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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이 돌아왔다 서평 (엄기호)

johancafe 2010.05.14 13:13 조회수 : 4020

교실이 돌아왔다. (한승미 교수 청탁 글)

엄기호

대학은 냉소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을 학문과 양심의 전당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대부부의 대학들이 경영과 법학, 의학과 약학 등 기업이 필요로 하는 학문에만 올인하고 있다. 심지어 한 대학에서는 노골적으로 경영학과만 수천명 수준으로 늘려야한다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인문학이나 기초과학에 학생들이 발을 돌리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다. 교양과목에서도 과거 인기를 누리던 문화인류학이나 여성학과 같은 과목은 폐지되거나 대폭 그 강좌수가 줄어들었다.
대학이 직업양성소가 되었다는 푸념도 낡은 이야기이다. 학생들은 차라리 대학이 직업양성소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취업이 될지 안 될지 누구나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예측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스펙을 쌓는데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다. 강의실 분위기도 살벌하다. 출석체크를 하지 않으면 곧바로 학생들이 이의를 제기한다. 수업이 오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확실한 불이익을 줘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 학교 당국만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합리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주체성 역시 ‘경영합리화’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교실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시대에 대학의 가치, 대학 강의실에서 새로운 실험이 가능하다며 동료교수들을 초대하는 사람이 있다. <교실이 돌아왔다-신자유주의 시대 대학생의 글읽기와 삶읽기>(이하 교실)라는 책으로 돌아온 조한혜정 교수이다. 중고등학교 교실붕괴를 넘어 강의실 붕괴가 일상화된 이 시대에 이 무슨 무모하게 낙관적 소리인가 싶다. 그러나 책을 자세히 살펴보면 저자 자신도 낙관주의자가 아님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15년전에 자신이 썼던 책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삶읽기와 글읽기>(이하<삶읽기>)에 등장하였던 학생들에 대한 그리움마저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시기일수록 새로운 페다고지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감성과 언어를 이해하여야한다고 역설한다. 이것이 이 책의 형태가 문화기술지의 형태를 띤 이유이다. <삶읽기>의 화자가 저자 자신이었다면 이 책의 화자는 수업을 들은 학생들에 의해 집단 창작된 가상적인 학생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새로운 교수법에 대한 기술적인 매뉴얼을 제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대학생이라는 정체성의 변화에 대한 문화기술지, 혹은 그런 문화기술지에 근거한 교수법에 대한 매뉴얼 이상이다. 책의 곳곳에서 저자는 이 정체성의 변화가 드러내는 시대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라고 한다면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실험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네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도전하는 네 명의 조한혜정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조한혜정은 대학을 현장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이며, 두 번째는 새로운 페다고지를 개발하고자하는 교육학자이며 세 번째는 시대를 고민하고 정체성의 변화를 언어화하려는 문화연구가이자 인문학자이며, 마지막으로 그녀는 인문학의 가치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것을 되살리려고 하는 인문주의자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끈질기게 15년전의 <삶읽기>에 등장하였던 자신의 학생들과 비교하는 것을 통하여 대학의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사실 저자는 이 변화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비교 지점 혹은 비교 대상을 살짝 비트는 트릭을 사용하였다. <삶읽기>에서 저자가 문제삼고 싶었던 것은 지식인이라는 대학생의 지위였다기보다는 대학이라는 공간이 생산하는 지식-앎이었다. 그 앎은 어떤 앎의 주체, 즉 지식인을 생산하는가? 이런 고민에는 <교실>의 서론에서도 밝히는 것처럼 대학생이 지식인이라는 위치는 고정된 것처럼 보인다. 대신 그 지식인이 학습하고 생산하는 앎이 무엇인가 보다 초점이 맞추어졌었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다음 <교실>에서 저자가 질문하는 것은 더 이상 대학이 어떤 앎을 생산하는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대학 이전에 어떤 정체성을 가진 아이들이 들어오며 그것이 거꾸로 교실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과거에는 대학이 ‘식민화된’ 앎의 주체를 대학 이전의 주체성과는 단절하여 형성하는 공간이었다면 현재의 대학은 오히려 대학 이전에 형성된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이 연장되고 강화되는 공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이 ‘탈’고등학생이 아니라 고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는 학생들의 말이 이것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저자의 시대인식이 ‘탈식민시대’에서 ‘신자유주의 시대’로 바뀐 이유가 있다. 지식인이 아니라 스스로를 그저 대학생이라고 부르며 지식인이라는 호명에 대해 부담스러워하고 냉소하는 학생들에게 저자가 발견한 것은 신자유주의적 주체이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에게 자유는 더 이상 추구해야할 대의가 아니라 부담스러운 의무이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자유롭고 싶었고, 또 사실 자유로워졌지만 막상 그 자유가 당황스럽기만 한’ 아이들이다. 이들에게 ‘자유란 오지선다에서 더 많은 선택으로 선택지만 늘어난 상태’이다. 이 자유는 ‘더 괴롭기’만 하다. 그 더 많은 자유에서 막상 이들이 해야 하는 의무는 주어진 선택지에서 여전히 정답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을 ‘암기해야할 무엇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정답을 때려 맞추는 것에는 귀재’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들이 ‘정답에 길들여져 있는 만큼 틀리는 것에 대해 심하게 주눅이 들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게다가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초경쟁의 통하여 ‘모두를 떨구고 가는’ 시대이다. 지그문드 바우만에 따르면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마지막에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누군가를 추방해야하는 ‘의자뺏기’ 게임이 이 시대의 규칙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들은 자신들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다들 눈치를 보고 선뜻 먼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소통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보니 저자가 실험하는 ‘자기 주도형’, ‘해답이 아니라 질문을 생산하는 형’의 수업이 학생들에게 쉬울 리가 없다. 학생들은 첫 시간에 최초의 침묵을 깨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저자는 그 시간을 교수가 어떻게 잘 견디고 이해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대다수의 선생들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여 학생들을 ‘포기’해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다수의 학생들은 여전히 남을 배려하고 전체를 통찰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면 남의 시간을 침범하기 십상이다.
학생들이 이러한 수업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이 스펙타클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사실 대학 밖뿐만 아니라 대학안의 강의들도 완전히 스펙타클로 전환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수업이 파워포인트와 동영상으로 이루어진다. 수업에서도 ‘학생’이 아니라 ‘시청자’인 셈이다. 이런 아이들이 스스로 무대에 올리는 아마추어적이고 촌스러울 수 있는 ‘학예회’를 즐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인문학의 힘과 새로운 페다고지

바로 이렇기 때문에 저자는 인문학이 지금의 시대에 고유한 역할이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다른 저서에서도 몇 번이나 강조하였다시피 이런 학예회를 만들고 즐길 줄 아는 주체, 그것이 저자가 수업을 통해 목표로 하는 인문학적 주체성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서태지의 시대는 갔다. 주인공 한 명이 주도하고 가치를 생산하는 시대는 가버린 것이다. 대신 우리가 목표해야하는 것은 자기 삶, 자기 마을의 주인들이다. 촌스러운 마을 잔치와 학예회를 기획하고 연출하고 즐길 줄 아는 주체줄 필요것은 이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 무대이며, 무대에는 다른 배우들도 있으며 그 상대들을 존중할 줄 알아야한다. 공동체는 이런 배려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단적으로 이 시대에 인문학의 임무는 소통과 공동체의 가치를 회복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공동체라는 참조집단을 통하여 인간을 일회적 인간에서 역사적 인간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 이 시대에 인문학이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인문학의 가치가 다시 실현되기 위해서 저자가 무엇보다 공을 들여서 설명하는 것이 가르치는 사람들의 의무이다. 저자는 대학의 교수들은 이제 영화감독, 혹은 연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지식을 화려한 프리젠테이션 기술로 전달하는 것으로 의미 있는 앎은 발생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앎은 암한 사람이 앎을 지배하고 전수하는 시대는 갔다. 오히려 지금의 시대는 동료에게 배우는 시대이다. 따라서 가르치는 자는 내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공동체라는 판을 벌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동료에게 배우고 공동체를 만드는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다. 이 공감을 만들기 위해 저자는 수업 내용과 관련해서는 일부로 모두가 졸수밖에 없는 ‘재미없는 다큐멘타리’를 수업 때 같이 보기도 하고 아주 잘 만든 영화 한편을 틀기도한다. 학생들은 개념적 판단이전에 재미있다/없다라는 정서에서부터 ‘나의 고민이 우리의 고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공감은 이성적 판단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너도 나도 대학에 대해 이미 실망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를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공감을 통해 공동체로 이어지는 것, 이것이 소통의 힘이며 가치이다. 이를 통해 공동체는 ‘적극성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공동체적 소통이 쉽지는 않지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배운다. 저자가 사용하는 개념에 따르면 ‘조작적 개념’이 아니라 ‘감응적 개념’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첫 출발점이다.
공감 이후에 수업을 학생들 스스로 연출하면서 성찰과 배움을 조직하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 책의 중반에 나오는 ‘올리브와 레섹스’를 읽고 토론한 세계화에 대한 강의이다. 학생들은 레섹스와 올리브 사이에 자신이 어디쯤 위치해있는지를 성찰해보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보는 부분이 그 단면을 보여준다. 다수의 아이들은 ‘가운데’에 위치한다. 중도의 시대이다. 세계화를 이해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왜 가운데를 선택하였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토론을 통하여 학생들은 자신들이 ‘균형’이라는 것에 집착하고, 그것이 정답이고 배워왔으며, 정답이 아닌 것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고백한다. 한 학생의 말대로하면 ‘중도를 택한 이기주의자’인 것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세계화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에 대한 앎에 도달한다. 배운다는 것이 스스로의 삶과 연결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기획이 교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수업을 듣고 있는 한 학생의 연출이라는 점이다. 가르치는 자의 위치는 학생들이 연출할 수 있게 연출해주는 것이다. 이 연출자는 위의 사례에서와 같이 수업에서 나오기도 하고 사이버 강의실의 게시판에서 나오기도 한다. 추석에 대한 참여관찰을 하고 토론한 수업에서 볼 수 있듯이 누군가가 자신의 가족이나 연애 이야기를 솔직하게 쓴다면 그에 대해 공감하며 토론의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서로가 서로를 부추키는 것이다. 다른 동료의 글에서 배우고, 다른 동료의 글에서 자극받는다.
학생들 스스로가 수업 공동체, 혹은 저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수업생태계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학생들 사이에서 연출이 발생하도록 추임새를 넣고 흐름을 짜는 것이 가르치는 자의 위치이다. 강의실 세팅을 둥글게 하여 서로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고, 교수가 강단이 아니라 학생들의 자리에 앉으며, 학생들에게 수업 바깥에서도 서로 인사를 하자고 권한다. 저자 스스로도 과거와는 달리 ‘마지막 한 명을 떨구지 않고’ 따뜻하게 가는 수업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고 말한다. 수업 스스로가 아이들이 배우는 것을 실험하고 체험하는 마을로, 부족이 될 수 있도록 저자 스스로가 그 공동체내에서 소통하고 위로하는 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려고 한 것이다.

계몽을 넘은 계몽주의자

무엇보다 이 책이 의미있는 것은 저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수업을 인문학의 가치를 이해하는 공간이기만한 것이 아니라 직접 실험되고 실연되고 실현되어야하는 공간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삶에서 헛도는 말에서 벗어나 말의 가치를 회복하려고 했던 <탈식민>의 문제의식과 기획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버전으로 집요하게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한 순간도 말과 소통, 그리고 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때로 그것의 여성학의 이름으로, 때로는 청소년으로, 혹은 마을 만들기로 끈질기게 실험되고 추구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탈근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역설적인 계몽주의자로서의 조한혜정을 만나게 된다. 말과 소통, 그리고 공동체, 이것은 전형적인 근대적 계몽주의자의 에토스이다. 사실 이런 점에서 그녀가 ‘계몽주의의 시대는 갔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트릭이다. 우리는 저자가 스스로를 ‘계몽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저자가 스스로 드러내는 곤혹은 ‘계몽주의가 가 버린 시대’에 ‘계몽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위치이다. 그러나 이 곤혹은 저자에게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니라 계몽주의를 계몽하는 이점으로 전환된다. 우리가 계몽해야하는 것은 반계몽적인 계몽주의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을 직접 계몽하는 폭력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유혹인 계몽주의와 싸우는 것을 통하여 계몽의 가치와 힘을 배우는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인문학의 가치를 자신의 교실에서 실험하고, 그것을 자신의 책으로 언어화하는 보기 드문 우리 시대의 탈계몽화된 계몽주의자인 조한혜정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조한혜정의 목소리는 최소화되어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책의 화자는 가상적인 학생이며, 저자의 목소리는 서문과 강의노트, 그리고 에필로그에 국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교실에서 그녀가 강단에 서지 않고 학생들 사이에 보이지 않게 끼여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화자인 학생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의 상대로, 관찰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조한혜정을 만나게 된다. 가르치는 사람이 학생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가르치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통하여 배움을 스스로 주도하게 배려하는 보이지 않는 교사 조한혜정을 만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보이지 않는 학생들의 언어를 통해서 문화인류학자이며, 교육학자이며, 인문주의자인 조한혜정을 찾는 일종의 숨은그림찾기이다.

2010-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