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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태어나 본 적이 없는 존재 (최은주)

johancafe 2010.05.14 13:20 조회수 : 4074

<사회적으로 태어나 본 적이 없는 이들과 생존방식으로써 ‘교육’>



지난 시간 희옥스의 ‘사회적으로 태어나 본 적이 없는 십대’라는 통찰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의 풍경을 떠오르게 하였다. 사회적으로 태어나 본 적 없는 엄마와 그녀의 아들과 이웃 사람들, 사회적으로 태어나 본 적이 없는 이들이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마을(사회)의 풍경을 영화 ‘마더’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마더’에서 근대의 과학과 이성을 상징하던 고물장수는 아들을 살리기 위한 엄마에 의해 삶의 최후를 맞이한다. 봉준호가 그려낸 한국의 풍경에는 생존을 위한 사회적 관계가 비극적으로 맞물려 있다. 홀로 치매 할머니를 봉양하며 생존을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쌀떡녀’ 아정, 아들과 함께 생존이 너무 힘들어 동반 자살을 시도 했던 ‘엄마’, 돌봄을 받아 본 적 없는 ‘엄마’의 유일한 돌봄으로 사회적 ‘바보’가 되어 살아가다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아들 ‘도준’..... 떠돌이 수컷이 되어 살아가는 아들 친구 ‘진태’,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엄마 없는 아정의 남친.... 이들 모두는 사회적 돌봄 없이도 살아남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한, 사회적으로 태어나 본 적 없는 이들이다. 이들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생존의 방식’을 스스로 터득해 나가야만 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통용 되는 사회적 윤리는 ‘생존’이며, 모든 ‘가치’를 초월하는 것 역시 ‘생존’ 이다. ‘시나공’으로 대표 되는 제도 교육의 가치 또한 ‘생존’ 이나 ‘살아남기’의 명목으로 수행되며, 사회에서 음으로 양으로 유통되는 ‘앎의 방식’들 또한 모두 생존을 위한 것이다.(부동산을 비롯한 재태크 정보, 취업 알선 등등등....) 인식 가능한 것과 인식되어지지 않는 감성을 분할하는 생명 정치의 가장자리는 바로 ‘생존’이며,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을 합리화 시키는 이데올로기 역시 ‘생존’ 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자 최고의 ‘가치’ 이기 때문에, 이 사회에 저항하는 방법은 때론 ‘자살’이 되기도 하며, 국가 공권력에 의한 ‘타살’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사건’이 된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뭉치는 법을 거리에서 배웠고, ‘죽음’으로 권력에 저항하는 법도 거리에서 배웠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축적하고 활발히 유통해 온 공동체적 지식이라 할 수 있는 '앎'이란 다름 아닌 ‘생존 방식’이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관계망’이란 가족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생존의 관계망’이다. 그 생존의 방식을 배우는 공간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이고, 생존을 유지시켜 주는 관계도 가족 공동체이자, 새로운 사회적 관계인 친구들과 결혼을 통제하는 곳도 가족 공동체 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 모든 생존에 대한 ‘교육’과 생명에 대한 돌봄의 책임을 전적으로 엄마들에게 위임해 왔다. 사회적 신분으로 탄생되어 본 적 없는 '엄마', 본능적으로 돌봄 능력이 있으리라 기대 되는 ‘엄마’들에게 스스로를 돌볼 겨를도 주지 않고 그 모든 사회적 책임을 떠맡겨 왔던 것이다. 때문에 한국의 '엄마'들은 사회적으로 탄생 해 본 적 없다해도, 사회의 중심 역할에 있다. 사회적으로나 합법적으로 가족을 구성하지 못하거나 안하는 사람들에게 ‘살아남는 방식’을 알려주기를 자처하거나 ‘생명’을 보살펴주는 사회적 장치가 한국 사회에 있었던가? 그러한 사회적 장치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엄마'가 없는 이들은 잠정적인 범죄자가 되거나 낙오자가 될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그 모든 책임을 부여받은 ‘모성성’을 신화화한 ‘엄마’는 아닐 것이다.



엄마 이외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자본’의 지배가 구조화 되는 방식은 생존의 사슬인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였으며, 이데올로기적 신화가 통치되는 방식 또한 바로 ‘생존’의 가치를 따라서 이다. 우리는 어떻게 최상의 사회적 가치로써 강력한 통치술을 발휘하고 있는 ‘생존’이라는 ‘앎의 방식’을 재구조화 재의미화 시켜 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동안 엄마들이 전담해 왔던 ‘생존’의 통치 권한을 어떤 사회적 관계망들에게 분배시켜 낼 수 있을까?

2010-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