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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재현 (한미라)

johancafe 2010.05.13 18:57 조회수 : 3945

한국영화에서의 가족 재현
-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영화를 중심으로-


한미라 (중앙대 강사)


1. 들어가면서
2. 한국영화에서의 가족재현
2-1. 좌절된 근대화의 공간
2-2. 가부장의 재구성
2-3. 억압적 모성신화와 경험적 모성
2-4. 가족-되기
3. 나오면서


1. 들어가면서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부분 중 하나는 가족과 그 가족에 관한 담론일 것이다. 기존의 가족관계를 뒷받침해온 가치와 규범에 균열이 드러나면서 이른바 ‘가족의 위기’가 등장하는 한편 정상가족신화에 대한 탈신비화 징후가 가시화 되었다. 이혼율 급증, 결혼율 감소, 저출산 경향, 노인문제 확산, 한부모 가족 등 연일 TV 뉴스를 오르내리는 가족 관련 이슈들은 가족이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생계부양자인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그 자녀들로 구성되는 근대 핵가족을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가족이라고 간주하는 이른바 정상가족이데올로기에서 본다면 위의 현상들에 근거한 가족의 변화는 분명 심각한 위기임에 틀림없다. 어떤 가족을 건강하다고, 정상적이라고 보고, 어떤 가족을 건강하지 않다고, 비정상적이라고 볼 것인가는 가족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의 문제이다.
가족the family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장구한 인류역사를 통해 ‘가족the family’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일한 현상이 있었던가? 지금까지 가족은 형태와 내용이 유사하며 고정불변의 실체를 함축하는 단일한 형태로, 무시간적인 완전성과 불변성을 지니는 것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사실 가족은 절대적 정당성과 자연성을 가지는 초역사적인 고정된 실체라기보다는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구성물이다. 권명아,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책세상, 2000, 14쪽 누가 가족인지, 무엇이 가족인지는 사실 명확한 것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고 때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가족 위기 담론은 가족 변화의 현실을 왜곡하는, ‘실제의 가족들’이 없는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기인한 것임에 다름 아니다.
현대의 가족 개념이 각각의 학문적 입장에 따라 다양한 입장들을 견지하고 있지만 대체로 일치된 의견은 유일한 ‘정상가족the family’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가족의 친숙함이나 익숙함 혹은 보편성 때문에 가족을 신성시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온 가족신화 속에서 가족을 찾아왔다. 가족신화의 주장처럼 가족이 안정적이고 조화롭다고 믿는 것은 근대성의 산물이었으며, 정상가족의 개념은 그 개념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견고한 가족의 경계를 만들어 정상의 범주에 들지 않는 많은 가족들을 비정상적이거나 결손의 상황으로 분류하게 했다. 김선영, 「텔레비전 광고에 재현된 가족 이데올로기 연구」,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논문, 2004, 1쪽 특정 형태를 정상가족으로, 그 외의 형태를 비정상가족이라 규정하는 이른바 정상가족이데올로기는 한부모 가족, 일인 가족, 동성 가족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주변화하고 타자화하며 차이를 배제한 동질한 형태만을 가족으로 범주화했다.
각각의 가족들이 서로 다른 경험을 하는 것처럼 개별 가족 구성원의 경험 또한 동일하지 않다. 가족을 하나의 덩어리로 본다면, 가족 내의 모든 개인들은 대체로 비슷한 자원과 생활을 공유하는 비슷한 상황에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그러나 실제 가족 내에서 여성과 남성, 아이와 어른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다. 가족은 ‘각박한 세상의 안정된 항구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가족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 박은주 옮김, 새물결, 11쪽’일 수도 있지만, ‘일상의 폭력과 억압이 자행되는 장소’일 수도 있다. 종종 사랑과 모성으로 미화되어 ‘천국 같은 가정’이라는 이미지로 신비화되곤 하지만 사실 가족은 남성지배와 여성종속, 그리고 그 ‘천국 같아 보이는 가정’ 안에 갈등, 폭력, 불평등이 존재하는 매우 복잡하고 모순된 공동체다. 각각의 가족이 경험하는 그리고 그 가족 내에서 가족 구성원들이 경험하는 것들은 앞서 언급한 이른바 정상가족으로는 다 묶일 수 없는 수많은 스펙트럼을 담고 있다. 배리 소온,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본 가족』, 권오주 외 옮김, 한울아카데미, 2003, 11쪽
이와 관련하여, 최근 한국 영화의 흐름 중 하나는 가족을 소재 혹은 주제로 한 수많은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 <8월의 크리스마스>(1998)를 시작으로, <가족의 탄생>(2006)까지 다양한 가족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가족을 소재 혹은 주제로 한 영화는 다음과 같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를 필두로 <조용한 가족>(1998), <마요네즈>(1999), <반칙왕>(2000), <베사메무쵸>(2001), <해적, 디스코왕 되다>, <집으로>(2002) 등의 일련의 영화에서 서서히 가족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2003년, <오 브라더스>, , <아카시아>, <바람난 가족>, <4인용 식탁>, <장화홍련>, <폰> 등의 영화가 봇물 쏟아지듯 등장하고, 2004년에는 <효자동 이발사>, <돈텔 파파>, <귀여워>, <인어공주>, <가족>, <우리형>, <맹부삼천지교>, <말아톤>, <꽃피는 봄이 오면>, <수퍼스타 감사용>, <클레멘타인> 등 가히 가족을 재현한 영화의 전성기를 맞는다. 2005년에도 이러한 흐름은 이어져 <간 큰 가족>, <안녕 형아>, <엄마>, <사랑해, 말순씨>, <주먹이 운다>, <파송송 계란탁>, <소년, 천국에 가다>, <다섯은 너무 많아>를, 2006년에는 <모두들 괜찮아요?>, <오로라 공주>, <맨발의 기봉이>, <가족의 탄생>, <괴물>, 2007년에는 <좋지 아니한가>, <우아한 세계>, <아들>, <마이 파더> 등에서 가족을 만날 수 있다. 이들 영화들이 가족을 재현하는 양상을 살펴보면, 가부장 중심의 이른바 근대 핵가족의 해체를 그리는 영화들이 있고(<아카시아>, <4인용 식탁>, <바람난 가족>, <장화 홍련> 등), 가족 변화를 가족의 위기로 인식하며 그 해체된 전형적 가족을 다시 봉합하여 가족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영화들이 있고(<태극기 휘날리며>, <우리 형>, <가족>, <주먹이 운다> 등), 마지막으로 가족의 변화된 양상을 가족 형태와 기능의 다양화로 이해하는 영화들이 있다(<싱글즈>, <다섯은 너무 많아>, <가족의 탄생> 등). 그리고 이러한 재현의 과정 속에서 가부장과 모성들을 불러오면서 그 변화된 위치와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점에서 ‘가족들’이 영화의 전면부로 부상하게 된 것은, 이른바 ‘가족의 해체’라고 명명되고 있는 ‘가족의 변화’라는 사회적 현실과의 반영이자 경합이다. 좌절된 근대화의 상징인 IMF라는 국가총체적 위기는 근대 핵가족의 위기와 가족 담론을 전면부로 가시화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고, 탈근대 사회로의 진입은 진보, 보편성, 규칙성이라는 근대적 가치에서 차이, 특수성, 비규칙성이라는 탈근대적 가치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다의성과 복수(複數)성 그리고 친화성을 바탕으로 한 가족 담론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된다.
영화라는 의미화 실천의 장은 어느 특정한 사회에서 공론화된 것뿐만 아니라 공론화되지 않은 것, 지배질서에서 언설화 되지 않는 것 혹은 합법화 되지 않는 것들까지도 표출하는 김소영, 『근대성의 유령들』,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2000, 172쪽 공간이다. 영화가 단순히 현실의 반영이 아닌, 영화적 재현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의미와 가치질서를 찾아낼 수 있는 적극적인 협상과 경쟁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영화에서 재현된 가족의 모습은, 수많은 이슈와 의미가 결정되는 투쟁의 장소이자 저항의 장소로 앤 브룩스, 『포스트페미니즘과 문화이론』, 김명혜 옮김, 한나래, 2003, 223쪽 작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고는 가족봉합 혹은 가족해체라는 이분법적 반영론에서 벗어나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영화에서 가족의 변화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가족 재현의 수면에 위치한 은밀한 무의식의 작동과 저항의 틈새를 구성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한국 영화가 가족을 바라보는 방식은 무엇인가, 내가 가족을 바라보는 방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출발점은 단수의 가족the family이 아니라 복수의 다양한 가족들families이며 그 과정은 가족의 대안을 규정하기보다는 가족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2. 한국영화에서의 가족재현

2-1. 좌절된 근대화의 공간
근대는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프로젝트’이며 여전히 낙관적인 전망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후기 근대주의자로부터, 근대 기획은 실패했으며 다른 문명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탈근대주의자에 이르기까지 ‘근대성’에 대한 논의는 매우 분분하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서부터 시작된 근대 기획은 1960년대 이후 민족주의적 주체를 활용한 경제주의 근대 기획으로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한다. 박정희 정권이 추구한 경제 기획은 ‘민족적 자아’라는 본질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무반성적인 발전주의와 진보주의의 담론 속에 갇히게 된다. 일제에 저항하는 가운데 형성된 민족주의 감정은 국민적 정서의 바탕이 되고 국가의 발전이라는 추상적 가치와 가족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은 근대화의 동력이 되어, 애국심과 가부장으로서의 책임은 산업 역군들에게 그 동기를 부여했다. 남자는 국가를 위해 사는 국민이고 아내는 그 국가적 인물인 산업 역군을 보조하는 사람으로 분리된다. 조한혜정, 『성찰적 근대성과 페미니즘』, 또 하나의 문화, 1998, 148~149쪽 이처럼 근대화 과정에 있어 주체 형성의 중심에는 남성들이 위치하게 되고 여성들은 그 주변부를 형성하며 타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수자, 『후기 근대의 페미니즘 담론』, 여이연, 2004, 19~20쪽 근대적 핵가족은 비생산의 사적 영역에 여성을, 생산의 공적 영역에 남성이라는 성별 분업을 강화시켰다. 오랜 세월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해온 유교적 질서가 근대의 자본주의적 본질과 맞닿으면서 남성들이 계몽적 주체로 적극적으로 근대화에 참여한 반면 여성은 산업화의 노동력 혹은 재생산의 모성으로 선택적으로 개입하며 근대화 과정의 그림자에 가려진다.
1990년대 이후 고삐 풀린 거품 자본이 만들어낸 한국의 공간들은 IMF 위기를 맞아 거대한 블랙홀과 무성찰적 근대가 만들어 낸 폐쇄회로를 드러내게 되는데 조한혜정, 위의 책, 14~18쪽 공적 영역에서 근대화의 실패가 IMF 경제위기로 가시화되었다면, 사적 영역에서는 각각의 가족들과 개개의 가족 구성원의 경험을 가려왔던 가부장 중심의 근대 핵가족 제도의 균열로 그 폐부가 드러난다. 군대를 막 제대한 막동이가 돌아갈 가족의 공간은, 예전의 그곳이 아니었다. 논과 밭이 사라진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섰고, 가족들은 더 이상 모여 살 수 없었다.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족들과 일산 집에 모여서 식당이나 하나 여는 게 꿈이었던 막동이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초록 물고기>(1997, 이창동)). 삭막하고 위험한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일 줄 알았던 가족의 공간은 가족 구성원 내부로부터 불려온 손님들에 의해 폭력과 광기의 공간으로 변해갔고, 가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 행태들은 한국의 폭력적 근대화, 바로 그것의 다른 이름이었다(<조용한 가족>(1998, 김지운)). 가장의 실직으로 경제적 위기에 처하자, 가족들은 보험사기극을 통해 부를 획득하고 점점 괴물화 되어 간다. 압축적 근대화 시기의 발전 구호였던 ‘하면 된다’가 가풍인 이 가족의 공간은 폭력과 탐욕의 장으로 변질되어 간다(<하면 된다>(2000, 박대영)).
이상과 같은 ‘천국보다 매우 낯선’ 가족의 공간은 이후 <바람난 가족>(2003, 임상수)과 <소름>(2001, 윤종찬)으로 이어진다. <바람난 가족>은 근대적 핵가족의 붕괴와 가족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를 가부장적 가족제도 바깥의 ‘바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재현하고 있다. 즉, 미성숙한 남성 주체와 실패한 가부장적 혈통 Robert Burgoyne, “National Identity, gender identity, and the rescue Fantasy in Born on the Fourth of July”, Film Nation: Hollywood Looks at U.S. Histor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 참조을 통해 해체 일로에 있는 근대적 핵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바람난 가족>의 여성들이 쿨하게 자기 삶을 찾아가는 동안, 다시 말해 영작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동창과 새 삶을 시작하고 호정은 싱글맘으로 새 가족을 꾸리는 동안, 남성들은 피를 토하며 죽어가거나 부인에게 아웃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영작의 아버지가 토해내는 ‘더러운 피’는 간이 해독작용을 못하고 있다는 의사의 진단처럼,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있어 간의 기능을 해왔다고 자임하는 남성주체들에 대한 현재의 진단이다. 폭력적인 가부장제 역사의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그가 더러운 피를 쏟아내며 죽음에 이르는 모습은, 할아버지-아버지-영작으로 이어지는 부계 혈연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쇠락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소름>은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70년대 개발독재시기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후, 그 압축적 근대화의 좌절과 외상을 여귀의 귀환으로 맞이하고 있다. 즉, 가부장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억압되고 주변화 되었던 여성이 귀신이 되어 현재로 돌아오게 되는데 <소름>이 진짜 공포스러운 이유는, 30년 전에 시작됐던 살인과 공포가 지금까지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곳 어딘가에 시체가 숨겨져 있다.’는 대사는 IMF 위기로 가시화되고 있는 근대화의 폐해들의 상징이다. 외상은 잠재성과 뒤늦음을 특징으로 한다고 Susannah Radstone, "Trauma and Screen Studies: Opening the Debate", Screen, Vol. 42, No. 2, Summer, 2001, p190, 김선아, 위의 논문, 27쪽에서 재인용 했던가? 갑작스럽고도 틈입적으로 현실의 시간을 침범하는 이러한 외상의 기억은 김선아, 「한국영화의 시간, 공간, 육체의 문화정치학」,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박사논문, 2005, 27쪽 현재 시점에서 <바람난 가족>과 <소름>을 통해 가부장적 가족의 해체와 억압된 타자의 귀환이라는 하나의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 공적 영역에서 실패한 근대화는 사적 영역인 가족의 공간을 통해 근대 핵가족의 위기로 귀환한다.

2-2. 가부장의 재구성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 과정을 통해 형성된 가부장성은 1990년대 후반 이후 남성성의 변화와 절합하며 본격적인 변화 양상을 드러내는데, ‘간 큰 남자 시리즈’라는 우스개 소리가 한 시대를 풍미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간 굳건하게 지켜왔던 가부장의 위치는 위기를 맞는다. 이에 매스컴에서는 ‘고개 숙인 아버지’, ‘남편 기 살리기’ 등을 보도하며 남성 가장의 위기와 이에 따른 남성 보호 담론을 창출하기 시작한다. 성시정, 「IMF 시대 가족주의 담론의 등장과 성 정체성의 위기」, <여성학 연구> 제8권 제1호, 1998, 75~81쪽 오랜 세월에 걸쳐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다져진 아버지의 모습은 적잖은 변화를 나타내고 IMF 위기와 탈근대 사회로의 진입은 남성성의 변화를 가시화하는 계기가 된다. 실직자의 대량생산과 이로 인해 경제적 부양능력을 상실한 남성 가장들의 출현은 실질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관한 성구별의 경계를 허무는 상징적 계기로 작용한다. 즉 노동시장으로부터 퇴출한 남성가장들의 심리적 방어기제로서, 혹은 생계부양자로서의 부담을 벗어나기 위한 실리적 계산으로 성역할의 유연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김혜영, 「한국의 가족주의와 여성 인권」, <아시아여성연구> 제42호, 2003, 26쪽
이를 반영하듯, 1990년대 후반 이른바 ‘남성 멜로’에 등장하는 남주인공들은 더 나아가 여성을 배려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실현하는 인물들로 가부장제 질서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여주인공에게 고통을 주는 한정된 역할에서 벗어나 남성 주체의 상실감과 회복을 찾아가는 내러티브의 중심에서 남성 주체성의 통합을 이루어낸다. 권은선, 「남성도 믿을 건 사랑 뿐」, 《씨네21》 181호, 1998 참조 <편지>(1997, 이정국)에서 남주인공의 헌신적인 사랑은 죽어서까지 편지를 보내고 그리고 나무가 되어 부인과 아들을 지켜준다. <남자의 향기>(1998, 장현수)에서 남주인공은 남편을 살해한 여주인공을 대신해서 죽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준다.
한편 가부장의 위기, 남성성의 위기는 가해자에서 희생자로 남성주체의 위치를 바꾸는 한편 건강한 남성 육체를 포기하고 여성화된 육체, 불치병을 앓는 훼손된 육체를 보여줌으로써 스스로를 여성화된 타자 이는 일제시대 문학에서도 볼 수 있는 경향으로, 남성 작가의 여성화 현상은 김소월, 한용운의 시에서 님에 대한 수동성, 질투, 자기도취와 매저키즘 등의 여성주의적 징후로 나타난다. 이는 전환기 지식인 내면의 갈등과 속죄의식을 여성성에 투사함으로써 전향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 남성주체의 심리적 자기동일성을 회복하게 하는데, 이 때 여성성은 위기에 처한 남성주체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무력해진 남성주체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도구화된다. 심진경, 「은폐와 투사-남성 섹슈얼리티의 두 가지 존재방식」, <여/성이론> 8호, 2003 참조.라고 인식한다. 가부장제는 스스로를 희생자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그 변화양상은 가족 관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가족>(2004, 이정철)에서 아버지는 한때 촉망받는 엘리트 경찰이었으나 지금은 한쪽 눈을 잃고 생선이나 다듬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젊은 시절 술주정뱅이에 어머니를 구타했던 아버지는 딸 정은에 의해 차라리 고아로 자라는 편이 좋았겠다고 말해질 정도로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실명이 결국 어린 시절 딸의 실수로 비롯된 것이었음이 밝혀지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불치병에 걸렸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딸을 대신해 조폭을 죽이러가고 마침내 장렬한 최후를 맞음으로써 폭력적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남성주체는 희생자로 전환된다.
아버지들은 또한 스스로를 사회 구조적 모순과 억압적 역사의 희생자라는 위치에 놓고 있다. <효자동 이발사>(2004, 임찬상)에서 성한모는 암울한 시대 상황 하에서 제대로 아버지 노릇을 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비겁하며 비천한 아버지다. 소시민 성한모는 폭력적 근대화에 있어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했던 ‘큰’ 아버지 박정희를 극복하고 마침내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무기력한 아버지는 ‘아버지의 부재’ 경향과 맞닿아 있는데, <우리 형>(2004, 안권태)에서 부재한 아버지의 자리는 동생에 의해 채워지는데, 형 성현이는 동생 종현이를 대신해 죽음을 맞게 되고, 마침내 종현이에 의해 ‘형’이라 불리며 가부장으로써 인정을 받는다. <태극기 휘날리며(2004, 강제규)>에서 형 진태는 부재하는 아버지의 자리를 채우는 가부장이다. 진태는 실질적인 가장으로 동생 진석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동생을 대학 보내기 위해 구두닦이를 하고 동생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이처럼 부재한 아버지의 자리에는 ‘형제’라는 아버지가 새로이 등장한다.
1990년대 후반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무의식 속에서 남한 여성들이 사라지는 현상 또한 이러한 가부장의 위기의 연장선임에 다름 아니다.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남한 여성은 시장의 가치, 교환의 가치를 상실하며 과거 근대화 과정에서 착취당했던 희생자의 역할은 <파이란>(2001, 송해성)에서 보듯 중국 여성으로 이동해간다. 김소영, 위의 책, 24쪽 아버지의 유령이 남한 여성들을 축출하며 한국 영화의 세계화를 표방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우리’라는 새로운 배열을 구성, 남성 중심의 보편성의 서사라는 이름에서 제외된 남한 여성은 영화 안에서 사라진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 박찬욱)에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소피 장은 스위스로 망명한 한국인 아버지와 스위스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타자였고, <쉬리>(1998, 강제규)에서 이방희는 ‘히드라’로 명명된 괴물화된 여성으로 북한의 살인병기였다.
남성향수영화라는 경향 또한 가부장의 위기와 젠더화된 상상력의 결합을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에 지배적으로 나타난 서사적 특징 중 하나는 향수 정서다. 원문에는 ‘노스탤지어’로 표기되어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통일성을 위해 ‘향수’로 표기함을 밝혀둔다. 이후 노스탤지어는 향수로 표기한다.. 복고의 열기와 함께 한국 영화는 시간적으로는 1970년대 언저리로, 공간적으로는 대도시의 주변부·소도시·뒷골목으로 침잠해 들어가며 남성의 상실감과 맞닿게 된다. <반칙왕>(2000, 김지운), <친구>(2001, 곽경택)와,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허진호), <박하사탕>(2000, 이창동), <파이란>(2001, 송해성) 등의 영화에서 향수의 서사는 각각 남성들이 무엇인가를 상실하고 있으며 과거에 존재했던 남성성을, 그리고 남성을 구원해 줄 추상화된 여성성을 갈구한다. 백문임, 「미래의 먼지가 덮인 기차. 또는, 떨어진 벚꽃잎의 불가역성에 대한 고찰」, 『박하사탕』, 삼인, 2003, 165~166쪽 과거에 대한 집착이 늘 현재의 두려움, 불만족,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같은 정체성의 위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향수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라짐 속에서 그 확실성과 불안의 순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절망적으로 추구하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향수적 경향은 남성성의 위기와 관련이 깊고 향수 영화에는 남성적 권위에 대한 그리움이 투영되어 있다. 신승엽, 「기억과 구조 속에 폐쇄된 전망」, 『박하사탕』, 삼인, 2003, 21쪽
무기력한 아버지, 아버지의 부재, 여성의 타자화 경향으로 이어지는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으려는 듯한’ 반동적 욕망은 가부장의 복권이라는 직접적 방식으로, 혹은 과거에 대한 향수라는 우회적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해피 엔드>(1999, 정지우)에서 가부장의 위기의식은, 불륜녀이자 모성애 결핍의 어머니로 여성을 타자화하고,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허진호)에서는 불치병을 앓는 허약한 육체를 전시하며 과거에의 향수로 이어간다. <해피 엔드>는 실직 가장 민기, 그의 아내 보라, 그리고 보라의 애인 일범을 통해 IMF 직후의 경제위기와, 전통적 의미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역할 전도, 그로 인해 변해가는 무기력한 가부장과 인물들 간의 일탈적 관계를 그리고 있다. 영화 속에서 민기는 생계부양자라는 위치를 상실함으로써 전통적 의미의 가부장성을 상실한 것으로 드러나지만 꼼꼼히 집안일을 하고 장을 보고 연애소설과 TV 연속극을 보는 등의 모습은 꼭 그것이 상실이라기보다는 이른바 새로운 여성성을 찾고 발현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민기가 갖고 있는 남성성 자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보라의 외도가 개입하면서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의 남성 지배적 구조를 비판하기보다는 그 구조가 요구하는 남성다움으로부터 개인 남성들이 남성으로서 입게 되는 상처와 피해가 얼마나 큰가를 드러내는 쪽으로 영화는 급선회하게 된다. 보라는 남성들의 상실감과 결핍이 투사되는 장소로 기능하며 결국에는 가부장적 무의식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되는데 이는 가족적인 가치가 위협받는 시대에 젠더 정체성과 성역할을 원래 위치로 되돌리려는 주유신, 「한국영화가 재현하는 성의 정치학 - ‘관객 천만 시대’의 또 다른 명암」, 〈영화언어〉, 2004 봄, 미디어2.0, 66~67쪽 가부장제의 무의식에 다름 아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현재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과거의 감미로운 기억 속으로 움츠러들어 잃어버린 것에 대해 슬픔에 빠지는 리타 펠스키, 『근대성과 페미니즘』, 김영찬·심진경 옮김, 거름, 1998, 73~77쪽 정원의 모습은 스스로를 여성화된 타자로 전시하는 모습이다. 20년 넘게 살고 있는 수색이라는 변두리 동네, 오래된 한옥의 기와집이나 툇마루 등과 같은 낡은 것들에 대한 동경, 그리고 과거를 만들어가는 사진사라는 직업, 아직도 첫사랑 지원을 잊지 못하고 있는 점 등의 과거에 대해 과도한 집착을 드러내는 모습은 이 영화의 주정서인 현재에 대한 불안과 그에 따른 과거에의 향수로 이어진다. 남성 주체의 은밀한 무의식은 사진 찍는 솜씨로 보나, 된장찌개 끓이는 솜씨로 보나, 아직은 아버지가 나은 그 시절을,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다.

2-3. 억압적 모성신화와 경험적 모성
어머니는 언제나 존재해 왔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성motherhood은, 공사 영역의 성별 이분법적 분리라는 근대적 핵가족 제도 하에서 남성을 국민의 주체로 여성을 그 보조자 역할로 상정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구성된 모성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가족 구조의 변화를 반영하며, 현모, 극성 어머니, 프로 엄마 등 다양한 모성의 변천사를 이룩해냈고, 이러한 모성 역할의 전개과정은 자녀 중심적이고 감정 소모적이며 노동 집약적이고 소비적인 모성 이데올로기를 낳았다. 설상가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은 어머니’라는, 이른바 전통적 모성 이데올로기에 상업적 전략까지 합세한, 심화된 모성과 확대된 어머니 역할에 실제의 어머니들을 내몰고 있다. 이재경, 『가족의 이름으로』, 또 하나의 문화, 2003, 151~171쪽 이와 함께 IMF 위기는 ‘신현모양처론’이라는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고 모성에 대한 향수와 극단적으로 희생적인 모성을 불러오며 공적영역에서의 갈등과 모순을 치유하는 사회적 기호로 작동시킨다. 부재하는 혹은 허약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며 아이들을 키우고 현실을 살아내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 된다.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영화에서는 수많은 모성을 불러오고 있는데, <집으로>(2002, 이정향)는 도시문명과 대비되는 자연화된 공간을 통해 근대화의 좌절과 실패를 치유하는 장소로써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모성적 고향을 그려낸다. 할머니로 상징되는 모성은 완전함과 충만함의 기표로 작용하며 실패한 근대화의 혼돈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건네는 역할을 한다. <사랑해 말순씨>(2005, 박흥식)에서는 1980년대 전후라는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 피를 뚝뚝 흘리며 죽어가는 어머니를 등장시킴으로써 과거에 대한 향수와 모성에 대한 향수를 동일선상에 배치하며 과거지향적인 퇴행적 유토피아의 모성공간을 만든다. 한편, 자식이 장애아이거나 불치병에 걸리거나를 반복하며 좀 더 극단적인 상황에서 모성을 소환하는 영화들도 한 무리를 이루었는데 <말아톤>(2005, 정윤철), <안녕 형아>(2005, 임태형), (2003, 이언희), <맨발의 기봉이>(2006, 권수경) 등이 그것이다. <말아톤>은 어미 얼룩말과 새끼 얼룩말에 대한 초원이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듯이, 동물의 모성을 끌어와 모성은 본능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어머니는 자폐아인 아들에게 밥 먹는 법, 방귀 뀌는 법 등 자질구레한 일상생활에서부터 마라톤과 같은 운동까지 자신의 삶을 온통 아들에게 쏟아 부으며, 외부와 단절된 자폐아 아들에게 유일한 소통의 수단이 된다. ‘희생적 모성’이라는 영화적 설정을 통해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특권적 관계로 극대화되고 이를 통해 모성신화는 공고해진다. <오로라 공주>(2005, 방은진)는 더 나아가, 성폭행 후 죽어간 어린 딸에 대한 어머니의 복수라는 최극단의 상황에서 모성신화를 구성한다. 살인도 정당화할 만큼 ‘모성은 도덕적인 것이자 정의로운 것’이라는 모성 윤리학을 설파하며 원형적이고 신화적인 모성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생물학적 모성이 아닌 모성(양모)은 악독한 ‘팥쥐 엄마’로 타자화되고, 모성이 아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아이 돌보기를 방기한, 유부남과 ‘놀아나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들 영화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위대한 어머니’라는 모성신화를 강요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이른바 ‘가족의 위기’가 전면으로 부각된 지금, 그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서 모성을 강조함은, 여성의 역할을 어머니로 한정짓는다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위기를 해결하는 주체로서의 어머니의 역할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가족>(2004, 이정철), <태극기 휘날리며>(2004, 강제규), <우리 형>(2004, 안권태), <효자동 이발사>(2004, 임찬상) 등의 일련의 영화에서 가족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실제로 혹은 상징적으로 ‘죽어나가는’ 아버지들과 비교할 때, 죽어서야 비로소 가부장의 지위를 재탈환하는 아버지들과 달리, 어머니들은 훨씬 다양한 지점에서 어긋나고 균열하는 다양한 모성의 의미들을 생성해 내고 있다.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들 영화가 모성 이데올로기로 다시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말아톤>에서 자기 욕심에 아들에게 마라톤을 시키고 그 모성활동에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내면을 돌아보고 있다는 점, 에서 죽어가는 딸을 위해 돈으로 남자친구를 사는 이기적인 어머니지만 딸이 엄마 이름을 부를 정도로 허물없이 지내는 모녀관계는, 예전과는 분명 다른 어머니의 모습이다. 특히 <마요네즈>(1999, 윤인호)에서의 어머니는 모성신화를 깨기에 충분한데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엄마의 마요네즈 헤어팩 사건은 딸의 눈에 철없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치지만 엄마와 딸의 대립적인 관계는 점차 엄마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모녀관계로 변화하게 된다.
이처럼 모성적 몸은 억압이 새겨지는 공간이자 새로운 의미 창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양가적인 공간이며, 이 둘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과 모순이 존재한다. 그간 모성은 최고의 도덕적 가치로 찬미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정작 그 찬가에 언어를 빼앗긴 어머니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상징 질서 체계 속에서 재현되지 못했다. 모성 담론 속에서 어머니는 중심부에 위치하지만 ‘비어있으며’ 혹은 ‘부재중’이었다. 박희경, 「모성 담론에 부재하는 어머니」, 〈페미니즘 연구〉1, 한국여성연구소, 2001, 235쪽 실제 경험과 관찰 속에서 어머니들은 무수하게 다양하고 혼종적이며 그 어머니들의 속성들은 어느 하나로는 규정지을 수 없는 것들이다. 현실에서 목도하는 모성의 탈신비화 경향이 종종 가부장제의 수혜자에게는 ‘모성의 부재’, ‘가족의 해체’, ‘사회 재생산의 위기’로 해석되는 것을 윤혜린, 「내일을 향해서 본 모성의 문제」, 『여성주의 가치와 모성 리더십』,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64~68쪽 보아도, ‘누가’ 모성을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떻게’ 모성을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모성은 각기 다른 수많은 스펙트럼을 나타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4인용 식탁>(2003, 이수연)과 <인어공주>(2002, 박흥식)는 모성 담론이 아닌 실제 어머니의 위치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로 모성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4인용 식탁>은 제도적 모성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어머니의 분열적 모성과 억압적 모성신화를, <인어공주>는 현재 시점에서 어머니의 과거로 돌아간 딸을 통해 상호 관계성과 역동성으로 변형력을 담보하는 경험적 모성을 재현한다. <4인용 식탁>은 연과 정숙이라는 무력한 모성을 등장시켜 모성신화에 억눌려 있는 여성 주체의 무의식적 공포와 욕망을 보여줌으로써 신화화된 모성애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정숙은 아이 양육에 대한 공포와 가부장제 하에서의 모성의 역할에 대한 부담감으로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의 아이와 연의 아이를 아파트 베란다에서 던져 살해한다. 사회통념상의 숭고한 모성신화는 정숙을 통해 여지없이 깨지는데 가부장제 사회에서 개인의 선택이기에 앞서 제도화 되어버린 모성에 의해 어머니와 그 자녀가 모두 억압당하고 죽음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많은 영화에서 ‘희생적인 어머니상의 미화화, 희생적이지 않은 어머니상의 이기적인 여성화’라는 방식으로 모성을 다룬 데 반해, <4인용 식탁>은 도통 깨어질 것 같지 않은 모성신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가부장적 모성담론에 저항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해낸다.
<인어공주>는 모성에 대한 향수를 그리지만 상징적 모성의 구도를 넘어 실재하는 모성을 그리고 있다. 모성 담론 속에 ‘부재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모성 경험 속에 ‘존재하는’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바로 <인어공주>이다. 나영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게 되면서, 점차 엄마를, 엄마의 언어를, 엄마의 목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엄마의 역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게 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순환적으로 흘러가는 엄마의 몸은 여성적 삶의 체험이 새겨지는 공간이며, 나영에게 타자와의 소통의 길을 열어주는 공간이 된다. 나영이 결혼해서 아이와 함께 사진을 보는 장면은 엄마(연순)-딸(나영)-손녀로 이어지는 여성의 순환적 역사를 보여준다. 남성 향수영화에서 과거의 순수했던 시절이 다시는 복원될 수 없는 퇴행적 욕망의 대상이라면, 나영에게 있어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현재와 단절되지 않은 순환적 시간관으로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현재를 극복할 수 있는, 현재와 화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그 어떤 것이다.
이들 영화는 가부장적 가족제도라는 모성의 역사적 종속을 망각하지 않으면서(<4인용 식탁>), 그 모성을 새롭게 위치시킴으로써 그 해법과 기회를 포착해 내고(<인어공주>), 모순과 갈등으로 혼재된 모성의 경험들을 ‘모성신화’가 아닌 ‘어머니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들려준다.

2-4. 가족-되기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혈연을 바탕으로 한 부계 혈통의 직계 가족을 그 범위로 인지해 왔다. 모든 사회제도가 그러하듯 가족제도도 현재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믿지만, 실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이에 편승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에 대립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발버둥치며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는 정당성을 부여하며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립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죄함으로써 특정 이데올로기가 받치고 있는 사회구조를 영속화해 오는 데 기여해 왔다. 이주향,「‘결손 가정’, 과연 결손 가정인가?」, 『여성과 철학』, 철학과 현실사, 1999, 237쪽 가족에 대한 정의는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에도 특정한 형태의 가족만을 정상가족으로 여기는 정상가족이데올로기는 특정 삶의 방식만을 규범화함으로써 개개인의 다양한 삶의 기회와 그 선택을 제약해왔다. 그러나 실상은 ‘가족’이라는 단수 명사보다는 ‘가족들’이라는 복수명사가 더 타당할 정도로, 이미 오래전부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 수많은 가족들이 존재해 왔다. 혈연, 이성애, 부계 중심의 정상가족이데올로기 하에서 이른바 ‘가족의 위기’로 둔갑하고 있는 한부모 가족, 독신 가족, 동성애 가족 등의 다양한 형태의 가족은, 가족이 더 이상 한 가지 방식으로 획일화될 수 없음을 방증한다.
이처럼 가족 형태의 다양화뿐만 아니라 가족의 일상 속에서 개개인이 경험하는 이력 또한 다양하다. 각각의 가족 구성원들은 매우 다층적이고 모순과 역설을 포함하는 긴장관계에 놓이며 거듭되는 조정과 균형의 곡예 속에서 일상을 살아간다. 각각의 가족이 갖는 경험과 그 가족 내에서 구성원이 갖는 경험은 개인적 혹은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르다. 가족 안팎에서 그들은 매우 이질적인 경험을 하고 있으며 실상 가족 구성원 개개인에게 있어 가정은 사랑과 모성으로 가득한 신화화된 경험만을 제공하지 않는다. 결혼을 한다는 것, 가족을 이룬다는 것, 부모가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 무엇일 수 있는지는 이제 더 이상 단정적으로 규정할 수 없게 되었다. 가족, 결혼, 부모 되기, 어머니, 아버지 등의 획일적인 용어의 사용은 이러한 용어들 뒤에 감춰진 삶의 점증적 다양성을 은폐하고 위장할 뿐이다.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위의 책, 23~47쪽
‘도덕은 법적으로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을 의심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버나드 쇼의 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일부일처제는 윤리도덕과 교묘히 맞물려 들어가며 이른바 불법적이고 불건전하며 비정상적인 것의 배제를 통해 일부일처제 가족의 정상화를 이룩해낸다. 이를 통해 일부일처제 관계에서 벗어나는 가족 관계는 파렴치한 죄로 인식되고 그런 만큼 혼인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결국 개개인을 속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에 대항하여 규범이나 제도에 묶여있는 집단이 아닌, 개개의 구성원들의 실제적 만남을 통해 묶여지는 집단, 사회변동의 모태가 될 수 있는 집단 조한혜정, 위의 책, 225쪽으로써 가족을 재현하는 영화들이 바로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 유하), <가족의 탄생>(2006, 김태용)이다. 이들 영화는 전형적 가족의 토대인 ‘제도로서의 결혼’의 지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기존의 가족 개념이 아닌, ‘가족 단위의 생활 방식들’ 혹은 ‘생활방식들’이라는 용어가 적절한, ‘가족들’의 탄생을 알린다. 일부일처제 신화의 허구성과 결혼에 대한 절대적 가치의 변화를 알리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서로 다르지만 어울리는’ 비혈연 모계 공동체의 탄생이라는 <가족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사랑과 결혼의 어긋남 혹은 불일치로부터 출발하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낭만적 사랑과 결혼의 필연적 관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연희는 관습과 제도의 측면에서의 일부일처제 결혼 제도에 저항하고 여성을 둘러싼 사회의 억압적 형태를 그 권위적 울타리 내에서 교묘하게 전유하며 그것을 가볍게 뛰어넘고 있다. 준영과 연희의 ‘옥탑방’은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와 가족제도가 허물어지는 공간으로 작동하는데 준영의 생일날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응시하는 연희의 모습은 일부일처제와 결혼제도에 대한 노골적인 저항으로 보인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비전통적이고 비공식적인 삶이 하나의 생활 형태로 확립되고, 결혼과 가족을 통해 요약되던 온갖 행동과 태도가 해체되고 분화되는 그 시발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위의 책, 46쪽 이른바 ‘불륜관계’이긴 하나, 상대방을 속박하거나 소유하는 관계가 아닌 정직한 소통과 자유를 부여하는 관계로의 설정은 어쩌면 지금까지의 결혼제도와 가족제도가 간과해 왔던 것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찐 계란과 사이다처럼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르지만 어울리는 것들이 있다’는 영화 속 대사는 바로 <가족의 탄생>이 말하는 복수적이고 이질적이며 서로 연결된 관계망으로써의 가족이다. <가족의 탄생>은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서로 다르지만 어울리는’ 비혈연적 모계가족을 탄생시킴으로써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출현을 알린다. 미라와 무신은 시누이와 올케라는 가부장적 가족관계 대신에 동생과 언니라는 자매애의 관계, 비혈연적 모계가족의 관계로 변화하고 채현과 함께 복수의 엄마들과 딸이라는, 생물학적 모녀관계가 아닌 사회적 모녀관계로 거듭난다. <가족의 탄생>은 다수의 이질적인 개인들이 만난, 개인들 간의 충돌과 섞임이 교차하는, 결코 평균화하거나 동질화할 수 없는 ‘가족들’의 탄생을 알린다. 가부장적 역사 속에서 주변인이자 타자의 위치에 머물렀던 ‘헤픈 여성들’의 다른 경험, 다른 세계관, 다른 윤리 의식, 다른 관계 맺기 방식은 어머니-자매 공동체를 김영옥, 「어머니들의 역사를 기억하며」, 『여성주의 가치와 모성 리더십』,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144쪽 통해 새로운 가족을 구성한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가부장의 역사 바깥에서 비가시적으로 존재했던 여성들의 ‘헤픈’ 삶의 역사를 짜면서.
그간 친밀한 관계 또는 친밀성의 공유가 결혼과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제도화 되어왔다면, 이들 영화에서 친밀성의 욕구는 혈연적 제약과 공간적 제약을 넘어 개인들 간의 다양한 관계 맺음을 통해 더 넓은 관계로의 통합을 이루어낸다. 이들 영화에서 가족은 배제와 포함의 논리가 아닌 수행적 개념으로, ‘정상’과 ‘일탈’의 강박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유동적인 다양체로 가족의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오은경, 「유목적 주체와 가족 다양체」, <한민족문화연구> 제16집, 2005. 6, 114쪽 새로운 가족-되기의 양상을 보여준다.


3. 나오면서

근대 핵가족은 신성시 되거나 아니면 거꾸로 저주받아왔다. 오직 가족의 위기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아니면 온갖 실망만 안겨준 대안의 잔해를 모아 만들어진 완벽한 가족이라는 환상으로 도망쳐왔다. 하지만 가족은 무조건 좋은 것 또는 이와 반대로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족은 필수불가결하고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지만 각각의 가족들 간의, 그리고 개별 가족 구성원들 간의 온갖 차이들이 표면으로 노출되는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위의 책, 74~75쪽 복잡하고 허약하며 모순된 장소다.
본고는 그간 보편성이라는 이름 하에 차이를 배제하고 동질화했던 근대적 가족의 시각에서 벗어나 ‘매우 특수하고 순진하지 않은’ 시각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한국 영화에 나타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좌절된 근대화의 공간’에서는 공적 영역에서 남성 중심의 근대화의 실패가 사적 영역에서 근대 핵가족의 위기로 귀환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적 영역에서 주변화 되고 타자화 되었던 여성은 사적 영역에서 귀신이 되어 돌아오고(<소름>), 가부장 중심의 근대적 핵가족은 위기를 맞으며 부계 혈통의 소멸을 알린다.(<바람난 가족>) ‘가부장의 재구성’에서는 근대화 과정의 주체였던 가부장들이 위기를 맞고 남성성의 변화로 이어지는 한편, 가부장의 위기가 여성에 대한 타자화로,(<해피 엔드>) 그리고 과거에의 향수로(<8월의 크리스마스>) 작동하는 남성 주체들의 은밀한 욕망을 바라보았다. ‘억압적 모성신화와 경험적 모성’에서는 여성을 억압해왔던 모성신화에 도전하고(<4인용 식탁>) 여성의 경험과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체험적 모성공간을 구성하며(<인어공주)>, 여성의 시각에서 제도화된 모성 문화의 억압을 드러냈고, 실제 어머니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모성 계보를 구성하였다. ‘가족-되기’에서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한 다양한 가족 경험과 다양한 가족 형태가 가시화되고 있음을 주장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는 일부일처제 결혼 제도의 허구성을, <가족의 탄생>에서는 여성적 삶의 체험이 새겨지는 비혈연 모계 가족의 탄생을 살펴보았다. 이들 영화에서 가족은 본질적이고 자연적일 거라는 신화와 달리, 매우 모순적이고 부분적이며 전략적인 공동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가족이라고 부를 것인가?’에 대한 답은, 본질적 통일성으로 묶여있을 거라는 믿음을 지워버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영화적 재현이 단지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가정할 때, 남성 가부장 중심의 가족에서 벗어나 차이를 지닌 탈중심화된 가족들, ‘가족’이라는 추상 명사로 묶인 선험적 존재가 아닌, 각각의 가족 구성원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경험적 존재로써의 가족들이 바로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한국 영화에서 새롭게 맞이할 수 있는 가족의 모습이다.
‘한국 영화가 가족을 바라보는 방식은 무엇인가, 내가 가족을 바라보는 방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타자와 실제로 교류하는 가족들, 관계 속의 주체이자 과정 속의 주체인 가족들, 다양성과 복잡성을 가진 가족들이 바로 그것이다. 보편적이고 획일적인 대문자 ‘ㄱㅏ족’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모순된 정체성과 복수적 체험을 지닌, 다양성과 차이를 인식하는 소문자 ‘가족들’을 구성하는 장소가 바로 가족이라는 공간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한국영화에서의 가족 재현은 ‘해결되어야 할 쟁점으로 이름 붙여진 과정이라기보다는 시작할 때보다 더 나은 문제들을 다루게 되는 기회’ Sandra Harding, “The instability of the analytical category of feminist theory”, Signs, p.19, 데이비드 칠, 『가족학 이론의 현황과 쟁점 : 근대성 논의를 중심으로』, 최연실·유계숙 옮김, 하우, 1999에서 재인용가 될 것이다.

 

2007-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