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을
게을리 하세
사랑하고 한잔 하는 일만 빼고
그리고
한껏 게으름 피우는
일만 빼고
우리에게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며,
무슨 사건에 참여할 때는
어느 정도 긴장감도 느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깊숙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행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라건대,
많은 사람이 동료들과 함께
정말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
노동은 신성하지 않은 고통, 자본주의 실용철학 기만적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고? 이솝우화 속의 ‘개미와 베짱이’이야기부터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의 성공학에 이르기까지, 게으름과 나태함은 한결같이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칼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사회주의 운동의 투사인 폴 라파르그(말년의 마르크스는 농담삼아 맏사위인 롱게를 ‘최후의 프루동주의자’로, 둘째 사위인 폴 라파르그를 ‘마지막 바쿠닌주의자’라고 불렀다)가, 게다가 감옥 안에서 ‘노동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창하고 나선 것은 아무래도 기이해 보인다. 더욱 해괴망측하게도 이 책은 처음 출간한 백 년 전뿐만 아니라 바로 2000년대에도 프랑스에서 대단한 화제를 모으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됐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들의 노동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있다. 일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정적인 사랑에 말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책은 현대사회의 노동?여가?일상생활의 정치경제학을 기발하게 역전시켜 사고할 수 있는 많은 여지를 마련해준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일 또는 노동에 중독돼 있고, 일부 유한 계급은 강요된 여가에 시달리고 있다. 일중독 또는 노동중독은 아편중독이나 알콜중독과 하등 다를 바 없으나, (후에 베버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잘 보여주었듯이) 기독교가 노동을 신성화하고 부르주아의 실용주의 철학이 이를 정당화한다. 따라서 마약중독이 사회적 범죄로 단죄되고 알콜중독자가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데 반해 노동중독자는 성인으로 추앙된다. 그리고 이처럼 신성화한 노동은 리바이어던처럼 사회 전체를 옥조이면서 인간의 영육을 철저하게 지배해나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과거에 인간이 손으로 처리하는 데 24시간이나 걸리던 일을 기계가 한 시간 만에 해치우고 있는데도 노동시간은 여전히 하루 10여 시간이나 된다. 많은 공장의 실험들은 노동시간을 5~6시간 줄여도 노동생산성은 오히려 3분의 1이나 늘어남을 보여준다. 따라서 라파르그는 하루에 세 시간만 노동해도 사회가 유지되는 데는 아무런 무리도 없다고 주장한다.
노동과 여가에 대한 자본주의 이전의 혁명
뒤이어 그는 노동과 여가에 대해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추적한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노동을 경멸하며 다른 많은 민족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오직 농업과 군복무만을 고귀하고 자유로운 직업으로 간주했다. 플라톤의 ??공화국??에는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키는 구두장이나 대장장이가 거주할 공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당연히 이들은 모두 노예제를 찬미하고 귀족제를 옹호하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라파르그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대답하면서, 하지만 기만적인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의 실용주의 철학은 노동자들의 고통스럽고 강제적인 임금 노동, ‘현대의 노예제도’를 신성화하고 찬미하는 더 비열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반박한다.
따라서 노동은 신성하기는커녕 지옥의 고통이며, 오히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되찾는 운동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몸부림이며 문화와 계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첫 걸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