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시학
오빠 서가에서 가져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니체 이야기가 나온다.
<니체에게 다가온 신의 콜링
"미쳐서 죽었지요. 광인으로 떠나지 않았습니까?"
"사건이 있었어. 토리노 광장에서, 우체국으로 편지부치러 가다가 늙은 말이 채찍질을 당하는 걸 본 거야. 무거운 짐을 지고 끌고 가려는데 길이 미끄러우니 계속 미끄러지지 마부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늙은 말을 보고, 니체가 달려가서 말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네 자기가 대신 맞으면서 "때리지 마 때리지 마' 하고 울다가 미쳤지.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고 마지막 말을 웅얼거리고는 십 년간 식물인간처럼 살다 죽은 거야. 그게 그 유명한 '토리노의 말이지. 그게 바로 니체에게 다가온 신의 콜링이라네."
"무슨 말씀인지요?"
“토리노 광장에서 얻어맞는 말이 예수야. 채찍질 당하고 허적대는 늙은 말 그게 십자가를 메고 가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Jesus Christ지. 그러니까 가서 말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던 걸세. 자기가 늙은 말하고 무슨 관계가 있겠나? 가까우면 마부하고 가까워야지. 그런데 니체는 그때 인간의 대열에 끼는 게 창피해서 인간을 거절했다네. 인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게 초인이거든.>
34쪽에 나오는 이어령 선생과 김지수 작가의 대화다.
근대의 위대한 작가들은 대부분 단명했고 극도의 고통속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산업화 초기 극심한 가난과 일이차 대전을 치르기까지
서구 근대화의 핵심부에서 살았던 '위인'들,
시대의 비참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창작을 했던 그들은 단명했다.
그들을 광인이라 부르며 떠나보낸 시대의 후손들은,
아직도 그들을 호명하며 그들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그들의 언어로 문제를 풀고자 한다.
그 비참의 뿌리는 깊다.
'축의 시대', 예수 이전 선지자들이 비통한 예언을 하던 때부터
무력과 탐욕에 가득찬 이들은 지배하고 시민들은 비참한 삶을 견뎌야 했다.
그 비통함은 옷을 바꾸어입었을 뿐,
철기 시대 이후 정복자들이 지배한 역사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비통함과 탄식의 언어로 치유가 가능할까?
예수가, 석가모니가, 무하메드가 내보였던 희망의 메시지는 어떤 것이었나?
비통함과 애통함을 넘어서는 언어,
신음을 넘어서는 언어,
서로를 위로하고 때로 기쁨에 겨워 함께 웃는 소통의 세계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현실을 건너 뛰어 서로 지지가 되는 이야기,
서로 돌보고 치유하는 시대의 말하기,
비참함을 통과하여 새 살이 돋는 이야기,
비참함 가운데서도 뼈를 갉아먹지 않고 살아남은 비법,
상생의 질서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지금까지의 문학 이후, 바깥 어딘가에서 나오고 있는 이야기들.
마를린 고리스의 <침묵의 질문> <안토니아스 라인>과 같은 이야기,
그런 삶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길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