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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조한 2014.03.11 08:38 조회수 : 4004

사회학자 노명우 “투덜대지 않고 불만을 말할 수 있는 힘”

『세상물정의 사회학』 펴낸 노명우 아주대 교수
20대들의 관계 맺기, 풍요 속 빈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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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력적인 제목을 듣고도 호기심이 일지 않는다면, 세상에 너무 무관심한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비단 극단적이지만은 않다는 확신은 『세상물정의 사회학』 서문을 읽고, 더욱 확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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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세속을 산다. 세상과 세속은 같은 말인데, 두 단어가 주는 어감은 다소 다르다. ‘세상’이라는 단어에 ‘물정’을 보태보자.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크게 다가온다. 세속을 산다는 것과 세상물정을 들여다보는 것. 사회인이라면 당연지사이거늘, 우리는 왜 두려워할까? 또는 머뭇거릴까? 『세상물정의 사회학』 이라는 제목을 맞닥뜨렸을 때, 호기심과 함께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왜 일까? 저자 노명우 교수는 “처세만큼 타락하여 슬프게 들리는 단어도 없다”고 말한다. ‘처세’는 세상과 교류하는 방법을 뜻하는 말이지만, 어느 순간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술책을 생각해낼 수 있는 잔머리를 뜻하는 단어로 타락해 버렸다. ‘세상물정’ 또한 다르지 않다.

지난해 ‘고독한 사람들의 사회학’이라는 부제를 단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를 펴내, 출판계에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던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는 삶의 여러 가지 순간들을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살펴보고 싶었다. 딱딱한 책상, 고립된 학교에서 벗어나 삶의 현장, 세속으로 향했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은 상식, 명품, 프랜차이즈, 불안, 종교, 이웃, 성공, 수치, 취미, 섹스, 자살, 노동 등 세상물정의 이치를 냉정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마주볼 것을 권한다. 무턱대고 듣기 좋은 말, 몸에 좋은 약을 소개하는 성급함은 없다. 그렇다고 냉소하거나 비관적인 태도도 없다. 노명우 교수가 말하는 ‘사회학’의 정의는 “삶에 대한 근거 없는 희망이나 ‘하면 된다’와 같은 사실상 거짓말에 가까운 헛된 기대가 아니라, 철저하게 삶의 리얼리티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노명우 교수는 『세상물정의 사회학』 에서 ‘프랜차이즈’를 주제로 한 ‘맥도날드에 대한 명상’ 편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리처의 저서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를 인용했다. 조지 리처는 급격하게 변하는 사회현상을 두고 소수의 학자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쓰고자, 새로운 스타일을 과감하게 시도했다. 노명우 교수의 신작『세상물정의 사회학』 도 다르지 않다. 노명우 교수는 이론이 이론을 낳고 이론에 대한 해석에 또 다른 해석이 덧칠되며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가는 폐쇄적인 학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연구 동기를 찾는 사회학을 지향한다. 때문에 『세상물정의 사회학』 역시, 매우 세속적인 환경에서 써내려 갔다. 사람들이 열변을 토하는 술집과 카페에서, 삶에 대한 근심 어린 걱정을 이야기하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또 수다 속에 담긴 사람들의 경험을 마주할 수 있었던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그 어떤 텍스트보다 생생한 우리의 세속 풍경을 관찰했다. 너도나도 3D카메라로 세상을 담는 풍경 속에서 노명우 교수는 언제나 6mm카메라를 고집할 것 같다.
자신의 처지를 공통감각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한, 자신의 삶에 대한 절실하고 치열한 생각은 팔자타령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팔자타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삶에 대한 개인의 생생한 느낌과 때로는 냉정한 사회학이 균형을 이루는 시도에 ‘세상물정의 사회학’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사회학과 삶의 느낌의 조우이지만 그 둘은 만났을 때 힐링이라는 값싼 동정과도 신세한탄이라는 투덜거림과도 좋은 삶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시니컬한 태도와도 다르다. 비판이란 본래 투덜대지 않으면서도 세상에게 불만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비판 고유의 능력은 세속이라는 리얼리티와의 용감한 대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p.21)



버스, 술집, SNS 세상에서 얻은 소중한 데이터

『세상물정의 사회학』 이라는 제목,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보고서 호기심이 생겼다. 사회학자가 말하는 ‘세상물정’. 과연 현실적으로,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표현됐을지도 궁금했다.

제목을 정해놓고 책을 쓴 건 아니었다. 책을 기획하고 의도했던 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는 삶의 여러 가지 순간들을 담고 싶었다는 점이었다. 인간은 누구든지 희로애락을 갖는데, 이 감정들은 언제나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기쁠 때도 있고 분노할 때도 있고 희망에 차있을 때도 있다. 한 개인의 삶을 만화경처럼 펼쳐놓았을 때, 그 개인이 휩싸이게 되는 정서를 표현하고 싶었다. 또한 책 제목에 ‘사회학’이라는 이름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었다.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점점 사회로부터 멀어지고 고립되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사회학이라는 것이 마냥 정치적이지도, 이데올로기적이지만은 않다는 것, 다채로울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사회학은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고, 인간의 삶에 뿌리를 내린 학문이다.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반응이 꽤 빠르게 왔다.

사회학을 대중화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대중화를 하지 않으면서도 ‘공감’을 기대해도 될까? 반응이 올까? 우려했는데, 이 책을 내고 용기를 얻었다. 공감 능력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걸 느꼈다. 사회를 살면서 느끼는 민감한 촉수, 사회학이 가지고 있는 촉수가 사람들 사이에서 교차되는 순간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감이 중요한 키워드였다. 친구 어머님이 환갑이 넘으셨는데, ‘‘이 책을 너무 재밌게 읽었다고, 삶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개인적으로 『세상물정의 사회학』 을 쓰고, 가장 기뻤던 순간이다.

그동안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회와 개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이 아닐까.

독자들을 모두 접하진 못했지만 『세상물정의 사회학』 을 읽은 분들의 공통점은 자신에 대한 고민을 매우 진지하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자신에 관한 고민을 하려면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는데, 한국 사회는 그것이 흡수되는 영역이 매우 부족하다. 개인의 진지한 고민이 교차될 수 있는 영역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이번 책을 펴내고 느낄 수 있었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점이, 통계에 의한 해석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연구실에서 쓰지 않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속을 살아가는 한 사회학자가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책을 쓰기까지, 보이지 않게 도움을 줬던 분들이 많았다. 매일매일 SNS에 올라오는 수많은 저주와 원망, 한탄 등. 이런 것들이 때로는 무책임한 저주도 있고, 매우 깊이 있는 성찰이 담기기도 했지만, 이 모든 건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해석하는 모습이었다. 술집, 버스에서 우연히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데이터였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경험과 해석은 나에게 날 것 그대로의 경험이 되었다.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가, ‘비판’에 대한 정의(투덜대지 않으면서도 세상에게 불만을 말할 수 있는 능력)였다. 그런데 이런 정의를 내포한 ‘비판’은 쉽지 않다.

투덜대다 보면 시니컬해지고, 시니컬한 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비판한다는 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떤 걸 염원하는 것인데, 시니컬한 태도, 패배주의가 그런 걸 갉아먹는다고 생각한다. 비판적인 사람은 까다롭고 투덜대는 시니컬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고, 반대로 비판적이지 않은 사람은 선하고 낙관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무조건적인 긍정성은 사실 큰 문제다. 또 우리 주변에는 무조건적으로 긍정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착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못마땅한 대상에 대한 감정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 감정이 분노, 시니컬리즘, 염세주의로 빠지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투덜대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불만을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판인데,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학문이 사회학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불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투덜대지 않고, 건강한 에너지로 전환시켜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게 사회학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한 건, 운명이라는 것이 있고, 또 처지가 있다는 점이다.

운명과 처지라면,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의 구별인가?

운명이라는 건, 예를 들어 내가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 동양인 남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내가 투덜댈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처지는 다르다. 바뀔 수 있는 영역이다. 여기서 비판이라는 건 운명과 처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처지란,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같이 해결해야 할 ‘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걸 보여주는 게 사회학이라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찾아낸다면 비관적이고, 근거 없이 세상을 낭만적으로 보는 낙관주의와는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상식을 이용하는 베스트셀러는 승승장구하고, 양식을 설파하는 추천도서는 서가 구석에 처박히는 현실도 지적했다. 상식과의 경쟁에서 언제나 양식이 지는 이유는 ‘말투의 차이’라고.

성인들은 완고한 자신의 생각들을 절대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에 의해서 설득 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논리적인 강박을 가해올 때, 벌컥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감동적인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봤을 때, 철옹성 같은 생각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해체시키는 순간이 있다. 무장해제가 되는 거다. 내가 원하는 순간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쌓아 올린 각자의 생각의 습관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 누가 논리의 힘으로 그 생각의 습관을 부수려고 하면 분노한다. 누군가 이기고 지는 싸움이 되면, 진 사람은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보복하는 순간을 만든다. 최근 한국의 정치사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좀 다른 건 없을까? 누구나 마음의 사고의 벽,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세상이 조금 더 좋아지려면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습관, 사유의 습관을 살펴볼 여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뭘까? 생각을 하다가 말투라든가, 맥락 이런 것들을 고민하게 됐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가 지향하는 말투, 문체, 어조도 고민했겠다.

조카들에게 쓰는 책이라 생각했다. 삼촌 입장에서 “세상은 이런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 내가 어릴 때, 누구도 “세상은 이런 거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네가 열심히 하면 돼”, “세상은 아름다운 거야”, “믿을 건 사람이란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는데, 어른들이 말해준 것과 세상의 격차가 너무 커서 가장 힘들었다. 앞으로 나보다 세상을 더 오래 살게 될 조카들에게 중간의 영역들을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어릴 때 생각했던 것처럼 마냥 아름답지 않은 세상이지만, 분노 없이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그것을 투덜대는 태도만으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 생각을 받아들이고 또 다른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20대들의 관계 맺기, 풍요 속 빈곤이다

책 속에 소개된 25개 키워드 중, 저자가 요즘 가장 깊이 있게 고민하고 있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첫 번째로 소개한 ‘상식’ 문제다. 상식의 배반, 양식의 딜레마. 어떻게 보면 내가 생각하는 사회학의 가장 커다란 방법론적인 틀, 지향하는 핵심 키워드가 ‘상식’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다. 아버지가 아흔이 넘으셨는데, 식민지 시대 때 청년기를 거친 분이다. 지금은 치매에 걸려서 컨디션이 아주 좋으실 때만 대화가 가능하다. 언젠가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할 텐데,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부모의 죽음이 굉장히 공포스러울 것 같다. 또 다가올 공포에 대한 생각도 하면서,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겪은 아버지의 삶을 ‘죽음’, ‘가족’ 이라는 키워드로, 아버지를 위한 책을 한 편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아버지와 저자의 삶 가운데 시대의 격차가 있듯, 지금 청년기를 보내고 있는 세대와 저자와의 격차도 있을 텐데. 대학에서 학생들을 대할 때, 격차를 느끼는 부분이 있나.

그게 애매한 문제일 수 있다. 판단의 기준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80년대에는 이랬는데’ 하는 생각은 경계하려고 하는데, 안타까운 건 있다. 가장 아쉬운 것, 측은하게 여겨지는 것이 ‘관계의 문제’다. 옛날에 비해 많이 자유로워졌고 끊임없이 연애를 하지만, 풍요 속의 빈곤인 것 같다. 장벽은 사라졌지만 관계 맺기는 더 힘들어지는 상황이다. 젊은 친구들은 매니저맘들에 대한 매니징 대상이었고, 학원에 다닌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학교 친구들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뿐이지 친구는 아닌 거다. 학교에서도 일대다의 대응일 때가 많다. 선생님과 학생들과의 관계도 다대다의 관계,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관계에 대한 안정성이 높아지려면 만남의 빈도, 묵은 경험들이 필요한데, 똑같은 스무 살이라고 해도 예전의 스무 살과는 확연히 비교가 된다.

소통할 수 있는 공간, 채널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데, 왜 이렇게 관계 맺는 일을 힘들어 하는 걸까?

서로가 서툴기 때문이다. “네가 먼저 다가가”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문제다.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야 하니까.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측면에 대해서는 나도 확신하기가 어렵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은 있다고 생각한다. 수업시간에 가능한 학생들끼리도 상호작용이 가능할 수 있도록 장치에 신경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 만나는 게 전부인 수업시간에서 얼마나 영향을 받을 수 있을까? 경험의 폭, 빈도가 작다는 점에서는 미래가 환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지난해 출간된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가 화제가 됐었다. 1980년 전체 가구의 4.8%에 불과했던 한국의 1인 가구가 2013년 통계에 의하면, 25%에 다다랐다. 저자 역시, 1인가구다. 혼자 사는 일상, 어떻게 즐기고 있나?

나는 개인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동시에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도 좋아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독립성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그것과 연결되지 못한 상황은 긍정적이지 않다. 혼자라는 것과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개인의 삶에서 자유롭게 전환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수월하지 못한 상황이 아쉽다. 혼자 하는 행위가 독립성, 자율성의 강력한 열망과 교차되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다.

자발적인 의지로 혼자가 되는 것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혼자가 되는 것의 차이로 보인다.

혼자서 사는 걸 좋아하고, 혼자 하는 행위가 늘어나는 걸 고양이 같은 거라고 한다면, 마냥 고양이처럼만 살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펭귄과 같이 군집생활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두 가지가 교차돼야 책임이라는 중요한 윤리가 부각될 수 있다. 책임은 언어상으로만 놓고 보면 강제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돌려서 생각해보면 책임은 서로의 반응에서 오는 거다. 상호작용하는 상황에서 타자를 인식하고 감지하고 있다가, 알아채는 것이다. 고양이 성향이 너무 강해지면, 무책임한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애완견이 늘어나는 동시에 유기견이 많아지는 현상이다. 애완견이 늘어난다는 건, 자기 영역에 대한 감각이 높아졌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책임의식으로 나가지 못하니까 동시에 유기견도 많아지는 것이다.

프랜차이즈 식당, 카페만을 즐겨가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맥도날드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현대 사회에서 ‘유일하게 확실성을 보장하는 예측 가능한 장소”라는 정의가 씁쓸하더라. 현대인들은 점점 사람들 간의 접촉이 최소화되는 공간을 찾는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이 벗어나는 걸 견딜 수 없어 한다.

일상 속에서 소비자 마인드가 너무 강해졌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감각적인 피해에 예민해졌다. 식당에서 우리 테이블이 먼저 주문했는데, 다른 테이블에 음식이 먼저 나오면 불같이 화를 낸다. 화가 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예를 들어, 어떤 정치인이 공약을 어겼다고 치자. 이것 역시 나에 대한 굉장한 모독인데, 사람들은 식당에서 화를 내는 만큼 분노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감각, 통찰력을 통해서 이해하는 모독에는 점점 무감각해지고,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는 피해에만 극히 예민해지는 것이다. 소비자로서 무시당하는 것과 공약이 무시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치명적인 모독일까? 후자가 더 큰 모독이 아닐까? 그런데 사람들은 꽤나 이성적인 판단, 조금이라도 우회적으로 추론을 해야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다.

취미의 탄생 조건은 개인의 취향이다. 취향은 개인적인 기호이고, 옳고 그름의 문제는 개입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개인의 취향에 대한 세상의 참견은 멈출 줄을 모른다. 참견과 관심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자신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남에 대해 띄엄띄엄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타인에 대한 관심에는 조심하는 편이다. 내가 정말 좋아해야 관심을 갖는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건,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면, 무관심해 보이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띄엄띄엄 관심을 갖고 싶진 않다. 우리 모두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지 않나. 알지도 못하면서 툭툭 던지는 말들로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




천천히 긴 호흡으로 가고 싶다

성공에 목숨 거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기계발서 출간 열풍이 멈추지 않을 거라고 전망했다. 1859년 새뮤얼 스마일즈가 쓴 『자조론』 이 자기계발서를 관통하는 장르 규칙의 원형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했는데, 성공과 실패를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하지 않는 자기계발서의 행태는 언제까지 유지될 것으로 보이는가.

꽤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자기계발서를 기획하는 능력이 점점 진화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포맷을 보면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지만, 기획하는 능력이 진화해서 새로운 포맷으로 출간되고 있다. 2013년만 해도 자기계발서에 인문학 터치를 해서, 사실은 자기계발서인데 그런 줄 모르고 읽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지 않았나. 올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자기계발서가 쓸데없는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자기계발서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 다만, 모든 사람이 읽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읽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에 대해서는 대범해질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사회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학창시절에는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원래 이과였고, 의대를 갈까? 건축과를 갈까? 고민하던 중에 고3 여름방학 때 의사가 된 내 미래를 떠올려보니, 조금 암담했다. 더 큰 무언가가 없을까? 천체, 우주 같은 걸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그 때 관심 있게 구독했던 잡지 중 하나가 건축잡지 <공간>과 <뿌리 깊은 나무>가 폐간되고 나온 <마당>이라는 잡지였다. 유신시절, 그 당시 한국 분위기 속에서 사회과학적인 인식이 담겨진 기사가 우회적으로 나올 수 있는 매체가 잡지였던 것 같다.

9년째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학교 학생으로부터 저자가 ‘다시 듣고 싶은 명강의 선정’ ‘평생 함께하고 싶은 교수님’으로 노미네이트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비결이 뭘까?

글쎄, 내가 학창시절 때 좋아했던 선생님들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그 선생님처럼은 되지 말자는 생각이 있다(웃음). 나는 학생들에게 좋은 멘토이고 싶지만, 학생들의 처지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쉽사리 상담을 하지 않는다. 일단 고민 상담을 해주려면, 둘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친해져야, 오해 없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낯을 좀 가리는 성격이고 친해지는 데 오래 걸리는 편이다.

많은 매체로부터 칼럼 기고 요청이 들어올 텐데, 칼럼을 쉽게 쓰진 않는 것 같다.

칼럼은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한다. 직업적인 문필가도 아니고, 학기 중에는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내기 쉽지 않다. 두 번째 이유는 약간 긴 호흡으로 가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칼럼을 많이 기고하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좋은 홍보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독이 될 수 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책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통 인물 자체가 화제가 되면, 어느 순간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칼럼 내용보다 그 사람의 평상시 태도, 생각, 인물이 소비된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인물이 소비되는 것보다 내가 쓴 글이 읽히는 게 더 좋다.

닮고 싶은 사람이 있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을 존경한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글을 쓰는 건, 일종의 마라톤 작업인데, 초반에 너무 페이스를 오버하면 힘들어진다. 그냥 천천히, 느린 호흡으로 갔으면 좋겠다.

교수라는 타이틀을 넘어, 세속을 살아가고 있는 한 사회학자로서 시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시민과 함께하는 강좌. 서양식 언어로 표현하자면 ‘오픈 유니버시티’다. 사회학자에게 현장은 사회이고, 대학이라는 건 사회 속에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면 사회학자로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해 수원의 한 평생학습관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사회학 세미나’를 열었다. 처음에는 이게 될까? 싶었는데, 의외로 많은 분이 신청했다. 25명으로 출발했는데 최종 10주차에 23명이 남을 만큼 호응이 좋았다. 23세부터 60세까지 직업, 성별, 하는 일까지 굉장히 다양했는데, 이 분들의 공통된 의견이 “이렇게 세대를 나누지 않고 진지하게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간이 처음이었다”는 것이었다. 위계 없이 동등하게,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인의 입장에서 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경험 자체가 너무나 감동스러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모델이 바로 이런 모델이다. 학교 바깥에서 더 많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을 시민들과 함께 쓰는 버전으로 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