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귄 SF와 미래 (세상 끝에서 춤추다)
1985 250-252
오레곤 과학과 산업 박물관 패널
우리는 미래가 어디 있는지 압니다. 우리 앞, 맞죠? 우리 앞에 있어요. 굉장한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있고 우리는 졸업식을 할 때마다, 선거를 할 때마다 자신만만하게 그 미래로 걸어 들어갑니다. , 안데스산맥 케추아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달리 말합니다. 과거란 우리가 아는 것이므로 볼 수 있고. 이것은 행동이라기보다 통찰 방식이고 진보라기보다는 인식입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 못지않게 논리적이기 때문에 미래는 뒤에 놓여있다고 말합니다. 등 뒤에, 어깨 너머에 있다고요. 미래를 슬쩍 돌아보고 일변할 경우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무엇입니다. 심지어 그랬다가도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로 후회하기도 하지요. 뒤에서 뭐가 다가오는지 보고 말았으니까요. 그러니 우리가 안데스 사람들을 우리의 진보와 오염과 아침 드라마와 위성의 세계로 끌어들일 때 그들은 뒷걸음질로 옵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아보려고, 어깨 너머를 보면서요. 저는 이것이 지적이고 적절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미래로 나아간다'라는 말은 은유이고 곧아 곧 대로 받아들인 신화적 사고이며, 실지어는 혹시라도 소극적이고 수용적이고 개방적이고 조용하고 정지해 있을까봐 겁내는 우리의 마초적 공표에 기반한 허세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일깨워주긴 하잖아요. 우리의 시끄러운 시계들은 우리가 시간을 맏든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통제 한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시간을 재는 기계를 연결해서 시간이 일어나도록 한다는 거죠. 하지만 사실 미래는 우리가 핵탄두를 실은 초음속 제트기를 타고 앞으로 달려나가든, 아니면 산봉우리에 앉아서 풀 뜯는 라마를 지켜보든 관계없이 찾아보거나 그저 그곳에 있습니다. (251)
볼 수 없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실제로 보는 건 우리 머릿속에 든 무언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꿈이죠. 좋은 것도 나쁜 것도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 SF가 일을 제대로 할 때 실제로 나르는 것도 그겁니다. '미래'가 아니라요. 우리의 꿈과 발상을 꿈이 아닌 세계와 혼동할 때, 이래가 우리가 소유하는 장소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곤경에 처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소망 충족 사고와 도피주의에 굴복하고 우리의 SF는 과대망상에 빠져 허구가 아닐 예언이라고 생각하며 펜타곤과 백악관은 또 그걸 믿기 시작하고 전략방위구상으로 미래를 정복하는 진정한 신봉자들이 나오기에 이릅니다.
SF 작가로서 저는 체추아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가만히 서서 제 앞에 놓은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편이 더 좋습니다. 땅을, 땅 위에 사는 제 동료들을 그리고 별들을요.