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Trips Anywhere
CHO(HAN)Haejoang
Field Trips Anywhere
CHO(HAN)Haejoang

김현경, 피로 사회 서평

조한 2012.04.20 07:03 조회수 : 4037

 

피로사회

 

이제 우리는 이 소문으로 듣던 책을 읽게 되었다. ?피로사회?는 2010년 가을 독일에서 출간되어 철학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덕택에 저자인 한병철은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비평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 작은 책에 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길래, 사람들이 그토록 반기는 것일까?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사실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 책을 바버라 에렌라이크의 ?긍정의 배신?과 비교할 수 있다. 에렌라이크의 책과 마찬가지로 ?피로사회? '긍정의 과잉'―"예스 위 캔!"의 철학과 '동기유발' 프로그램들, 혹은 '신경향상'을 위한 약물들, 자기투자와 자기착취을 비판한다. 하지만 전자와 달리 후자는 긍정의 과잉을 자본 축적의 특정한 국면 혹은 전략과 연관짓지 않는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안전망을 철거하려고 하며, 변화에 대한 '긍정적 자세'("위기를 기회로 여겨라", "사라진 치즈에 연연하지 말고, 새로운 치즈를 찾아나서라")가 강조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피로사회?의 저자는 신자유주의보다는 '성과사회'라는 말을 선호하며, 성과사회 특유의 병리적 현상들을 노동하는 동물과 사색하는 동물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성찰한다.

성과사회는 노동하는 동물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 말을 우리는 지배계급이 '노동하는 동물'로 바뀌었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사색하는 동물이 지배하던 시대에도 피지배자들은 어차피 노동하는 동물이었으니까). 확실히 지배자의 형상이 바뀌었다. 과거에 최고경영자는 사무실에 편안하게 앉아 있다가 누가 서류를 가져오면 싸인을 하고 손님이 오면 차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오늘날 유능한 경영자란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고 야전침대에서 눈을 붙이면서 밤낮없이 일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과거에 교수들지배층 안에서도 사색을 전담해온 집단은 교정을 거닐며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오늘날 평균적인 교수의 초상은 쉴새없이 전화벨이 울리는 연구실에서 논문더미에 파묻혀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과사회에서는 모두가 바쁠 뿐 아니라,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바빠진다. 이 사회의 꼭대기에는 떨어진 돈을 주울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밑바닥에는갤리선의 노예 대신에가진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는 백수들이 있다. 성과사회의 낙오자인 그들은 바쁜 듯이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지나가는 직장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바쁠수록 당당해지는 이 사회에서, 바쁜 것은 일종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이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경영 능력, 즉 스스로를 바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스펙'의 용도가 여기에 있다.  

한 마디로 성과사회는 활동과잉 상태에 빠져 있는 사회이다. 한병철은 이것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가져온 예상치 않은 결과라고 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43-44)

성과사회의 주체를 움직이는 것은 '~하면 안된다' '~해야 한다'와 같이 주체의 의지와 욕구에 대립하는 부정성의 언어가 아니라, '~할 수 있다'라는 긍정성의 언어이다. "명령, 금지,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24) 따라서 면역학은 더 이상 성과사회의 병리를 분석하는 데 적합한 패러다임이 아니다. 성과사회의 주체는 면역학적 주체처럼 외부에서 침범한 어떤 이질적인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의 과잉, 긍정적인 것의 과잉으로 인해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22)

"찢어질 듯이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된"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들, "자기 자신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인 우울한 성과주체들에게 저자는 피로를 처방한다.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성과사회의 고독한 피로가 아니라, "자아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하여" 세계가 스며들 수 있게 하는, 무위의 피로. 한트케가 말하는 "근본적 피로."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72) "근본적 피로는……어떤 가족적 유대나 기능적 결속과도 무관한 이웃관계를 빚어낸다."(73) 도래하는 사회는 이런 의미의 "피로사회"일 것이라고 저자는 결론짓는다.


  ?
피로사회?는 이처럼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에 대한 명쾌한 진단과 처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이 진통제만큼 많이 팔린다 하더라도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피로사회?는 단순한 진통제가 아니다. 이 책은 가벼운 외관과 달리, 묵직한 철학적 야심을 숨기고 있다. 바로 노예와 주인, 조에와 비오스, 노동과 사색 같은 이항대립들의 위상학적 관계를 뒤집는 것이다. 이리하여 저자는 아렌트가 '주인'의 편에 두었던 활동적인 삶을 '노예'의 편으로 옮긴다. 대신에 무위와 피로를 '주인'의 쪽에 놓는다. 그 결과 우리는 주인-사색-무위-피로-서사가 있는 삶이 하나의 계열체를 형성하고, 노예-노동-활동-자아의 과잉-벌거벗은 삶이 거기에 대립하는, 파격적인 배치를 얻게 된다.

그런데 이 배치는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만일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다면, '서사가 있는 삶'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한병철은 세계의 탈서사화로 인해 삶이 벌거벗은 생명으로 바뀌었으며, 벌거벗은 노동은 벌거벗은 생명에 정확히 조응하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이것을 '서사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과 연결시키면서, "서사성을 지닌 죽음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벌거벗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관념이 생겨난다"(42)고 덧붙인다. 이런 구절들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진우, 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이하 괄호 안의 숫자는 이 책의 페이지임)에서도 동일한 주장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활동적인 삶의 세 차원 중 가장 우위에 놓았던 '행위'는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를 의미하였다. "행위는 이야기꾼에게만 완전히 계시되기"(253) 때문에, "행위 주체의 본질은 삶이 떠나가서 이야기 외에 아무것도 뒤에 남기지 않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자신의 위대한 행위로 목숨을 잃는 자만이 자신의 정체성과 가능한 위대성의 확고한 주인으로 머물 수 있다."(255) 폴리스란 이런 의미의 행위가 개시될 수 있는 무대이자, 가장 무상한 인간활동인 행위와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보증해주는 "조직화된 기억체"였다(260). 아렌트는 그리스인들의 정치개념의 근간에는 "타인과의 대결에서 자기를 보여주고자 하는 열정"(256)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폴리스는 '불멸의 영예'를 얻는 기회를, 즉 말과 행위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기회를 배가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다(259).

행위와 서사, 폴리스와 자기현시가 이렇듯 연결되어 있다면, 서사가 있는 삶을 활동적인 삶으로부터 분리하여 무위 혹은 피로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무리한 게 아닐까? 한병철은 차라리 서사의 추구를 '노예'의 편으로 보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너의 인생을 스토리로 만들라"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정언명령이니 말이다. 사실 우리는 성과사회의 압박에서 벗어나 '느리게 살기'를 택한 사람들이 곧 잽싸게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팔아먹는 모습을 숱하게 보지 않았던가?

물론 서사의 추구를 노예와 연결시키는 것은 벌거벗은 삶을 주인과 연결시켜야 하는 한층 더 큰 어려움을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리바꿈은 이 책이 갖는 대중적 매력 역시 반감시킬 것이다. 우리는 아무 이야기도 없이 피로하기만 한 삶을 원하지 않는다. 타인의 팽창된 자아를 마주하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야기가 좋다고 생각한다. 간간이 나에게도 기회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남들의 자기자랑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이다. 오늘도 술집과 찻집을 가득 메운 사람들, 허공을 날아다니는 수백만 개의 메시지들, 결코 성과지향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위'라고 하기도 어려운, 이 다양한 활동의 증거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