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류세’라는 낯선 용어가 점점 더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원래는 지질학적 세기를 뜻하는 전문 학술용어였지만, 이제 학계의 논의대상을 넘어 인문학과 문화 전반에서 거론되며 일반인들한테까지 관심을 끌고 있다. ‘인류세’는 노벨상 수상자인 화학자 파울 크루첸Paul Crutzen이 2000년 ‘국제 지권-생물권 프로그램the International Geosphere-Bioshpere Program’에서 “우리는 인류세에 살고 있다”라고 선언하면서 본격적인 관심과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이 용어를 처음 제시한 사람은 1922년 구소련 지질학자 알렉세이 파블로프Aleksei Pavlov였지만 냉전 시대에 이 용어는 소련을 넘어 서구 학계에까지 퍼져나가지는 못했고, 1980년대 지구과학자 유진 스토머Eugene Stormer가 제시했을 때에도 그다지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때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에 대하여 대중의 관심을 확 끌어당길 만큼의 공감대가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즉 ‘인류세’ 논의의 부상은 우리들, 인류 전체가 뭔지 몰라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문턱을 넘어섰으며, 전례 없는 수준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는 공통의 인식을 반영한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본질과 성격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달라진 인간의 지위와 역할,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고찰하고 재설정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인류세는 인류를 뜻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와 ‘세-cene’를 합쳐서 만든 용어이다. 지질학적 시대는 -대, -기, -세로 구분되는데, 이때 기준이 되는 것은 지각변화와 생물종의 변화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홀로세holocene’로, 대략 만 2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시작된 간빙기이다. 간빙기의 따듯하고 안정적인 기후 덕분에 인류는 정착 생활과 농업을 시작하면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인류세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홀로세의 기후 안정성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으며, 이것이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선 증거라고 말한다. 홀로세에서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주장의 주요한 근거 중 하나는 인간이 화석 연료를 사용하면서 대기 중 탄소량이 급증하였고, 이로 인하여 대기의 화학적 조성과 지구의 환경 조건이 돌이킬 수 없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크루첸은 인류세의 근거로 인구 및 에너지 사용의 증가, 온실가스 배출 급증, 삼림 파괴, 수산물 고갈 등을 든다. 인류세가 벌써 학계를 넘어 널리 통용되고 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승인되지는 않았다. 크루첸의 주장에 따라 2009년 국제층서위원회에서 지질학과 층서학의 전문가들이 모인 ‘인류세워킹그룹Working Group on the Anthropocene’이 구성되어 조사 중이다.
 

인류세의 시작점을 언제로 잡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아직은 이견이 분분하다. 정리하자면 크게 세 가지의 주장이 있는데, 첫 번째는 시작점을 가장 멀리 잡는 견해로 7-8천 년 전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면서부터 지구 환경을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고 본다. 두 번째 견해는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산업혁명이 일어난 18세기를 본격적인 인류세의 시작 시점으로 주장한다.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화석연료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탄소 배출량이 급증하면서 지구 환경이 결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견해는 세계 2차대전 이후인 1950년대 자본주의 산업화가 급격히 이루어진 ‘대가속the Great Acceleration’시기를 인류세의 시작점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기를 인류세의 기점으로 주장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이때 처음 핵실험이 실시되면서 낙진이 지구 토양의 구성 성분을 영구적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견해는 두 번째이며, 크루첸도 이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인류세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 구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일 것이다. 크루첸은 인류세를 ‘인간이 지질학적 힘이 된’ 시대라고 정의한다. 그는 “지구 환경에 새겨진 인간의 흔적이 매우 크고 인간의 활동이 대단히 왕성해져 지구 시스템 기능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력이 자연의 거대한 힘들과 겨룰 정도가 되었다”라고 인류세의 의의를 설명했다. 이 말은 인간이 더는 지구 환경에 종속되어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전체 환경을 통제하고 변화시킬 위대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승인처럼 들리기도 한다. 실제로 인류세의 의미를 이렇게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인류세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사회학자 클라이브 해밀턴은 어느 학회장에서 “인류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Anthropocene”라고 적힌 현수막을 보고 반어적인 의미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인류세의 의의를 오해한 것이며, 이러한 자기중심적 착각은 인류세에 들어와 우리 주위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림으로써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인류세를 말 그대로 ‘인류가 주인공이 되는 시대’로 이해하며 인류 문명과 과학기술의 진보에 무한한 믿음과 찬사를 보내는 대표적인 이들이 ‘에코모더니스트ecomodernist’이다. 이들은 인류세가 인류의 힘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시대라고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얼 엘리스Earl Ellis는 역사적으로 인간이 자연체계를 변화시켜 왔지만 지구는 늘 그러한 변화를 잘 수용하여 더욱 생산적으로 변모해 왔으며, 여태까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이러한 역학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이유는 없다고 주장한다. 지구는 인간의 지식과 기술로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며, 이를 잘 사용하기만 하면 인류세는 위기가 아니라 인류를 도약하게 하는 ‘위대한 인류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에코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은 과학기술로 자연과 물질의 제약을 극복하고 인간의 능력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전통적 휴머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트랜스휴머니스트Transhumanist들의 입장과도 유사하다. 그들은 자연이 통제가능한 대상이며, 인간은 자연을 배경으로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공유한다. 따라서 에코모더니스트들은 인류세의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도 태양광을 차단하는 에어로졸을 대기 중에 살포하여 지구 온도를 낮추는 등 기술적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인류세가 인류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 해도 인간이 의도했던 결과는 아니며 인류세에 일어나는 변화를 인간의 힘으로 통제하기는 불가능하다. 인류세는 인류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어섰음을 의미한다. 최근 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이상기후로 인한 재앙들은, 인간 활동이 지구 환경에 일으킨 변화가 그 원인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달리 순수한 자연재해로 분류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인 인류세의 현상인 기후변화의 경우, UN 기후변화협의체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는 온실효과로 인해 2100년까지 지구 평균 온도가 3.7~4.5도 상승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이러한 온도 변화는 천 5백만 년 만에 가장 더운 상태이다. 기후분석그룹인 WWAWorld Weather Attribution은 현재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2050년경에는 40도 이상의 혹서가 지구 전체에서 일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러한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현상들은 벌써부터 심각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 비영리단체 ‘클라이밋 센트럴Climate Central’은 2050년경에는 해수면 상승으로 1억 5천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게 될 것이고, 방콕이나 호치민같은 대도시조차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 세계 각지에서 점점 더 빈번히, 더 큰 규모로 일어나는 산불 또한 지구 온난화가 가져온 결과들 중 하나이다. 호주 산불은 이미 호주 면적의 3분의 1을 태우고도 잡힐 기미를 보이지 않지만, 이는 호주 소방관들이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재해들은 전지구적 규모와 강도에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사실상 넘어선다. 또한 인류세의 위험들은 고도로 발전한 과학이 만들어낸 새로운 위험이라는 점에서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에코모더니스트들의 주장에도 반한다. 과학기술과 인간의 이성이 문제를 해결할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해 주리라는 믿음, 인간의 힘과 의지로 자연환경과 모든 비인간 존재들을 인간의 요구에 맞게 통제하고 변형할 수 있다는 확신은 이 새로운 시대에는 더는 통할 수 없다.

이러한 인류세의 변화들은 인간 활동이 지구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면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는 지구 시스템의 ‘항상성’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렸기 때문에 초래되었다. 지구 시스템의 항상성을 잘 설명하는 개념이 1972년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이 제시한 ‘가이아Gaia’ 개념이다. 러브록은 그의 논문 <대기권 분석을 통해 본 가이아 연구>에서, 지구의 생물권이 물리 화학적인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환경을 생명체가 살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바꾸어 왔다고 주장하고, 생물권을 포함한 지구 전체를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로 불렀다. 가이아 개념은 지구 전체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면서, 지구 환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이 맺는 상호관계에 주목했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은 과학적 근거 없이 신화와 과학을 뒤섞었다는 비난과 함께 오랫동안 무시당했다.

그러나 20세기 말 실제로 지구 생명체와 대기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조절하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면서 과학적 가치를 인정받았고, 지구 전체를 물리, 화학, 생물학적 구성 요소와 인간으로 구성된 하나의 자기 조절적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지구 시스템 과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과학철학자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인류세의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가이아 개념을 다시 가져온다. 라투르는 가이아를 지구의 항상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며 인간이 살아갈 터전을 보살펴주는 자애로운 어머니 여신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광포하고 잔인한, 비인간적인 힘으로 묘사한다. 인간의 무분별한 활동이 지구의 항상성을 회복불가능한 정도까지 몰고 가는 순간, 과거 공룡 등 다른 생명체들을 멸종시켰던 무자비한 가이아가 깨어난다.
 

인류세의 문제들은 국지적으로 어느 한 지점이나 한 요소에 일어난 변화로 축소하거나 한정 지어 이야기할 수 없고, 지구 시스템 과학의 관점에 따라 전체 계 안에서 수많은 다른 요소들과 복잡하게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류세 논의의 변천 과정은 인류세를 연구하는 데 이러한 관점의 전환과 확대가 필수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인류세 연구를 가장 좁고 정확한 의미에서 정의한다면 지층에 남겨진 흔적을 추적함으로써 인간이 일으킨 변화의 증거를 찾아내는 층서학과 지질학에 국한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인간 활동이 일으키는 변화는 어느 한 영역에만 국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암석층의 변화만이 아닌 지구 시스템 전반에 일어난 변화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인류세를 올바로 파악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인류세 연구는 지질학이 되었건 지구 시스템 과학이 되었건 자연과학의 주제로 한정되지 않고, 학문 분과의 벽을 넘어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영역까지 포괄해야 한다. ‘인간이 지질학적 힘’이 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를 더는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19세기에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문학이 제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분과학문 체계가 정립되었고 과학과 인문학은 서로 다른 방법론을 가지고 다른 대상을 연구하는 별개의 분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역사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는 인류세에 들어서서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를 갈라놓고 있던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가 같은 지구역사geohistory로 얽히게 되었으며, 자연이 더는 인간 역사의 배경막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인류는 자유를 성취해야 할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면서 이를 부정의와 불평등, 억압적 사회 정치 제도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만 생각했지만, 자유의 성취는 화석연료의 이용을 통한 문명의 발전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차크라바르티는 “근대적 자유의 집은 화석연료 사용을 기반으로 세워졌”으며, 대부분의 자유는 “에너지 집중적energy-intensive”라고 표현한다. 즉 사회 정치 제도 역시 지구 환경의 물적 기반과 연관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자연과학과 분리된 영역에서 그 자체의 법칙에만 따르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류세는 인간이 자연과 무관한 사회 속에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줄곧 지구의 물질적 조건 위에서 삶을 영위해 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인류세의 이야기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인간 주체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환경과 비인간 존재들을 지배하고 통제함으로써 물질 세계를 배경으로 인간의 이상을 성취하는 휴머니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세는 인간이 지금까지는 배경으로 치부했던 비인간 존재들이 무대 위에 한꺼번에 행위자로 등장하는 새로운 드라마의 시작을 알린다. 비인간 존재들은 인간이 완전히 파악하거나 이해할 수 없으며, 인간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자체의 행위성을 갖는다. 인간의 행동은 다른 행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반응이 인간의 행동을 제한한다. 이러한 비인간 행위자들에 대한 인식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자연환경을 단순히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이용가능한 자원으로만 보았던, 인간을 예외적이고 특권적인 존재로 보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여섯 번째 대멸종의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 인류세의 위기를 초래한 인류에게 요청되는 새로운 윤리적 책임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라투르는 인류세의 인간 조건을 ‘지구에 묶인 자the Earthbound’라고 표현하면서 우리에게는 지금 ‘지구에 묶인 자’로서 인류세에서 살아갈 준비를 할지, 아니면 홀로세에 인간으로 남을 것인지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선택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기후변화를 비롯한 비정상적인 자연현상이 ‘가이아의 역습’으로 점점 더 우리의 일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와 또 다른 강력한 행위자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상황에서, 우리는 변화를 인정하고 그 흐름 속에서 살아갈 준비를 하든지, 아니면 여전히 눈을 감고 현실을 부인할 수 있을 뿐이다. 홀로세의 안정된 기후조건에서 지금과 같이 자원을 낭비해 가며 평화롭고 풍요로운 일상을 여전히 영위할 수 있다고 애써 믿고 싶어도 그런 환상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인류세의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인간이 비인간 존재들과 환경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생태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다. 인류세와 환경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점점 더 기계적인 것들과 접속하고 정보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가상 세계로까지 삶의 영역이 확장되는 시대에, 인간의 물질적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기술과 과학의 유토피아적 전망으로부터 우리를 다시 이 땅으로, 한계를 가진 연약하고 유한한 육신으로 끌어내린다. 그러나 인류세의 이야기는 단순히 인간의 종말에 관한 어둡고 음울한 경고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포스트휴먼이 된다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포스트휴먼이 된다는 것은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하고 기계적 보철 장치로 신체 기능을 강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투공성의 존재이며 주변 환경과 모든 비-인간 존재들과 연결되어 운명을 함께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도 물질적인 세계의 구성요소의 하나라는 생태적 인식은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에 인간의 생존이 인간 이외의 모든 것들의 생존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임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