친구들 중엔 엘리트로 남아있다는 우월감, 너넨 한국에 있으면 그 돈 갖고 신나게 놀고 대학도 못 갔을 걸 하는 멸시 등 당시에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앞의 말의 반은 사실이고.(웃음)
사실 이번 여름방학동안 나는 영어공부를 (체감상) 굉장히 많이 했다. 첫 번째는 나의 욕심때문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영어 실력은 중3때 외고 준비를 하면서 정립되었고, 실제로 고등학교 때는 토플 외에 영어공부는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 그 열정으로 영어를 공부해보고 싶었다. 두 번째는 엄마의 압박이었다. 다른 아줌마들과 통화하는 과정에서 들려오는 글로벌 압박을 엄마는 나에게 여실히 전해주고 싶었지만, 대학에 입학해 첫학기부터 여성학에 심취해있는 자신의 딸이 미웠나보다. 그래서 1학기는 거의 하루걸러 하루 싸우고 다른 공부(영어공부)도 할 거라고 엄마를 안심시켜야하는 불편함을 겪어야했다. 세 번째는 유학 간 친구들 때문이다. 그들과 얘기할 때 나도 자연스럽게 알아듣고 또 말을 하고 싶었다. 방학 때 다녀온 유학생파티는 나에게 또 하나의 작은 자극이 되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은 나이에 대학교 들어와서 첫 여름방학을 영어로 보냈다고 하면, 대다수가 ‘네 나이때는 그런 것보다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을텐데’하며 내심 걱정하는 말투와 약간의 한심스럽다는 눈빛이라는 반응뿐이었다. (그래서 난 방학때 뭐했냐고 하면 그냥 놀았다고 한다.) 자신있게 영어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목적과 그 비난의 화살이 변질되어버린 지금, 믿고 따르는 건 그래도 ‘해야한다’ 현실뿐이다. 영어 때문에 불편함과 쓰라림을 체감하는 나로서는 소신있는 안티 영어공부따윈 통하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하는 학문분야에 있어서는 영어는 안해도 돼’라는 소신을 가지고 영어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은 본 적 있지만(물론 동조하진 않는다) 나에게 있어 그러한 확신을 심어주는 사람의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얘기하다보니 예민해져서 조금 비관적으로 말한 것 같긴 하지만 그만큼 나와 영어의 애증관계는 실로 깊다고 말하고 싶다. 짧게 마무리하자면 ‘적의 무기로써 싸운다는 것’... 나는 처음에는 남성중심의 이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찾고 말한다는 것을 쉽게 연상했었다. 하지만 더 생각해보니 (내가 평화주의자는 아니지만)지구 여러 곳에서 불편함을 끼치고 있는 미국에 적대감을 갖고 있는 나에게도 영어는 하나의 적의 무기가 아닐까 싶다. 첫 번째는 하나의 학문으로써, 두 번째는 나의 가치상승욕구로써, 세 번째는 적을 낙후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영어를 배우는 즐거움이 계속 되기를 바랄뿐이다.

(송시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 공부는 해야 할 것 같다. 지구촌시대의 문화인류학 첫 번째 시간 솔직하게 나는 졸았다. 앞의 수업들이 많아서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너무 궁색하다. 처음에는 잘 알아들었다. 아니 알아듣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는 꾸벅 졸고 있는 날 보았다. 이런 사건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전에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여사가 학교에 와서 강연을 했던 적이 있었다. 연세대YMCA라는 이름으로 강연에 참여했고, 난 또 개인적인 창피함을 당해야 했다. 강연장은 정확히 둘로 나뉘어졌다. 호지여사 한 말을 듣고 웃는 사람과 통역하시는 분의 말을 듣고 웃는 사람. 물론 난 후자였으며, 그리고는 실질적으로 강연장에서 소외되었다. 또 다시 꾸벅 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되면 더 이상 변명거리가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극히도 궁색하지만 나름대로 이유 있는 변명을 한 가지 하련다. 약 10여년에 걸친 나의 영어 공부의 목적은 대학입학이었으며, 이것을 제하고 나면 없다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러니 못 알아듣는 것이 당연하고, 원서나 외국 잡지가 익숙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영어와 만나는 나이가 점차 적어질뿐만 아니라 그 만남의 방법도 다양해짐에 따라 캠퍼스에는 점차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이 ‘정문에서 학교 끝까지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이 학교에 겨우 들어올 ‘영어 점수를 만든’ 사람들은 영어에 대해 ‘참 할 말이 많은 상태’가 된다.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들이 글로벌의 떠들썩한 잔치판을 벌이게 되면서 ‘영어 때문에’ 듣고 싶은 수업마저 듣지 못하고 교환 학생조차 가기 힘든 상태에서 이것은 개인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계급적인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불어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 ‘떠날 수 있는 자’와 ‘남을 수밖에 없는 자’ 사이의 묘한 감정도 얽히게 된다.

위의 맥락에서 ‘영어 이야기’가 수업 공동체의 바탕을 만드는 중요한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말하기와 듣기를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교실 토론’은 보통 지식이나 입장만을 갖고 찬반으로 나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서로서로 자발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신의 경험을 연결 시켜 말하고 주의 깊게 듣는 것은 삶과 괴리되지 않은 지식을 만들 시동을 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두 번째로는 인문학 수업이 가장 먼저 학생들에게 길러줘야 할 ‘사람에 호기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재미나는 말하기와 듣기 그리고 그와 연상되어서 자신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면 어느덧 이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살았기에 상당히 다른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때문에 서로에게 말걸기를 시도하는 호기심이 차츰 교실에 넘실대기 시작한다. 마지막 세 번째로 적극적인 학습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차이에 대한 인식’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모두 똑같다고 가정하는 상태에서 ‘객관성’으로 포장된 지식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것이라 ‘지금 바로 이곳, 각자 선 자리에서’ 신명나게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서로의 경험과 삶의 궤적이 차이가 있으며 ‘영어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점차 인식하게 된다.

Scene 2. 살벌한 시대의 끝자락에서의 영어: 불안 혹은 열망

(홍아성)
1. 말하기 아까운 이야기
(다른 신입생들도 그렇지만) 나는 작년에 수능을 봤는데, (다른 신입생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군대에서 봤다. 나는 나름대로 ‘메이커’ 있는 대학생으로 학기로는 4학기, 학년으로는 3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로 군대를 갔다.
1학년 때 나는 너무 어려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다.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학생의 생산적인 두 축, ‘학점과 영어’중 학점은 이미 무너졌다.
그래서 “똑똑한 포스트 서태지 세대”답게 머리를 굴렸다. 종이에 표를 그리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각각의 경우의 수를 나열한 다음, 장단점을 적었다. 그리고 고민했다.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가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난 두 가지 이유에서 웃음이 난다.
첫째는 나의 사고의 틀. 나는 나열하고 분석하는 것이 진리인 것처럼, 그게 전부인 것처럼 행동했다. 두 번째는 그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무엇에 비추어 더 나은 선택인가’하는 기준의 문제다. 그러니까 난 그때 내 기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생각해보지 않고 판단했지만, 기준은 학점과 영어였다. 대학생들의 가방에는 학점과 영어가 들어있다. 매일매일 넣고 다닌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의 보험이고, 또 생각하지 못하는 모범생들의 멍에다. 누구 말대로 ‘또라이 짓’만 하지 않으면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는데, 그렇지만 그 틀 안에서 계속 맴도는, 부수지 않고는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에 빠진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리고 기준에 맞게, 새 대학+교환학생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학점과 영어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더 오래, 더 유용하게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대학에 등록금 넣는 날은 보험금 넣는 느낌이었다.(학벌+학점+영어=45세까지 보장하는 직장보험; 보험 종료 시 치킨집 창업 쿠폰이 제공됨)
직장보험에 들면 좋을까. 나쁘지는 않지만, 자기는 신이 정해 놓은 일들을 겪는 존재일 뿐이라며, 인도로 떠날거라고 좋아하던 친구. 그 친구는 보험을 넣다 말았지만, 난 그 친구가 더 부럽다. 여기서 내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 영어 못하는 내가 9학점이나 영어 수업으로 짜고 숙제가 많다는 수업만 골라 듣는지. 내가 왜 연세유니벌스티 학생이 됐는지.
이 틀을 깨야 한다. 같은 틀 안에서는 항상 같은 결론만 나오기 때문이다.
2. 2006년 7월 26일, 환송회 - 산만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
전화가 왔다. 친구가 인턴을 잡아서 워싱턴 D.C에 간다고, 환송회 겸 서로 얼굴도 볼 겸 모이자고 했다. D.C(친구는 워싱턴 D.C를 D.C라고 말했다.)에 가는 친구의 성별은 여성인데, 일학년 때부터 해외 이곳 저곳을 다닌 친구였다. 가끔은 나에게 해외파가 아니라서 가지는 어려움, 집에서 재정 지원을 받는 친구들에게 갖는 부러움을 흘렸었다.
모인 우리는 남자 9명, 여자 1명으로 명문대 경제학부 생이고, 그래서 먹고 살 걱정은 없지만, 무엇을 할까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와서 한 학기를 다녔거나, 나처럼 막 군대를 갔다 온 그런 상태였다. 대학교 3학년 복돌이들이라고 생각하면구분수비고해외파2미국1, 호주1D.C 인턴1워싱턴D.C 인턴영어 능통자2카투사, 명문외고그 외5부모 돈으로 외국가고 싶음<<모인 친구들과 영어>> 쉽다.
그날 우리가 한 이야기는 주로 학점과 영어였다. 일학년 때 받은 C, D, F를 어떻게 해야 하냐, 재수강은 어디 애들이랑 붙어야 쉽게 학점을 딸 수 있냐 같은 학점이야기. 그리고 교환학생이나 토익점수, 해외 연수 같은 영어 이야기.
우리는 인턴을 잡아서 D.C에 갈(지금은 D.C에 있는) 친구를 부러워했다. 특히 졸업학점계산과 학점 메우기에 여념이 없는 친구들 보다, 학점 좋고 나름대로 영어공부도 좀 한 친구들이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들 중 몇몇은 D.C인턴가는 친구를 보면서 스스로를 채찍질 했다. 나는 우리가, 그 친구가 D.C가는 모습을 보고 나도 가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친구가 1학년 때부터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 가는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연순)
나는 작은 편의 입장에 서서, 큰 것을 동경해왔다. 지금껏 그랬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것은 바로 영어였다. 나에게 영어는, ‘가장 강력한 나라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홈페이지를 꾸렸던 때가 있었다. 중3 때부터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방문자수는 적은 홈페이지였지만 애착을 가지고 글을, 사진을 올리곤 했었다. 나는 국어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말’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생동하는 표현, 내 감성이 묻어나는 표현을 하기 위해 꽤나 골똘히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내가, 어느 날부터인가 그런 고민들을 멈춰버렸다. 영어를 배우고 나서, 정확히는 영어에 자신이 붙고 나서부터였다. 고1 무렵 새 단장한 나의 홈페이지는 어색한 영문메뉴를 갖추게 되었다. "Profile", "Monolog", "Photo" 따위의 별 것도 아닌 영어를 써놓고 어렸던 나는 뿌듯해했다. 영어로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나니 그림도 뭔가 ‘미국적인 것’을 올려놓아야 할 것 같아서, 크리스티 털링턴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그렇게 완성된 내 홈페이지는 뭔가 근사해보였다. 같은 잡지 쯤 되어보였다. 뿌듯해하는 내게 언니는 그 무조건적인 영어-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동경 비슷한 것이 얼마나 우습냐고 이야기했다. 난 반박했다.
내가 쓰려고 구상했던 소설에는, 미장원에 간 주인공이 즐비하게 놓인 영문명의 잡지를 읽는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의 언니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단어조차 싫어해 항상 세계화라 말하며 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바로 그러한 언니의 칼럼을 미용실의 영문 잡지에서 읽게 된다. 눈치 챘겠지만 이 소설은 기본적인 인물 설정에 있어서 우리 언니와 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는데, 결국은 그 이유로 쓰기를 중단했었다. 우리 자매는, 서로에 대한 경쟁심이랄까- 그런 것 때문에 점점 더 서로와 반대된 방향으로 나갔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가장 우스운 일이었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다. 동시에 그것만큼 우스운 일이, 그 때 그렇게나 뿌듯해했던 내 모습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한 언어를 사랑하고, 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내가 사랑했던 것이 ‘영어’가 아니라 그 배경이었다는 점에 있다. 크고, 강대한 국가- 미국.
주변과 중심의 문제에서 나는 항상 고민한다. 준거집단과 소속집단과의 괴리. 한 때 ‘주류’와 ‘비주류’를 열심히 갈랐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나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사람과 사물이 주류와 비주류로 갈라졌다. 나는 비주류에 속했고 영어는 주류에 있었다. 얼마나 우습고 유치한 생각인지. 하지만 나는 결국 그런 이유로 영어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다들 영어, 영어 한다. 얼마 전 과외를 구하러 갔던 집 아이는 IBT TOEFL시험지로 시험을 봐서 학원의 상급반으로 진급한다고 했다.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인데. 어제는 중 1짜리 학부모가 내게 수능 외국어영역 모의고사를 풀게 해주기를 부탁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비단 그 이유 뿐만은 아니었겠지만 그 집에선 내게 영어 과외를 맡기지 않았다.
다들 나 같은 이유에서일까? 주류가 되기 위해서, 사회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 얼마나 더 안달복달하면 그렇게도 원하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영어는 정말 그것의 수단이기나 할까? 머리가 복잡해져온다. 영어는 세계 공용어이니만큼, 그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해서 필수라는 것쯤이야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세계’로 뻗어나가고 싶은 것일까. 중심부로의 접근, 그것이 영어 열풍의 핵심 ‘키워드’가 아닐까. 나에게 그것은 강박처럼 작용하곤 한다.
얼마 전 나는 2학기를 맞아 준비해야 하는 교재들을 사려고 서점을 한 바퀴 돌다가, 잡지 코너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타임?)지를 집어 들었다. 얼마 전 치른 기관토플시험 점수가 눈앞에 아른거리며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들었다. ‘영어는 기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아버지는, 타임지 한 권을 정독하면 영어 실력이 몰라보게 향상된다고 하셨다. 사야 하나, 고민했다.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다. 다른 책들을 집으며, 지는 따로 떨어뜨려놓았다. “이건 계산 안하시는 거구요?” 하는 직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생각했다. 오늘 내가 (타임)지를 내려놓은 것은 오로지 강박에 대한 반감 때문인 것일까?
하지만 아마도 나는 결국, (타임)지를 살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단어가 50%쯤 되는 그 책을 읽겠답시고 사전을 찾아가며 끙끙댈 것이다. 그 이유가 지금까지의 ‘영어’에 대한 동경과 강박의 이유와는 조금 다른 방향의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양담배를 피우면 미제국주의의 노예라고 평가하며 자기반성을 하라고 촉구했던 대학생들은 더 이상 캠퍼스에 없다. 대신 하루하루 팍팍해져가는 취업 시장에서 생존을 하기 위해 자기가 얼만큼 ‘견딜 수 있는 인간’인가를 측정하기 위해서 영어와 교환학생이 필수가 되어버린 시대가 와버린 것이다. 홍아성은 다른 대학에서 2학년이나 다녔지만 미래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며 견적을 뽑아보니 별로 생존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새대학-이전 대학보다 브랜드가치가 높은, 그리고 교환학생과 영어를 새로운 카드로 꺼내들게 되었다. 홍아성의 글에는 요즘 남학생들이 느끼는 허탈감이 그대로 담겨 있기도 하다. 군대에서 ‘삽질’을 하고 있을 동안 어학연수와 교환학생을 다녀오며 착실히 준비한 여자 친구들, ‘미쿡’에 있는 D.C로 가버린 ‘잘 나가는 (여자인) 친구’와 어쩌면 집에 와서 ‘디씨인사이드’에서 댓글 놀이하며 지내는 게 유일한 낙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남겨진 ‘(남자인) 복돌이인 자신과 그들’ 사이의 묘한 긴장과 자괴감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영어는 한켠에서 불안해져가는 시대의 대학생의 생존과 긴밀하게 연결되며 있는 중요한 코드가 된다.

서로의 삶을 관통하지만 각자의 경험에 따라 서로 다르게 굴절되어 나타나는 ‘영어와의 관계’를 통해 한바탕 이야기가 펼쳐졌고, 이 과정에서 수업에서 말하고 듣는 방법, 상대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지식 생산을 위한 각자의 차이 인식들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졌다. 어떤 학자의 어떤 이론이 아닌, 자기 삶을 언어화 시키고 서로 교차해 가며 즐거운 한마당을 펼친 이후 게시판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이어진다.


Scene #3. 수업이 끝난 후 사이버 강의실 왁자지껄 게시판에는...

글쓴이 : 김재욱 조회수 : 97
등록일 : 2006/09/12 20:29 수정일 : 2006/09/12 20:29
매력적인 분들..ㅎㅎ
오늘..두시간에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더라구요,,ㅋㅋ
참,,!! 저는 오늘 '국어선생님 이야기'를 했던 사회학과 2학년 김재욱입니다..ㅎㅎ
사실 저는, 조한 선생님 성함과 과목명만 보고 뒤늦게 수강신청을 했는데..
오늘 '1학년이 꽤 많네'라고 생각했는데..알고보니 이 수업이 '문화의 이해' 더군요,,ㅋㅋ
오늘 여러분들 이야기를 들었는데...솔직히 고백하건데, 매력적인 분들이 너무 많더군요^^
(설마,,뭐 이성적으로..라고 오해하시는 분들은 없겠죠?ㅋ)
열정으로 뭉친 수업공동체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ㅎㅎ
진심으로..이번 수업 계기로 많은 분들 사귀고 싶습니다..!!
그리고...마칠때 쯤, 토론(이야기)하는데 약간의 규칙을 만들고..기분좋게 이야기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뭐- 다 좋지만, 그러한 규칙때문에 치열함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ㅎㅎ
토론할 때 만큼은 열정적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ㅋㅋ
오늘 못다한 '영어와 세계화'에 대한 이야기가 온라인에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옆에 보니..토론방도 있네요,,
오늘 수업시간에 못다한 이야기 해주시면..저도 적극적으로 참여할게요~!!^^ ㅎㅎ

글쓴이 : 하승효 조회수 : 81
등록일 : 2006/09/13 00:24 수정일 : 2006/09/13 00:27
오늘 수업^^ 재밌었어요ㅋㅋ
멋지게 먼저 나가서 말문을 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기얘기를 해나가는 사람도 있고
의견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도 있고
선생님 말대로 결국 불편함 점을 맞닥뜨리게 되는 시점까지가서는
서로 원칙을 정하자는 얘기도 나오고
그치만, 모두 조한선생님의 짜여진 각본이라는 느낌이ㅋㅋㅋㅋ
나중엔 열기때문에 모두들 얼굴이 바~알개진 걸 보고 왜 귀엽다고 느껴지던지ㅋ
개개인이 아니라 발개진 얼굴을 한 몇십명의 학생들로 가득찬 교실 풍경이 귀여웠어요
'좋은 기운'때문인가?ㅋ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개성있는 자기소개 듣고 싶구요
팀프로젝트도 많이 많이 개설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차마 주도적으로 하진 못하겠고;;
저는 이번 수업에 팀프로젝트에 관한 약간의 빡센 환타지를 갖고 있어서요
그래도 기대는 크게 안하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씀이 떠올라서요)
좋은기운 계속 지키고 친하게 지냈으면 합니다 안녕히(__)

글쓴이 : 조혜정 조회수 : 55
등록일 : 2006/09/13 13:56 수정일 : 2006/09/13 13:56
모두가 기획연출자
내가 연출한 것이라 생각하면
아마도 다들 움직이기 싫어질걸요.
각자가 주체적으로 이 수업의 연출자가 되는 겁니다~~~
나도 이 수업이 어떻게 굴러갈 지 잘 모르지요.
노마드처럼 수업의 흐름을 타면서
어딘가로 함께 가는데
그 여정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
짜증나지 않는 시공간을 만드는 훈련을 한다는 것만
분명히 하면서 갑시다.
(글로벌) 소통이 되는 '후기 근대적 사회'를
우리 안에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2007-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