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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수 벤야민과 기억의 뜨게질

johancafe 2010.05.14 13:24 조회수 : 3800

인류를 잠에서 깨어나기 위한 주문(呪文)


문화학협동과정 2008312187
신정수


지난 특강에서 “비관주의 이후에 어떤 낙관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했던 엄기호는 김영옥의 특강이 끝나고 만세를 부르면서 “벤야민은 비관주의에서 시작하고, 벤야민을 읽었다 하는 사람들은 비관주의로 끝내는 것, 그게 큰 차이로구만!”이라고 내 옆자리에서 소리쳤다.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는 모더니즘과 자본주의의 거리를 걸으면서 상품의 마법 너머에 있는 꿈의 징후들을 독해하고 해체하기 위한 글쓰기를 했다. 그 글쓰기는 어린아이들처럼 멂과 가까움, 꿈 과 현실을 하나의 소실점으로 맞추려고 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거리, 풍경, 삶이 보여주는 것들을 독해해내는 글쓰기이며, 여 기에는 환상의 이음새와 틈새를 사용하는 접합의 원칙, 채워넣기의 원칙, 높이와 깊이의 원칙이 적용된다. 동시에 인류의 ‘원사’에 대한 꿈 꾸기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하기, 또한 근대가, 역 사가 파국의 잔재들이라면 그것을 더 큰 역사 속에서 파악하기,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마법을 해체하는 ‘복된 동경’을 쓸 수 있기를 요청한다.



어릴 적 동네가 아닌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가 내게 멀고 가깝게 다가왔던 한 풍경은, 제사를 지내러 북가좌동 할아버지 댁에 왔다가 한 밤 중에 미아동의 우리집으로 돌아갈 때면 불이 꺼진 컴컴한 거대한 숲으로 보였던 경복궁과 창경궁을 지나면 보였던 삼선동과 길음동, 미아동의 별들의 산이다. 달동네들이 많았던 이 동네는 밤이 되면 산 가득 가로등과 집집 창문에 들어온 붉은 색과 하얀 색, 노란 색의 불들로 우주의 색 온도가 다른 별들이 내려와 총총히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차멀미에 꾸역꾸역 토하면서 눈물 맺힌 눈에 번지는 그 별의 온도들을 담아 두려 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풍경은, 어 릴 적 논밭이었던 일산 일대가 아파트 재개발이 막 시작될 즈음, 한 밤 중에 통일로를 타고 파주에 가다 보면 잠결에 작은 아파트 숲이 보였는데, 꿈 결에 그 아파트의 불빛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판타지아>에 나오는 유니콘들이 뛰노는 자작나무 숲 같아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다가올 미래의 콘크리트 아파트 숲이 아니라 한 밤 중의 들판에 드물게 등장한 빛나는 자작나무 껍질 같은 자연의 이미지를 하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도시 사회학>이 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이상과 근대의 산보객, 벤야민 등을 들으면서 기말 과제로 내가 경험하는 도시를 영상으로든 글로든 담아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친구의 도움으로 영상 하나를 짤막하게 만들었는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성석제의 <홀림>이라는 소설책과도 제목을 같이 했던 그 영상은 당시 21살이었던 내가 집과 ‘나와바리’를 벗어나 ‘서울 시민’들의 도시, ‘서울’ 깊숙이 들어서고자 했을 때 느꼈던 어지러움과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담고 있었다. 이는 동시에 성인으로 자립하고자 했던 나의 투쟁과정에서의 메스꺼움, 어떻게 ‘어 른’이 되어야 할지,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지 막막했던 심정을 담고 있었다. 나는 나를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 1동 몇 번지의 사람에서, 서울사 람으로 위치지어 볼 때 더욱 낯설어 지는 이 도시를, 그리고 더욱 빠르게, 더욱 높게 가야 한다고 주문하는 이 현기증이 나는 도시에 대해서 기말 과제를 냈었다. 어릴 적 차만 타면 느꼈던 멀미는 다시 찾아와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창에 이마를 대고 속으로 토를 삼키기 일쑤였고, 그 때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는 모래내의 찜질방과 그 옆의 예식장을 볼 때마다 저 촌스럽고 상스러운 우리 동네의 조명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담즙이 과도하게 넘치는 사람처럼 모든 것이 헛되게 느껴져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때 어떤 어른이 나에게 그만 말하려 하고, 지금은 책을 읽을 때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머물고 있는 장소가 언젠가 개인의 육체가 소멸하고 말 큰 역사 속의 허무한 한 지점이 아니라, 이 사회가 개인이 바둥거리는 곳이 아니라, 소 설 등을 통해서 시공간을 넘어 작게 뜨개질 해 낸 작은 (벤야민 식으로) 집합적 기억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울을 털고 일어났던 것 같다.



벤야민은 우리가 꿈을 해독함으로써, 이 근대의 파국들의 잔재들을 가지고, 조각난 국면들을 가지고 꼴레쥬 하여 새로운 피규어를 만듦으로 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나오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개인들이 대책없이 안정과 소유 관념 속에서 자신의 상실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고 말하는 식이 아니라, 사태를 역사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우둔함과 비겁함을 넘어서 “구원이 반드시 지상에서 이루어리라는” 집단적 다짐 속에서 우리의 원체를, 미래를, 혁명을 지금 이루어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말은 이 시대의 사회과학의 우울함을 벗어날 수 있는 복음이다. 작 은 길을 걸어가면서 길의 영향력을 경험하고, 작은 길목에서도 “먼 곳,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는 곳, 숲 속의 빈터, 전경들을 불러”내는(P.77) “부채 상상력”(p.116)을 갖고, 티벳의 만트라가 새겨진 기도바퀴를 돌리듯 주문을 호흡하면서 설득하기 위한 말이 아닌 신경을 감응하기 위한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지붕 없음의 상태, 나침반 없는 상태, 별은 비추지 않고 비까지 오는 상태, 그런 식의 역사를 살게 된 근대인”(김영옥의 강연 중)으 로서의 상태가 파국으로 끝난 종말이 아니라, 이러한 비관주의의 조작을 통해서 집단적 다짐과 각성을 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면 우리의 집단적 지성은 허무주의가 아닌 역사적 임무를 품을 수 있게 된다. 벤야민의 복음대로 “도취 상태에서 우주를 경험”하자. 근대적 이성과 지식이 우주를 단순히 별들의 거리로, 별빛을 단순히 별들의 온도차로 바꾸어 놓았지만, 다시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우주와 소통하는 일을 시작하자.



부채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p. 116)



* 지난 주에 좀 더 지금 시대를 독해할 수 있는, 해체할 수 있게 언어를 엄정하게 쓰자고 주절주절하고는 나이브한 쪽글을 제출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만. 저는 배워가는 중이고, 동지 여러분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기말에는 좀 더 성장해 있기를...


2010-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